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화 10. 믿음은 부를 창출한다(4)
“만약 금화가 더 필요하시다면 최대 3,000달란트까지 더 빌려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물론 이 금화는 저희 것이 아니지만, 영주님 사정이 딱하기도 하고, 저희 역시 돈을 벌면 그만이기에 최대한으로 생각한 금액입니다.”
5,000달란트에 추가적으로 3,000달란트라니!
끽해야 1,000~2,000달란트 정도 생각하고 찾아온 영주 입장에선 이보다 더 반가운 소리가 없었다.
당장 8,000달란트를 손에 쥘 수 있다는 말에 영주는 그 뒷감당에 대해선 그리 깊게 생각하지 않고 당장 앞만 보았다.
‘8,000달란트면 추가적인 용병 부대를 고용해서 유지할 수 있는 비용인 데다가 국경 바로 근처에 요새 하나 정도는 튼실하게 지을 수 있겠어.’
거기에 대한 뒷감당?
‘액수가 크긴 하지만 내가 여기 영주인데 저놈들이 뭘 어쩌겠어? 빌려줄 땐 서서 빌려주더라도 받아갈 땐 당연히 엎드려 받아가야지.’
그런 얄팍한 생각을 하고 있었으나, 다 계획이 있는 록펠러에겐 가당치도 않은 소리였다.
‘누구나 그럴싸한 계획이 있지.’
처맞기 전까지는.
“그래서 최대 8,000달란트까지 대출이 가능한데, 영주님께선 얼마나 빌려 가시겠습니까?”
록펠러의 물음에 영주는 일단 헛기침부터 하고 봤다.
“크흠! 일단 상황이 안 좋으니 어떻게든 크게 빌려가는 게 낫겠지. 유사시 급전이 필요할 때 또 여기까지 와서 또 빌려 갈 순 없잖나? 번거로우니.”
“그럼 8,000달란트를 전부 빌려 가시는 겁니까?”
8,000달란트라는 말만 들었을 뿐인데 영주는 흥분된 마음을 좀처럼 감출 수가 없었다.
영지와 인접한 지역에서 두 세력 간의 전면전이 일어난다 할지라도, 제국의 지원군이 도착하기 전까지 자신의 힘만으로 어떻게든 해볼 수 있을 정도로 꽤 많은 돈이었던 것이다.
“전부 빌려 가겠네.”
말을 마친 영주는 아주 흡족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러면서 쓸데없는 생각까지 하게 됐다.
‘잠깐만. 8,000달란트면…… 요새 하나 짓고도 와이번 한 마리까지 들여올 수 있겠어.’
전장에서 포효하는 와이번은 제국이 자랑하는 막강한 괴수병기 중 하나였다.
바스타드 달란트가 태어난 화염전쟁의 전리품이자 전장을 누비는 모든 기사들이 염원하는 것으로, 무지막지한 유지비용 때문에 한 영지를 다스리는 영주조차 쉽게 가질 수 없는 아주 비싼 애완동물이었다.
‘보자…… 잘 큰 와이번 한 마리가 대충 2,000달란트였었나? 비싸기도 해라. 하지만 이번 기회에 큰마음 먹고 한 마리 장만해도 되겠어. 8,000달란트 정도면 한 마리 들여오고도 남지.’
와이번 외에도 훌륭한 말이나 하늘까지 날 수 있는 그리핀을 조련시켜 타는 방법도 있었지만, 이미 와이번에 꽂힌 영주의 눈에는 차지도 않는 것들이었다.
‘욕심만 줄인다면 와이번이 아니라 그리핀 정도가 적당하긴 한데…… 아니야. 이번이 아니면 대체 언제 와이번을 타보겠어? 기회가 있을 때 잡아야지.’
까막눈이었어도 피비린내 나는 전장에선 맹수 같은 게 바로 그였다.
그는 이 순간 영지 내에 침노한 오크 전사들을 자신의 와이번으로 무자비하게 학살하는 장면을 머릿속으로 상상해 보았다.
단순히 상상만 해보았지만, 그보다 짜릿할 수가 없었다.
꿈에서나 그리던 와이번을 드디어 가질 수 있다니!
“8,000달란트. 전부 빌려주게.”
재차 빌려달라고 말하는 그의 말투에서 록펠러는 그가 감춰놓은 탐욕을 엿볼 수 있었다.
영주가 그 많은 돈으로 무엇을 원하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적어도 그 돈이 절실하게 느껴지는 건 확실히 보였다.
‘좋아, 잘 물었어. 하지만 쉽게는 안 되지. 이쪽도 나름 판을 깔아놨다지만 더 확실하게 대비해 둬서 나쁠 건 없으니까.’
잔뜩 흥분해 있던 영주에게 록펠러는 무척이나 곤란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영주님. 그게…….”
“왜? 무슨 문제라도 있나?”
“저희가 최대한으로 빌려드릴 수 있는 금액이 8,000달란트인 것은 맞습니다만.”
록펠러는 카터를 한번 흘깃 쳐다보았다.
물론 이 자리서 카터가 필요한 건 아니었으나, 가게 사정을 살피는 척 연기하기 위해 카터를 한번 흘겨본 것이다.
다시 영주에게 시선을 옮긴 록펠러가 말을 잇기 시작했다.
“저희에게도 8,000달란트는 워낙 큰 액수인지라.”
뭔가 했더니 그냥은 못 주겠다는 소리로 들렸다.
영주는 살며시 표정을 구겼다.
“내 차용증서가 필요하면 얼마든지 써줄 테니 당장 8,000달란트나 준비해 놓게.”
이렇게 말하면 끝날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곤란함에 젖은 록펠러의 표정은 아직까지도 변함이 없었다.
“영주님이 써주신 차용증서라 하면 영주님의 신용을 믿고 저희가 대출해 드리는 겁니다. 하지만 영주님의 신용만 믿고 빌려드리기엔 이번에 빌려 가실 8,000달란트가 너무 큽니다.”
“뭐? 그럼 내 신용에 문제 있다고 생각하는 겐가?”
“듣기엔 무척 불쾌하시겠지만, 지금까지는 영주님을 믿고 영주님이 써주신 차용증서를 담보로 대출을 해드렸습니다만. 지금 그 액수는 저희로서도 곤란합니다.”
그러자 근처에 있던 카터도 지극히 동의한다는 표정으로 고개까지 끄덕이며 록펠러 편을 들어주었다.
‘그래, 뭘 믿고 8,000달란트나 빌려줘. 아무리 영주라지만 미치지 않고서야 그냥 빌려줄 수는 없지.’
“맞습니다. 이번 대출은 영주님이 써주신 차용증서만으로는 곤란합니다.”
영주의 표정이 왈칵 구겨진 채 날이 선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뭘 어떻게 하란 말이야? 내 신용으로도 안 되면 뭐, 여기 영지라도 담보로 잡으라는 거냐?”
그 말에 기다렸다는 듯이 록펠러가 나섰다.
“영지까지는 아니지만…… 적어도 어느 정도 땅을 담보로 해주시면 저희도 8,000달란트를 대출해 드리는 데 큰 무리가 없을 것 같습니다.”
영지나 땅이나 어차피 그 말이 그 말이지 않은가?
영주의 표정이 무섭게 썩어들어갔다.
‘땅을 담보로 대출하라고?’
곧바로 대답을 내놓지 못하는 영주에게 록펠러는 말을 이었다.
“저희도 그 정도가 아니라면 8,000달란트는 무리입니다. 하지만 액수를 낮추신다면 어느 정도 조정이 가능할 거 같습니다.”
록펠러는 그의 표정 속에 감춰진 탐욕을 보았기에, 그가 어떤 식으로든 8,000달란트를 빌려 갈 것을 알고 있었다.
그렇지 않다면 저리 고민할 필요도 없으리라.
“땅은…… 안 돼. 이 땅을 잃으면 내가 뭐가 되겠는가?”
영주가 말을 이었다.
“여기서 내가 주인 행세를 하는 것도 다 이 땅의 주인이기 때문이야. 이 땅을 담보로 하다가 자칫 잃기라도 하면 내가 이 땅에서 계속 영주 노릇을 할 수 있으리라 보는가?”
땅을 담보로 잡을 수 없다?
그렇다면 다른 걸로 담보를 잡으면 그만.
“아니면 이 영지에서 생산되는 올해 수확물을 담보로 잡으셔도 됩니다.”
“올해 수확물을 담보로 잡으라고?”
“네, 그걸로 담보를 잡으시면 어느 정도 대출이 가능할 것 같습니다.”
농노에겐 일정량의 수확물을 세금 대신 받고 있었다.
그것을 담보로 한다는 것은 영지 내에서 걷히는 세수가 줄어드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큭…… 자네, 굉장히 곤란한 것만 원하는군.”
“영주님, 저희도 무언가를 담보로 잡아야 영주님께 그만한 돈을 대출해 드릴 수 있는 거 아니겠습니까?”
이 자리서 카터는 대화에 끼지 않았지만 속으로 록펠러를 응원하고 있었다.
아마 영주를 상대로 저렇게나 밀어붙일 수 있는 영지민은 록펠러가 유일할 것이다.
‘일 하나는 진짜 기똥차다니까.’
제아무리 영주라 해도 자기 땅에서 장사하고 있는 방코 업자를 제 마음대로 다룰 순 없었다.
그들은 ‘방코 연합’을 결성하여 그들에게 위해를 가하거나 불이익을 주는 군주에게 서로 협력하여 맞서고 있었으니까.
‘지옥에나 떨어질 것들이라 내 마음대로 해버릴 수도 없고. 그놈의 방코 연합이 골치야. 그런 것만 없었다면…….’
소문이 잘못 나면 앞으로 모든 방코 업자와 거래를 할 수 없었다.
방코 연합과 관련이 깊은 황실도 문제.
영지를 운영하다 보면 급전이 필요한 경우도 많았으니, 방코 업자가 꼭 필요한 영주 입장에선 어떻게든 그들과 타협을 봐야만 하는 것이다.
“크흠! 좋아. 대신 땅은 안 돼. 하지만 올해 수확물은 담보로 잡게 해주지. 올해 수확물을 담보로 잡으면 어느 정도까지 가능하나?”
“단순히 올해 수확물로만 담보를 잡으시면 최대 4,000달란트가 가능할 것 같습니다.”
“고작 그것밖에 안 되나?”
“이것도 영주님이 써주신 차용증서까지 고려한 액수입니다. 단순히 수확물만으로는 2,000달란트가 한계입니다.”
“큭! 그럼 땅을 담보로 하면 얼마까지 가능하나?”
원하던 게 나왔다.
큰돈을 빌려 가려면 결국 가장 많은 가치를 가지고 있는 땅을 담보로 할 수밖에 없었다.
자연스레 올라가는 입꼬리를 애써 말리며 록펠러가 말을 이었다.
“만약 땅을 담보로 하신다면 생각해 볼 것도 없이 8,000달란트 전부 가능하십니다. 해당 액수만큼의 땅을 담보로 잡으면 그만이니까요. 그리고 여기선 영주님이 써주시는 차용증서도 필요 없습니다.”
일개 방코 업자도 아닌 가게에 속한 조수 따위가 자신의 땅을 노리고 저렇게 말할 순 없었다.
영주도 제 땅을 담보로 잡히는 게 매우 불쾌하긴 했으나, 와이번을 타고 날 수 있다는 생각에 이성의 끈이 서서히 놓아지고 있었다.
‘좀 무리하면 와이번이야. 와이번이라고.’
합리화?
물론 가능했다.
와이번을 타는 건 그의 욕심이었지만, 이 대출은 영지의 존속이 걸린 문제였다.
자칫 잘못하면 고래 싸움에 낀 새우가 되어 영지 자체를 잃을 수 있는 일.
“좋아. 땅을 담보로 하지. 대신 대출은 바로 되는 거겠지?”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이 록펠러는 깃펜과 서랍에서 가게의 차용증서 뭉치를 꺼내 들었다.
당장 현물로 내줄 수 있는 금화의 양은 2,500달란트가 전부였으나, 이처럼 종이로 된 차용증서를 이용하면 없는 5,500달란트를 허공에서 찍어내어 영주에게 대출해 줄 수가 있는 것이다.
‘종이화폐의 마술이란 건 바로 이런 거지.’
“네, 영주님이 원하신다면 지금 당장 이 자리서 8,000달란트를 대출해 드릴 수 있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영주가 잠시 의아해했다.
‘전부 차용증서로 내주는 건가? 뭐 상관없지만.’
사람들도 방코에서 진짜 금화를 가져가는 것보단 종이로 된 차용증서를 가져가는 걸 선호했다.
가게에서 발행해 준 차용증서만 있으면 방코에 찾아가 언제든지 진짜 금화로 바꿔갈 수 있었고, 그런 이유로 휴대와 거래가 불편한 진짜 금화보단 단순히 숫자만 적혀 있는 차용증서가 사용하기 더 편리했기 때문이다.
‘종이화폐란 게 바로 이런 식으로 탄생하게 됐지.’
영주가 의문을 품기도 전에 록펠러가 선수를 쳤다.
“8,000달란트를 전부 금화로 가져가시는 건 영주님께서도 매우 번거로우실 테니, 따로 필요하신 양만큼 금화로 드리고 나머진 저희 가게의 차용증서로 대신하려고 합니다.”
“그 차용증서만 있으면 언제든 금화로 교환할 수 있는 거겠지?”
록펠러가 옅은 미소와 함께 입을 열었다.
“물론이죠. 언제든 금화로 바꿔 가실 수 있습니다. 그러니 휴대하기 편한 이 차용증서가 여러모로 좋은 거죠.”
영주가 잠시 생각하는 모습을 보이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좋아. 대신 차용증서는 100달란트 단위로 작게 쪼개서 여러 장 써주게. 그게 거래하기 편하니까.”
“네, 그럼 영주님께서 사용하시기 편하게 작은 단위로 쪼개서 발행해 드리겠습니다.”
영주가 가지고 있는 땅을 담보로 대출해 주는 것이었기에 카터는 근처 교구에서 고위 사제를 데려와 이번 거래의 증인으로 내세웠고, 그렇게 카터 방코에선 영주에게 땅을 담보로 수중에 있지도 않은 8,000달란트를 빌려줄 수 있었다.
모든 거래가 끝나고 조용해진 가게 안에서 카터가 걱정을 내비쳤다.
“이러다…… 문제는 안 생기겠지?”
카터 입장에선 수중에 없는 돈을 빌려줬으니 당연히 문제가 생길 거라 생각했으나 록펠러는 절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왜냐?
‘이미 검증된 세상이 있거든.’
“절대 문제 같은 건 안 생기죠. 절 믿으세요.”
그 대신.
“그리고 저흰 영주님이 매달 이자만 갚는다고 할 때 8,000달란트의 6퍼센트인 480달란트를 매달 이자수익으로 얻게 될 거예요. 그리고 이게 1년이 되면 5,760달란트가 되겠죠. 저희 수중에 있었던 돈은 고작 2,500달란트였지만, 1년 뒤엔 그게 8,260달란트가 되는 거죠. 없는 돈에서 이자까지 받아냈으니까요.”
“그렇게나 많이? 내가 평생을 일해서 1,000달란트를 손에 쥐었는데 고작 1년 만에 그렇게 벌어들인다는 소리냐?”
록펠러의 입꼬리가 길게 휘어졌다.
“카터 아저씨, 자고로 돈이란 건 말이죠. 이런 식으로 버는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