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화 15. 예금의 탄생(1)
18살.
제국의 풍습에선 성년으로 치부되는 나이.
그 나이에 이르게 되자 록펠러를 더 이상 소년으로 취급하는 어른들은 없어졌다.
방코 주인인 카터는 일찍부터 록펠러를 성인으로 대하며 그를 존중해 주고 있었고, 몬테펠트로 영지 내에서 록펠러의 영향력을 잘 알고 있는 대다수의 영지민들도 카터와 마찬가지 생각으로 록펠러를 일찍부터 성년으로 대우해 주었다.
하지만 나이가 아직 어리다 보니 간혹 록펠러를 어린애 취급하며 무시하던 사람들이 더러 있었는데, 그런 사람들마저도 록펠러가 18살에 이르게 되자 더 이상 그를 소년으로 취급하지 않고 한 명의 어엿한 어른으로 대우해 주기 시작했다.
이렇듯 록펠러가 완전히 어른 대접을 받기 시작한 것도 불과 1개월 전의 이야기였다.
해가 넘어가면서 성년인 18살이 되었으니까.
‘눈이 내리네.’
가게 안에서 조용히 무언가를 읽어가던 록펠러가 잠시 고개를 들어 창가 쪽을 바라보았다.
겨울이 된 거리 위엔 새하얀 눈꽃이 평화롭게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앤드류가 떠난 지 벌써 2년이나 지났었나? 시간 참 빠르네.’
방코에 취직한 지 벌써 3년이란 시간이 지나갔다.
그사이 많은 일들이 있었고, 그중에 가장 큰 일은 둘째 앤드류가 나름의 큰 꿈을 안고 황도로 떠난 일이었다.
사관학교를 졸업하여 군인이 되고자 했던 앤드류는 2년 전 제국의 수도인 황도로 떠나게 됐고, 오늘 이날까지 정기적으로 록펠러와 가족들에게 안부 편지를 보내왔다.
그리고 지금 록펠러 손에 들려 있는 편지가 바로 둘째 앤드류가 보낸 안부 편지였다.
창가에 잠시 시선을 뺏겼던 록펠러는 다시 고개를 내려 한 번 읽었던 동생의 편지를 다시 읽기 시작했다.
록펠러 형님, 안녕하십니까?
집안의 가장이자 큰형님께 이렇게 편지를 올리는 것은 제 기쁨이자 당연한 의무입니다.
형님과 어린 동생들이 있는 몬테펠트로 영지를 떠난 지 벌써 2년이란 시간이 흘렀군요.
떠나고 나서도 형님께는 항상 미안한 마음뿐이었는데, 그 미안한 마음을 따로 보답할 기회가 없어 매일 같이 죄지은 죄인마냥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습니다.
다만 형님께서 말했듯이 사관학교 생도로서 잘 지내고 졸업하는 것이 그나마 형님께 진 빚을 갚는 길이라 생각하여 매일같이 힘든 훈련에도 착실히 임하고 있습니다.
생도로서의 삶은 무척 고되면서 항상 제 한계에 대해 알게 되는 좌절의 연속이기도 하지만, 그런 위기의 순간마다 고향 땅에서 집안을 굳건히 지키고 계시는 큰형님과 어린 동생들을 생각하여 절대 굴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래야 형님께 조금이나마 보답하는 길이 아니겠습니까?
사랑하는 록펠러 형님.
갑자기 이런 말을 꺼내게 돼서 죄송하지만, 형님께서 매달 보내주시는 학비와 생활비는 사실 조금, 아니, 좀 많이 과한 느낌이 있습니다.
제가 사관학교 생도가 되어 정말 여러 계층의 사람들을 만나보고 느낀 것이지만, 평민 신분으로 누릴 수 있는 한계라는 게 분명 있습니다.
하지만 형님께서 매달 보내주시는 돈을 생각해 보자면 제가 과연 평민이 맞을까? 하는 의문이 절로 들 정도로 보내주시는 돈이 너무 많습니다.
제가 스텔라 아가씨보다 용돈을 더 많이 받고 있다고 하면 형님께선 믿으시겠습니까?
정말로 그렇습니다.
그 정도로 큰형님의 사랑이 과분하다는 이야기입니다.
그 사랑을 조금만 줄여주셔도 저는 충분히 행복할 것 같습니다.
(중략)
철부지 조슈아와 말수가 적은 레오도 가끔 그리울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예쁜 막둥이 루시아도 잘 지내고 있겠지요?
루시아도 이젠 9살이 소녀가 되어 예전처럼 너무 걱정할 필요도 없어 보입니다.
형님과 동생들 모두 그립습니다.
이번 학기가 끝나게 되면 스텔라 아가씨와 함께 고향으로 돌아가 형님과 동생들을 보고 싶습니다.
그때까지 몸 건강히 안녕히 계십시오.
그렇게 재차 편지를 읽은 록펠러가 묘한 표정으로 잠시 생각에 잠겼다.
“흠…….”
둘째 앤드류가 먼 타지에서 잘 지내고 있다는 것은 분명 좋은 일이었다.
문제는…….
‘돈을 전혀 쓸 줄 모르네.’
매달 쓰는 생활비를 쓸데없이 많이 보낸 이유는 앤드류를 챙겨주기 위함도 있었지만, 그것 외에도 돈을 어떻게 다루고 써야 하는지 학습시키고자 하는 차원에서 보낸 것도 있었다.
‘굴릴 자신이 없으면 차라리 여러 계층의 사람들과 만나면서 좀 친해지든가. 사관학교면 분명 귀족도 있을 거고 아니면 황실 사람도 있을 텐데, 그런 인연 좀 만들면 좀 좋아? 특히나 그런 학창시절의 인연은 어디서 돈 주고도 못 사는 건데.’
어차피 돈이란 건 어딘가에 쓰기 위함이었다.
푼돈 따위를 묵히고 아껴봤자 썩기밖에 더하겠는가?
물론 흥청망청 다 써버리는 것보단 돈을 아끼고 사는 게 더 나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록펠러 관점에선 푼돈은 절대 아끼는 게 아니었다.
돈을 아끼는 것도 아낄 돈을 아끼는 것이지, 새 발의 피가 되는 돈이라면 차라리 다른 식으로 이익되게 하는 게 훨씬 나았으니까.
‘얼마 되지도 않는 돈이니 어떻게든 쓰라고 해야겠어. 어디에 투자를 하든, 아니면 누굴 만나는 데 쓰든. 어떤 식으로든 써야 뭐라도 남는 거지 그냥 열심히 훈련만 받다가 군인이 되어 돌아오면 뭐라도 남는 줄 아는 모양이야.’
그런 생각이 들자 록펠러는 앤드류에게 제 생각을 담은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참 동안 편지를 써 내려가던 록펠러는 문득 또 다른 문제를 떠올리게 됐다.
‘조슈아 말대로라면 사관학교 간 이유가 그 영주 딸 때문인데…….’
스텔라 드 몬테펠트로.
록펠러 역시 그녀를 모르는 건 아니었다.
영주가 진 빚 때문에 자신을 찾아온 당돌한 아가씨였으니까.
‘설마 아직도 영주 딸에게 감정이 있으려나?’
영주 딸과는 얽혀서 좋을 게 없었다.
어차피 영주는 자신이 빚으로 깔려 죽게 할 생각이었으니까.
단순히 빚 문제라면 서로 원수까진 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영주는 록펠러를 두려워할 공산이 컸다.
영주야 빚쟁이 채무자였고, 록펠러야 그에게 돈을 받아야 하는 채권자였으니까.
하지만 록펠러가 영주가 남긴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면 영주와 록펠러 사이는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자기 자리를 뺏긴 영주가 로스메디치 집안에 절대 호감을 갖지 않을 테니까.
그런데 그런 자의 딸과 자신의 동생이 서로에게 감정이 있다?
‘둘이 정확히 어떤 관계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다지 내키진 않는군.’
물론 같은 고향 출신이니 사관학교 안에서 서로 친하게 지낼 수는 있었다.
다만 그런 관계가 좀 더 깊은 감정으로 발전되는 걸 록펠러는 원치 않고 있었다.
‘저번에 떠보기 식으로 물어보긴 했었는데…….’
영주와 사이가 틀어질 것을 우려했기에 록펠러는 이전 편지에서 영주 딸과는 절대 친해져서는 안 된다는 편지를 앤드류에게 보내긴 했었다.
물론 그 이유에 대해서 앤드류도 모르진 않았다.
전부 다 설명해 놨으니까.
‘이번에 다시 물어봐야 하나? 이제 앤드류도 다 컸으니 확실히 말해주겠지. 영주 딸에게 감정이 있는지 없는지.’
가장 좋은 시나리오는 앤드류의 시야가 넓어져 영주 딸이 아닌 다른 여자와 눈이 맞는 일이었다.
그게 영주 딸처럼 어느 귀족 영애라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일.
‘그랬으면 참 좋겠는데…….’
하지만 록펠러의 생각대로 되기는 어려웠다.
앤드류는 아직 평민 신분이었고, 앤드류가 편지에 썼던 것처럼 평민으로서 누릴 수 있는 한계는 분명 존재했으니까.
‘앤드류가 다른 귀족 영애와 엮이려면 우선 내가 영주가 되는 게 우선일 거야. 그게 선행되어야 앤드류도 평민의 굴레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귀족 영애도 만날 수 있는 거니까.’
몬테펠트로 영지를 차지하기 위해서 3년 전부터 실행되어왔던 원대한 계획은 이제 슬슬 빛을 보고 있는 중이었다.
‘내가 생각해 뒀던 지점까지 거의 다 왔어. 이제 마지막 한고비만 잘 넘기면 돼.’
마지막 한고비.
그것은 바로 끝나가는 토템전쟁이었다.
‘여기서 전쟁이 끝나게 되면 이곳에 있는 다수의 용병들이 본래 있던 지역으로 돌아가게 될 거야.’
영지 방비에 쓰이고 있는 대부분의 자금들은 영주가 카터 방코에서 가져온 두 종류의 차용증서가 맡고 있었다.
IOU와 Gold의 차용증서.
이 두 개의 차용증서가 마치 ‘돈’처럼 영지 방비에 쓰이고 있는 것이다.
‘정확히는 우리가 찍어낸 가짜 돈이지. 사람들은 웃기게도 그 차용증서에 쓰인 금화가 전부 여기에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그게 아닌데.’
영주는 영지 방비를 위해 ‘진짜 돈’을 쓰고 있는 게 아니라 카터 방코에서 만들어낸 ‘가짜 돈’을 쓰고 있었고, 그 ‘가짜 돈’이 용병들 사이에서 ‘진짜 돈’처럼 쓰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 ‘가짜 돈’은 언젠간 ‘진짜 돈’으로 바뀌어야만 했다.
‘전쟁이 끝나게 되면 용병들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차용증서를 전부 달란트로 환전해가길 원할 거야. 우리 가게에서 발행한 Gold 차용증서가 대륙 어디서든 쓸 수 있다면 굳이 교환해갈 필요가 없겠지만, 아쉽게도 그들이 가지고 있는 차용증서는 오직 이 지역에서만 한정되어 쓰이는 거니까. 그러니 무조건 달란트로 환전해가길 원하겠지.’
만약 용병들이 카터 방코에 찾아와 금화로 교환하는데, 카터 방코에서 그만한 금화가 없어 문제가 생긴다?
그런 문제가 생긴다면 자칫 뱅크런이라 불리는 대형 사고가 터질지도 모를 일이었다.
‘뱅크런이 나면 다 끝장이지. 이제까지 그만한 금화도 없이 오로지 신용만으로 버텨왔는데, 뱅크런은 그 신용이 완전히 무너진다는 소리니까.’
하지만 록펠러가 두려워하는 뱅크런도 카터 방코의 신용과 신뢰가 전부 무너졌을 때 생기는 일이었다.
이것은 다르게 보면 카터 방코의 신용과 신뢰가 건재하다면 뱅크런은 피할 수 있는 소리였다.
‘용병들이 교환해서 가져가는 금화야 어쩔 수 없을 거야. 그들에겐 여기 차용증서가 필요 없으니까. 중요한 건 그 과정에서 우리 신용에 문제가 생기면 안 된다는 거지.’
뱅크런이 일어나는 것도 전부 다 신용의 문제였다.
만약 사람들의 인식 속에서 카터 방코는 튼튼하다는 생각이 지워지지 않는다면 영지 사람들은 굳이 제 금화를 찾기 위해 방코에 찾아와 ‘가짜 돈(차용증서)’을 ‘진짜 돈(달란트)’으로 바꿔가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카터 방코는 이제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모두를 허공에서 찍어낸 가짜 돈으로 기만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그 기만을 계속 이어나갈 수 있다면…….
‘지금보다 더 큰 부자가 되겠지.’
우선 카터 방코의 건전함을 알리기 위해선 곧 찾아올 대규모 교환 사태에 대비하여 충분한 양의 금화를 미리 확보해 놔야만 했다.
그래야 사람들의 인식 속에서 카터 방코의 안정성은 굳건해질 테니까.
‘그래서 당장 해결할 문제는 곧 찾아올 대규모 교환 사태에 대비하여 필요한 양의 금화를 미리 수급해 놓는 일인데.’
언제나 그렇듯.
록펠러에겐 항상 계획이 있었다.
‘그것도 다 생각해 놨었지.’
방코의 다음 단계라 할 수 있는 은행은 항상 튼실하고 또 규모가 커야만 했다.
‘굴리는 자금이 클수록 이런 사태에 유용하게 대처할 수가 있는 거니까.’
그리고 굴리는 자금이 크다면 그에 따른 이자 수익도 당연히 클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우리 카터 방코를 이용하는 사랑스러운 고객님들께 매달 3퍼센트의 이자를 내어주는 것도 충분히 가능한 일이지.’
왜냐고?
‘대출 이자’는 항상 ‘예금 이자’보다 많았으니까.
이 순간 록펠러는 제 입가가 길게 휘어짐을 느꼈다.
‘이제 슬슬 덩치 좀 키워볼까? 제대로 놀아보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