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화 16. 그대여, 빚에 먹히리(2)
“영지 밖에서 일어난 전쟁에 대해선 아마 오버시어님도 잘 알고 계실 거라 생각합니다. 그 일로 인해 영주님은 저희 방코로부터 막대한 빚을 지게 됐습니다. 이건 알고 계시겠죠?”
영주가 방코에서 어마무시한 돈을 빌려왔다는 건 그도 잘 알고 있는 내용이었다.
그래서 분수에도 안 맞는 와이번을 사들였고, 또 쓸데없이 큰 요새까지 지어냈으니까.
어디 그뿐이랴?
다수의 용병 부대를 오늘 이날까지 운영한 것도 전부 다 방코에서 빌려온 돈 때문이었다.
‘생각보다 많이 빌려오셨지. 뒷감당이야 어차피 내 일이 아니니까 신경도 안 썼지만.’
그 생각과 동시에 한편으론 이런 생각도 가지고 있었다.
영주는 이 땅의 지배자.
그리고 방코 업자는 그 땅에 기생하고 살아가는 피지배자.
‘그래도 문제는 안 생길 거라 생각했는데.’
“그 일이야 당연히 알고 있다. 그런데 그게 어때서? 영주님이 여기서 빚을 진 것과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이 차용증서가 달란트로 교환 안 되는 것에 대체 무슨 관계가 있다고 이러는 겐가?”
오버시어는 정말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나는 모르겠어. 대체 그 이유가 뭔가? 명확히 설명해 주게.”
설명은 필요한 법.
록펠러가 입을 뗐다.
“관계야 당연히 있죠. 영주님께선 지금까지 아무 의미도 없는 이 차용증서를 남발하면서 저희의 빚을 갚아오셨습니다. 이겁니다.”
록펠러는 카터 방코가 아닌 영주가 직접 써준 차용증서를 오버시어인 그에게 건네주었다.
“그게 바로 영주님이 저희에게 직접 써주신 차용증서입니다. 확인해 보십쇼.”
록펠러가 건넨 차용증서 뭉치를 오버시어가 대략적으로 훑어보았다.
영주의 인장이 큼지막하게 찍혀 있는 그것은 분명 영주가 언젠간 자신이 진 빚을 갚아주겠다는 약속의 증표였다.
록펠러가 말했다.
“그것은 영주님께서 언젠간 그만큼의 금화를 갚아주겠다는 영주님의 신용이자 약속입니다.”
“알고 있네. 이건 자네 말대로 영주님이 써주신 차용증서가 맞아.”
“잘 알고 계시군요. 그런데 오늘. 저흰 그 약속을 매몰차게 배반당했습니다.”
“배반당했다고?”
오버시어가 놀란 표정을 지었고, 반면 록펠러의 표정은 차갑게 식어 있었다.
“네, 하도 차용증서로 해결하려고 하시기에, 더 이상 필요가 없어 약속된 금화를 받기 위해 영주님께 찾아갔더니, 거기서 영주님께서 하는 소리가 금화는 못 주겠고 대신 그 차용증서를 또 주겠다고 하더군요.”
말함과 동시에 록펠러가 실소를 뱉어주었다.
“하, 기가 찼습니다. 저희에게 필요한 건 금화였지 그딴 종이 증표가 아니었습니다. 영주님께서는 대체 언제까지 약속만 하실 겁니까? 약속을 하셨으면 응당 갚으셔야죠.”
그 말에 오버시어가 갑작스레 영주를 옹호하기 시작했다.
그에겐 아직 영주에 대한 신용이 있었고, 당장 약속을 지키지 못한 것에 대한 이유가 있을 거라 좋게 생각한 것이다.
“그래도 무슨 사정이 있으셨겠지. 영주님은 이 땅의 주인이시자 우리들을 이끌어갈 훌륭한 지도자시네. 그대에게 당장 금화를 내주지 않으셨다면 그만한 이유가 분명 있으셨겠지.”
록펠러는 보란 듯이 고개를 저어주었다.
“저희도 그런 줄 알고 이제까지 계속 속아왔습니다. 하지만 이젠 아닙니다.”
록펠러는 오버시어가 제 편을 들도록 다음 말을 이어주었다.
“제가 이번에 영주님께 금화를 받으려 했던 것은 여기 계신 당신이나 밖에서 아우성치는 영지민에게 금화를 교환해 주기 위함이었습니다. 저희도 금화가 있어야 당신들이 들고 온 차용증서를 금화로 교환해 주지 않겠습니까? 애당초 Gold 차용증서는 영주님의 신용을 담보로 하는 건데, 당연한 거죠.”
그 말에 오버시어가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그럼…….”
“저희야 그런 의도로 금화를 받기 위함이었는데, 영주님께선 저흴 배신한 겁니다. 그래서 저희도 더 이상 영주님 편의를 봐 드리지 않기로 했습니다. 영주님께서 저흴 언제까지 기만하실지는 저도 모르겠으나, 저흰 바보가 아닙니다. 바보처럼 굴 이유도 없고요.”
이번엔 록펠러가 그에게 반문해 보았다.
“이젠 제가 물어보죠. 저흰 매일같이 그 아무 의미도 없는 종이 증표만 받아가면서 저희의 피 같은 금화를 당신들에게 내줘야 하는 겁니까?”
“그건…….”
대화가 여기까지 진행되자 오버시어는 그제야 이해할 수 있었다.
상황이 이 지경까지 된 이유를 말이다.
쉽게 대답하지 못하는 오버시어를 상대로 록펠러는 말을 이었다.
“그렇다고 하늘 같은 교회의 재산을 대신 내줄 수도 없는 노릇입니다. 왜 영주님의 잘못을 저희와 교회에서 떠맡아야 하는 겁니까?”
옆에서 이야기를 듣고 있었기에 피터 사제장은 바로 목소리를 냈다.
“교회의 재산은 그 누구도 건드릴 수 없는 요한 님의 것이라네.”
피터 사제장이 엄한 얼굴로 오버시어를 향해 검지를 겨누었다.
“그러니 자네 영주에게 가서 똑똑히 전하게. 여기 있는 교회 재산은 절대 건드릴 수 없으니, 자기가 잘못한 게 있으면 알아서 해결하라고. 그 일에 우리 교회가 피해를 입는 일은 절대 없어야 할 것이야. 절대로.”
이 모든 게 영주의 잘못에서 비롯됐으나, 그걸 충분히 이해했으면서도 오버시어는 쉽게 물러날 수 없는 입장이었다.
영주가 그런 잘못을 했다고 해서 Gold 차용증서에 묶여 있는 자신의 금화를 쉽게 포기할 수 없는 노릇이었니까.
쉽께 말하자면 억울한 것이다.
“그럼 이건 어떻게 하란 말인가?”
오버시어가 자신이 가져온 Gold 차용증서를 내보이며 작지만 강한 목소리로 항의하자 록펠러는 무덤덤한 표정으로 말을 잇기 시작했다.
“그 Gold 차용증서는 원칙적으로 저희가 금화로 바꿔줄 의무가 없는 상태입니다.”
“그게 무슨 소린가? 이제까지 잘 교환해 줬으면서 이제 와 그게 안 된다고?”
록펠러가 보란 듯이 고개를 저어주었다.
“거기에 써져 있는 내용을 보십쇼. Gold 차용증서는 애당초 영주님이 남발하신 차용증서를 담보로 발행된 겁니다. 즉, 이것과는 확연히 다른 거죠.”
록펠러는 자신이 가지고 있던 또 다른 카터 방코의 차용증서를 꺼내 그에게 보여주었다.
“이건 저희 카터 방코에서 발행된 IOU란 차용증서입니다.”
오버시어는 자신이 가져온 Gold 차용증서와 IOU란 기존의 차용증서를 비교해보았다.
형태는 같았으나 한 가지 극명한 차이점이 있었다.
“둘의 차이점이 보이십니까?”
“…….”
오버시어가 아무런 말도 못 하는 이유.
Gold 차용증서엔 카터 방코가 직접 금화를 보증한다는 내용이 없었으나, 그러한 내용이 IOU 차용증서엔 적혀 있었던 것이다.
“아마 보이실 겁니다. 만약 당신이 저희 방코에 기존에 쓰이고 있던 IOU 차용증서를 가져오셨다면 저희야 당연히 그것을 달란트로 교환해 드렸을 겁니다. IOU 차용증서야 저희가 직접 보증해 드리니까요. 하지만 Gold 차용증서는 아닙니다. 그건 저희가 직접 보증해 드리지 않습니다.”
“하지만! 영주님 신용이…… 더 좋지 않았나?”
이전까지 영지민들이 써오던 카터 방코의 차용증서는 IOU 차용증서가 전부였었다.
그러다 영주가 직접 보증하는 Gold 차용증서가 나오기 시작하자 사람들은 너 나 할 거 없이 전부 기존에 있던 IOU 차용증서를 Gold 차용증서로 바꿔서 사용하기 시작했다.
달란트로 교환되는 건 둘 다 마찬가지였고, 일개 방코 업자가 보증하는 차용증서보단 영주가 직접 보증하는 차용증서가 더 안전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여기 사람들 모두 Gold 차용증서를 쓰기 시작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지금 IOU 차용증서는 아무도 안 쓰고 있네. 전부 Gold 차용증서로 바꿨으니까.”
그것 역시 록펠러가 정확히 의도하던 바였다.
‘나 역시 그렇게 되길 원했지. 왜냐고? 그래야 우리에게 그 종이 쪼가리밖에 안 되는 차용증서를 진짜 금화로 교환해 줄 의무가 사라지게 되니까.’
“그럼 저흴 믿지 못한 당신들의 실수겠네요. 저희보다 영주님을 더 믿었으니까요. 안 그런가요?”
다급해진 오버시어가 항변했다.
“이제까지는 똑같이 교환해 주지 않았나? 왜 이제 와서!”
“아마 영주님께서 저희가 가져간 차용증서를 말없이 금화로 바꿔주셨다면 지금도 문제없이 Gold 차용증서를 달란트로 교환해 드렸을 겁니다. 하지만 그것을 영주님께서 거부하셨으니, 저희 역시 이제 거부하는 겁니다.”
록펠러가 강조하듯 말을 이었다.
“어찌 됐든 그 Gold 차용증서는 영주님의 차용증서를 담보로 발행됐으니까요.”
“…….”
“여기서 무슨 말을 하시든, 저흰 원칙적으로 그것을 금화로 바꿔줄 의무가 완전히 없는 상태입니다. 이건 Gold 차용증서에 정확히 명시되어 있는 부분이니 저희야 더 이상 해드릴 말이 없습니다.”
오버시어 입장에선 분통이 터졌으나, 그걸 카터 방코에 화풀이를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모든 잘못은 영주에게서 비롯된바.
따지려면 여기가 아닌 영주에게 가서 직접 따져야만 했으니까.
“그럼…… 우린 이제 어떻게 하라고? 이 종이 쪼가리밖에 안 되는 걸 가지고 그냥 돌아가라는 겐가?”
그래도 영주보단 카터 방코에 따지는 게 더 속이 편해서 그렇게 소리쳐보니, 돌아오는 대답은 이것뿐이었다.
“그게 마냥 종이 쪼가리는 아닙니다.”
록펠러는 그것과 비슷한 종이 쪼가리를 가리켰다.
“아까 제가 드린 영주님의 차용증서가 있지 않습니까? 그것이 담보로 되어 있으니 저희가 금화는 못 챙겨드리지만, 영주님의 차용증서는 충분히 챙겨드릴 수 있습니다.”
록펠러가 다시 말했다.
“즉, 가져오신 Gold 차용증서만큼 영주님의 차용증서를 내드린다는 소리죠. 이건 Gold 차용증서에 분명히 명시되어 있는 부분이니까요.”
말인즉.
여기서 따지지 말고 영주에게 찾아가 다시 따지라는 소리였다.
“하…….”
더 이상 할 말이 없어 길게 한탄만 내뱉던 오버시어 옆으로 걸어간 카터가 그의 어깨를 다독이며 위로 아닌 위로를 건네주었다.
“우리도 그냥 돌려보내겠다는 게 아니야. 자네가 가져온 Gold 차용증서만큼이나 영주님이 내주신 차용증서를 대신 내어줄 테니, 정 억울하다면 우리가 아닌 영주님에게 가서 따져보게. 우리가 볼 땐 그게 맞는 거 같으니까.”
어찌 하늘 같은 영주를 상대로 감히 채권행사(빚을 갚으라고)를 할 수 있을까?
오버시어는 하늘이 막막해짐을 느꼈다가 이내 다시 생각하게 됐다.
영지엔 자기 같은 사람들이 넘쳐나고 있었다.
지금 이 시간에도 카터 방코 앞으로 찾아온 성난 영지민들은 지금 당장 달란트로 교환해 달라고 아우성치고 있었으니까.
‘절대 작지 않아. 어쩌면 영지민 전부일 수가 있어.’
그들 대부분이 카터 방코에서 보증하는 IOU 차용증서보단 Gold 차용증서를 들고 있었고, 그 말인즉 전부 다 영주에게 할 말이 있다는 소리였다.
‘나 혼자서는 불가능하지만…… 저기 밖에 있는 사람들하고 다 같이 움직인다면?’
거기다 오늘 아침에 시어들에게 나눠준 급여 역시 전부 Gold 차용증서였다.
‘밑에 부하들도 나와 같은 생각이라면, 더 이상 생각해 볼 것도 없지.’
어쩌다 Gold 차용증서(가짜 돈)가 ‘진짜 돈’처럼 여기저기서 쓰이게 됐는지는 그로서도 의문이었지만, 지금 이 상황에서 그것은 그다지 중요한 게 아니었다.
‘찾아가서 무조건 금화로 돌려받아야 돼.’
그가 강하게 움켜쥐고 있는 Gold 차용증서는 더 이상 돈 같은 게 아니었다.
그것은 종이 쪼가리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닌 것이었으니까.
각오를 마친 오버시어의 눈빛이 무섭게 변하자 이를 지켜보던 록펠러의 입매가 옅게 휘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