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화 10. 믿음은 부를 창출한다(1)
제국에서 정한 규격대로 금화를 다듬던 카터는 잠시 하던 일을 멈추고 록펠러를 찾아가 말을 붙였다.
전에 했던 이야기를 마무리 지어야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록펠러, 네가 저번에 했던 얘기 있잖느냐?”
찾아오는 손님이 없어 한가하던 찰나, 카터가 찾아와 말을 붙이니 록펠러는 자연스레 그에게 시선을 주었다.
“어떤 얘기요?”
“그때 했던 그 이야기. 없는 돈을 빌려준다는 그 이야기 말이다.”
“아, 그 얘기요?”
록펠러가 조수로 일하기 이전의 카터는 오직 자신의 금화만 남에게 빌려주고 그 이자를 받아 수익을 내고 있었다.
그다음 록펠러가 오고 나서는 지금까지 손대지 않았던 손님들의 금화까지 몰래 빌려주었고, 그다음으로 아예 없는 금화까지 만들어 대출해 보는 건 어떻겠냐고 록펠러에게 제안을 받은 상태였다.
만약 록펠러가 가게의 주인이었다면 카터의 승인이 필요하지도 않았으나, 현재로선 그는 조수에 불과한 상태였다.
카터의 허락이 없다면 그 무엇도 할 수 없으니 록펠러는 자신의 생각을 그에게 알리고 허락을 구했던 것이다.
하지만 남이 맡긴 금화까지 빌려주는 것조차 마음을 졸이던 카터였으니, 그보다 한 발 더 나아간 없는 금화까지 만들어 빌려주는 건 더더욱 마음을 졸이는 일이었다.
그래서 며칠을 생각해 보다 마침내 결정을 내렸는지 록펠러에게 찾아와 이전의 이야기를 꺼내 든 것이다.
“어떻게 하실 거예요? 결정은 내리셨어요?”
“아무래도 말이다. 그건 좀…… 아닌 것 같아서.”
그래도 허락해 주리라 예상했었는데 카터가 의외로 사리는 모습을 보이자 록펠러는 실망을 금할 수 없었다.
“또 왜 그러세요? 고객들이 맡긴 금화까지 대출해 주는 것도 이미 허락하셨잖아요?”
남이 맡긴 금화를 몰래 대출해 주는 것도 문제였다.
그런데 그것을 허락한 자가 그보다 더 나아간 생각에는 동의를 못 하겠다니.
“아무리 생각해 봐도 굳이 그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어서 말이다. 이미 수익은 충분하지 않느냐?”
“아저씨, 저흰 대출업도 같이 하고 있잖아요? 그 대출업에서 남이 빌려 가는 돈이 많아야 얻는 수익도 당연히 늘어나는 거예요.”
“그건 알고 있지. 하지만 이런 좁은 곳에서 그렇게까지 많은 대출이 필요한지도 의문이고, 이전에 허락한 일도 매일 잠까지 설쳐가며 이상한 꿈을 꾸고 있어.”
“꿈이요? 무슨 꿈을 꾸시는데 그러세요?”
“나한테 금화를 맡긴 사람들이 우르르 찾아와 내 멱살을 붙잡고 내 금화까지 몽땅 가져가는 꿈을 말이다.”
카터의 말은 끝나지 않았다.
“그다음 시어들에게 끌려가 목이 매달리는 최후를 맞이하게 돼. 근데 웃긴 건 목이 교수대에 걸렸는데 죽질 않아. 죽질 않으니 몸부림을 치면서 모두의 웃음거리가 되고 만 거지.”
“나름 악몽이긴 하네요.”
“그 꿈을 가끔씩 꾸는데, 오늘 아침에도 꿨단다.”
록펠러는 짧게 한숨을 쉬었다.
“휴우~ 아저씨, 꿈은 현실과 반대라는 말은 모르세요?”
“알지. 하지만 꿈자리가 워낙 뒤숭숭해서…….”
“절대 그런 일이 생기지 않을 거란 건 아저씨께서 더 잘 알고 계시잖아요?”
“그래도 내 성격이 그런 걸 어쩌겠니? 책임이야 네가 지는 거지만 나한테도 타격이 없진 않을 거 아니냐?”
“그래서 아저씨께선 그 생각엔 동의하실 수 없다는 건가요?”
“미안하구나. 나도 너처럼 젊고 혈기왕성하면 한 번쯤 시도해 보겠는데, 지금은 뭐 아쉬운 것도 없고, 그냥 이대로 가게를 계속 끌고나가는 것도 나름 나쁘지 않은 것 같아서.”
실망스러웠으나 그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
없는 돈까지 찍어내어 대출해 줄 곳이 없었던 것이다.
“괜찮아요. 어차피 아저씨 말대로 저희가 그렇게까지 해서 대출해 줄 사람들이 없기도 하잖아요.”
“그렇지?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없는 돈까지 대출해 준다면 더 많은 수익을 창출할 수 있는 건 사실이었으나, 그 이전에 그만한 돈을 대출해 줄 수 있는 환경이 이 영지엔 아직 조성되지 않은 상태였다.
만약 영주가 주도하는 건축 사업이나 무역업 같이 큰돈이 필요한 일들이 주변에 많이 있다면 그들에게 돈을 빌려주는 방코 역시 성황일 수 있겠으나, 워낙 변방에 위치한 영지다 보니 큰돈이 필요한 사람이 적은 편이었다.
“그래도 뭔가 아쉽네요. 어차피 그렇게 한다고 해서 크게 문제 될 건 없는데.”
“그런데 말이다. 넌 어떻게 그리 확신할 수 있는 게냐? 말 그대로 가짜 금화를 찍어내어 유통하는 것도 아니고 그냥 없는 금화를 차용증서에다가 적어서 대출해 주는 건데, 그게 정말 문제를 안 일으킨다고 확신할 수 있는 거냐?”
그 말에 록펠러는 한 치의 머뭇거림도 보이지 않았다.
“네, 전 그렇게 생각하는데요?”
“왜? 이건 고객들의 금화에 손을 대는 것보다 더 위험한 일이야. 말 그대로 없는 금화잖니?”
록펠러가 설핏 웃어 보였다.
“저희가 없는 금화를 차용증서에 써서 대출해 준다고 해도 사람들이 그걸 직접적으로 확인해 보진 않잖아요?”
“만약 확인한다면? 그땐 어쩔 거냐?”
그 물음에 록펠러는 오히려 그에게 반문했다.
“카터 아저씨, 아저씨는 금화에다가 자기 이름을 새겨 넣으세요? 금화엔 주인이란 게 없어요. 제 금화가 잘 있는지 의심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을 데려다 금고 안에 있는 금화만 보여주면 되는 거예요.”
“그렇기야 하다만…….”
“이게 문제가 되려면 결국 저희에게 금화를 맡긴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와 금고 안을 확인해 보는 수밖에 없어요. 하지만 그럴 일이 과연 있을까요?”
록펠러의 물음에 카터는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그럴 수도 있지 않냐고 반문하려고 해도, 절대 그럴 일이 없는 것이다.
‘뱅크런(Bank Run)은 그 어떤 은행도 가능한 일이지. 설령 이 은행은 절대 안 망할 거라고 확신하는 그 은행조차 가입한 모든 고객이 일시에 찾아간다면 뱅크런은 피할 수 없지.’
그렇게 되는 이유?
‘애당초 믿음 빵빵한 그들조차 없는 돈까지 만들어 대출해 준 상태니까. 그러니 수중에 그만한 돈이 없는 거지. 그리고 은행들은 그 뱅크런 이전에 없는 돈까지 대출해 주며 이자수익을 창출해 내는 거고.’
그런 이유로 록펠러 역시 현대 금융의 기만을 여기서 보일 생각이었던 것이다.
“좋아요. 대신 아저씨 생각과 다르게 갑자기 많은 대출이 필요해진다면 그땐 다시 한번 제가 한 말을 생각해 보세요.”
그럴 일이 과연 있을까?
카터가 잠시 고민하던 사이 록펠러가 말을 이었다.
“그렇게 좋은 기회는 흔치 않으니까요.”
제국 변방.
한때는 아즈락 골드마인이라 불리며 대륙에서 제일가는 금광지대였으나, 현재는 작은 금맥조차 남아 있지 않은 죽은 땅이 되어버렸다.
그런 곳에 갑자기 큰돈이 필요한 사람이 있을 수 있을까?
‘있지. 당장은 아니더라도 슬슬 그 돈이 필요한 사람이 나올 거다. 누군지는 말하지 않겠지만.’
몬테펠트로 영지와 같이 제국 변방에 위치한 곳은 타 세력들과 국경을 접하고 있어서 시기가 잘못되면 많은 분란과 분쟁을 일으키기도 했다.
‘몬테펠트로 영지는 변방치곤 다른 곳보다 다소 조용한 편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영원히 평화로운 곳은 아니지. 왜냐면 곧 드워프와 오크가 제대로 한판 붙을 거거든.’
전쟁엔 많은 돈이 필요하고, 그 돈을 대출해 주는 곳은 이자수익으로 막대한 부를 창출하게 된다.
제국 내의 분쟁이 아닌 대륙 전체적인 분쟁에서 가장 많은 이익을 창출해 내는 곳이 바로 고블린방크였다.
‘고블린 녀석들이 슬슬 마무리 작업을 할 때가 된 거 같은데?’
현 시점에서 몬테펠트로 영지는 그 누구에게도 주목받지 못하는 곳이었다.
다시 한번 무지막한 금을 뿜어내는 금광돼지가 되기 이전에는 제국, 또는 드워프들에게도 관심받지 못하는 소외지역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영지 근처에서 일어나는 두 세력 간의 전쟁까지 무시할 순 없었다.
‘그렇게 되면 드워프와 오크가 제대로 한판 붙을 거다.’
그 계기가 되는 게 바로 오크들의 토템 우상이었다.
오크들은 대개 부족 단위를 이루고 살아가는데, 그 부족을 이끄는 부족장보다 더 높은 위치에 있는 게 바로 부족의 주술사인 샤먼이었다.
그 샤먼이 가장 신성시 여기는 게 바로 몬스터와 짐승의 뼈로 이뤄진 토템 우상.
그 토템 우상을 고블린들이 몰래 부수고 평소 오크들과 고깝게 지내던 드워프들의 짓이라 소문을 낸 것이다.
‘토템 전쟁이었나? 아무튼 그 전쟁이 시작되면 오크 토벌도 문제가 생길 거고, 여기도 마냥 조용히 있을 순 없을 거다.’
고래 싸움에 새우 등이 터질 순 없는 법.
만약 그 전쟁이 발발한다면 가장 똥줄 탈 사람은 따로 있었다.
록펠러는 머잖아 찾아올 누군가를 기대했다.
‘아마 대출이 많이 필요할 거다. 가능한 많이.’
며칠이 지나자 영주가 고용한 하운드 용병대가 영지 근처에서 어슬렁거리던 오크 무리를 영지 밖으로 쫓아냈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하운드 용병대에 임시로 고용됐던 마법사의 활약이 가장 두드러졌다고 하는데, 이를 계기로 영지 안은 한동안 축제 분위기였다.
골치거리던 오크 무리가 영지 밖으로 밀려났으니 당연히 좋아할 수밖에.
하지만 소문을 들은 록펠러는 마냥 안도하는 표정은 아니었다.
오크 토벌이 그렇게 쉽게 끝날 거라 생각 자체를 안 했던 것이다.
‘내가 생각하는 시기가 맞다면 슬슬 조짐이 보일 텐데?’
그렇게 오크 토벌이 마무리되나 싶더니 이내 엄청난 소문이 영지 안을 덮치기 시작했다.
영지 밖 근처로 대규모의 오크군이 집결되고 있다는 소문이었다.
물론 영지 밖의 이야기라 몬테펠트로 영지의 직접적인 문제는 아니었으나, 대규모의 부족 오크들이 대군을 만들었다는 사실에 영지 안은 발칵 뒤집어졌고, 그 소식을 접한 영주 역시 놀라긴 마찬가지였다.
“카터! 자네 있나!”
며칠 동안 밤을 새웠는지 핼쑥해진 몰골로 카터 방코를 찾아온 영주가 대뜸 카터부터 찾았다.
“무슨 일이시죠?”
영주는 카터 대신 자신을 상대하는 록펠러에게 표정부터 구기고 봤다.
“어서 카터나 불러봐. 카터랑 긴히 할 얘기가 있으니까.”
왠지 나설 자리가 아닌 것 같아 록펠러는 영주의 요구대로 카터를 불러냈다.
카터가 찾아오자 영주는 대뜸 대출부터 물어봤다.
“단도직입적으로 자네, 얼마까지 빌려줄 수 있나?”
“갑자기 왜 그러시는 겁니까?”
“급하게 돈이 필요해졌어. 이건 이 영지를 위해서도 아주 중요한 일이야. 자네도 날 도와줬으면 하네.”
“설마…… 그 소문이 사실인 겁니까?”
사색이 된 카터가 묻자 영주는 잔뜩 찌푸린 표정으로 제 앞머리를 벅벅 긁었다.
“골치 아프게 됐어. 아무래도 영지 밖에서 크게 붙을 모양이야. 시어들이 가서 보고 왔는데, 양쪽 규모가 상당하다고 하더군. 저 정도면 거의 세력 간 전면전인데.”
“그래도 저희와 관련은 없는 거 아닙니까?”
“따지고 보면 저건 남의 일이긴 하지.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안심할 순 없다네. 저러다 수틀리면 이쪽으로 넘어오는 건 일도 아니니까.”
“황도에다간 아무 말도 안 하신 겁니까? 지원이라도 요청하셔야죠.”
그 말에 영주의 표정은 더욱 어두워졌다.
“관심 밖의 지역이라 그런지 폐하께서도 아주 형식적으로 도움을 주려는 모양이야. 섭섭할 정도로.”
“그래도 같은 제국 사람인데 폐하께서 저흴 이대로 버리시겠습니까?”
영주는 그에 대한 말을 아끼며 다시 물어보았다.
“아무튼 자네 얼마까지 빌려줄 수 있겠나? 최대한 많은 돈이 필요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