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화 14. 전쟁은 누군가를 살찌운다(4)
자신이 모르고 있는 그녀가 말한 그 사람이란 건 대체 누굴까?
“그 사람이라 하시면?”
“기억 안 나? 우리가 예전에 여기 처음 왔을 때 만났었던 방코 소년 있잖아. 새 차용증서로 우릴 아리송하게 만들었던 그 사람.”
제이슨은 빠르게 기억해 냈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이렇게 기억해 내지도 못했을 것이다.
“아, 그 평민 소년 말입니까?”
“기억나지? 그 사람 말이야. 왠지 그 사람은 알 거 같거든.”
1년이 지난 지금도 그녀는 그가 남긴 강렬한 인상을 아직까지도 잊지 않고 있었다.
평민 주제에 감히 영주를 상대로 빌려준 돈을 받아낼 수 있다고 자신 있게 말하던 소년.
“그냥 내 느낌이 그래.”
제이슨은 눈가를 좁히며 그녀가 말한 소년에 대해 생각해 봤다.
하지만 그녀 같은 느낌은 받지 못했다.
그에게 있어 그 소년은 그저 방코에서 일하는 어린 조수에 불과했으니까.
“제 느낌에선 별로 그럴 것 같지는 않지만, 금화 교환을 위해 방코에 들러야 하니 우선 방코로 가시죠, 아가씨.”
대화를 마친 둘은 정말 오랜만에 방코로 향했다.
그동안 일이 없어 들르지 않았던 방코였다.
“어서 오…… 세요.”
가게에 있던 록펠러는 찾아온 두 손님을 빠르게 알아보았다.
그들을 못 알아보는 건 록펠러에게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둘은 마법사였고, 거기다 한 명은 후에 소설 속 주인공과 엮이게 될 여러 히로인 중 하나였으니까.
‘요새에서 돌아온 건가?’
“또 뵙게 되네요. 한 1년 만에 다시 찾아오신 거 같은데.”
록펠러는 둘이 무슨 이유로 찾아왔는지 빠르게 생각해 봤다.
‘혹시 계약 기간이 끝난 건가?’
빠르게 머리를 굴려보니 거기까지 생각이 닿았다.
현재 돈이 없는 영주에게 두 마법사에게 지급할 대금 따윈 없었을 것이다.
이자 갚기도 벅찰 테니까.
그럼 최근부터 예쁜 짓을 하고 있는 영주가 그들에게 어떤 식으로 대금을 지급했는지는 안 봐도 뻔했다.
허공에서 찍어낸 ‘가짜 돈’.
자신의 신용을 담보로 발행된 종이뿐인 차용증서를 아마 약속한 대금으로 지급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차용증서가 필요 없는 마법사들은 방코에 들러 ‘진짜 돈’으로 바꾸길 원했을 것이고.
‘그럼 여기까지 온 이유야 뻔하겠지.’
“무슨 일로 오셨나요?”
록펠러의 물음에 두 마법사 중 먼저 나선 건 제이슨이었다.
“방코 소년, 오랜만이다.”
그의 투박한 인사에도 록펠러는 다시 한번 고개를 숙여 그들에게 예를 보였다.
둘이 마법사이기도 했지만, 다른 한쪽이 소설 속 히로인이기에 더 예의를 차린 것도 있었다.
“그때 그대가 이름을 말했던 것 같은데. 이름이…….”
“록펠러 로스메디치.”
제이슨은 기억하지 못하는 그의 이름을 기억력 좋은 그녀는 아주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머리가 좋은 탓도 있었지만 그때 남았던 강렬한 인상이 그의 이름을 기억하게 되는 계기가 되어준 것이다.
“제 이름을 기억하고 계셨군요. 감사합니다.”
자신의 이름을 기억해 준 그녀에게 록펠러가 고마움의 표시로 다시 한번 고개를 숙이니 제이슨이 무안했는지 헛기침부터 터뜨려주었다.
“크흠! 그래, 록펠러 로스메디치. 가게에 볼일이 있어 찾아왔다.”
방코에 있어 봤자 지옥에 갈 녀석들과 엮이는 기분인지라 제이슨은 빠르게 일을 보고 떠날 생각이었다.
그는 마주 보고 있던 록펠러에게 성큼성큼 다가가 영주에게 받아온 차용증서를 꺼내 보였다.
“이걸 금화로 바꿔줬으면 한다.”
“그 말은, 여길 떠나시는 건가요? 아직 전쟁은 끝나지 않았을 텐데요?”
록펠러의 걱정스러운 물음에 제이슨은 무표정한 얼굴로 감흥 없이 대꾸해 주었다.
“우리가 영주와 약속했던 시간이 끝났다. 더 이상 머무를 이유가 없으니 이제 떠나는 것이다.”
“그런가요?”
마법사의 존재는 이곳 영지를 보다 안전하게 만드는 일종의 보험 같은 느낌이었다.
그들이 떠난다고 하니 록펠러는 아쉬운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두 분이 떠나셔도 여긴 별문제 없겠죠?”
“그거야 우리가 알 바는 아니지.”
가문의 사냥개답게 매정하게 답해주었으나,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그는 소년이 원하는 답으로 다시 바꿔주었다.
“하지만 영지 방비가 워낙 튼튼하여 네가 생각하는 일은 없을 거다.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소년.”
이름 대신 소년이라 말하는 그에게 록펠러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사냥개 출신이라 그런지 사람이 쌀쌀맞긴 하네. 뭐 어때? 이 사람이야 어차피 쩌리고 진짜는 뒤에 있는 저 여자인데.’
1년 사이 나이트로드 이자벨라는 크게 성장해 있었다.
여기서 말한 성장은 육체적인 부분이었다.
그녀의 정신적, 마법적 실력은 이 자리서 알 수 있는 부분이 아니었으니까.
‘쟤도 그 사이에 많이 크긴 컸네. 하긴 저 나이면 한창 발육할 때니까.’
나이트로드를 힐끗 쳐다봤던 록펠러가 다시 제이슨에게 시선을 옮기며 살가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우선 가져온 차용증서부터 확인해 볼게요. 두 분께서 가져온 거라 큰 문제는 없을 테지만 그래도 확인은 필요하니까요.”
가져온 차용증서를 확인하는 과정은 빠르게 끝마칠 수 있었다.
늘 받던 것이었고, 영주의 인장은 눈에 들어올 만큼 큼지막하게 찍혀 있었으니까.
“영주님께서 써주신 게 맞네요.”
이 와중에 제이슨은 노파심이 생겨 록펠러에게 쓸데없는 걸 물어보았다.
“금화로 교환하는 데 문제는 없겠지?”
제이슨이 볼 땐 이곳 영주는 제 힘만 믿고 너무 막 나가고 있었다.
차용증서라 하면 일종의 빚문서였다.
언젠간 그만큼의 돈을 갚겠다는 그런 내용의 문서인데, 이곳 영주는 그것을 너무 생각 없이 발행하고 있었고, 이는 언젠간 문제를 일으킬 것이다.
여기서 제이슨이 걱정하는 것은 그 문제가 되는 시기가 대체 언제냐는 것이었다.
당장 문제가 생겨도 전혀 이상할 게 없어 보였지만, 아쉽게도 그가 생각하는 문제의 시기는 지금 당장은 아닌 것으로 보였다.
“네, 바로 교환해 드릴게요. 그런데 전부 금화로 바꿔가실 건가요?”
‘적당히 바꿔가라. 어차피 너희들도 번거롭잖아.’
전부 금화로 바꿔가기엔 금화의 양이 상당히 많기는 했다.
그래서 제이슨은 당장 필요한 금액만 금화로 교환하고 나머지는 타 지역에서 쉽게 교환할 수 있는 보다 신뢰 있는 ‘다른 차용증서’로 바꿔가기로 했다.
“그중에 일부만 환전해 주고 나머진 타 지역에서 사용 가능한 다른 차용증서로 바꿔줬으면 한다. 리옹 길드나 블랙라벨 유니온이 보장해 주는 다른 차용증서면 좋겠구나.”
대답을 들은 록펠러는 속으로 웃을 수밖에 없었다.
“당연히 그렇게 해드려야죠. 당장 필요한 금화는 어느 정도세요?”
“100달란트 정도.”
“네, 그럼 100달란트랑 나머지 금액은 다른 곳의 차용증서로 바꿔 드릴게요. 잠시만 기다리세요.”
말을 마친 록펠러가 가게 안쪽으로 사라지자 자리에 남은 제이슨이 뒤에 있던 이자벨라에게 조용히 시선을 주었다.
“아직까진 별문제가 없나 봅니다.”
이자벨라 역시 의외라는 눈빛이었으나, 어차피 그들이야 자기 금화만 잘 챙겨서 떠나면 되는 사람들이었다.
이후 이 영지에서 무슨 일이 생기든 그들과는 전혀 관계없다는 소리.
“그런가 보네.”
“네, 그럼 교환부터 하겠습니다 아가씨.”
“응.”
록펠러가 금화 주머니를 가지고 나와 그들 앞에 내어주었다.
“여기요. 전부 해서 100달란트예요.”
무게가 꽤 나가는 금화 주머니였으나, 자신만의 아공간에 무언가를 담을 수 있는 마법사에겐 별문제가 되지 않았다.
제이슨은 마법을 통해 금화 주머니를 공중에 띄워낸 뒤 자신만의 아공간에 옮겨 담았다.
특정한 아공간을 유지하는 것도 나름 마력이 소모되는 일이었다.
아공간에 보유하고 있는 물건의 개수와 그 무게가 많이 나갈수록 소모되는 마력 또한 많았으며, 그러한 이유로 제이슨은 당장 쓸 금화만 교환했던 것이다.
나머지 금화들이야 여기서 받은 또 다른 차용증서로 다른 영지에 있는 방코에 가서 교환하면 그만이었으니까.
‘여기서 확인하려고 했던 것은 영주가 준 차용증서가 효력이 있냐 없냐는 거였지.’
“수고했다 소년.”
말을 마친 제이슨이 금화 주머니를 챙겨 떠나려고 하자 전처럼 자리에 가만히 남아 있는 이자벨라가 록펠러를 향해 입을 열기 시작했다.
“평민, 이름이 록펠러라고 했지?”
그녀의 관심에 자리에서 떠나려던 제이슨이 잠시 걸음을 멈추고 그녀에게 시선을 흘렸다.
‘또 이러시는군.’
새삼스러울 것도 없었다.
궁금한 게 있다면 이 자리서 풀고 가는 것도 나쁘지 않았으니까.
다만 그가 다소 껄끄럽게 생각하는 것은 그녀가 지금 이 자리서 관심 갖는 분야가 마법이 아닌 돈놀이와 관련된 금융이었기 때문이다.
금융은 마법보다 고상하지도 않고 오히려 저급한 지식이었으니까.
‘내 바람에선 적당히 묻다 끝내셨으면 좋겠군. 굳이 아실 필요도 없고 말이야.’
제이슨은 여기서 후에 일어날 일에 대해선 눈곱만큼도 관심이 없는 상태였다.
그게 자신과 무슨 상관이오, 또 무슨 득이 있겠는가?
하지만 그녀는 궁금한 게 참 많은 사람이었다.
“네, 맞습니다. 제 이름까지 기억해 주시는군요, 아가씨.”
“하나 묻고 싶은 게 있는데.”
“말씀하십쇼. 듣고 있습니다.”
그녀는 눈가를 살짝 좁혔다 이내 자신이 궁금하던 것을 솔직하게 물어보았다.
“우리야 이 거래가 끝났으니 더 이상 이 영지에 볼일이 없지만, 내가 볼 땐 추후에 그대에게 큰 문제가 생길 것 같은데…… 여기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지?”
그 물음에 록펠러는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했다.
“문제요? 무슨 문제를 말하시는 거죠?”
저번에도 괜히 히로인 앞이라고 쓸데없이 말만 늘렸다가 손해만 봤기에 이번엔 아주 조용히 넘어갈 요량으로 록펠러가 모른 척을 하자 그녀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약간 실망한 기색이었다.
“어떤 문제인지 그대가 잘 알 텐데?”
“저는 무슨 문제가 있다고 하시는지 잘…….”
“그 차용증서. 영주가 제 신용만 믿고 써준 그 차용증서. 거기서 아무 문제가 생기지 않을 거라 생각하느냐?”
“네, 당연하죠. 영주님은 하늘이잖아요? 하늘이 써준 차용증서에도 문제가 생기나요?”
“영주가…… 하늘이라고?”
“네, 하늘이요. 하늘같은 영주님인데 무슨 문제가 생길까요? 아무 문제 없어요.”
“그래?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느냐?”
“네! 당연히 그렇게 생각하죠.”
쓸데없는 대화가 늘어지는 것 같지만 그녀는 정안의 소유자였다.
그녀의 마안엔 록펠러의 검은 속내가 뻔히 보이고 있었다.
다만 그 부정한 속내가 정확히 어떤 것을 뜻하는지 알지 못했다.
방코 조수이기에 당연히 가지는 탐욕인지, 아니면 그 일에 다른 속내가 있는지.
전혀 알 수 없다는 말.
“아가씨. 전에도 말씀드렸다시피…….”
제이슨이 나서서 그녀를 회유하려 하자 그녀가 먼저 눈치채고 손을 들어 그의 입부터 막았다.
그때와 다르게 그녀는 나름 성장해 있었다.
자신의 정안이 어떤 힘을 가지고 있고, 또 어떤 한계를 가지고 있는지 명확히 알고 있었다.
그래서 쓸데없이 나서려는 그의 입을 먼저 닫게 한 것이다.
그녀의 신호를 받고 입을 다문 제이슨이 표정을 살며시 구겼다.
‘시간만 축내는군. 별 의미 없는 일로.’
같이 온 제이슨이 무슨 생각을 하든.
그녀는 여기 온 목적을 확실히 하고자 했다.
“솔직히 말해서 내가 본 그대의 모습은 전혀 솔직하지 못하다. 이는 내 마안으로 충분히 알 수 있는 일이야.”
그녀가 정안의 한계를 명확히 아는 것처럼, 록펠러 역시 그녀가 가진 힘의 한계를 정확히 알고 있었다.
‘알아. 그래서 주인공 속마음도 못 읽어냈잖아. 그딴 어설픈 걸로 뭘 알 수 있다고.’
“솔직이요? 글쎄요. 전 그냥 제 생각대로 말했을 뿐인데.”
능구렁이 같이 넘어가는 말에 이자벨라가 오히려 웃어 보였다.
“그렇게 말할 줄 알았다. 여기까지 오면서 그대가 어떻게 말할지 대충 생각해 봤는데, 분명 그렇게 말할 거라 예상했었으니까.”
그녀는 제 안에서 답을 찾았는지 고개를 끄덕이며 시선을 그대로 둔 채 몸을 반쯤 돌렸다.
마치 떠나려는 모습을 취하자 록펠러가 눈가를 살며시 좁히며 그녀를 예의주시했고, 그녀는 떠나기 전 마지막 말을 남겨주었다.
“내 촉이 맞다면 그대는 감춰둔 속내처럼 영주에게 빌려준 돈을 어떻게든 받아내겠지. 그렇게 되면 여기 영주는 힘을 잃게 될 것이고 그대는 지금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다른 사람이 되어 있을 것이다. 그게…… 귀족일지도 모르겠네.”
역시 히로인답게 바보는 아닌 모양이었다.
록펠러가 속으로 웃었을 때 그녀가 끊었던 다시 말을 이어주었다.
“하지만 그게 아니라면 그대는 한순간 거지가 될 것이다.”
그렇게 두 가지 상황을 가정한 그녀가 막판엔 의미심장한 미소를 날려주었다.
“훗날 이곳에 다시 올 기회가 있다면 그대가 어떻게 됐는지 알 수 있겠지. 어떤 식으로든 결과는 나와 있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