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화 13. 매점매석 #3(3)
맥주 한 잔 마시고 어느 정도 진정된 드워프들을 앉혀놓고 누군가를 목이 빠지게 기다리던 피터 사제장이 자꾸만 회중시계를 내려다보았다.
‘늦는군.’
드워프 사절단이 찾아왔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곧바로 록펠러를 불렀었다.
시간상으로 보면 이제 찾아오고도 남을 시간.
성질 급한 드워프들이 맥주로 목을 한 번 축이고 없는 인내심까지 끌어내어 한참을 기다리고 있을 때, 조용하던 방문이 열리며 학수고대하던 이가 얼굴을 비추었다.
“오, 늦지 않게 왔구나. 어서 와 앉거라.”
그를 가장 먼저 반긴 건 드워프 사절단과 자리를 함께하고 있던 피터 사제장이었다.
피터 사제장은 이 자리를 이끌어 갈 생각이 전혀 없었다.
이번 일을 주도한 사람은 따로 있는데, 자신이 괜히 나서서 망칠 생각이 없었던 것이다.
사제장의 환대에 록펠러 역시 자리에 앉아 있던 사제장과 드워프들을 향해 예를 갖춰 인사를 올렸다.
“만나 뵙게 돼서 영광입니다. 록펠러 로스메디치입니다.”
록펠러의 등장과 동시에 드워프들이 저들끼리 쑥덕대기 시작했다.
사제장에게 대충 이야기는 들었지만 저렇게나 어린 애송이일 줄은 몰랐던 것이다.
“뭐야? 새파란 애송이잖아.”
“그러게 아직 애야.”
“저런 애새끼랑 대화를 해야 한다고?”
“뭔가 좀 이상한데?”
록펠러의 나이가 너무 어렸던 탓인지 드워프들의 반응이 썩 좋지 않았다.
다 큰 어른하고 이야기를 해도 모자랄 판국에 새파랗게 어린 애라니!
당연한 반응이기도 했다.
“우선 먼 길을 오셨으니 목부터 축이시죠. 이야기는 이후에 해도 나쁘지 않을 것 같습니다.”
교회에 찾아옴과 동시에 사제들에게 부탁하여 드워프들의 목을 축일 또 다른 맥주를 가져온 록펠러가 웃으며 말했다.
그러자 그 이야기를 듣고선 헤벌쭉 웃는 드워프들이 다시 태도를 바꿨다.
맥주 한마디에 록펠러에 대한 그들의 시선이 다소 호의적으로 변한 것이다.
“일단 이야기는 나눠보자고. 혹시 또 모르잖아.”
“그렇지. 사람을 겉모습만 보고 판단하면 안 되지.”
“어서 가져오게! 목이 타고 있단 말이야!”
사제들이 가져온 맥주를 벌컥벌컥 마시는 드워프들이 그제야 살았다는 듯이 그 표정들이 하나같이 나른해졌다.
당장에라도 폭동을 일으킬 것처럼 예민하고 날카롭던 그들이 세상 모든 불평불만을 받아줄 것처럼 인자하고 선한 인상으로 순식간에 바뀐 것이다.
이를 본 록펠러가 속으로 생각했다.
‘보기보다 성질이 더럽고 급한 드워프들이 맥주에 환장하는 이유가 있었군. 일단 맥주로 달래주지 않으면 애당초 대화 자체가 안 되는 거야.’
소설에 나온 내용이라 다 알고 있는 이야기였지만, 이렇게 막상 두 눈으로 확인하고 보니 묘한 기분이 들었다.
어찌 됐건 피터 사제장이 마련한 자리에 록펠러는 거리낌 없이 그들과 함께 할 수 있었다.
“맛은 어떠신가요? 나름 신경 쓰려고 노력은 했는데 입맛에 맞는지는 모르겠습니다.”
“딱 좋아! 거기다 시원하기까지 하더군.”
“그래, 뭔가 이상해서 봤더니 맥주가 엄청 시원했어!”
“시원한 맥주가 이리도 좋을 줄이야!”
록펠러에게 맥주란 얼어붙은 잔에 흘러내리는 거품이 일품인 음료였다.
‘광고에서 많이 봤었지.’
그래서 최대한 그 느낌을 살려 맥주를 가져와 봤더니, 맛은 둘째 치고 드워프들의 반응이 아주 좋았다.
‘그래, 맥주는 무조건 차게 마셔야지.’
맥주를 차갑게 저장시키는 방법 또한 몇 달간 연구해서 나온 결과였다.
냉기 마법을 활용하는 정도였기에 냉동창고의 개발 비용은 그렇게 크진 않았다.
하지만 그 효과는 엄청났다.
“우리도 앞으론 맥주를 차게 마셔야겠어.”
“그게 좋겟군! 오늘 마셔보니 이거 미지근한 거랑 차원이 달라!”
“목이 한 번에 뻥 뚫리는 느낌이야!”
그런 드워프들의 반응에 록펠러야 당연히 미소 지을 수밖에 없었다.
“마음에 드신다니 다행이네요.”
그런 록펠러의 모습을 본 사제장이 아주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역시 잘하는군. 생각했던 것처럼 사업적인 이야기는 굳이 내가 할 게 아니라 저 소년에게 맡겨야겠어.’
“자세한 이야기는 전부 저 소년과 나누시면 됩니다.”
다 큰 어른들은 나설 생각이 없고, 죄다 관계가 없거나 아니면 저 사제장처럼 발을 빼고 있었다.
영문을 모르는 드워프들이 다소 어리둥절했지만, 나이 든 사제가 어린 소년과 대화를 하라고 하니 드워프 사절단을 이끌고 온 대표 오린도 어쩔 수 없이 록펠러와 대화하게 됐다.
“그대와 이야기를 하라고 하니 어쩔 수 없이 그대와 이야기를 나눠야겠군. 난 오린이다. 자랑스러운 천둥산맥의 주민이지.”
“천둥산맥이요? 이야기는 많이 들었습니다. 천둥을 품은 자를 따르고 계시는군요.”
“그래, 아주 모르지는 않구나.”
드워프들의 수명은 본래 엘프와 맞먹을 정도로 길었다.
그리고 엘프의 평균 수명은 인간을 아득히 뛰어넘었으니 오린은 록펠러가 자신보다 어릴 것이라 판단하고 말을 편하게 했다.
“그런데 일이 있어 찾아오셨다고 들었습니다. 무슨 연유로 찾아오신 겁니까?”
다 알고 있었지만, 애써 모른 척 시치미를 떼는 록펠러에게 성질 급한 드워프들도 말을 질질 끌 생각이 없었다.
오린은 마치 준비라도 했다는 듯이 품에서 소브린을 한 움큼 쥐어 탁자 위에 거칠게 내려놓았다.
찰그랑! 서로 부딪히는 금화의 소리가 요란해진 방안에서 오린이 목청을 높였다.
“여기 있는 맥주를 전부 다 사겠네!”
오린은 교회 밖에서 재배되고 있는 보리와 홉, 그리고 양조장 등을 기억해 냈다.
“그리고 앞으로 나올 맥주까지 모조리 다 사들이겠어!”
드워프들을 제외한 모두의 시선이 일제히 탁자 위로 쏟아진 소브린으로 향했다.
소브린(Sovereign).
제국의 금화가 달란트인 것처럼 소브린은 여러 드워프가 만든 금화들을 총칭하고 있었다.
참고로 제국의 달란트는 종류가 하나였지만, 드워프의 소브린은 그 종류가 다양했다.
“우리들의 금화를 처음 보진 않았겠지? 여기 제국과 같이 구리를 섞는 간악한 짓은 절대 하지 않았지. 오로지 순수한 금으로만 주조된 이 세상의 진정한 화폐라고 할 수 있겠지!”
오린의 말이 계속 이어졌다.
“그러니 이 대륙에서 가장 신뢰할 수 있는 금화라네. 고블린들이 생산해내는 두카트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물건이지.”
자신들이 만든 금화에 강한 자부심을 드러내는 오린이 의기양양하게 소리치자 록펠러는 그가 탁자 위로 던져놓은 소브린에 시선을 두며 물었다.
“제가 직접 살펴봐도 되겠습니까?”
“살펴본들 뭐라도 알겠나?”
은연 무시하는 말투에도 록펠러는 여전히 웃는 얼굴이었다.
“방코에서 조수로 일하고 있어 평소 금화를 만지는 일이 많습니다. 금화 크기는 저희 달란트와 얼추 비슷한 걸 보니 뭐가 다른지 한번 살펴보고 싶습니다.”
“방코?”
방코라는 말은 오직 제국에서만 통용되고 있었다.
드워프들은 대부분 왕 또는 대부호에게 금화를 빌렸지, 인간들처럼 방코 같은 고리대금업자에게 돈을 빌리진 않았기 때문이다.
“혹시 그 방코라는 데가 고블린방크 같은 곳인가?”
“얼추 비슷합니다.”
“이거 약삭빠른 고블린처럼 이자놀이를 하는 사람이었군.”
오린의 표정이 굳었다.
인간들의 방코에 대해선 잘 몰랐지만, 고리대금업으로 종족을 부흥시킨 고블린들에 대해선 아주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하는 짓만 보면 인간들도 고블린과 다를 게 없다니까.”
“그래도 그 냄새나는 고블린보단 낫겠지.”
“그래, 차라리 인간이 낫지. 고블린 그놈들은 엘프랑 동급이야. 쓰레기 같은 놈들.”
고블린에 대한 이야기로 할 말이 많아진 드워프들이 잠시간 시끄러워졌고, 그사이 오린은 록펠러에게 소브린 하나를 던져주었다.
“맘껏 살펴보게. 확실히 순금으로만 이뤄졌으니까. 그대들의 금화와는 아마 차원이 다를 거야.”
드워프들의 금화가 오로지 순금으로만 되어 있다는 사실을 록펠러가 모르진 않았다.
그럼에도 확인하는 것은 단순한 호기심 때문이었다.
‘이게 바로 순수한 금으로만 된 금화…… 확실히 제국 달란트와 비교해봤을 때 무게나 질감 같은 게 다르긴 하네.’
화염전쟁의 여파로 구리가 섞이게 된 제국 금화에선 갈수록 그 구리 함량이 미묘하게 늘어나고 있었다.
금화가 쓰일 데는 많고, 가진 금화는 적으니 나름 잔머리를 굴린 결과였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어쩌면 저들이 말했던 것처럼 인간도 고블린과 별 차이가 없을지도 몰라. 아니지. 오히려 고블린보다 더 지독한 족속이 우리일지도 모르지. 금화에 구리를 섞는 짓은 아직 인간밖에 안 했으니까.’
“좋은 금화로군요. 저희 달란트와 묘하게 다르긴 합니다.”
그 말을 듣고 오린이 자신의 입꼬리를 슬쩍 끌어올렸다.
“그렇지. 제국 금화와 비교하면 안 되지. 우린 금화에 거짓을 섞진 않았거든. 그대들처럼 말이야.”
오린이 빠르게 말을 이었다.
“그대들이 쓰는 금화보다 더 좋은 금화로 여기 맥주를 사겠네.”
씩 웃는 오린의 표정엔 나름의 자부심과 이번 거래에 대한 확신이 묻어나고 있었다.
“한 번으로 끝날 거래가 아니니, 이 거래가 오래될수록 그대들은 아마 돈방석에 앉게 되겠지.”
인간의 금화가 다른 종족이 만들어낸 금화보다 질이 나쁘다는 건 록펠러 역시 전적으로 동의하는 바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소브린의 가치가 더 뛰어난 건 아니었다.
적어도 이곳, 제국 땅에서는 말이다.
“저기, 한 가지 착각하고 계시는 게 있습니다.”
그 말에 오린이 의문을 드러냈다.
“뭐가 말인가? 금화 품질은 당연히 우리가 우수한데.”
“물론 금화 자체 품질로 본다면 당신들이 말했던 것처럼 제국의 달란트보다 당신들의 소브린이 더 훌륭하고 좋습니다. 하지만 이건 아셔야죠.”
어느새 해맑게 웃던 소년은 사라지고, 표정에 웃음기 하나 없는 냉혈한 같은 협상가가 자리에 앉아 있었다.
록펠러는 오린을 똑바로 마주 보며 말을 이었다.
“여긴 제국입니다. 제국에선 오로지 달란트만 통용됩니다. 그러니 여기에 있는 맥주는 오로지 달란트로만 살 수 있습니다.”
즉, 드워프의 금화는 받지 않겠다는 선언이었다.
제국 달란트보다 질이 좋든, 나쁘든, 뭐든 간에.
결국 자신들에게 필요한 것은 제국 달란트라는 것을 드워프 사절단에게 알린 것이다.
록펠러의 말을 듣고서 찾아온 사절단 전부가 크게 술렁이기 시작했다.
“달란트를 달라고?”
“달란트는 없잖아?”
“금화는 우리 거가 더 좋은데 무슨 달란트야.”
“하지만 쟤 말대로 여긴 제국 땅이야. 소브린이 필요하지 않을 수도 있어.”
“무슨 개수작이지? 보통은 소브린이라 하면 환장을 하잖아.”
시끄러워진 드워프들을 뒤로하고 오린이 다시 나섰다.
“우린 소브린밖에 없는데, 어떻게 달란트로 여기 맥주를 사라는 거지?”
그 말에 록펠러는 은연중 미소를 드러내며 그에게 화답해 주었다.
“금화 간의 환전 문제는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제가 일하고 있는 카터 방코에서는 금화 간의 환전 서비스도 겸하고 있으니까요.”
록펠러의 말은 계속됐다.
“물론 소정의 수수료는 떼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