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금융명가의 창시자-35화 (35/181)

§35화 10. 믿음은 부를 창출한다(3)

대화를 마친 둘이 다시 모습을 드러내자 이제껏 불편한 기색으로 자리를 지키고 있던 영주가 입을 열었다.

“그래서 5,000달란트는 빌려 갈 수 있는 거겠지?”

상황이 상황인 만큼 꽤 많은 돈이 필요해진 영주는 이참에 크게 빌려 가기로 마음을 굳힌 상태였다.

선친의 조언 따윈 개나 줘버리고 당장 살길부터 찾은 것이다.

만약 빌려 간 액수가 너무 커서 나중에 문제가 생길 시, 그땐 자신의 힘을 아주 적극적으로 이용할 생각이었다.

자신은 이 땅의 주인인 자였다.

빌려간 액수가 크다고 한들, 한낱 방코 업자가 자신을 어찌하겠는가?

“기다리게 해서 정말 죄송합니다.”

“괜찮네. 그보다 대답이나 듣고 싶은데. 설마 지금 와서 없던 이야기라고 하진 않겠지?”

“아, 아닙니다.”

“그럼 5,000달란트는 지금 당장 빌려 갈 수 있는 거겠지?”

배짱도 좋아라.

아무리 상황이 상황이라지만 평소 빌려가던 액수에 몇십 배나 되는 금화를 덜컥 가져갈 생각을 하다니.

“한데 5,000달란트나 빌려 가실 생각이십니까?”

“왜? 당장 영지가 어찌 될지도 모르는데 그 정도 돈은 나도 필요하네.”

“평소 빌려 가신 금액보다 더 많이 빌려 가시는 것 같아서…….”

“문제라도 있나?”

“저도 영주님의 뜻을 모르는 건 아니지만…….”

카터가 영주의 눈치를 살피며 계속 말을 이었다.

“이번에 빌려 가실 액수가 워낙 커서요. 단순히 몇백 달란트도 아니고 5,000달란트나 되는 거금을 이리 빌려가셨다가 나중에 곤란해지시는 건 아닌지 그게 걱정입니다.”

영주의 시선이 마치 칼날처럼 카터에게 날아와 꽂혔다.

“이보게. 자넨 나를 못 믿는 겐가? 내가 이 땅의 주인인데.”

“아, 아닙니다. 제가 영주님을 못 믿을 리 있겠습니까?”

“그럼 그냥 빌려주면 되지 뭔 말이 그렇게 많아.”

영주는 잔뜩 불쾌해진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누가 보면 내가 여기 돈을 그냥 떼먹는 줄 알겠어. 난 그런 파렴치한 사람이 아닐세.”

“설마 영주님께서 제 돈을 떼먹으시겠습니까? 그런 의미로 말한 게 아니라…….”

“그만. 그쯤하고 빌려줄 수 있다면 군말하지 말고 그냥 빌려주게. 지금 상황이 급해. 이렇게 노닥거릴 시간이 없단 말일세.”

말을 마친 영주가 설핏 웃어 보였고, 카터는 그의 미소 속에 자리한 부정한 생각을 어느 정도 읽을 수 있었다.

과거에도 영주 같이 자신에게 저런 미소를 짓던 자가 있었던 것이다.

‘그때 그 녀석이랑 완전히 똑같아. 처음엔 잘 갚는다 싶더니 어느 순간부터는 큰돈을 빌려가서 그대로 잠수를 타버렸지. 놈을 찾느라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지금 생각해도 치가 떨려.’

카터의 경험상 모든 불량채무자가 처음부터 불량채무자였던 것은 아니었다.

그들도 한때는 신용이 좋은 우량채무자였었다.

그러던 자들이 어느 순간부터 사정이 변해 갑자기 불량채무자로 변질되는 것이다.

“크흠…….”

이쯤 되자 카터는 록펠러가 필요해짐을 느꼈다.

제아무리 산전수전 다 겪은 자신이라지만 이런 상황에서 능수능란하게 세 치 혀를 놀릴 수 있는 건 자신의 조수인 록펠러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자 눈치 빠르게 행동하는 록펠러가 둘 사이에 불쑥 끼어들었다.

“상황이 상황이니 영주님께서 말하신 5,000달란트는 무리 없이 빌려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록펠러가 불쑥 끼어든 것은 그다지 반가운 일이 아니었으나, 카터가 질질 끄는 대답을 속 시원하게 말해주니 영주 입장에선 록펠러를 싫어할 이유가 없었다.

“그래, 답답한 자네보다 자네 조수가 낫군. 빌려줄 수 있다고?”

“네, 당연히 빌려드릴 수 있습니다. 감히 누가 빌려가는 건데 저희가 그것을 거부하겠습니까?”

그 말에 영주는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듣기 좋군.”

“영주님, 그럼 5,000달란트면 되는 겁니까?”

“어차피 거기서 더 빌려줄 것도 아니잖나?”

“아닙니다. 더 필요하시다면 거기서 더 빌려드릴 의향도 있습니다.”

“뭐?”

그 말에 영주와 카터가 동시에 놀랐다.

영주는 이 방코에 숨은 돈이 더 있다는 사실에 놀란 눈치였고, 반면 카터의 생각은 이러했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5,000달란트에서 더 빌려준다고?’

어차피 없는 돈을 만들어서 빌려주는 거라 록펠러의 말이 불가능한 건 아니었으나, 너무 배짱 좋게 행동하는 록펠러의 말에 카터는 더더욱 마음을 졸일 수밖에 없었다.

이때 영주는 흡족하던 표정을 지우고 다시 표정을 구겼다.

그리고 그의 시선은 다시 칼날이 되어 카터에게 날아와 꽂혔다.

“자네, 대체 얼마나 많은 금화를 숨겨둔 겐가? 5,000달란트 이상이나 빌려줄 정도로 그렇게 금화가 많았나?”

없는 금화를 만들어서 빌려준다는 사실을 꿈에도 모르고 있던 영주는 그렇게 생각하며 카터를 압박했고, 졸지에 거짓말쟁이가 된 카터는 반사적으로 손사래를 쳤다.

“아, 아닙니다. 그런 게 아니라.”

카터의 시선이 무섭게 변하며 엉뚱한 말을 한 록펠러에게 날아와 꽂히자, 그제야 록펠러가 웃으며 상황 수습을 위해 나섰다.

“영주님, 그게 아닙니다. 저희 가게에서 빌려드릴 수 있는 금화의 양은 카터 아저씨가 개인 소유로 가지고 있는 5,000달란트가 전부입니다.”

“그럼 대체 어디서 빌려준다는 게냐?”

만약 금세공업자가 자기 돈 외에 남의 돈을 몰래 빌려줬다는 소문이 퍼지게 되면 영주 입장에서는 당연히 그 죄를 물을 수밖에 없었다.

하여 록펠러는 나중에 그 상황이 올 것을 대비하여 미리 영주에게 양해를 구하는 것이었다.

“영주님께선 저희 가게에서 금화를 빌려줄 때 남의 금화를 빌려주면 안 된다는 걸 알고 계시겠죠?”

“설마, 남의 금화를 빌려주겠다고?”

영주가 다소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그의 상식에서 벗어난 일이었기에 그러했다.

“그건 범죄야. 남의 금화는 당연히 남의 금화지, 그걸 왜 다른 사람에게 빌려주나? 자기 금화도 아닌데.”

“하지만 영주님. 상황이 상황이지 않습니까? 영주님께선 지금 당장 많은 금화가 필요하지만, 기존의 룰을 따르는 저희로서는 최대 5,000달란트밖에 빌려줄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영주님께서 이번 일을 눈감아주신다면 저희 역시 최대한으로 도와드릴 수가 있는 겁니다.”

영주는 계속 탐탁지 않은 표정이었다.

방코의 생명은 바로 신뢰였다.

그런 의미에서 사람들이 자기 목숨 같은 금화를 맡기는 것인데, 그런 금화로 장난을 치다니.

평소 같았으면 화부터 냈겠지만, 당장 돈이 급한 영주로서는 록펠러의 말을 그저 흘려들을 수가 없는 처지가 되었다.

“크흠!”

괜스레 헛기침을 하는 영주에게 록펠러는 은근슬쩍 제안을 하였다.

“저희가 이번 한 번만 위험을 무릅쓰고 크게 도와드릴 테니, 영주님께서도 저희 편의를 좀 봐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무슨 편의?”

“저희 소유의 금화만 빌려줄 수 있다는 기존의 룰을 어겨도 영주님께서 조용히 눈감아주시는 걸 바라는 겁니다. 그럼 저희도 이번에 영주님께 5,000달란트 이상을 빌려드리는 게 가능해지는 거죠.”

록펠러가 말을 이었다.

“물론 영주님께서 허락하신다면 말입니다.”

기존의 법 따윈 상황에 따라 충분히 바꿀 수 있는 게 바로 영주가 가진 힘이었다.

“크흠!”

괜스레 헛기침만 일삼던 영주가 제 턱수염을 매만지며 록펠러의 제안에 대해 생각해 봤다.

사실 생각해 볼 것도 없었다.

당장 돈은 급했고, 그 돈을 위해서라면 기존의 법 따윈 편의상 잠시 무시할 수 있었으니까.

“이번 한 번만 그렇게 해주면 되겠나?”

이왕지사 말을 꺼냈으니 록펠러는 이참에 확실한 허락을 구할 요량이었다.

“그래도 한 번 깨진 룰이 계속 지켜지긴 힘들 것 같습니다. 영주님께서도 편의를 보셨으니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 편의를 계속 제공하는 게 맞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저희가 몰래 고객들 금화를 빌려줄 수 있도록 영주님께서 좀 봐주셨으면 합니다.”

그런 록펠러의 말에 영주가 살며시 표정을 구겼다.

어린놈이 말은.

“여기 금화 말고 남의 금화까지 빌려주면 돈깨나 벌겠군. 돈 많이 벌어서 좋겠어.”

약간 비아냥거리는 영주의 말에 록펠러는 능글맞은 미소로 받아쳐주었다.

“그러면 영주님께 바칠 세금도 당연히 많아지겠죠. 저희만 아니라 영주님에게도 좋은 일이 될 것 같습니다.”

자신의 영지에 속한 방코에서 장사가 잘된다는 것은 영주 입장에서 환영할 일이었다.

장사가 잘된다는 건 세금을 많이 낸다는 소리와 다름이 없었으므로 그러했다.

“듣고 보니 문제만 안 생기면 그렇게 나쁠 건 없겠군. 하지만 그렇게 하면 분명 문제가 생길 텐데? 그땐 어떻게 하겠나?”

남의 금화까지 빌려주더라도 문제가 생기지 않게 되는 자세한 내막을 영주가 알아서는 곤란했다.

그래서 록펠러는 자세한 설명은 생략하기로 하고 이렇게 말해주었다.

“만약 문제가 생긴다면 저희가 알아서 책임지겠습니다. 그러니 영주님께서는 그 부분에 대해선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알아서 책임지겠다고? 그 말 장담할 수 있겠나?”

“네, 물론입니다.”

“카터.”

록펠러와 대화하던 영주가 가게 주인인 카터를 찾았다.

“네, 부르셨습니까?”

“자네, 저 말대로 책임질 수 있겠나?”

그 물음에 카터는 한 치의 머뭇거림도 보이지 않았다.

“아, 네, 물론이죠. 그러다 문제가 생기면 저희가 전적으로 책임지겠습니다.”

“그래? 배짱도 좋군. 책임도 그렇게 시원하게 지겠다니. 나중에 가서 절대 딴말하지 말게.”

“네, 그 부분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문제가 생긴다면 알아서 책임지겠다는 말에 영주도 더는 토를 달지 않기로 했다.

‘문제가 생기면 알아서 처리하겠지. 가진 돈도 많은데 문제가 생기겠어? 나야 세금만 왕창 뜯어 가면 되니까.’

카터는 영주와 마주하는 록펠러를 보며 여러 생각이 들고 있었다.

‘그걸 이런 식으로 해결한다고?’

그동안 남의 금화를 몰래 빌려주는 일로 크게 마음을 졸이고 있었는데, 그 문제를 이렇게 해결해 버릴 줄이야.

‘정말 기가 막힌 녀석이야. 그걸 이런 식으로 넘어가다니.’

아마 자신이었다면 그런 말조차 꺼내지 않았을 것이다.

영주가 거기서 어떤 태도를 취할지 가늠할 수 없었으니까.

하지만 영주가 납득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같이 이익을 본다는 식으로 유혹하니, 영주가 록펠러의 꾐에 넘어가지 않을 수가 없었고, 이를 지켜보던 카터는 연신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대체 커서 뭐가 되려고. 정말 무서운 애야.’

카터가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던 사이, 영주는 더 빌려갈 수 있는 금화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5,000달란트에서 더 빌린다라…….’

사실 그가 빌려 가기로 마음먹은 5,000달란트조차 적잖은 액수였다.

거기다 추가적인 대출이라니.

만약 돌아가신 그의 선친이 여기 이야기를 알았더라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만큼 쉽게 볼 일이 아니었으니까.

‘빚이야 천천히 갚으면 되고.’

하지만 영지 사정이 좋지 않았다.

국경 근처에서 발발한 두 세력 간의 전면전으로 인해 고래 싸움에 새우 등이 터질 것 같았으니까.

‘일단은 살고 봐야겠지.’

“그래서 얼마나 더 가능하겠나?”

만약 영주로부터 빌린 돈을 확실히 받을 수 있다면.

록펠러 입장에선 최대한 많이 빌려주는 게 좋았다.

‘이미 어떻게 돌려받을지 다 구상해 놨지. 판도 깔아놨고.’

그의 아버지인 한스 로스메디치가 땅에 묻혔을 때 오만방자하게 주둥아리를 털던 영주의 모습을 록펠러는 아직까지 잊지 않고 있었다.

‘자고로 받은 건 최대한 우아하게 돌려줘야지.’

누구는 칼로, 누구는 빚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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