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금융명가의 창시자-66화 (66/181)

§66화 17. 그대여, 빚에 먹히리 #2(2)

잠시 생각에 잠기던 앤드류가 다시 한번 의문을 표했다.

“하지만 저희가 그 빚을 갚을 이유가 없지 않을까요? 형님께서 저 때문에 그러진 않으실 거 같고.”

영주가 진 빚.

그걸 록펠러가 갚아줄 의무는 단연코 없었다.

“당연히 없지. 우리가 무슨 자선사업가도 아니고 그걸 왜 갚아주겠어?”

“그럼 무슨 이유에서 대신 갚아주는 거죠?”

록펠러는 차분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여기 영주가 되려면, 정확히는 여기 민심을 잡기 위해선 어쩔 수 없는 일이지. 그리고 그렇게 되는 과정에서 당연히 너희 둘 관계가 개선될 여지는 있는 거고.”

“저희 관계가 과연 좋아질까요?”

“글쎄다. 하지만 우리가 버리면 그쪽은 완전히 나락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겠지. 변방에 위치한 힘없는 빚쟁이 영주를 감싸고돌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을 테니까.”

“그건…… 그렇네요.”

“그게 정녕 네 소원이라면, 뭐 잘된 거겠지.”

“뭔가 기분이 묘하네요.”

“묘하든, 좋든, 어차피 네 선택이다. 난 분명 말했어. 엮이려면 다른 여자랑 엮이라고. 이건 네 선택이다.”

“그게…… 생각보다.”

“그럼 그 여자를 가져. 말리진 않을 테니까.”

대화가 이렇게 되니 앤드류가 느끼기엔 딱히 내키진 않으면서 또 싫은 건 아니게 됐다.

“아무튼 록펠러 형님께선 그런 생각이셨군요.”

“그래, 그렇게 할 생각이야.”

사람들이 가장 민감하게 생각하면서도 전부라고 할 수 있는 게 바로 돈이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해결해 준 구원자.

“여기 사람들은 영주 때문에 자신들의 금화를 전부 잃은 상태야. 이제 의미도 없는 차용증서 쪼가리에 자신의 금화가 묶여 있는 상태지.”

“그걸 형님께서 전부 해결해 주신다는 겁니까?”

“그렇게 하면 여기 민심은 무조건 얻을 거다.”

저도 모르게 입을 벌린 앤드류가 감탄사를 내뱉기도 전에, 가게 안쪽에서 모습을 드러낸 이가 있었으니 그 역시 앤드류의 방문을 반길 자였다.

“앤드류 형!”

가게 안에서 금화세공을 하고 있던 조슈아가 나와 소식도 없이 찾아온 앤드류를 격하게 맞아주었다.

“대체 언제 온 거야? 온다는 말도 없이!”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어. 조슈아, 너도 많이 컸구나. 정말 몰라보겠어.”

“정말 잘 왔어! 내가 앤드류 형을 얼마나 보고 싶어 했는데!”

격한 해후 뒤에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보니 록펠러도 자리에서 일어나 목소리를 내주었다.

“예정에는 없는 일이었지만, 앤드류가 이렇게 찾아왔으니 오늘 저녁은 근사하게 먹자꾸나.”

“당연하지!”

기쁨도 잠시.

앤드류는 이 자리에 없는 막둥이부터 물어보았다.

“그보다 루시아는 잘 지내고 있는 거야?”

“루시아도 많이 컸지. 형이 알던 예전의 철부지가 아니야.”

“루시아가 이제 9살이던가?”

“응! 이젠 앞가림도 잘해. 곧 시집도 보내야 할 걸?”

“그건 좀 너무 나갔네.”

“하하하!”

두 동생을 흡족한 표정으로 바라보던 록펠러가 생각에 잠겼다.

‘역시 가족이란 건 좋은 거야.’

“앤드류, 말이 나온 김에 루시아나 보러 가는 게 어떻겠니? 조슈아 말대로 루시아도 정말 많이 컸어.”

앤드류가 물었다.

“그럼 가게는 어떻게 하시려고요?”

“가게는 내가 지켜야지. 둘이 갔다 와.”

이처럼 카터 방코에 찾아온 앤드류가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이어가고 있을 때, 그와 마찬가지로 고향에 돌아온 스텔라는 전에 없는 분위기에 적잖이 당황한 눈치였다.

‘사람들 시선이 변해도 너무 변했어.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자신이 영주 딸이라는 게 믿겨지지가 않을 정도로 성안의 사람들도 싸늘한 시선을 보내고 있었고, 그나마 영주에게 충성하던 몇몇 하인들만 그녀를 영주 딸로서 예우해 주었다.

하지만 그마저도 이전과 느낌이 다르다는 건 스텔라도 바보가 아닌 이상 바로 알 수 있었다.

하인의 안내를 받아 영주를 찾아간 스텔라는 예전과 다르게 많이 초췌해진 자신의 아버지를 볼 수 있었다.

“아니, 온다는 말도 없이 갑자기 왜 찾아온 거냐?”

영주 체스터는 소식도 없이 찾아온 제 딸을 보고 크게 놀란 눈치였다.

그런 영주에게 스텔라는 우선 이곳의 사정 이야기부터 듣고 싶어 했다.

“아버지, 어떻게 되신 거예요? 문장관 아저씨가 급히 서신을 보내서 여기 내용은 대충 알게 됐어요. 대체 얼마나 빚지신 거죠?”

영주가 표정을 구겼다.

“헤밀턴 그 자식이 너한테 쓸데없는 얘기를 했구나. 내가 당장 가서 그 자식을!”

“아버지! 지금 그럴 상황이 아니잖아요?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거예요?”

사관학교에 있어야 할 딸이 고향까지 내려와 따져 묻자 영주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지난 일들을 설명해 주기 시작했다.

자신이 써준 차용증서로 인해 영지 안이 발칵 뒤집힌 날.

간신히 시어들을 제 편으로 만든 영주는 무력을 앞세워 영지민의 폭동을 간신히 제압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때는 영지민 전체가 움직인 게 아니었기에 쉽게 막을 수 있었던 것이었고, 이후로 계속되는 폭동은 점차 그 규모가 커져 나름 절정에 이르렀을 땐 영지민 대다수가 영주성까지 찾아와 농성을 벌일 정도가 됐다.

이대로 영지가 무너지느냐 마느냐의 기로에 선 상황에서.

영주는 오버시어의 설득으로 인해 어쩔 수 없이 영지민들로 구성된 채권단과 마주할 수밖에 없게 됐다.

그 채권단 대표는 당연히 영주에게 가장 많은 금화를 빌려줬던 카터 방코의 록펠러가 되었고, 록펠러는 자신이 이끄는 채권단과 성난 영지민들을 대표하여 빚쟁이 영주에게 몇 가지 제안을 하게 됐다.

그때 받았던 제안에 대해 영주가 말하기 시작했다.

“우선 내가 써준 차용증서를 들고 있는 사람들에겐 세금을 안 걷기로 합의했다. 그걸로 내가 진 빚을 천천히 변제하라고 하더구나. 나야 알겠다고 했지. 어디서 금화를 빌려다 줄 것도 아니었으면 그게 맞는 것 같았으니까.”

“다른 건요?”

“그리고 내가 진 빚을 전부 갚을 때까지 담보로 잡힌 땅에서도 세금을 걷지 말라고 하더구나. 이것 역시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빚이 너무 커져서 담보로 잡힌 땅에서 권리 행사를 하기가 민망할 정도였거든. 그래서 그 제안도 받아들이기로 했단다.”

“아버지.”

한숨 쉬는 영주가 말을 이었다.

“아마 그때 그 제안들을 받아들이지 않았다면 지금 이 자리에도 없었을 거야. 시어들도 강하게 동요하던 때라 일이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르는 상황이었거든.”

영지민 대다수가 영주가 써준 차용증서를 들고 있었다.

그가 써준 차용증서를 담보로 발행된 Gold 차용증서는 마치 돈처럼 영지 여기저기서 쓰이고 있었으니, 사실상 영지민 전체가 영주에게 금화를 받아야 할 채권자가 되어버린 것이다.

말인즉, 현재 영주의 수입이 제로란 소리였다.

“아버지, 그렇게 합의해 버리면 여기 세금이 전혀 안 걷히게 되잖아요? 아버지가 따로 사업을 벌이시는 것도 아닌데 이제 어떻게 하시려고 그렇게 합의를 해버리신 거예요?”

“알아. 나도 알긴 아는데…….”

영주도 나름 할 말이 있었다.

“방법이 없었다니까? 그걸 받아들이지 않고는 살 수가 없는 상태였어. 네가 그때 두 눈을 시퍼렇게 뜨고 날 찾아온 영지민 무리를 못 봐서 그런 소리를 하는 게다. 진짜 날 어떻게든 해서 돈을 받아갈 사람들이었다니까?”

“그러니까 왜…… 그렇게 많은 빚을 지신 거예요. 쓸데없이.”

“쓸데없지는 않았지. 전부 영지를 위한 일이었으니까. 여긴 드워프가 버린 이후로 선조로부터 대대로 물려받은 땅이다. 어떻게든 지켜야 할 의무가 있는 곳이야.”

바보 같은 아버지라도 결국 자신의 아버지였다.

스텔라는 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우선 영지의 정확한 상태에 대해 알고 싶어 했다.

“아버지, 그럼 여기서 세금은 아예 안 걷히는 거예요?”

“세금? 전부 다 나한테 찾아와 금화를 달라고 아우성인데 무슨 세금이 걷히겠니?”

“그럼 그것뿐인 거죠? 다른 건 다 괜찮은 거죠?”

나름 희망을 품고 물어보는 딸에게 영주는 가차 없이 고개를 젓기 시작했다.

“그건 아니다.”

“아니라고요? 설마 또 빚을 지신 거예요?”

이 모든 게 빚으로 인해 비롯된바.

스텔라의 눈빛이 전에 없이 날카로워지면서 아버지인 영주를 무섭게 쏘아보았다.

“정말 왜 그러세요?”

“아니야. 그게 아니야. 내가 또 판을 벌였겠니? 내가 그동안 지은 죄가 있는데. 또 손을 벌릴 정도로 그렇게 무지한 사람이 아니다.”

“그럼 뭐예요?”

“뭐긴. 세금이 전혀 안 걷히니 방코에 낼 이자가 없게 됐단다. 그래서 그 이자가 계속 불어나 이제 감당하지 못할 정도가 됐어.”

“뭐라고요? 그게 정말이에요?”

세금이 전혀 안 걷히니 이자 낼 돈이 없어졌다.

그리고 그 이자가 쌓이고 쌓이다 보니 이게 또 빚이 되고, 그 빚은 무섭게 영주의 목을 조여오고 있었다.

“이자가 쌓이니 그게 또 빚이 되더구나.”

월 6%의 고금리.

그것은 영주에겐 너무나도 증오스러운 존재였다.

“그걸 변제할 능력이 없으니 또 땅을 담보로 잡히게 됐다. 그 악순환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거고.”

“아버지!”

자신을 세차게 부르는 딸을 향해 영주는 면목이 없음을 느꼈다.

일이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면 선대의 조언을 그렇게 흘려듣는 게 아니었는데…….

‘아버지께서 그렇게 빚을 조심하라고 하셨는데…….’

“아무튼 그렇게 됐다. 너한텐 정말 할 말이 없구나.”

그녀는 영지민의 시선이 왜 전과 같지 않았는지 확실히 알게 됐다.

이빨과 발톱이 있는 영주였다면 자신 또한 그에 걸맞은 대우를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그녀의 아버지는 이빨도, 발톱도, 전부 뽑힌 채 아예 일어날 기력조차 없는 노쇠한 맹수였다.

그러니 모두가 대놓고 무시할 수밖에.

“너한테 정말 미안하게 됐다. 어쩌다 일이 이렇게 됐는지…….”

그렇다고 죽을 용기는 없었다.

“그냥 죽을 생각도 해봤다. 하지만 내가 죽으면 넌 또 어떻게 되겠니? 내가 죽는다고 그 빚이 전부 없어지는 것도 아닌데.”

“한평생 명예로우셨던 분이 어쩌다 이렇게까지 되신 거예요.”

“나도 모르겠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정말 이렇게 돼버렸어.”

두 부녀는 침울해진 분위기 속에서 말이 없어졌다.

하지만 이렇게 죽을 순 없는 법.

일을 이 지경까지 만든 영주와 다르게 그녀는 어떻게든 살아보고자 했다.

“제가 카터 방코에 가서 잘 말해볼게요. 어떻게든 살아야죠.”

영주는 강한 의문이 들었다.

자신도 포기한 일을 자기 딸이라고 해서 뭐가 달라질까?

“네가 간다고 크게 달라지겠느냐? 어쩌면 그들은, 아니, 그 자식은 이걸 전부 의도했을 수도 있어. 처음부터 땅을 담보로 해달라고 했을 때부터 의심했어야 했다.”

“하지만 돈을 빌리신 건 아버지였잖아요?”

“그거야…….”

“그럼 아버지도 하실 말이 없는 거예요. 그들이야 아버지께 빌려주고 아버지가 그걸 못 갚으신 거니까. 그리고 아버지도 나쁜 생각을 가지고 계셨잖아요.”

“내가 무슨 나쁜 생각을 했단 말이냐?”

“차용증서를 생각도 없이 남발하셨잖아요. 제가 그걸 모를 줄 알았어요?”

“그거야…….”

딸에게도 그런 소리를 듣게 되니 영주는 죽고 싶은 심정이었다.

“맞다. 네 말이 맞아. 내가 그 차용증서를 그렇게 남발하지만 않았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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