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화 12. 매점매석 #2(3)
둘은 허름한 책상을 두고 마주 앉았다.
좋은 제안이 있다기에 미소부터 띠고 보는 사제장이 빠르게 운을 뗐다.
“네 조부님 이야기를 다시 하자면, 정말 좋은 분이셨지.”
첫 시작은 돌아가신 그의 조부를 칭찬하는 것이었다.
그도 나이가 어느 정도 있는 만큼 과거에 많은 성금을 냈었던 데이비드 로스메디치를 잊지 않고 있었으니까.
“마법을 다룰 줄 아는 신성사제들처럼 신성치유술을 알진 못했지만 여러 전쟁터에서 배운 응급처치술이나 민간요법 등으로 정말 수많은 사람을 살리셨지. 그 당시 나는 경험이 부족하고 나이도 어린 사제였지만, 멀리서 너희 조부님을 보면 항상 재주가 좋다는 느낌을 받았단다. 마법 같은 게 없어도 사람을 살릴 수 있구나, 그렇게 생각했었지.”
사제장의 미소는 여전했다.
“그런 훌륭한 조부님을 두었으니 그 후손들이야 두말할 것도 없겠지. 그래, 좋은 제안이 있다고?”
조부 이야기로 운을 뗀 사제장이 슬슬 본론으로 들어가려고 하자 록펠러 역시 그에 못지않은 미소로 그의 말을 받아주었다.
“네, 사제가 되고 싶은 제 동생이 여기서 거절당했다기에 무슨 연유에서 거절하셨는지 이야기를 잠시 들어봤는데, 이쪽 교구 사정이 좋지 않다고 들었습니다. 재정적으로 말입니다. 그래서 제가 작게나마 도움 드릴 일이 없을까 하여 이렇게 실례를 무릅쓰고 찾아오게 됐습니다.”
“아, 루시안 사제가 추천한 아이가 바로 자네 동생이었나?”
“네, 그 아이가 저희 로스메디치 집안의 넷째인 레오 로스메디치입니다. 제가 첫째고요.”
“그렇군.”
사제장은 책상 위로 자연스럽게 올린 두 손을 깍지 끼며 온화한 미소를 지어냈다.
깍지 낀 두 손 중에 한 손에는 큼지막한 금반지가 눈에 띄었는데, 금반지에 박힌 루비가 알게 모르게 록펠러의 시선을 잡아끌고 있었다.
‘교구 사정이 어려워도 손가락에 낀 반지는 금에다가 루비까지 박혀 있네?’
물론 반지 쪽으로 시선이 간 것은 아주 잠시였다.
록펠러의 시선이 빠르게 돌아오자 사제장은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짐짓 심각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자네도 알고 있겠지만. 요즘 영지 사정이 썩 좋지가 않아. 레드스킨이었나? 피부가 붉은 오크들하고 천둥산맥에서 온 드워프들이 이 영지 밖에서 한판 붙으려고 한다네. 그런 이유로 인접한 이 영지가 아주 소란스러워졌지. 자칫 잘못하면 두 세력의 싸움에 크게 휘말릴 수도 있는 거니까.”
“네, 저도 영지 밖이 소란스러운 건 잘 알고 있습니다. 그 일로 영주님께서 많은 금화를 빌려 가셨고요.”
“방코에 있으니 영지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잘 알겠지. 영지에 어떤 일이 생기게 되면 가장 먼저 소식을 접하는 곳이 바로 자네가 일하고 있는 카터 방코가 아니겠나? 모든 사건엔 필연적으로 돈 문제가 엮이게 되니까.”
록펠러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해 주었다.
나이는 분명 어렸지만 분위기 자체가 무거워 사제장도 그런 록펠러의 태도에 딱히 딴죽을 걸진 않았다.
대신 하던 이야기를 계속 이어나갔다.
“아무튼 영지 생활이 안정되어야 그 안에 자리 잡은 우리들도 문제없이 생활할 수 있다네.”
“이곳 재정이 많이 안 좋다고 들었는데, 이곳은 성금 외에 다른 수입원은 없는 겁니까?”
“아쉽게도 그렇다네. 다른 교구들과 다르게 이곳은 오직 성금만으로 돌아가고 있다네.”
사제장의 표정은 여전히 어두웠다.
“그러니 영지 사정이 어려워지면 자연스레 우리 사정도 어려워지는 게지.”
사제장이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흐음…… 그런 이유로 자네 동생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한 걸세. 당장 이 교구에 있는 사제들만 해도 벅찬데, 여기서 새 식구까지 받아들일 여력은 없는 상태네.”
이어 록펠러를 무거운 시선으로 쳐다보는 사제장이 말을 이었다.
“아무리 신의 어린 양이라지만 먹고는 살아야지 않겠나? 기도만으론 살 수 없으니.”
사정이야 대충 알고 있었지만, 오직 성금만으로 돌아간다는 이곳 교구의 사정 이야기를 듣고선 록펠러는 다소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교회라는 직함을 달고 할 수 있는 일이 얼마나 많은데 대체 이 교구는 지금까지 뭘 했단 말인가?
“따로 지원 같은 건 없는 겁니까?”
“지원이란 게 있을 것 같은가? 변방에 위치한 이런 조그마한 영지에 교회가 있는 것도 신기한 일일세.”
사제장이 말을 이었다.
“위에선 아무 의미도 없는 이런 변방까지 관심을 주지 않는다네. 이곳에 성지라도 들어선다면 또 모를까. 아니면 높으신 분들의 구미를 당길만한 뭔가라도 있으면 좋으련만. 하지만 그런 게 없으니 결국 소외당할 수밖에 없는 걸세.”
“그렇군요. 그런데 제가 듣기론 옆 영지에 위치한 수도원에선 작은 포도 농장을 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쪽 와인이 나름 좋다고 하던데요?”
사제장이 들으라는 듯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후…… 자네가 말하는 수도원에서 하고 있는 그 와이너리 사업에 대해 말하는 거라면 이쪽도 할 말은 있네. 그것도 다 돈이 있어야 하는 거지.”
“돈이라면 잠시 빌리면 되지 않습니까?”
그 말에 사제장이 엄한 표정을 지었다.
“그 돈을 누구한테 빌리나? 방코 업자한테?”
“네, 카터 아저씨와 사이가 좋으시다면 좋은 조건으로 대출이 가능했을 텐데요?”
사제장이 보란 듯이 고개를 저었다.
“아닐세. 우린 이자를 아주 혐오한다네. 이자는 말할 것도 없이 신성모독이야. 지옥에나 떨어질 일이지.”
그런 이유로 이제까지 성금만으로 교구를 운영해왔단다.
록펠러 입장에서 기가 차다 못해 돈을 좋아하면서도 멀리하려는 그들의 이중성에 토가 나올 지경이었다.
‘듣다 보니 정말 어메이징한 곳이네. 돈을 빌려서 사업하기는 싫고, 그러면서 돈은 오지게 밝히고.’
말을 마친 사제장이 눈을 반짝 빛내며 록펠러에게 물었다.
“그래서 그 좋은 제안이란 게 뭔가? 들어서 좋은 이야기라면 나야 당연히 환영하는 입장이라네.”
이 답답한 것들에게 과연 구원의 손길을 내주는 게 과연 옳은 일일까?
‘싫더라고 결국 한배를 탈 수밖에 없지.’
돈에 대한 교회의 이중성은 토가 나올 지경이었지만, 교회라는 곳이 영주의 감시와 세금 문제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는 초법적인 곳이라는 것에는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그리고 우리 레오를 위해서라도.’
“제가 제안하는 일은 이겁니다.”
록펠러는 자신이 생각했던 매점매석에 대한 이야기를 사제장에게 해주었다.
이야기를 다 듣고 난 사제장이 잠시 침음성을 흘리다 입을 열었다.
“흠…… 맥주와 그 재료들을 매점매석하자고?”
“네, 매점매석만 할 수 있다면 드워프들을 상대로 많은 이익을 남길 수 있을 겁니다.”
크흠!
한 번의 헛기침 뒤 사제장이 다시 입을 뗐다.
“좋은 이야기네만 드워프가 쓰는 금화는 우리와 다르다고 알고 있네. 그래도 괜찮겠나?”
“어차피 다 같은 금화입니다. 소브린을 녹여서 제국 달란트로 바꾼다면 아무 문제 없습니다. 아니면 다른 곳에서 소브린에 대한 수급이 있을 시, 그쪽과 거래하여 제국 달란트로 환전하면 됩니다.”
“그렇지. 어차피 자네가 방코에서 일하고 있으니 쓸데없는 걱정이었군.”
“그런 부분은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무언가를 매점매석하는 일이 좋은 일은 아니네만, 상대가 또 드워프라면 말이 달라지지.”
이어지는 미소엔 드워프 따윈 안중에도 없는 그런 잔혹한 교인의 모습이 담겨 있었다.
‘그럼 그렇지. 거절하지 않을 줄 알았어. 어차피 남의 일이잖아?’
록펠러는 그에게 바람을 넣기 위해 계속 입을 움직여주었다.
“천둥산맥에서 온 드워프들과 레드스킨과의 전쟁은 하루아침에 끝나지 않을 겁니다. 짧으면 몇 개월, 길면 몇 년이 걸리겠죠. 그동안 저희는 드워프들을 상대로 많은 이익을 남길 수 있을 겁니다.”
록펠러는 확신에 찬 어조로 말했다.
“그런 의미에서 단순히 시중에 있는 맥주와 그 재료들만 매점매석할 게 아니라 앞으로 몇 년을 바라보고 이 교회에서 보리와 홉을 직접 재배했으면 합니다. 당연히 양조장도 만들어서 교회에서 따로 관리해 주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죠.”
“호오, 그렇군. 단순히 이번뿐만 아니라 맥주 공급까지 독점할 수 있다면 황금으로 태산을 쌓았다는 그 드워프들을 상대로 정말 많은 이득을 볼 수 있겠구만.”
록펠러는 은근슬쩍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분명히 그럴 겁니다. 두 세력 사이에 전쟁이 오래 지속될수록 맥주가 필요한 드워프 입장에선 부족한 맥주를 수급하기 위해 주변 지역에서 어떻게든 구하려고 할 겁니다. 이건 무조건 성공하는 장사입니다.”
“좋은 생각일세.”
대화 도중 사제장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저렇게나 어린 소년이 그런 생각을?
“그런데 자네. 그런 생각은 대체 어떻게 한 겐가?”
“그냥 영지 밖에서 두 세력이 충돌했다기에 길이 보였을 뿐입니다.”
“그래? 호오, 그것참 대단하군. 난 생각도 못 했어.”
“그거야 뭐.”
“그런데 한 가지 문제가 있네.”
문제가 있다고 하자 록펠러가 잠시 긴장했다.
‘무슨 문제가 있다는 거지? 교회라 영주 눈치는 안 보일 텐데.’
노심초사한 것도 잠시.
사제장이 침묵 속에서 말을 이었다.
“우린 그것을 매점매석할 돈이 없네.”
뭔 소리를 하나 했더니 쓸데없는 걸 걱정하고 있었다.
빠르게 표정을 푼 록펠러가 다시 미소를 입가에 걸었다.
“그 부분은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당장 매점매석에 필요한 돈이나 추후 보리와 홉을 재배하거나 양조장 건설에 쓰일 돈은 제가 대겠습니다.”
“자네가?”
아직 성년도 되지 않은 어린 소년이었다.
나이는 15살쯤 되어 보였을까?
그런데 그런 소년이 그 많은 돈을 대겠다고 하니 사제장 입장에선 의문이 아닐 수가 없었다.
“대체 무슨 돈이 있어서?”
“제가 방코에서 일하고 있는 걸 잊으셨습니까? 제가 그동안 벌어둔 돈도 있고, 여차하면 방코에서 돈을 빌리면 됩니다.”
록펠러가 이어 진한 미소를 사제장에게 날려 보냈다.
“어차피 이자는 혐오하시니, 그 혐오스러운 일은 저 혼자 감당하려고 합니다. 단지 이곳에선 제가 드리는 돈으로 이번 일을 진행해 주시면 됩니다.”
사제장의 눈빛이 전보다 더 진중해졌다.
“이자도 없이 말인가?”
“감히 교회를 상대로 이자를 받아낼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남에게 돈을 빌리는 일은 필연적으로 이자라는 게 따라붙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록펠러가 그런 이자도 없이 돈을 빌려주겠다고 하자 사제장은 다소 놀랄 수밖에 없었다.
“정말 그래도 괜찮겠나? 보통 돈을 빌려주면 당연히 이자를 받네만.”
교회가 고리대금업자를 싫어하는 이유.
록펠러는 전혀 모르지 않았다.
“이자는 신의 영역으로 감히 교회를 상대로 받아낼 건 아니라 봅니다. 지옥에 가는 건 저 혼자로도 충분하니, 부디 사제장님께선 이런 절 위해 기도나 해주셨으면 합니다.”
“허허, 이렇게 무책임한 사람을 봤나.”
사제장은 엄하면서도 한편으론 부드러운 미소로 말을 이었다.
“지옥이라니! 교회의 은인이 그리 쉽게 지옥에 떨어질 줄 아는가? 지옥은 그렇게 쉽게 가는 곳이 아니라네. 자네가 가고 싶어도 내가 보내지 않을 테니 그리 알게나.”
무슨 말을 하려나 했더니 저리 말할 줄이야.
록펠러는 속으로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 말씀해 주시니 저야 감사할 따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