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화 14. 전쟁은 누군가를 살찌운다(3)
몬테펠트로 영지 밖에서 일어난 두 세력 간의 전면전.
토템전쟁은 그 누구의 승리도 아닌 채 점차 소강상태에 접어들고 있었다.
1년이 넘는 시간 동안 몬테펠트로 영지의 방비는 굳건했고, 이로 인해 레드스킨의 침략과 야만적인 약탈 행위는 사전부터 미리 차단될 수 있었다.
거기다 국경 근처에 지어진 거대한 요새의 존재는 레드스킨의 관심을 꺼뜨리는 데 크게 일조했으며, 외세의 침략으로부터 영지를 지키는 훌륭한 방파제 역할을 수행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아가씨, 오늘까지입니다. 체스터 영주와 계약했던 기간이 말입니다.”
1년이 넘는 시간 동안 몬테펠트로 영지에 머물며 수많은 오크들의 침입을 저지시켰던 싱클레어의 마법사이자 훗날 나이트로드가 되는 이자벨라의 스승이었던 제이슨이 최근 1년간 몰라보게 성장한 이자벨라를 향해 말을 이었다.
“약속했던 시간이 끝났으니 더 이상 여기 일에 간섭할 이유도 사라졌습니다. 저희의 책임도 딱 여기까지인 겁니다.”
“시간 참 빠르네.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된 거야?”
“네, 그렇게 됐군요.”
“조금 아쉽네.”
“아쉬울 게 뭐 있겠습니까? 오히려 전 이곳에서 해방되어 홀가분한 기분입니다. 전 전장의 피비린내를 그렇게 좋아하지 않거든요. 지겹도록 맡아봐서.”
평화에 젖은 요새 안을 살피며 이자벨라는 잠시간 감상에 젖어들었다.
“그동안 나도 모르게 여기에 정이 들었나 봐. 여길 떠난다니까 조금 그렇네.”
그녀가 남긴 아쉬움에 제이슨은 고개부터 저었다.
그녀가 이런 변방에 아쉬움을 느낄 만큼 세상은 그렇게 비좁지 않았던 것이다.
분명 대륙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다보면 이곳보다 더 좋은 곳이야 많이 있을 테고, 제이슨은 그녀가 이런 곳보다 더 평화로운 곳에 정들기를 바라고 있었다.
“아가씨, 세상은 생각보다 넓습니다. 여기저기 돌아다니시다 보면 이곳보다 더 좋은 곳도 분명 있을 겁니다. 정을 붙이시려면 차라리 그런 곳에 붙이십쇼.”
“알아. 그냥 해본 소리였어.”
정들었던 요새를 떠나기 전.
이자벨라는 그동안 있었던 여러 일들을 잠시 떠올려보았다.
평온과 지루함이 연속이던 어느 늦은 밤.
요새 안으로 소리 없이 잠입한 붉은 오크들이 있었다.
침입한 오크들이 함성을 부르짖고 요새를 점거하기 위해 육중한 무기를 휘두르기 시작했다.
이어지는 소란 속에서 마력을 개방한 그녀가 어둠의 마법으로 붉은 오크들을 옥죄었고, 그사이 빠르게 반격하는 요새 안 용병들과 영지의 시어들이 겁도 없이 침입한 붉은 오크들을 막아서며 가까스로 요새를 지켜낼 수 있었다.
다음 날, 레드스킨의 습격에도 살아남은 사람들은 역시나 싱클레어 마법사라며 그녀를 추켜세웠고, 그녀는 자신의 힘으로 모두를 지켰다는 사실에 나름 뿌듯함을 느낄 수 있었다.
‘위험했던 순간도 많았어.’
또 어떤 날은 하운드 용병대와 함께 주변 정찰을 나갔다가 레드스킨에서 ‘등뼈 분쇄자’라 불리는 오크족 영웅과 마주친 적이 있었다.
오우거보다 작은 체구였지만 사람의 머리 따윈 한 주먹에 뭉개버릴 정도로 우락부락한 괴물 오크.
자칫 잘못하면 정찰대 전원이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아주 위험한 순간이었지만, 노련한 제이슨의 재치로 그녀를 포함한 정찰대 다수가 무사히 도망칠 수 있었고, 그 사건 이후로 그녀는 자신이 많이 부족하다는 것을 절실히 깨달을 수 있었다.
‘여러모로 기억에 남는 곳이 될 것 같아.’
이처럼 몬테펠트로 영지는 그녀의 성장에게 있어 매우 중요하고 특별히 기억에 남을 만한 곳이었다.
‘좀 더 있고 싶은데…… 그럴 순 없겠지.’
하지만 일개 귀족도 아닌 대가문 출신인 그녀가 변방의 땅에 너무 오래 있을 이유는 없었다.
제이슨도 이를 고려하여 적당한 시기에 떠나기로 영주와 합의를 봤었고, 그날이 바로 오늘이었다.
“가시죠, 아가씨. 이곳 영주도 저흴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그들은 떠나기에 앞서 영주 체스터와 만나보기로 했다.
영주에게 받아야 할 대금이 있기도 했지만, 영지 주인과 인사를 나누고 떠나는 건 나름의 예의였기 때문이다.
도착한 영주성.
영주는 떠나는 두 마법사의 노고를 치하하기 위해 성대한 연회를 열어주었고, 이를 가볍게 즐긴 두 마법사는 곧바로 영주와 독대하게 됐다.
“하하, 그동안 수고 많으셨습니다. 두 분의 활약이야 정말 귀가 닳도록 많이 들었었죠. 수고 많으셨습니다.”
영주는 약속했던 대금을 지불하기 위해 그들에게 차용증서를 건네주었다.
그것은 영주가 직접 발행한 차용증서였다.
그러자 큼지막한 금화 자루를 예상했던 제이슨과 이자벨라는 당혹감을 감출 수 없었다.
기대했던 대금의 형태가 전혀 다른 것이었기에 그러했다.
“이게…… 뭡니까?”
당황한 제이슨이 묻자 영주가 이를 보고 더 놀라는 눈치였다.
“뭐냐니요? 처음에 약속했던 대로 드릴 대금입니다. 혹시 액수가 틀렸습니까?”
“이건…… 그냥 당신의 차용증서가 아닙니까?”
“아, 갑자기 왜 그러신가 했더니 이것 때문이었군요.”
영주는 걱정 없는 표정으로 말을 이어주었다.
“이걸 가지고 여기에 있는 방코에 가시면 전부 금화 자루로 바꿔 드릴 겁니다. 만약 금화 자루가 번거로우시다면 리옹 길드에서 보장하는 다른 차용증서로 대체해서 가져가시면 되겠군요. 아무 문제 없는 차용증서니 그렇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굳이 금화 대신 차용증서로 주는 이유가 있는 겁니까?”
“금화 자루야 가져가기 번거롭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저는 두 분을 배려하는 마음에서 이 차용증서를 드린 겁니다.”
꽤나 무게가 나가는 금화 자루가 번거롭다는 건 두 마법사도 지극히 공감하는 부분이었다.
하지만 지금 영주가 건넨 차용증서는 예전에 그들이 한 번 지적도 했을 만큼 문제가 있는 차용증서였다.
‘저 사람 신용으로 발행된 차용증서라…… 이게 아직도 문제를 안 일으키고 있는 건가?’
영주의 신용이 거뜬하다면 아무 문제 없는 차용증서이기도 했다.
하지만 두 마법사가 생각해 봤을 때, 이곳 영주의 신용은 그렇게 탄탄하지 못한 것으로 보였다.
그동안 영지 방비를 위해 쏟아 부었던 돈이 그만큼 많았던 것이다.
거기다 주제에 안 맞는 와이번까지.
‘요새까지 지었지.’
짧게 헛기침을 한 제이슨이 영주에게 물었다.
“큼! 갑작스러운 질문이라 실례가 될지도 모르겠지만, 이곳의 재정 상황은 괜찮은 겁니까?”
말 그대로 갑작스러운 질문이었다.
“그건…… 왜 물으시는 겁니까?”
“영지 방비로 여러모로 지출할 게 많아 보이는데, 이런 변방에서 그만한 자금력이 있는지 궁금해서 물어봤습니다.”
제이슨은 의문이었다.
아무리 영지라지만 변방에 위치해 있어 영지민의 수도 적었고, 또한 크게 벌이고 있는 사업 같은 것도 없어 보였다.
여기에 무슨 금광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마석이나 은광산이 있는 것도 아니었으니까.
“제가 알기론 영지 내에서 따로 크게 사업을 벌이시는 것도 없는 것 같던데…… 그렇다고 여기 교회처럼 드워프들을 상대로 크게 장사를 하는 것도 아니고요.”
“크흠!”
교회 이야기가 나오자 이번엔 영주가 헛기침을 했다.
그만큼 불편한 이야기였기에 그러했다.
‘그걸 내가 했어야 했는데.’
“교회에서 벌이는 사업 이야기는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저로서도 무척이나 아쉬운 일이지만, 교회에서 하는 일이니 최대한 좋게 생각하기로 했습니다.”
제이슨이 다시 물었다.
“거기다 고용한 용병 부대도 많고, 그렇게 많은 병력들을 유지하려면 군수품과 보급품 등, 돈 들어갈 데가 한두 군데가 아닐 텐데요? 상황이 이런데도 여기 영지 재정은 전혀 문제가 없는 겁니까? 저는 그게 의문입니다.”
누가 그걸 모르겠는가?
영주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사실…… 재정 문제야 당연히 있었죠. 수입에 비해 지출이 아주 컸으니 말입니다. 한동안 머리 좀 싸맸습니다. 이자값을 어떻게 감당할지 나름대로 고민이었거든요.”
거둬들이는 영지 세금으로 방코 이자를 갚는 것도 한계가 있었다.
그래서 언제부터인가 영주는 자신의 이름으로 된 차용증서를 마구잡이로 발행하여 이를 이자 대신 내주고 있었다.
굳었던 영주 표정이 다시 펴지기까진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진 않았다.
오히려 그는 마치 해법이라도 찾은 마냥 신나게 떠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말입니다.”
영주 얼굴에서 미소가 번졌다.
“제가 이 땅의 주인인 자가 아닙니까? 멍청한 방코 녀석들을 상대로 기만을 하고 있으니 그런 일은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 말에 제이슨이 강한 의문을 표했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방코 사람들을 기만하고 있다고요?”
“매달 방코에 갚아야 할 이자만 해도 꽤 됩니다. 그 당시 너무 급한 마음에 돈을 왕창 끌어다 썼더니 이게 배보다 배꼽이 더 커버리더군요. 하지만 그 무지막지한 이자를 영지 세금으로 갚는 게 멍청한 짓임을 나중에야 알았습니다.”
제이슨은 대꾸하지 않고 그가 하려는 말을 잠자코 들어보기로 했다.
“그냥 제 이름으로 된 차용증서만 갖다 줘도 이자를 갚는 꼴이 되니, 뭐하러 진짜 돈을 놈들에게 쥐어주냐는 말입니다?”
영주가 씩 웃었다.
“이렇듯 저야 허공에서 돈을 찍어내어 갚는 꼴이 되니, 이게 놈들을 기만하는 게 아니고 대체 뭐겠습니까?”
그가 짓는 미소엔 상당한 자신감이 깃들어 있었다.
“설령 그놈들이 그것을 문제 삼는다 해도 전 이 땅의 주인이 되는 자입니다. 그까짓 고리대금하는 방코 업자놈들이 대체 뭘 하겠습니까?”
오히려 영주가 되물었다.
“방코에 있는 그 두 놈이 절 찾아와 감히 돈이라도 갚으라고 소리라도 치겠습니까?”
영주가 고개를 저었다.
“어림도 없는 소리죠. 제정신이 박혔다면 저한테 찾아와 두 무릎을 꿇고 제발 이자 좀 갚아달라고 하소연하는 게 정답인 겁니다.”
그런 영주의 답변을 듣고선 제이슨과 이자벨라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영주 말이 완전 틀린 건 아니었으나, 뭔가 내키지 않고 영 찝찝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금 제가 내준 차용증서는 현재까진 아무 문제 없이 금화로 교환이 가능하니, 그 차용증서를 가지고 방코에 가셔서 금화로 바꿔 가시면 됩니다.”
썩 내키진 않았으나, 영주 말대로 그가 내준 차용증서가 별문제 없이 방코에서 금화로 교환이 가능하다면 두 마법사가 굳이 딴죽을 걸 이유는 없었다.
하지만 무언가 계속 내키지 않았던 제이슨이 영주에게 다른 걸 물어보았다.
“혹시 여기 영지 사람들이 당신이 발행한 차용증서를 담보로 한 또 다른 차용증서를 마치 돈처럼 쓰고 있다는 걸 알고 계십니까? 제가 기억하기론 IOU가 아닌 Gold라는 새로운 차용증서라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 물음에 영주가 설핏 웃어 보였다.
“그 일이야 저도 들어서 잘 알고 있습니다. 한평생 전쟁터에서 굴러먹다 온 녀석인지라 방코 놈들이 무슨 속셈으로 저러는지 잘 모르겠지만, 저 역시 차용증서를 거리낌 없이 내주는 입장에서 그런 것까지 일일이 터치할 순 없겠죠. 그걸 막았다가 제 차용증서를 방코에서 받지 않으면 그게 더 문제되지 않겠습니까?”
“그렇게만 생각하고 계시는 겁니까?”
“네, 그리고 금화 대신 차용증서를 돈처럼 쓰는 일이야 이젠 당연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생각해 보면 사람들이 왜 무거운 금화를 들고 다니는지 당최 이해할 수 없더군요. 어차피 필요한 금화야 방코에 가서 교환하면 그만일 텐데. 뭐하러 휴대하기 불편한 금화들을 들고 다니는지 원. 저도 예전엔 안 그랬지만 지금은 무조건 금화 대신 차용증서만 들고 다닙니다.”
두 마법사와 더 할 말이 없어진 영주가 미소로써 그들을 보내주었다.
“아무튼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혹시나 제 도움이 필요하시다면 언제든 연락 한번 주십시오. 은혜를 입었으면 응당 갚는 게 도리가 아니겠습니까? 더군다나 싱클레어 가문과의 인연이라니. 이런 건 돈 주고도 살 수 없을 겁니다.”
그렇게 영주와의 독대를 마친 둘은 영주성에 나와 자리에 섰다.
“…….”
제이슨은 여러 생각을 하며 말을 아꼈고, 이자벨라는 답을 알고 싶어 했다.
궁금한 건 딱 질색이었으니까.
“저러다 어떻게 되는 거야?”
“그게…… 저도 가늠이 잘 안 됩니다. 저러다 어떤 식으로 진행될지는…….”
“제이슨도 모르는 게 있었어?”
“저런 분야는 제 관심 분야도 아닐뿐더러, 워낙 하등한 분야라. 아마 저 일을 예측할 수 있는 사람은 이 제국 내에서 아무도 없을 겁니다. 지금까지 제국 역사에 저런 일들이 없었으니까요.”
그러나 이자벨라는 다른 생각이었다.
“아니, 그건 아닌 것 같아.”
“네?”
물론 그녀도 확신은 없었다.
단지 촉이 그럴 뿐.
“그냥…… 느낌인데. 왠지 그 사람만큼은 여기 일이 어떻게 될지 알 것 같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