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화 16. 그대여, 빚에 먹히리(4)
달이 중천에 걸린 늦은 밤.
영주 체스터는 영지에서 일어난 소란에 대해 시어들의 보고를 받게 됐다.
무슨 일인고 하니, 카터 방코에서 영지민이 가져온 차용증서를 금화로 교환해 주지 않고 있단다.
그래서 성이 난 영지민들이 카터 방코에 찾아가 소란을 피우고 있다는 내용의 보고였다.
‘그게 내 알 바는 아니겠지.’
어찌해서 일이 그렇게까지 됐는지.
영주는 감도 못 잡고 있었다.
그저 단순히 생각하기엔 카터 방코에 문제가 생겨 금화를 내줄 수 없는 정도로만 생각하고 있었지, 그 일에 자신이 깊게 개입되어 있는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한 것이다.
물론 아예 의심을 하지 않는 건 아니었다.
오늘 밤, 그 일이 있기 전에 록펠러란 청년이 자신을 만나고 갔으니까.
‘좋은 이야기야 없었는데…… 그것과 관련은 없겠지. 이건 카터 방코 자체적인 문제니까.’
영주를 찾아온 록펠러는 여느 때와 다르게 채무 상환에 대해 진지하게 이야기를 했었다.
그리고 이자를 되도록 금화로 갚아달라는 이야기를 했었는데, 그걸 들을 영주가 아니었다.
찾아온 록펠러를 향해 영주는 이렇게 말했다.
“지금까지 내 차용증서로 잘 받아왔으면서 갑자기 안 받겠다고 하면 내가 어쩌겠나?”
그런 영주의 말에 록펠러가 항변했다.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지만 계속해서 영주님의 차용증서만 받아갔습니다. 차용증서는 언젠간 그 빚을 갚겠다는 영주님의 약속입니다. 하지만 저희가 언제까지 그 약속만 받을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이자값으로 달란트를 내주십시오.”
“그런 식으로 이자는 못 주겠네. 자네도 알다시피 내게 그런 돈이 어딨겠는가?”
“영지 세금은 꾸준히 걷히지 않습니까?”
“아, 영지 세금이야 걷히긴 하지. 하지만 금화로 내어줄 순 없다니까? 나도 금화가 모자라네. 유사시에 대비를 해야지 않겠는가? 그럼 어느 정도의 금화는 가지고 있어야 하지.”
“그 정도가 너무 심하신 거 같습니다.”
“아무튼 금화는 없네.”
영주가 이전과 다르게 대놓고 배짱을 부리자 록펠러는 예전에 카터가 말했던 불량 채무자에 대해 떠올리게 됐다.
‘모든 채무자가 처음부터 불량 채무자는 아니었다고 했지. 딱 저 사람처럼.’
영주처럼 착실하게 돈을 잘 갚아오던 우량 채무자도 제 사정에 따라선 충분히 불량 채무자로 변질될 수 있음을 록펠러는 이 자리서 알게 됐다.
하지만 이 모든 게 자신이 의도했던바.
영주가 그만한 빚을 지게 은근슬쩍 유도했던 것도 바로 자신이었다.
그를 빚으로 깔아 죽이기 위해.
‘정확히 노렸던 바였지. 반갑다, 영주, 아니, 불량 채무자 양반.’
“그럼 이번에도 금화 대신 차용증서로 대신하겠다는 겁니까?”
그 물음에 영주가 거드름을 피우기 시작했다.
“내가 언제 안 갚겠다고 했나? 당장은 어려우니 차용증서로 대신하겠다는 거야.”
“대체 언제까지 말입니까?”
영주는 제힘을 너무 과신하고 있었다.
‘내가 금화를 안 주겠다는데 저놈이 뭘 어쩔 거야?’
“왜 따지는 겐가? 내가 차용증서라도 써주는 걸 감사히 여기게.”
그 말에 록펠러도 한마디 던져보았다.
“영주님. 앞전에 말했듯이 저희가 계속해서 차용증서만 받을 순 없는 노릇입니다. 예전에 땅을 담보로 잡았으니, 문제가 생기면 저희도 땅을 가져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자 영주가 대놓고 콧방귀를 뀌었다.
“자네가 감히 내 땅을 가져가겠다고? 일개 방코 업자가 무슨 재주로?”
“그렇게 서로 약속하지 않았습니까?”
“약속이야…… 했었지. 하지만 자네가 무슨 수로 가져갈 텐가? 내가 이렇게 버젓이 살아 있는데.”
그 말에 록펠러는 속으로 영주를 비웃어주었다.
‘자신이 여기 주인이라는 사실을 너무 과신하고 있군. 저러다 큰코다치지.’
“이미 피터 사제장님 앞에서 약속했던 내용입니다.”
그럼에도 영주의 고까운 태도는 변함이 없었다.
“자네, 이건 분명히 알아두게. 땅은 교회에서 주는 게 아니라 폐하께서 주시는 것이라네. 자네가 나와 교인 앞에서 무슨 약속을 했든, 폐하가 그것을 헤아려 결정하는 것이지 단순히 내가 빚을 졌다고 해서 그 땅을 그대 마음대로 가져갈 수 없다는 소리야.”
여기서 틀린 말 따윈 없었다.
교인과의 약속이 유효하다고 해도, 원칙적으로 제국 땅은 황실에서 정하여 나눠주는 것이었고, 그렇기에 이곳의 약속을 황실에서 인정해 주지 않는다면 여기서 무슨 약속을 했든 전부 다 무효가 될 수 있었다.
그게 바로 황실의 힘이자 황제가 다스리는 제국이란 땅이었으니까.
“그래도 신이 지켜보는 자리서 약속했는데, 감히 그것을 폐하라 해도 무를 순 없는 법입니다.”
순간 영주의 목소리에 날이 섰다.
“어디서 감히 폐하를 들먹이는 겐가!”
록펠러가 주춤하자 목에 핏대가 선 영주가 그를 지그시 노려보았다.
“자네…… 못 보던 사이 정말 많이 컸군. 나한테 찾아와 말대꾸도 하고 말이야.”
록펠러는 속으로 인정해 주었다.
자신이 많이 컸다는 걸.
‘어차피 저 녀석은 오래 못 가. 여기서 나간 순간 내가 먼저 방아쇠를 당길 테니까.’
“교회에서 약속한 내용입니다. 폐하도 하늘이지만, 그 위엔 신께서 계십니다. 신께서 지켜보는 자리에서 한 약속입니다. 그 누구도 무를 수 없습니다.”
교회는 영주가 가장 싫어하는 곳이었다.
제 말을 가장 안 듣는 데다가, 들을 의무조차 없는 곳이었으니까.
항상 골치였던 곳이었고, 지금도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다.
“물론 교회에서 약속이야 했지.”
“약속을 하셨으면 나름 효력이 있는 겁니다. 폐하께서도 이 점을 분명 헤아리실 겁니다. 이건 저보다 영주님께서 잘 알고 계실 텐데요?”
“당연히 그렇겠지. 하지만 자네가 바라는 일도 내가 빚을 안 갚는다는 전제조건하에서 그렇게 되는 걸세.”
영주가 대놓고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내가 언제 빚과 이자를 안 갚겠다고 했나? 난 갚을 생각이야.”
영주는 책상의 서랍 속에서 자신의 인장이 찍힌 차용증서 무리를 꺼내 들었다.
“그리고 오늘도 갚을 생각이고. 이자는 이걸로 대신해 주겠다니까?”
배움이 깊지 않은 영주는 오로지 제힘만 믿고 ‘허공에서 찍어낸 돈의 힘’에 탄복하고 있었다.
자신의 인장이 찍힌 이 차용증서 뭉치만 있으면 언제 어디서든 자신의 이름으로 된 차용증서를 발행하여 자신에게 돈을 갚으라고 성화인 카터 방코를 기만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자, 어디 한번 말해보게. 이자값으로 얼마나 필요하나? 이 자리서 필요한 만큼 이자를 적어줄 테니.”
참으로 거만하고 무식한 사람이었다.
‘한평생 전장터에서 굴러먹다 온 사람이라 그런지 생각하는 게 좀 단순한 거 같은데?’
이때 영주가 지었던 변태스러운 미소를 록펠러는 잊지 않기로 했다.
“영주님께선 오늘 이 일을 후회하실 날이 올 겁니다.”
평민이 영주에게 할 수 있는 가장 최상의 도발이었다.
기가 찬 영주였지만, 그래도 그 배짱에 탄복하며 오히려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어린놈이라 그런지 겁도 없군. 감히 누구 앞에서 주둥이를 터는 건지.’
“후회? 후회라면 이걸 가져가지 않는 자네에게 있겠지.”
씩 웃는 영주가 어디 해볼 테면 해보라는 식으로 록펠러를 도발해 보였다.
어차피 승자는 자신일 거라 생각했으니까.
“자네는 한낱 영지민에 불과한 사람이야. 내 땅에 들어와 세 들어 살고 있는 가엾은 평민에 불과하지.”
가소롭다는 듯이 영주가 말을 이어주었다.
“일전에 내가 한 말을 기억하고 있나?”
록펠러가 침묵으로 시위했고, 영주는 진한 미소와 함께 다음 말을 날려주었다.
“사람이란 말이야. 모름지기 제 분수를 알아야 돼.”
그다음에 이어질 말?
록펠러는 분명 알고 있었다.
“농노는 농노답게, 평민은 평민답게. 그리고 귀족은 그 자체로 우아하게 살아야 하지.”
그의 말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항상 예의와 분수를 지키며 살게. 어디서 감히 신에게 밉보인 방코에서 조수나 하는 나부랭이 새끼가 하늘 같은 영주에게 찾아와 빚 독촉을 한단 말인가? 빚 독촉 전에 자기 주제부터 알아야지.”
할 말을 다 마친 영주가 내쫓듯 록펠러를 돌려보냈다.
“내가 해줄 말은 그것뿐이니, 다시 할 말이 있다면 카터와 다시 찾아오게나. 어차피 다시 돌아와도 내가 내줄 것은 금화가 아니라 이 차용증서니까.”
영주의 미소는 아직도 가시질 않고 있었다.
“그것도 내 기분에 따라선 무릎을 꿇긴 다음 받게 할 수도 있어.”
지금 이 상황은 힘없는 채권자의 한계.
그리고 힘 있는 채무자의 당연한 배짱이었다.
“자네도 알고 있었을 텐데? 빌려줄 땐 서서 빌려주더라도 받아갈 땐 당연히 엎드려 받아가야 한다는 걸. 그게 자네 같이 이자놀이를 하는 방코 업자의 서러움이 아니겠나? 알아들었으면 조용히 돌아가게. 다시 올 땐 카터랑 같이 찾아오고.”
그것이 영주가 기억하는 마지막이었다.
‘그때 일이야 그렇게 끝났는데, 그것들이 갑자기 자포자기를 했나? 왜 영지민의 차용증서를 금화로 안 바꿔준다는 거지?’
여기서 영주는 그 일의 일차적인 문제가 자신이 아닌 카터 방코에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영지민이 가진 차용증서를 금화를 안 바꿔주는 일이야 당연히 방코의 책임이라 생각한 것이다.
‘아니면 나한테 쓴소리를 들어서 배알이 뒤틀린 건가? 하긴, 내가 이렇게 배짱을 부리는데 놈들이라고 배짱을 안 부릴 순 없겠지. 사람 욕심이야 다 똑같은 법이니까.’
그리 생각한 영주는 오히려 어떤 식으로 카터 방코를 벌주어야 할지 그것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카터 방코에서 정상적인 업무를 하지 않는다는 건 영주 입장에선 당연히 고쳐야 할 문제였던 것이다.
‘이번에 정신 좀 차리게 방코 세금만 올리든지, 아니면 따끔하게 벌 좀 줘야겠군. 그래야 영지민의 불만이 사그라질 테니까.’
늦은 밤.
카터 방코에서 시작된 소란이 머잖아 자신에게 돌아올 줄은 꿈에도 모른 채.
영주는 잠을 청하기 위해 침소로 향했다.
카터 방코의 소란이야 내일 일어나서 차분히 해결할 생각이었으니까.
그런데, 그런 영주 앞을 막아서는 무리가 있었으니, 그들은 당연히 이곳에 없어야 할 자들이었다.
“자네…….”
영주가 말끝을 흐리며 우르르 몰려온 시어 무리를 보게 됐다.
“여긴 왜 있는 겐가?”
흥분한 시어들을 데리고 영주를 찾아온 오버시어가 한 발자국 나서며 그에게 급여로 받은 차용증서 뭉치를 건네주었다.
“이것 때문에 찾아왔습니다.”
“그게 뭔가?”
“받아보십시오. 저흰 전부 그것 때문에 찾아왔습니다.”
그것은 언제부터인가 영지 안에서 돈처럼 쓰이게 된 카터 방코의 Gold 차용증서였다.
영문도 모른 채 오버시어로부터 Gold 차용증서를 받게 된 영주가 오히려 반문했다.
“이걸 왜 나한테 보여주는 겐가?”
그 말에 오버시어를 포함한 모든 시어들의 표정이 일제히 굳었다.
“저희가 이 늦은 밤 여기까지 왜 찾아왔는지, 정말 아무것도 모르시는 겁니까?”
한 영지의 주인이라지만 영지 방비와 전장에 관심이 가 있는 그는 영지 내부의 자잘한 일까지 알고 있지는 않았다.
“이건 카터 방코에서 예전에 새롭게 나온 차용증서가 아닌가?”
“네, 맞습니다.”
“그런데 이걸 왜 나한테 들고 왔나?”
“그 차용증서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시는 겁니까?”
“모르다니? 이거야 그냥 카터 방코의 차용증서가 아닌가?”
“모르신다니…… 그 차용증서를 자세히 살펴보십쇼. 그럼 저희가 찾아온 이유에 대해 알게 되실 겁니다.”
영주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오버시어가 말한 대로 자신이 건네받은 차용증서를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그곳엔 예전에 우연히 훑었다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여 넘긴 글귀가 또렷이 적혀 있었다.
이 차용증서는 자신이 써준 차용증서를 담보로 발행되었다는 글귀가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