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화 16. 그대여, 빚에 먹히리(1)
오버시어 시론 마크.
그 영주성 안에 있는 시어 막사로 들어선 직후 오매불망 자신만을 기다리고 있던 시어들에게 반가운 소식 하나를 전해주었다.
“이번 달 급여다.”
그의 손에는 급여로 쓰이는 Gold 차용증서가 있었고, 그 차용증서는 곧 각 시어들에게 급여처럼 지급되었다.
“또 이거야?”
“금화 못 본 지 꽤 됐지 아마?”
“요즘은 이게 대세잖아. 안 그래?”
“것도 방코가 아니라 영주님이 보장해 주는 거야. 이것보다 확실한 건 없지.”
“그렇기야 하지.”
“그나저나 참 편하단 말이야. 예전엔 금화라 불편했는데.”
급여를 챙긴 시어들이 저마다 한마디씩 했고, 모두에게 급여를 나눠준 오버시어는 늘 그랬던 것처럼 똑같은 말을 반복해 주었다.
“정 달란트가 필요하면 방코로 가면 된다. 영지 사정이야 너희들이 잘 알고 있을 테니, 그걸 그냥 금화처럼 써도 되고.”
그 말에 시어들이 또 시끄러워졌다.
“어차피 이 차용증서는 이 영지 안에서밖에 못 쓰는 거 아닙니까?”
“맞아요. 이걸 어딜 가서 쓴다고. 아마 다른 영지에서 이걸 내밀면 미친놈 소리 들을 겁니다.”
그러자 오버시어가 엄하게 목소리를 냈다.
“자네들이 이 영지를 떠날 일이 있었나? 떠날 일도 없는 녀석들이 무슨 그렇게 군말들이 많아. 정 불만이면 방코 가서 교환하라고.”
토를 달지 않는 부하들이 침묵하자 오버시어 시론 마크는 영지 밖의 진행 상황에 대해 짤막이 전달해 주었다.
“그건 그렇고. 전쟁은 이제 끝났다. 양쪽 진영 모두 오늘부로 전부 철수했어. 이른 아침에 보고받은 내용이다. 물론 영주님껜 가장 먼저 보고를 드렸다.”
전쟁이 끝났다는 말에 크게 안도하는 시어들은 없었다.
이미 몇 달 전부터 그런 낌새가 있었으며, 지금 와서 그런 소식을 들어봤자 새삼스러울 것도 없었으니까.
“전쟁 자체가 오크들의 마석에 눈독을 들인 고블린들의 농간이었다는데, 오버시어님은 거기에 대해 뭐 들으신 건 없는 겁니까?”
“그런 얘기를 대체 어디서 들었나?”
“여기저기서 이야기를 들은 용병들이 해주더군요. 토템전쟁 자체가 고블린들에 의해 생겨난 전쟁이라고 들었습니다. 멍청한 오크들을 상대로 마석을 받아내기 위해 일부러 전쟁을 일으켰다고 하더군요. 전쟁엔 필수적으로 돈이 필요하고, 그 돈을 고블린방크가 대주면서 대신 오크들이 가지고 있던 마석을 가져갔다고 들었습니다.”
그 이야기를 전한 시어가 잠시 숨을 고르고 있던 사이 다른 시어가 불쑥 끼어들었다.
“저게 사실이면 오크들은 멍청하게 당한 거겠네. 지들보다 작은 고블린한테.”
“오크들뿐이겠어? 엉뚱하게 오해를 받게 된 드워프들도 속이 뒤집힐 일이지.”
“근데 뭐 증거는 없는 거니까.”
오버시어가 목소리를 냈다.
“그만. 어차피 우리 일이 아니다. 거기에 대해선 일절 신경 쓸 필요 없다. 중요한 건 영지 밖 전쟁이 끝났다는 거다.”
“그렇긴 하죠.”
한 시어가 손을 들며 오버시어의 주의를 끌었다.
“저기 오버시어님. 그럼 요새 쪽 용병 부대는 어떻게 됐습니까?”
“용병 부대도 이미 순차적으로 여길 빠져나가는 중이다. 갑자기 한꺼번에 우르르 빠져나가면 영지가 혼란스러워지니까.”
“영주님은 그 일을 알고 계십니까?”
“알고 있지. 그걸 지시하신 분이 바로 영주님이시다.”
“그렇군요.”
모두들 수긍했는지 고개를 주억이자 시론 마크는 곧바로 해산을 명했다.
“그럼 해산하고 오늘도 맡은 구역을 철저히 감시하도록. 그대들이 여기서 급여를 받는 건 오로지 영지 치안을 위해서니까. 자기 맡은 바 임무를 절대 게을리하지 말도록.”
“네!”
이구동성. 우렁차게 대답하는 시어들이 무장한 상태에서 막사를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그런 시어들을 물끄러미 지켜보고 있던 시론 마크가 제 손에 들려 있는 남은 차용증서를 보며 다소 엉뚱한 생각을 했다.
‘이걸 복사할 수 있는 능력이 있으면 참 좋을 것 같은데 말이야.’
하지만 꿈같은 일.
애당초 차용증서에 쓰이는 종이는 방코 업자들이 싱클레어 마법명가의 힘을 빌려 만든 특수재질의 종이였다.
즉, 복제가 불가능하다는 말.
‘그러긴 쉽지 않겠지. 내가 무슨 마법사도 아니고.’
아쉬운 생각을 하며 막사 밖으로 나간 시론 마크는 오늘 하루도 무탈하게 일과를 시작했다.
영지는 오늘 하루도 평온했다.
외부의 침입은 없었고, 영지 내부에서 말썽을 일으키는 영지민들도 없었다.
하지만 진짜 큰 문제는 그날 저녁에 그의 아내에게서 나왔다.
“여보, 오늘 방코에 갔는데, 글쎄 이 차용증서가 달란트로 교환이 안 된다고 하는데, 뭐 아시는 거 있어요?”
“뭐? 그게 갑자기 무슨 소리야? 교환이 안 된다니?”
웬 날벼락 같은 소릴까?
지난 몇 년간 문제없이 달란트로 교환되던 Gold 차용증서가 갑자기 금화로 교환될 수 없단다.
“정말 방코에선 그렇게 말했어?”
“네, 오늘 당신 급여 날이었잖아요? 그래서 베른에게 생활비 좀 보내려고 달란트로 교환을 하려고 했는데, 글쎄 안 된대요. 너무 막무가내였어요.”
시론 마크는 벗으려 했던 갑옷을 다시 입으며 아내를 향해 목소리를 냈다.
“당신이 내 아내인 걸 알면서도 방코에서 거절했다는 소리야?”
“네, 시어든, 오버시어 아내든, 절대 안 된다고 못을 박더라니까요. 이게 무슨 일이죠?”
오버시어는 제 머리를 긁적이며 대체 무슨 상황인지 이해해 보려 애써보았지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 이유에 대해 알 수가 없었다.
“내가 한번 가 보지. 갑자기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이제까지 별문제 없이 달란트로 교환이 됐는데 갑자기 교환이 안 된다고?”
카터 방코가 가진 신뢰에 대해 생각해 본다면 오늘 아내에게서 있었던 일은 도무지 설명이 안 되는 것이었다.
“기다려 봐. 내가 가서 이야기를 듣고 올 테니.”
날이 저물고 하루 일과가 끝나야 할 시점.
하지만 오버시어는 다급한 마음에 방코부터 찾아갔다.
찾아간 방코는 이미 그와 같은 이유로 찾아온 영지민들로 인해 난리도 아니었다.
“갑자기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야! 이제까지 잘만 교환해 줬으면서 오늘부터 교환해 줄 수 없다니!”
“당장 이 문 열고 금화로 교환해 줘! 지금 당장 달란트가 필요하다고!”
“문 열어!”
“카터! 카터 이게 무슨 짓거리야!”
카터 방코 앞에는 성난 영지민들이 엄청 많이 있었다.
그들은 저마다 종이로 된 차용증서를 쥐고선 방코 안을 향해 목청 터지라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이게 무슨 일이야?”
“오버시어님.”
“오셨군요, 오버시어님!”
오버시어를 알아본 영지민들이 일제히 그를 향해 예를 갖추기 시작했다.
그는 평민보다 높은 기사 계급이었고, 또한 영지의 치안을 담당하는 핵심적인 인물이었기에 영지민들은 그에게 깍듯이 대하며 안쪽 사정에 대해 전해주었다.
“글쎄 방코에서 이 차용증서가 달란트로 교환이 안 된다고 합니다.”
“저희도 영문을 모르겠습니다. 지난 몇 년간 별문제 없이 달란트로 교환이 됐는데, 이제 와서 교환이 안 된다니 이게 말이나 됩니까?”
“진짜 돌아버리겠습니다. 왜 갑자기 저러고 있는지 이해가 안 됩니다.”
사정 이야기를 들어보니 자신과 같은 이유로 찾아온 이들이 대다수였다.
어느샌가 찾아온 이들이 곱절로 늘어나 있었다.
전부 다 소식을 듣고 부랴부랴 찾아온 영지민들이었다.
“내가 한번 물어보지.”
“오버시어님이 한번 물어봐 주십시오!”
“네, 오버시어님이 한 번 물어봐 주세요! 저희야 이유라도 알아야 할 거 아닙니까?”
“내일 보낼 돈이 급합니다. 정말 급해요!”
오버시어가 카터 방코 앞으로 나서자 그제야 그를 막아서는 사람들이 있었으니, 그들은 단연코 이곳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사람들이었다.
“이곳은 교회의 재산이 안치되어 있는 성역 같은 곳이다.”
오버시어 앞을 막아서는 건 사제들 중에서도 제법 연륜이 있는 자였다.
“그대가 누군진 모르지 않지만, 여기서 소란을 피우려 찾아왔다면 뒤로 물러나 있는 게 좋을 것이다. 이곳에 해를 끼치는 행위는 교회에 해를 끼치는 행위와 같으니.”
세상에나!
고리대금업자를 가장 증오하는 교회 사람들이 오히려 카터 방코를 성난 영지민들로부터 지켜주고 있었다.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에서 오버시어는 어안이 벙벙해짐을 느꼈다.
‘이게 무슨 상황이지?’
사제들이 하는 말을 들어보니 교회 재산이 카터 방코에 있는 모양이었다.
‘어떻게 교회 재산이 여기 있는 거야? 있을 이유가 없잖아? 도통 알 수가 없군.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이렇게나 많은 영지민들이 우르르 찾아왔음에도 불구하고 카터 방코가 지금껏 무사할 수 있었던 것도 전부 다 입구 앞을 지키고 있는 사제들의 힘이 커 보였다.
그게 아니라면 카터 방코는 이미 성난 영지민들로 인해 가게가 풍비박산 났을지도 모를 일.
“크흠!”
제아무리 영지의 치안을 총괄하고 있는 오버시어라지만, 교인을 상대로 함부로 나설 힘은 없었다.
어떻게 보면 영주에게 무례를 범하는 것보다 더 큰 죄가 될 수도 있기에.
그만큼 교회의 힘이 막강했던 것이다.
그러니 자신의 불편한 속내를 감출 수밖에 없는 오버시어가 사정하듯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저야 이 영지의 치안을 담당하는 자이니, 자세한 사정 이야기를 들으러 찾아왔습니다. 제게 말씀하신 대로 이곳은 교회 재산이 있는 곳이라 막무가내로 소란을 피울 생각은 없으니, 사정 이야기를 들어보게 길을 좀 내어주셨으면 합니다. 절대 소란을 피우지 않을 것이라 분명히 약속드리겠습니다.”
정중하게 부탁하는 오버시어를 가볍게 훑어내리던 사제가 마지못해 길을 터주자 뒤에서 아우성치는 영지민들이 저들도 가게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한 발자국 발을 내디뎠으나, 이는 곧 횃불을 든 다른 사제들에게 저지당하고 말았다.
“그대들은 이곳에 들어설 자격이 없다. 전부 한 발자국 물러서 있도록!”
“이곳은 교회의 재산이 있는 성역이다! 성역에서 말썽을 일으킬 참인가!”
“성역에서 멀어져라! 그대들이 감히 소란을 피울 곳이 아니다!”
그렇게 성난 영지민들과 여러 사제들이 가게 밖에서 대치하고 있는 사이.
가게 안으로 들어선 오버시어는 이미 이 일을 예상이라도 한 듯 자리를 지키고 있던 방코 사람들과 또 그들과 함께하고 있던 피터 사제장을 보게 됐다.
“사제장님도 계셨군요.”
“자네 왔군.”
예의상 사세장에게 인사부터 한 오버시어가 곧바로 카터를 향해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카터, 이게 무슨 소란인가?”
“시론 마크님이 아니십니까? 여기까진 어쩐 일로 오셨습니까?”
“내가 찾아온 이유야 뻔하지 않은가? 밖에선 아주 난리야. 대체 왜 이걸 달란트로 교환해 주지 않는다고 하는 겐가?”
“그게 말입니다…….”
대답하기 곤란했는지 카터가 말꼬리를 흐리자 이를 지켜보고 있던 록펠러가 가게의 어둠 속에서 걸어 나오며 목소리를 냈다.
“저희에게 그렇게 흥분하실 필요 없습니다. 이번 일은 저희가 아닌 영주님께서 초래하신 당연한 결과니까요.”
“영주님께서 이 일을 초래했다고? 그게 무슨 말인가? 영주님께서 대체 무슨 잘못을 저질렀다고?”
가게의 어둠에서 완전히 모습을 드러낸 록펠러는 촛불의 빛에 의지하여 자신을 흐릿하게 비추었다.
빛과 어둠.
그 경계선.
그 경계선에 선 록펠러가 말을 이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