소설리스트

금융명가의 창시자-68화 (68/181)

§68화 17. 그대여, 빚에 먹히리 #2(4)

몰락한 귀족 가문이라 하면 인기가 없었다.

뭐라도 있어야 다른 곳에서 그 딸을 데려갈 게 아닌가?

하지만 이제 빚밖에 남지 않은 변방의 영주에게 관심을 보일 귀족 가문이 과연 있을까?

영주 체스터는 그것이 의문이었다.

“설마 이 근처에 있는 바쿠나 브루봉 가문을 말하는 게냐?”

바쿠 또는 브루봉 가문은 몬테펠트로 영지와 인접한 곳에서 위세를 떨치고 있는 귀족 가문이었다.

그 물음에 스텔라는 고개부터 저어주었다.

“그쪽 가문에선 여기 빚을 감당하지 못할 거예요. 평소라면 모를까 지금은 관심도 없을 텐데. 오히려 싫어할걸요?”

그럼 대체 어디?

“그게 아니면…… 리옹에 있는 리옹 가문을 말하는 게냐? 거기라면 충분히…… 하지만 우리 가문엔 관심이 없을 텐데.”

리옹 가문이라 하면 영주가 지고 있는 빚을 한 번에 갚아줄 정도로 아주 부유한 가문이었다.

문제는 두 가문의 차이가 너무 크다는 것에 있었다.

“리옹 가문이라면 아버지가 빚이 없는 평소라도 힘들걸요? 워낙 큰 가문인지라 저희에게 관심도 없을 것 같은데.”

리옹도 아니라고?

“그럼 설마…….”

무언가 대단히 오해한 영주의 낯빛이 한순간 밝아졌다.

“이 아비도 모르는 사이 황도에서 어느 명문가 자제랑 뭐라도 생긴 게냐? 뭐 그런 거야?”

기대에 찬 물음.

하지만 그 기대는 잇따라 짓밟히고 말았다.

“그것도 아니에요. 생도 생활에 여유가 없어서 연애엔 크게 관심이 없었어요. 그리고 연애는 아버지가 말리셨잖아요?”

“그래도 혹시 모르잖니?”

“아는 선배들이 조금 있긴 한데, 아마 저희 가문에 관심을 보일 선배는 없어요.”

영주가 김빠진 목소리로 물었다.

“그럼 뭐냐? 대체 어디로 간다는 말이냐? 마땅히 갈 곳도 없는데.”

“있잖아요. 딱 한 군데. 거긴 아버지가 원하시는 귀족 가문은 아니에요. 하지만 아버지 빚을 바로 갚아줄 수 있을 거예요.”

“뭐라고? 거기가 어딘데?”

그래도 바보는 아니었는지.

영주의 낯빛이 순식간에 변하며 이내 고개를 좌우로 흔들기 시작했다.

“안 된다. 절대 안 돼! 설마 그 근본도 없는 파렴치한 집구석을 말하는 건 아니겠지?”

영주는 제가 생각하는 곳이 절대 아니길 빌었다.

하지만 현실이란 것은 때론 매정한 법이었다.

“네, 아버지가 생각하시는 그곳이 맞아요.”

영주의 의사야 어찌 됐든.

스텔라가 보기엔 빚쟁이 아버지를 위해선 이게 최선이었다.

나름 결심을 굳혔는지, 아니면 아버지를 위한 선택이었는지.

그녀가 당찬 각오로 말을 잇기 시작했다.

“아버지 빚 문제에 있어서 가장 큰 채권자는 그쪽이잖아요. 그럼 그 집안 식구들하고 결혼한다면 아버지 빚 문제도 자연스레 해결될 수 있을 거예요.”

스텔라가 말을 이었다.

“지금 아버지는 힘이 없지만, 그쪽은 또 다르니까요.”

“그게 무슨 소리야. 너 지금 제정신으로 하는 소리니?”

영주는 기가 차다 못해 어이가 없는 상황이었다.

다른 곳도 아니고, 한낱 평민 집안과 연을 맺게 되다니.

그것도 원수가 될지도 모를 곳과 말이다.

“거긴 평민 집안이야. 우리와 근본부터 다른 곳인데 어찌.”

“그게 무슨 상관이에요? 평민은 계속 평민이란 법이 있나요?”

스텔라의 말이 이어졌다.

“아버지, 평민 집안도 노력 여하에 따라선 얼마든지 귀족 가문이 될 수 있어요.”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 평민은 평생 평민이지!”

“말이 되는 소리예요. 아버지는 이런 변방에 계셔서 잘 모르시겠지만, 저는 제국 황도에서 한때 평민이었다가 귀족 계급으로 올라선 사람들을 잘 알아요. 대부분 전쟁에 대한 공로가 크거나 아니면 부유한 집안이 되어 귀족 가문으로 승격된 경우가 많았죠.”

“드문 일이겠지!”

“물론 아버지 말처럼 흔한 일은 아니긴 하죠. 하지만 여기 있는 로스메디치 집안이 한평생 평민 집안으로 남으라는 법이 있을까요? 오히려 아버지 땅을 담보로 잡았다면 부유해져서 귀족 가문으로 올라설 가능성이 더 높을 것 같은데요?”

“그래도!”

영주는 치가 떨리는 심정이었다.

다른 곳도 아니고 로스메디치 집안이라니!

“안 된다. 거기만은 절대 안 돼.”

“그럼 다른 방도가 있는 거예요? 그런 게 있다면 저도 아버지 뜻을 따라 포기할게요.”

“그거야…… 일단 찾아보자꾸나. 찾아보면 분명 다른 방법이 있을 거야.”

“찾아요? 찾아보신다는 분이 허구한 날 여기서 술이나 드시고 계신 거예요?”

할 말이 없어진 영주가 입을 다물자 스텔라가 설득을 위해 다시 말을 잇기 시작했다.

“아버지. 최대한 이성적으로 생각하셔야 돼요. 지금 저희가 취할 수 있는 최선은 아마 그것밖에 없을 거예요. 그게 아니라면 현실적으로 아버지 빚을 감당할 수 있는 곳이 있긴 해요?”

“크흐…….”

머리를 싸매고 자리에 앉은 영주가 자기 자신을 탓하기 시작했다.

이 모든 건 자신으로 인해 비롯된바.

하지만 눈에 넣어도 안 아플 딸을 그곳에 보낸다는 건 도무지 납득이 되지 않았다.

“하…….”

긴 한숨이 이어지고, 여러 생각에 잠기던 영주가 저 혼자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아니야. 이건 아니야. 어떻게…… 어떻게 한때 평민이었던 집안하고. 이건…… 도무지.”

제아무리 원수 가문이라 할지라도 귀족 세계에선 서로의 이해관계에 따라 두 가문의 사람들이 결혼하는 경우가 아예 없진 않았다.

화해를 위해서나, 아니면 모종의 계약을 위해.

저마다 이유야 있을 테지만, 이 경우 자신의 빚 문제를 해결하기 위함이라면 어느 정도 납득이 됐다.

문제는 그곳이 자신들과는 근본조차 다른 평민 집안이라는 것에 있었다.

“얘야, 넌 자존심도 없는 게냐? 거긴 평민이야. 너와 어울리지도 않아.”

“자존심이요? 저희가 그걸 따질 처지였나요?”

스텔라가 말을 이었다.

“아버지, 제가 평민 집안에서 귀족이 된 사람들을 잘 알고 있다고 했죠? 그런데 그 반대도 있는 거 아세요?”

“반대라고?”

“네, 저희처럼 귀족 가문이었다가 한순간 몰락해서 평민보다 못한 삶을 사는, 그저 겉만 귀족인 자들이 있어요. 사관학교엔 특히나 그런 몰락한 가문의 자제들이 많아요. 제국에서 성공하는 여러 방법 중 군인이 되어 공로를 세우는 게 가장 현실적이잖아요?”

“그거야…….”

“그런데 제가 볼 땐 그 사람들은 더 이상 귀족 같은 게 아니에요. 겉만 귀족으로 치장할 뿐 속은 이미 평민보다 못한 경우가 많죠. 학비도 제대로 못 내는데 그게 무슨 귀족이에요?”

할 말이 없어진 영주가 또다시 말을 아꼈다.

그사이 스텔라가 하소연하듯 그에게 말했다.

“저희도 충분히 그렇게 될 수 있어요. 여기서 아버지 빚을 해결하지 못하면요.”

“…….”

“그리고 제가 이런 생각을 했다고 해서 그쪽에서 저를 받아줄지 안 받아줄지도 모르는 거예요.”

두 손바닥에 얼굴을 파묻었던 영주가 잠시간의 침묵 뒤에 고개를 들었다.

“그래, 말 잘했다. 네 말대로 거기서 널 받아줄 이유가 없잖니?”

“물론 없죠. 오히려 왜 받아줄까요? 어차피 절 떠안게 되면 아버지 빚까지 떠안게 되는데.”

“아니지.”

영주가 세차게 고개를 젓기 시작했다.

“그 록펠러란 놈은 널 가져가도 내 빚은 안 갚아줄 수도 있어. 출가외인이라고 네가 그곳에 팔려가게 된다 할지라도 원칙적으론 그 집안에서 내 빚을 갚아줄 의무가 없는 거야.”

이렇기에 딸을 보내지 않으려 했던 것.

“그나마 너라도 좋다면, 나야 뭐 어찌 되든 상관없겠지만. 아무튼 그렇단다. 네가 시집간다고 해서 다 끝나진 않아.”

“아무리 출가외인이라 해도 제가 가만히 있겠어요? 그건 아니죠.”

“그런데 그 생각은 어쩌다 하게 된 거니?”

“그건…….”

앤드류가 크게 티를 내진 않았지만, 그녀가 자신을 좋아하는 그의 마음을 모를 리 없었다.

“앤드류가 절 좋아하는 것 같아서요. 그래서…… 하지만 확신은 없어요.”

“앤드류? 그게 누구야? 아, 설마 너와 사관학교에 다니는 그 둘째 말이냐?”

“네.”

“그런 근본도 없는 놈이 감히 내 딸을 넘보고 있었구나.”

영주가 대놓고 씩씩거렸다.

“내가 당장 그놈의 집구석을 찾아가서!”

“아버지!”

세찬 딸의 외침에 영주가 정신을 차렸다.

“미안하다. 어쩌다 내가 이리 정신없게 됐는지.”

“저희가 원한다고 해서 그쪽에서 받아줄지 안 받아줄지는 또 모르는 거예요. 하지만 받아준다면 아버지 빚은 바로 해결할 수 있어요. 이건 아버지가 어떻게 생각하시든 똑같아요.”

스텔라가 말을 이었다.

“그리고 앤드류가 절 좋아하지 않아도 상관없어요. 그쪽 집안에서도 나름 욕심이 많다면 영주인 아버지를 이렇게 버리진 않을 거예요. 서로 같이 갈 수 있다면 득을 볼 수 있는 일이야 많이 있잖아요.”

“같이 간다고? 그런 근본도 없는 놈들하고?”

“그래도 인정하시잖아요? 그쪽 집안 사람들하고 같이 일해서 영주인 아버지가 손해 볼 일이 있어요?”

“그거야…….”

영주의 한숨만 길게 이어졌다.

“어쩌다 우리가 이렇게 된 거니. 대체 어쩌다…….”

그런 영주에게 스텔라가 따끔하게 한마디 해주었다.

“그러게 왜 차용증서를 그렇게 남발하셨어요.”

“내가 죄인이지. 내가 죄인이야.”

자기 자신을 탓하는 영주에게 스텔라가 말을 이었다.

오랫동안 봐왔던 아버지였던 만큼 어느 정도 설득이 됐다고 판단한 것이다.

“우선 제가 그곳에 시집가고 싶다고 해도 그쪽에서 저흴 받아줄지 안 받아줄지는 아무도 모르는 거예요. 그래도 일단 말이라도 해볼게요.”

“정녕…… 그 수밖에 없는 거니?”

“제 마음은 이미 굳힌 거나 다름이 없어요. 이제 남은 건 그쪽 집안사람들하고 아버지 결정이 남은 거겠죠.”

“하…… 내가 죄인이다. 어쩌다 널…….”

“전 괜찮아요. 정말로요. 저도 앤드류를 너무 나쁘게 보지는 않거든요.”

그 말에 영주가 당연스레 표정을 구겼다.

‘근본도 없는 집구석에 어떻게 내 금쪽같은 딸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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