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화 17. 그대여, 빚에 먹히리 #2(3)
“그땐 일이 이렇게 될지 전혀 모르셨던 거예요?”
딸의 물음에 영주가 고개를 푹 숙였다.
마치 죄인처럼.
“그때는 몰랐지. 나도 힘이 있으니 설마 일이 이렇게까지 될 거라곤 생각도 못 했다.”
영주도 할 말이 있는지 계속 말을 이었다.
“차용증서를 남발하다 망한 영주가 있긴 했었지.”
“있는 걸 알면서 대체 왜 그러셨어요.”
“방법이 완전 달랐어. 내가 알고 있는 건 내가 쓴 차용증서가 폐하나 다른 영주에게 들어가는 경우였단다. 그런 경우는 상대도 힘이 있어서 내게 정당하게 금화를 요구할 수 있거든. 또 폐하께서도 금화를 빌려준 쪽에 편을 드실 테니까, 돈을 빌려준 쪽에서 싸움을 걸어도 그만한 명분이 있을 테고.”
“그것 말고 이런 경우는 전혀 생각을 못 하신 거예요?”
영주는 힘없이 답해주었다.
“못 했지. 이건 영지 외부가 아니라 내부에서 일어난 일이니까. 설마 영지민 전체가 채권자가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거기다 시어들까지…….”
변명을 들어보니 듣기만 해도 한숨이 절로 나왔다.
그러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번 일은 대체 누구의 잘못이었을까?
급전이 필요했지만, 필요 이상으로 잔뜩 빌려 빚쟁이가 된 영주의 잘못이었을까?
아니면 그런 영주에게 돈을 잔뜩 빌려주고 나중에 빚을 갚으라고 영지민 전체와 담합을 한 카터 방코가 문제였을까?
팔은 안으로 굽는다지만 그녀는 나름 이성적으로 판단했다.
‘이건 아버지가 잘못하신 게 맞아. 마냥 돈을 빌려준 쪽을 탓할 순 없어.’
영주가 필요 이상으로 차용증서를 남발한 건 분명한 실수이자 잘못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신의 아버지가 전부 잘못했다고 보기엔 힘들어 보였다.
그도 영지 방비를 위해 돈을 끌어다 썼지 너무 개인의 욕심만을 위해 돈을 빌려다 쓴 건 아니었으니까.
“아버지가 잘못하신 건 분명 맞지만, 아버지께서 마냥 잘못하신 건 아니에요. 아버지는 그저 영지 방비를 위해 희생한 것밖에는 없잖아요? 와이번 외에 사적으로 돈을 크게 쓰신 적이 있으셨어요?”
“아니, 그런 적은 없단다. 정도가 지나쳤을 뿐, 대부분 영지 방비를 위해 쓰였으니까. 내가 좀 돈관리가 서툴잖니.”
“그럼 이번 일은 전부 아버지 잘못이라고 보기엔 힘들겠네요. 이건 모두의 이해가 필요한 부분이에요. 그런 내용을 채권단에게 충분히 설명하셨어요? 정도 이상으로 큰돈을 빌린 건 전부 영지 방비를 위해서였다고요.”
일은 이 지경이 됐지만 영주도 나름 할 말이 있었다.
“그래, 토템전쟁으로부터 여길 지킨 건 오로지 내 판단이었다. 그건 알아줘야지. 하지만 사람들은 그걸 알아주지 않아. 그때 진 빚이야 오로지 내 몫이라 생각하고 있으니까.”
“그건 너무하지 않나요? 그 부분에 대해서 이해를 전혀 안 해줬다는 말인가요?”
“그 녀석들은 오히려 정당한 세금을 냈지 않냐고 성을 내더구나. 영지 방비야 당연히 내 일이라고 하면서 다들 무시했어.”
“하…….”
어찌 됐든 이 상황은 두 부녀에게 그다지 유쾌하지만은 않았다.
나름 위기라면 위기.
사실 벼랑 끝이라고 해도 할 말이 없을 정도로 심각한 상황이었다.
“그 부분에 대해선 제가 다시 설명해야 할 거 같아요. 제가 카터 방코에 가서 잘 설득해 볼게요. 앤드류도 잘 알고 있고, 어떻게든 아버지 빚을 갚아야 할 거 아니에요?”
“네가 무슨 수로 그 능구렁이 같은 자식을 설득한다는 말이냐? 다른 녀석이라면 몰라도 그 록펠러란 자식은 절대 설득이 안 돼. 그 녀석은 돈 앞에선 절대 피도 눈물도 없는 놈이다.”
스텔라는 말을 아꼈지만, 아무래도 살아날 방법은 딱 한 가지밖에 없어 보였다.
영부인이 죽고 난 뒤부터 영주 체스터는 제 딸을 끔찍하게 아끼며 살아왔었다.
그러니 스텔라 본인도 영주에게 받은 게 있으니 나름 보답할 차례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나름 결심이 섰는지 스텔라가 어렵게 입을 뗐다.
“혹시나 해서 물어보는 건데 다른 곳에서 금화를 빌릴 순 없는 거예요?”
“다 찾아가 봤다. 왜 안 찾아갔겠니? 근처에 있는 방코란 방코는 다 찾아가 봤지. 하지만 선뜻 그런 거금을 내줄 방코 업자는 하나도 없더구나. 다들 알고 있는 거겠지. 지금 날 도와주는 건 미친 짓이란 걸. 그 정도 친분도 없고 말이야.”
“교회는요? 유사시 서로 도와주고 그래 왔잖아요?”
“교회는 이미 카터 방코랑 한통속이다. 그놈들도 똑같아. 신이나 들먹이며 장사나 하는 쓰레기 같은 놈들이지. 교회 얘기는 꺼내지도 말거라. 듣다가도 이가 갈리는 놈들이니.”
“그럼 폐하께는 아무 말도 안 하신 거예요? 다들 버려도 폐하는 계시잖아요?”
영주는 대놓고 한숨을 쉬었다.
“후…… 그때 폐하께서 도와주셨다면 내가 이러고 있겠니? 폐하께서도 이런 변방에 그렇게 신경을 쓰지 않아요. 날 도와줄 이유가 없잖니? 어차피 내가 망하면 다른 녀석이 여길 차지하게 될 테고, 그럼 그 녀석은 폐하께 충성심을 보이기 위해 여기 세금을 더 크게 가져다 바치겠지. 그럼 되는 거야. 폐하께선 신경 쓰실 게 전혀 없는 상태지. 오히려 세금이 더 걷힐 걸 반기고 있을 지도 모르겠구나. 안 그래도 요즘 황실 재정이 어렵다는얘기를 들었다. 어느 미치광이 전쟁광 때문에.”
영주가 고개를 저었다.
“다 틀렸어. 백방으로 방법을 모색해도 살아날 길이 전혀 없는 상태다. 그저…….”
그의 고개가 더욱 더 수그려졌다.
“한심하게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단다. 내가 모르긴 해도 빚에 깔려 영지 전체가 담보로 잡히게 되면, 그땐 나올 세금도 없게 되니 다시 찾아오는 채권단 무리에게 잡혀 목이 걸릴 거야. 그땐 시어들도 막아주지 않을 테니까.”
“시어들은 왜요? 시어들은 아버지 편이라고 하지 않았나요?”
“그것도 내가 급여를 줄 때의 얘기지. 지금 그들에게 급여를 주고 있는 건 내가 아니야.”
“네에? 그게 무슨 말이에요.”
스텔라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버지가 시어들 급여를 주지 않으면 대체 누가 준다는 거죠?”
“누구겠니? 날 이렇게 만든 그 버러지 놈들이지.”
“그게 누군데요? 설마…… 카터 방코는 아니죠?”
“카터 방코 말이다. 이제 시어들 급여는 그쪽에서 챙겨주고 있단다.”
영지 치안에 힘쓰는 시어의 급여를 챙겨주는 건 예로부터 영주의 일이었다.
그런데 그 일을 일개 방코 업자가 대신하고 있단다.
스텔라는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쪽에서 시어들 급여를 왜 챙겨주는 거죠? 전 이해가 안 되는데요.”
“나도 그게 참 의문이었는데, 옆에서 지켜보니 다 이유가 있더구나.”
영주는 최근 들어 자신의 충복이었던 오버시어가 카터 방코에 자주 찾아가는 걸 떠올릴 수 있었다.
그놈의 돈이 무엇인지.
아무래도 카터 방코에 매수된 교인들처럼 오버시어도 제 급여를 챙겨주는 일개 방코 업자를 영주인 자신보다 더 중요시 여기는 듯싶었다.
“흥, 시론 그 녀석도 문제야. 내가 여태까지 챙겨준 게 얼만데. 그 급여 하나 못 챙겨줬다고 언제부터인가 방코 업자의 개가 됐어. 이게 말이 되는 소리냐?”
이때 그녀의 뇌리를 가로지르는 게 있었다.
“설마 방코의 안전 때문에 방코에서 시어들 급여를 챙겨주는 건가요?”
“뭐 그렇게 되더구나. 내가 제대로 급여를 챙겨주지 못하면 시어들도 일을 안 하게 되니, 그걸 염려한 모양인지 방코에서 시어들 급여만큼은 끔찍하게 챙겨주기 시작했단다. 덕분에 영주인 나만 우습게 됐지. 이젠 길 가다 강도 떼가 습격해도 시어 놈들은 나보다 그 방코 업자 놈을 더 챙길 거다. 특히나 그 록펠러란 놈은 목숨 걸고 지키겠지.”
자신이 먼 타지에서 생도 생활을 하고 있는 사이 영지 내에서 방코의 입지가 아주 몰라보게 올라간 상태였다.
사실상 이 영지 주인이 카터 방코라 해도 어색함이 없을 정도.
영지의 치안을 담당하는 시어들이 방코에 충성하고 있는데 어느 누가 영지의 주인이 영주라 생각하겠는가?
“하하하…… 어쩌다 내 인생이 이리됐는지…… 너무 한심하구나.”
모든 걸 체념한 듯 보이는 영주에게 스텔라가 말했다.
“전 아버지 이렇게 안 버려요. 절 어떻게 키워주셨는데요. 다른 사람들이 다 버려도 전 아버지 편이에요.”
“그래, 너라도 내 편이라 다행이구나. 다들 날 등졌지만 그래도 내 딸만큼은 내 편이야.”
눈시울이 붉어진 영주가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의 딸을 꼭 안아주었다.
부녀의 사랑이 느껴지는 그 순간.
스텔라가 아껴뒀던 말을 꺼내기 시작했다.
“아버지.”
“응?”
“지금 아버지가 살길은 딱 하나밖에 없어요.”
“내가 살길이라고?”
어처구니가 없었는지 영주가 조그맣게 실소를 터뜨려주었다.
“하하…… 나한테 살길이 있다고. 내가 볼 땐 별로 없어 보이는데.”
“아니요. 그렇게 생각하시면 안 돼요. 아버지가 진 빚은 제 빚이고, 제 빚은 또 제 남편 될 사람의 빚이기도 하죠.”
“그게 무슨 소리냐? 설마…… 지금 결혼을 하겠다고? 아직 혼기도 안 찼는데?”
“지금 제 나이가 16살이에요. 혼기야 다 찼죠. 제 친구들 중에 어떤 애는 이미 정략결혼 할 상대방도 있는걸요.”
일러도 너무 일렀다.
사랑을 좀 더 주고 스무 살쯤 늦게 보낼 생각이었는데 벌써부터 결혼이라니.
그것도 축복 속의 결혼도 아니고, 빚 때문에 팔려가는 결혼이었다.
그런 딸을 둔 아비의 심정이야 오죽할까?
“얘야, 난 아직 널 시집보낼 생각이 전혀 없단다. 아니, 이 아비를 놔두고 대체 어딜 간단 말이냐? 안 된다. 절대 안 돼.”
영주가 절대 안 된다며 고개까지 내젓자 스텔라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그를 쳐다보았다.
“그것 말곤 달리 방법이 없잖아요?”
“하지만 이건 아니잖니?”
“그럼 다른 방법이 있어요? 다른 곳에서 금화를 빌려올 수 있다면 어떻게든 살아볼 수 있겠지만, 그것도 안 된다면서요?”
“그거야…….”
“그럼 방법이 이것밖엔 없는 거예요. 저는 이미 마음의 준비를 해놨어요. 이제 아버지만 허락해 주시면 돼요.”
몰락한 귀족 가문에서 살아남기 위해 딸을 시집보내는 일이야 심심찮게 있는 일이었다.
다만 영주는 그 일이 설마 자신의 일이 될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 하고 있었다.
“안 된다. 절대 안 돼. 내가 널 누구한테 보내?”
“어차피 아버지도 절 언젠간 보내주셔야 하잖아요?”
“그거야 그렇지만. 그렇다고 지금 보낸다고? 그건 아니지. 더군다나 이런 상황이라면 더욱더 안 된다. 너 지금 팔려가는 거야.”
“팔려간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언젠간 아버지 곁을 떠날 거라면 지금 떠나는 게 낫다고 생각하는 거죠. 지금 떠나면 그래도 아버지는 살잖아요?”
너무 맞는 말이라 영주도 할 말이 없었다.
침묵의 시간.
고심 끝에 영주가 정말 어렵게 입을 열었다.
“정말…… 그 방법밖에 없는 거니?”
“네, 이게 저희가 택할 수 있는 최선이에요.”
한동안 정적이 흐르고, 끝내 고개를 떨궜던 영주가 딸의 설득에 넘어가 주기로 했다.
“그게 네 선택이라면. 크흑…… 이 못난 아비 때문에…….”
“그렇진 않아요. 저도 절 키워주신 아버지께 보답하는 거죠.”
“널 이렇게 보내게 될 줄은 정말 몰랐다. 이게 다 내 잘못이라니…….”
“괜찮아요, 저는. 어디서든 잘 살 자신이 있으니까. 제가 어디 죽으러 가는 것도 아니잖아요?”
“난 널 사랑하는 사람에게 보내고 싶었다. 정략결혼 같은 건 생각도 안 했어. 그건 네가 불행할 테니까.”
“어디로 시집을 가든 저만 행복하면 된 거죠. 전 괜찮아요.”
대화는 이렇게 됐지만 막상 결혼할 상대가 문제였다.
“그런데. 누구한테 시집을 간다는 말이냐? 내가 알기론 마땅한 상대가 없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