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금융명가의 창시자-64화 (64/181)

§64화 16. 그대여, 빚에 먹히리(5)

“이게 어쨌다고…….”

자신이 써준 차용증서를 담보로 나왔다는 카터 방코의 새 차용증서.

영주는 당장 이해가 안 된다는 눈치였다.

“뭐가 어쨌다는 거야? 이게 이 시간에 날 찾아올 이유까지 되는 겐가?”

도리어 화를 내려는 영주가 늦은 밤 자신의 잠자리를 방해한 오버시어와 그를 따라온 시어들을 노려보자 찾아온 시어 무리가 잠시 주춤했다.

상대는 영주.

이 땅의 주인인 자였다.

그리고 그들의 주인이기도 한 자.

주춤하는 시어들이 저도 모르게 헛숨을 들이켰을 때, 과감히 나선 자가 있었으니 그는 그들 무리를 끌고 온 오버시어 시론 마크였다.

“자세히 보신 게 맞는 겁니까? 거기엔 분명 이렇게 적혀 있을 겁니다. 영주님께서 그간 써오셨던 차용증서를 담보로 한다고요.”

“여기 그렇게 써져 있지 않나? 그래서 그게 뭐 어쨌다고?”

영주는 받았던 차용증서를 다시 오버시어에게 던져주며 불 같이 화낼 준비를 했다.

‘대체 뭔 생각으로 여기까지 찾아온 거야? 이것들이 단체로 미친 건가? 내가 누군지 모르는 거야 뭐야?’

성난 기색이 역력한 영주를 향해 오버시어는 차분히 눈을 감더니 이내 고개를 젓기 시작했다.

이 모든 게 어리석은 그로 인해 비롯된바.

그가 당장 이해하지 못하는 게 어쩌면 납득이 되고 있었다.

“정말…… 무지하시군요. 전장터에선 분명 존경할 분이 맞지만, 이런 데서는 정말 실망스럽습니다.”

“뭐라고? 자네, 지금 뭐라고 했나? 지금 제정신으로 그 소리를 한 겐가?”

다시 눈을 뜬 오버시어의 시선은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어차피 멍청한 군주에겐 그만한 대가가 따르게 마련.

오버시어는 이후 일어날 모든 일에 대해서 어느 정도 감을 잡은 듯싶었다.

“영주님. 지금 저희가 이런 늦은 밤 무례를 무릅쓰고 찾아온 것도 전부 다 영주님의 무지함 때문입니다. 영주님께서 담보로 한 차용증서가 더 이상 쓸모가 없어졌기에, 금화를 교환하지 못한 저희가 여기까지 찾아오게 된 겁니다. 이래도 모르겠다고 발뺌하시려는 겁니까?”

그 말에 영주는 약간 당황한 표정이었다.

“내가 써준 차용증서가…… 쓸모가 없어져? 그게 무슨 소린가?”

“카터 방코에선 더 이상 영주님이 써주신 차용증서를 신뢰하지 않겠다고 선언했습니다.”

오버시어의 목소리에 힘이 붙기 시작했다.

“그래서 그동안 영주님의 차용증서를 담보로 발행된 Gold 차용증서를 마치 돈처럼 사용하던 저희들 대다수가 손해를 보게 생겼다 이 말입니다.”

“뭐라고?”

눈살을 찌푸린 영주가 오버시어와 그를 따라온 시어 무리를 살펴보았다.

그들 손엔 전부 다 카터 방코의 Gold 차용증서가 쥐어져 있었다.

“아니…… 차용증서를 금화로 교환하는 건 전부 방코 일이지, 그걸 왜 나한테 따지고 있어.”

“거기서 따질 수 없기에 여기까지 찾아오게 된 겁니다.”

“따질 수 없었다고?”

영주는 당최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이었다.

상대는 일개 방코 업자였다.

방코 업자에게 찾아가 금화를 요구하는 게 쉽겠는가?

아니면 영주인 자신에게 찾아와 이런 시각에 무례를 범하는 게 쉽겠는가?

이건 생각해 볼 가치도 없는 것이었다.

“이 시간에 날 찾아와 무례를 범할 정도로 방코라는 곳이 나보다 더 대단하게 느껴졌던 모양이지? 그래, 나도 모르는 사이에 자네들이 거기서 거액의 빚이라도 졌나? 그게 아니고서야 나한테 이럴 순 없네.”

그런 영주의 태도에 오버시어를 포함한 다수의 시어들은 실망감을 금치 못했다.

자신들이 이제껏 영주라 모셔오던 자가 이리도 멍청한 자였다니!

“영주님께선 정말 하나도 모르시는군요. 저희가 금화를 교환하기 위해 방코를 찾아가야 하는 건 맞습니다. 하지만 그 방코는 지금 성역처럼 되어 감히 저희가 손을 쓸 수 없는 상태입니다.”

“성역? 그게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야. 대체 무슨 소리냐고!”

영주가 세차게 묻자 오버시어를 따라온 다른 시어가 그 물음에 답해주었다.

“아무래도 교회의 재산이 카터 방코에 묶여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저희가 찾아갔을 땐 교회의 재산을 지키려는 교인들이 그 입구를 막아서고 있었습니다.”

또 교회였다!

교회 이야기가 나오자 표정을 왈칵 구긴 영주가 그제야 상황이 이렇게까지 된 배경에 대해 대충 눈치를 챌 수 있었다.

차용증서를 금화로 교환해 주는 일은 전적으로 자신이 아닌 방코의 책임이었다.

그런데 그 방코가 교인들로부터 보호를 받자, 어디 하소연할 데가 없어진 시어 무리가 자신을 찾아온 것이다.

‘정말 개 같은 경우로군. 나한테 이런 일이 생길 줄은…….’

그런데 한 가지 이해하기 힘든 점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방코를 감싸고도는 교회의 태도였다.

본디 교회라 하면 이자놀이를 하는 방코를 증오하는 게 당연하지 않겠는가?

그걸 떠나서도 돈에 인색한 사제장이 카터 방코에 금화를 맡겼다는 사실 또한 믿기지 않는 일이었다.

“그런데 좀 이상하군. 교회에서 금화 보관료까지 내면서 카터 방코에 교회 재산을 맡겼다고?”

그 물음엔 오버시어가 대꾸해 줬다.

“둘의 자세한 배경까진 저희가 알지 못합니다. 교회 일에 저희가 감히 간섭하기 힘든 점도 있지만, 둘의 관계는 꽤 오래전부터 지속되고 있었습니다. 어쩌면 교회와 영주님의 관계보다 방코와의 관계가 더 깊을 수도 있습니다. 성금 역시 이 영지에서 가장 많이 내는 게 바로 방코가 아니겠습니까?”

이는 영주도 어렴풋이 알던 바였다.

둘이 맥주 사업으로 이전부터 가깝게 지내왔다는 것은 잘 알고 있었으므로.

크흠!

애꿎은 헛기침부터 내뱉은 영주가 자신에게 찾아온 시어 무리를 찬찬히 살펴봤다.

무언가…… 분위기가 심상찮아 보였다.

진정 미치거나 혹은 어느 정도 각오가 있지 않고서야 여기까지 찾아올 생각도 못 했을 터.

‘이 녀석들 지금 장난이 아니야. 마치 날 잡아먹으려고 찾아온 거 같아.’

일단 제 사람들부터 챙기고자 하는 마음에 영주가 혼란스러운 마음을 추스르고 목소리를 냈다.

“그래, 그 차용증서가 내 차용증서를 담보로 했다고?”

“네, 그렇습니다.”

우선 책임회피부터 찾는 영주가 표정을 구긴 채 생각에 잠겼다.

‘이거 참 개 같은 경우로군. 내 걸 담보로 한다는 게 일이 이렇게 된다고?’

“그럼 내가 그것을 꼭 보상해 줘야 하는 이유가 뭔가?”

그 물음에 돌아온 것은 놀랍게도 자신이 카터 방코에 써주었던 자신의 차용증서였다.

“이유요? 이유는 바로 이겁니다.”

“이게 왜…… 자네한테 있나? 이건 내가 카터 방코에 써준 것인데?”

“벌써 잊으셨습니까? 저희가 가진 Gold 차용증서가 영주님의 차용증서를 담보로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카터 방코에선 금화가 아닌 영주님의 차용증서를 대신 내주게 됐고,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저희 모두 영주님의 차용증서를 들고 있는 상태입니다.”

“…….”

할 말이 없어진 영주가 짧은 침묵에 휩싸였다.

‘뭔가 잘못됐어. 그게 왜…….’

대충 흘러가는 그림을 보니 이거 보통 일이 아닌 듯싶었다.

순간 목울대로 침을 삼켜 넘기는 영주가 저도 모르게 두 눈을 깜빡였다.

“그럼…… 자네들이 이제까지 쓰던 Gold 차용증서가 전부 내가 써준 차용증서로 대체됐단 말인가?”

“네, 저희도 딱히 의도한 바는 아니었으나, 어쩌다 보니 일이 그렇게 됐습니다.”

이 순간 영주의 머릿속에 자리한 생각은 딱 하나였다.

‘이런 빌어먹을.’

그저 종이일 뿐인 차용증서를 남발하여 힘없는 방코 업자를 기만하는 것이야 그가 본래 의도하던 바였다.

하지만 그 차용증서가 방코에서 나와 이처럼 다른 사람에게 흘러 들어가는 것은 그가 바라던 일이 절대 아니었다.

‘다른 영주 놈 손에만 안 들어가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이렇게 되다니.’

사태를 정확히 인지하고 얼굴 표정이 붉으락푸르락 변하는 영주를 향해 오버시어는 제법 담담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래서 저희에겐 여기 써진 금화를 요구할 권리가 있는 겁니다. 다행히도 영주님이 써주신 이 차용증서엔 이런 말이 있더군요.”

이 역시 아주 오래전에 카터 방코에 의해 의도됐던바.

그 끔찍한 글귀를 오버시어가 차분한 어조로, 최대한 감흥 없이 읽어주었다.

“양도가 가능하다고.”

“양도야…… 가능하지.”

“그래서 저희들이 이렇게 무례를 무릅쓰고 늦은 밤 영주님을 찾아오게 된 겁니다.”

힘없는 영지민이야 신경 쓸 일이 없겠지만, 당장 영지의 방비를 책임지고 있는 무장한 시어 무리는 아니었다.

“저희는 말입니다. 오늘 밤 이 자리서 여기 적힌 금화를 꼭 받아가야겠습니다. 이건 저희가 가진 당연한 권리니 영주님께서도 거부하실 수 없을 겁니다.”

오버시어를 포함한 나머지 시어들도 바보는 아니었다.

영주는 현재 막대한 빚을 지고 있었고, 그것은 Gold 차용증서로 인해 영지민에게 골고루 뿌려진 상태였다.

만약 일이 커지게 된다면 영주의 능력으론 빚의 완전한 변제가 불가능할 터.

그런 악몽 같은 일이 일어나기 전에 자신들의 금화부터 챙기려는 시어 무리가 영주를 향해 목소리를 냈다.

그리고 이것은 채권자 무리가 빚쟁이 채무자에게 당연하게 행사할 수 있는 권리였다.

“내주시죠. 저희 금화를.”

단 두 마디.

그 두 마디에 영주는 저도 모르게 움츠러들며 뒷걸음질을 치고 말았다.

‘이놈들이…….’

자신들의 금화를 찾기 위해 우르르 몰려온 시어들의 눈빛이 제법 매서웠다.

지금 이 자리서 저들이 원하는 금화를 내주지 않는다면 어떤 유혈사태가 발생할지는 안 봐도 뻔했다.

“우, 우선 진정들 하게. 금화야 당연히 내어줄 테니 너무 걱정하진 말고.”

이자값을 받기 위해 찾아온 록펠러와는 확연히 다른 태도로 시어들을 안심시키는 영주가 다소 긴장한 태도로 목소리를 이어주었다.

“내가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자네들 금화는 꼭 챙겨줘야지 않겠나?”

이제껏 영주에게 충성을 다해왔으나, 오늘 이날 영주의 무능함을 알게 된 오버시어는 이 상황이 그리 탐탁지 않음을 느끼고 있었다.

비록 하늘 같은 영주라지만, 그것도 영주의 권한이 다 살아 있을 때의 이야기였다.

“저희 금화야 당연히 챙겨주시는 겁니다. 한데 여기서 궁금한 게 하나 있습니다.”

“뭘 말인가?”

“저희야 잘 챙겨주시더라도 나머지 사람들은 어떻게 하실 겁니까? 지금 이 영지엔 Gold 차용증서를 들고 있는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 그들이 전부 카터 방코에서 영주님의 차용증서를 받게 된다면 그땐 어떻게 하실 겁니까?”

“그야…….”

상상만 해도 끔찍했다.

그저 악몽 같은 일.

“거기에 대한 감당은 되시는 겁니까?”

말을 마친 오버시어가 잠시 고개를 돌려 자신을 따라온 시어들을 가볍게 훑어보았다.

적지 않은 수였지만, 이 정도 수로는 제 금화를 되찾기 위해 성난 영지민들을 전부 제압하는 건 매우 힘들어 보였다.

아마 통제라는 게 불가능할 터.

“여기 있는 저희만으론 아마 영주님께 채권행사를 하려는 성난 영지민들을 막을 수 없을 겁니다. 아니, 힘에 부치겠죠.”

이어지는 오버시어의 눈빛엔 점차 힘이 들어갔다.

“물론, 그전에 저희부터 진정시키는 게 순서겠지만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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