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화 평화로운 하늘 아래 넓게 펼쳐진 초원 위.
요새 뒤쪽으로 자리 잡은 용병 캠프에선 따분함과 반복된 일상에 찌든 용병들이 저들끼리 모여 여러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그중에 단연 화두는 그들이 떠날 시기였다.
“여기도 슬슬 뜰 때가 된 거 같은데, 다들 어떻게 생각해?”
한 명이 운을 떼자 주변에 있던 다른 용병들이 빠르게 말을 붙였다.
“맞아. 떠날 때가 되긴 했지. 굳이 아무 일도 없는 이곳에 우리 같은 놈들이 계속 남아 있을 이유는 없잖아?”
“몸이 근질근질하긴 하지.”
“찬성. 진짜 심심하다고. 따분해서 미쳐 버릴 지경이야.”
“뒤지게 심심하긴 하지.”
그러자 한 용병이 코웃음 치며 그런 소리를 한 용병들을 나무라기 시작했다.
그의 기준에선 배부른 소리라 생각한 것이다.
“이봐, 이렇게 죽치고 있는 게 왜 행복이란 걸 모르고 있는 거야? 우리야 따박따박 돈이나 타 먹으면서 평화롭게 대기 타고 있으면 되는 거지 무슨 불만들이 그렇게 많아? 어디 한번 오크와 죽기 살기로 싸워봐야 정신을 차리겠어?”
“그래, 맞는 말이야. 우리가 아무리 전장터에서 굴러먹는 용병들이라고 해도 사람 목숨은 항상 귀한 거라고. 이러고 있는 게 다소 따분하긴 해도 우리한테 제일 좋은 거지. 난 평생 이러고 있다가 죽고 싶다니까?”
둘의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있던 또 다른 용병이 나섰다.
“조금만 쓸모없다 치면 바로 손절 치는 게 우리 용병들 인생인데, 이런 행복도 누릴 수 있을 때 충분히 누리자고. 괜히 심심하다고 엉뚱한 짓거리나 하지 말고 말이야.”
대부분 수긍했는지 고개를 주억이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한 명이 다시 목소리를 냈다.
“그나저나 여기 영주는 돈이 많나 봐? 여기저기서 고용한 용병 부대가 한두 개가 아닐 텐데, 이런 병력을 몇 년씩이나 유지하는 걸 보면 참 대단하긴 해.”
“그것도 변방의 영주가 말이야.”
“맞아. 나도 그 생각했다니까?”
“혹시 여기에 숨은 금광 같은 거 있는 거 아니야?”
“에이 설마. 여기 땅이 뒤진 지 언젠데. 그런 건 아닐 거야.”
“그럼 뭐야? 대체 무슨 돈이 있어서 여기다 돈을 때려 박은 거야?”
“어디서 사업이라도 하는 거야? 교역 같은 거라도.”
“그런 건 아닌 것 같던데.”
모두의 의문이 증폭되려는 찰나, 여기저기서 이야기를 들었던 한 용병이 나서며 그들의 궁금증을 시원하게 풀어주었다.
“내가 여기 있는 시어들에게 들었는데, 다 대출이래. 방코에서 대출받은 돈으로 다 해결한 모양이더라고.”
“대출이라고? 이게 다 대출이라고?”
“그래, 다 대출이래.”
“와, 어마무시한데? 이걸 다 대출로 해결했다고?”
실상에 대해 알게 되자 용병들은 허탈한 표정과 함께 어이없는 웃음까지 흘려주었다.
변방의 영주치곤 영지 방비를 너무 확실하게 해서 영주에게 무슨 대단한 비밀이라도 있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기에 그러했다.
그러면서 모두의 생각은 이것으로 통일되었다.
여기 영주놈은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렇게 큰돈을 덜컥 빌렸을까?
“그런데 여기 영주는 대체 무슨 자신감으로 그렇게나 많은 돈을 빌린 거야? 판을 이 정도로 벌릴 정도면 방코에서 적잖이 빌렸을 거 아니야?”
“그러게 말이야.”
“딱히 무슨 수입원이 있는 것도 아니고. 참…….”
“혹시 지가 영주라서 배짱이라도 부린 건가? 어차피 영주잖아.”
“그럴지도 모르지. 원래 위에 놈들이 더 안 갚는다고 하잖아. 우리보다 더 독한 새끼들이라니까.”
“윗대가리들이 돈을 잘 안 갚는다는 얘기는 나도 들었어. 진짜 더럽게 안 갚는다고 하더군. 어차피 지가 대가리인데 아랫것들이 지랄지랄 해봐야 귀에 들리기나 하겠어? 나라도 무시하겠다.”
대화가 이렇게 되니 용병들은 영주에게 돈을 빌려준 방코가 불쌍해 보였다.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은데 말이다.
“그래도 여기 영주는 영지 사랑만큼은 아주 대단한 사람이야. 그 많은 돈을 들여가면서 저기다 저렇게 큰 요새까지 지어놓은 것 좀 봐. 어이구, 여길 어떻게든 지키려는 영주놈의 의지가 보인다.”
“듣자 하니 황실에선 여길 버렸다고 하는데…… 그래도 용케 버틴 걸 보면 역시 돈빨은 못 이기는 모양이야.”
“그건 그렇지. 황실에서 여길 버리든 말든, 돈만 많으면 무슨 상관이야? 어차피 알아서 해결할 수 있는데.”
“그건 그렇고 여기가 정말 튼튼하긴 해. 저 정도 요새에다가 이 정도 병력 규모면…… 내가 오크라도 쳐다도 안 보겠다.”
“그래서 이렇게 따분한 거잖아.”
“맞아.”
그렇게 한창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는데, 저 멀리서 눈에 익은 자가 뛰어오는 게 보였다.
자세히 보니 그들과 잘 어울려 지내고 있던 동료 용병이었다.
힘껏 달려온 그는 어디서 귀한 소식이라도 물어온 것처럼 숨까지 헐떡이며 무언가를 전해주었다.
“이봐, 소문 들었어? 이제부터 슬슬 철수하려는 모양이야.”
“뭐어? 여기서 철수한다고? 언제부터?”
“오늘부터. 한두 군데씩 순차적으로 철수하는 모양인데, 아까 내가 여기 오버시어와 대장이 하는 얘기를 우연히 엿들었거든. 우리도 곧 떠날 모양인가 봐.”
드디어 올 것이 오고 말았다.
언제까지나 평화로운 영지에 눌러앉아 한가롭게 돈을 벌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모두 어느 정도 예상이라도 했는지 소식을 듣자마자 기쁨과 아쉬움이 묻어나오는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그렇겠지. 전쟁이야 끝나가니까.”
“이런 날이 올 줄은 알았어. 또 다른 일거리를 찾아 신나게 돌아다녀야겠구나.”
대다수 용병들은 현실을 받아들이는 모양새였지만, 누군가는 못내 아쉬운 모양이었다.
“전쟁이 그렇게 쉽게 끝나진 않을 텐데? 벌써 끝났다고?”
“저들 사정이야 우리가 어떻게 알겠어? 몇 개월 전부터 계속 조용했잖아. 이쯤 됐으면 서로 싸울 의지가 없는 거겠지.”
“전쟁이 뭐가 좋다고. 해봤자 서로 감정의 골만 깊어지는 건데.”
“저런다고 드워프나 오크 중에 하나가 완전히 망해버리는 것도 아니고 말이야.”
“그러게 말이야. 그냥 저놈들은 적당히 치고받고, 우리야 이런데 와서 보호 명목으로 돈이나 뜯어먹는 게 최고 아니겠어?”
아쉬웠지만 어쩔 수 없는 일.
그렇게 모두 수긍하고 이제 화두는 이후 일에 맞춰지기 시작했다.
“그럼 여길 뜨기 전에 금화부터 챙겨야겠네. 전부 이걸로 받았었잖아?”
말을 마친 용병이 품에서 종이로 된 차용증서를 꺼내 보였다.
분명 그것은 카터 방코에서 발행된 Gold라 불리는 차용증서였다.
그 차용증서를 보자 주변에 있던 용병들도 자기 몸 여기저기서 그와 비슷한 차용증서를 꺼내기 시작했다.
어떤 이는 가슴에서, 또 어떤 이는 가방에서, 또 어떤 녀석은 사타구니 쪽에서.
그들은 이날 이때까지 제 목숨과도 같은 돈을 몸 어딘가에 숨겨왔던 것이다.
“이게 참 편하긴 해. 금화를 가지고 있었다면 백방 털렸을 텐데.”
“하기사 종이로 됐으니 덜 털린 거겠지. 이렇게 종이로 돼 있으면 어떻게든 숨길 수 있으니까.
“그런데 거기다 숨기면 어떻게 하는 거야? 냄새나게.”
“시끄러워. 남이사 어디다 숨기든 말든 네가 뭔 상관이야? 어차피 이거 받아주는 쪽도 방코 쪽인데. 아니면 네가 교환해 줄 거야?”
“됐어. 가서 방코랑 상의해 봐라. 난 관심도 없으니까.”
말을 마친 용병들이 저마다 꺼낸 차용증서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그러면서 문득 이런 의문이 들었다.
“그런데 여긴 참 이상하단 말이야. 이런 걸 돈처럼 쓰고 있고 말이야.”
바로 특이한 쓰임새였다.
“맞아. 나도 좀 신기했어.”
“처음에 이걸로 급여를 대신 준다고 했을 때 난리 치는 새끼들 많았었잖아? 이딴 게 돈이냐고.”
“그랬었지.”
“그러다 방코에서 쉽게 교환되는 걸 보고 그냥 넘어간 녀석도 있었고.”
“그래도 금화만 고집하는 새끼가 있긴 했었지. 그래서 중간에 털리기도 했지만 큭큭큭!”
“털렸어? 진짜?”
“야, 금화가 간수하기 편하겠냐 아니면 이게 더 편하겠냐? 뻔한 거지. 그냥 지 분수야. 머리가 안 돌아가면 당해야지.”
“그렇긴 한데…… 불쌍한데?”
“냅둬, 우리가 뭔 상관이야. 우리야 이걸 방코에 가져가서 금화로 바꿔가면 그만인데.”
차용증서의 편리성.
정확히는 종이화폐의 편리성에 대해 논하던 그들은, 그들이 지금 누리고 있는 화폐 시스템이 널리 퍼지길 은근히 바라고 있었다.
일단 편했으니까.
“여기뿐만 아니라 이런 게 제국 전체적으로 깔리면 좋겠는데. 우리 같은 사람들이야 금화보다 휴대하기 편해서 좋잖아? 안 그래?”
그러자 한 용병이 그들이 처음부터 가지고 있었지만, 이제는 망각해 버린 그 치명적인 문제점에 대해 언급하기 시작했다.
“야, 그러다 이 종이 쪼가리가 금화로 교환이 안 되면 어쩌려고?”
그 물음에 용병들은 잠시 벙어리가 됐다.
누구 하나 나서서 속 시원히 대답해주는 이가 없었던 것이다.
“에이 설마.”
“야, 거기 방코 튼튼해. 다른 데는 몰라도 거긴 내가 알아.”
대신 그들 대다수는 방코에 대한 강한 믿음으로 최악의 상황을 염두에 두지 않으려는 모습을 보였다.
왜냐?
방코에 금화를 맡긴 사람이 한둘이 아닌데 거기서 문제가 생긴다면 일이 엄청나게 커지기 때문이다.
그러니 아무 문제가 없을 거라 생각하며 오늘 하루도 안이하게 넘기는 것이다.
“거기 가면 100% 교환해 줘. 차용증서 몇 개를 가져가든 무조건 교환해 준다니까? 내가 봤어. 저번에 500달란트나 그 자리서 바로 교환해주는 거.”
“뭐? 500달란트씩이나?”
“그래, 500달란트.”
그들 모두가 방코에 가서 교환할 금화라고 해봐야 채 500달란트가 되지 않았다.
그런데 그 500달란트를 한 번에 교환해 준 방코의 안전성을 굳이 논할 필요가 있을까?
“그럼 아무 문제 없겠네. 500달란트나 그 자리서 교환해 주는 걸 보면.”
“야, 내가 뭐랬어? 거기 안전하다니까. 영주에게 그 정도 돈을 빌려줄 정도면 진짜 큰 데야. 아무 문제 없어.”
그래도 어느 자리든 의심 많은 사람은 항상 있게 마련이었다.
“야, 혹시 알아? 막말로 이거 종이 쪼가리 아니야. 거기서 갑자기 교환 안 해주면 그땐 어쩔 건데?”
하지만 그 우려에도 모두는 고개부터 저었다.
그만큼 이곳 영지에 있는 카터 방코에 대한 신뢰가 두터웠던 것이다.
“그렇게 의심스러우면 너부터 교환해 보던가. 나는 떠날 때 안전하게 교환할 생각이니까.”
“나도.”
“괜히 금화 들고 있어 봤자 엉뚱한 놈에게 털리기나 하지.”
“여기 사타구니 속이 가장 안전하다니까. 다른 덴 몰라도 여긴 절대 못 털어가. 거기다 종이라 여기 숨겨도 티가 안 나요. 진짜 최고야.”
“더러운 소리 그만해라. 거기 아니더라도 숨길 덴 많으니까.”
그들이 가진 카터 방코에 대한 믿음은 그대로였지만, 교환의 번거로움 때문에 그들 중 하나가 한 가지 제안을 했다.
“야, 어차피 철수하는 마당에 이 많은 인원이 한꺼번에 금화로 교환해가면 굉장히 번거로울 거 같은데? 그냥 내일쯤 방코에 가서 미리 금화로 교환해 놓는 게 어때? 나중에 교환할 시간이 없을 거 같아. 여기 인원수도 엄청 많고.”
철수하는 이야기가 돌았으니 이곳에 그리 오래 있지 않을 것이다.
막상 철수가 시작되면 바빠질 것은 당연지사.
한 용병의 제안에 자리에 있던 여러 용병들이 차례대로 수긍하기 시작했다.
“그럼, 내일 가서 교환이라도 해둘까? 어차피 며칠 뒤면 여길 뜰 거 아니야. 쟤 말대로 방코까지 들를 시간이 없을 거 같은데?”
“좋아. 그럼 내일 다 같이 가자고. 어차피 할 것도 없는데.”
“찬성!”
“그래, 그럼 내일 가서 우리들 금화를 가져오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