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화 08. 화폐는 믿음이다(4)
록펠러는 사내의 말에 딴죽을 걸고 싶었지만 그러지 않기로 했다.
정안을 가진 마법사와 말을 더 섞어 봤자 좋을 게 있을까?
피곤해지는 건 딱 질색이었다.
‘소설 속 히로인과 만난 건 재밌었지만 이 이상 대화는 나한테 득이 될 게 별로 없어 보이는데?’
소녀를 회유하고자 하는 사내의 정중한 물음이 이어졌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래도 남겠다면 하면 막을 수 없는 게 그의 입장이었으나 자신은 이미 충분한 설명을 했다고 판단하여 잠자코 소녀의 대답을 기다렸다.
사내가 기다리자 짧게 고민하던 소녀가 못내 아쉬운 표정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내가…… 잘못 본 건가?’
그녀는 아직 나이 어린 소녀였다.
타고난 재능은 최고일지 몰라도 경험이 부족하여 그 판단이 미숙할 수 있었다.
그러니 스승의 회유에 어렵게 발걸음을 돌린 것이다.
‘그럴지도.’
일개 영지민이 그가 몸담고 있는 땅의 주인을 상대로 돈을 받아간다는 게 그리 쉬운 일일까?
‘힘이 있다면 충분히 가능하지만 그러지 않고서야.’
아까 전 록펠러의 모습은 아직까지도 그녀의 뇌리에서 잊히지 않고 있었다.
평민인 자가 감히 그런 자신감을 보일 수 있다니.
나름 신선한 충격이었다.
‘두 번 다시 볼 일은 없겠지만…….’
미련이 남지 않는 건 아니었으나 소녀는 못내 아쉬움을 떨쳐내고 사내를 따라 제 길로 떠나갔다.
둘이 떠나가자 록펠러는 짧게 한숨을 돌렸다.
“휴~”
동시에 상황을 예의주시하고 있던 카터가 나와 록펠러에게 말을 붙였다.
“방금 마법사였니?”
어쩌면 일개 영지민에게 마법사란 존재는 영주보다 더 두려운 존재가 될 수 있었다.
그러니 알아서 몸을 사렸던 카터가 떠나가는 마법사와 맞물려 나타난 것이다.
“네, 아마도요.”
“다행이구나. 마법사를 상대로 정말 큰일 날 뻔했어.”
가슴을 쓸어내리며 크게 안도하는 카터를 두고 록펠러는 피식 웃을 수밖에 없었다.
‘진짜 새가슴이라도 되시는 모양이야.’
카터가 록펠러에게 물었다.
“그보다 우리 일을 들킨 건 아니겠지?”
“걱정 마세요. 그냥 의심만 하다가 돌아간 거니까.”
“그렇다면 정말 다행이구나. 만약 저 마법사들이 우리 계획을 다 눈치채고 영주님께 고자질했다면 우리만 큰일 나는 거 아니겠니?”
록펠러는 보란 듯이 웃어보였다.
“저희야 큰일 날 게 뭐 있겠어요? 어차피 잘못이야 영주님께서 하는 건데. 저희야 잘못 없어요. 잘못은 자신의 채무를 우습게 안 영주님이 문제죠.”
“그야…… 그렇긴 하지.”
“그리고 너무 걱정 마세요. 어차피 저희 계획은 당장을 보고 하는 게 아니니까요. 어느 정도 충분한 시간이 흘러야 하고.”
록펠러가 말을 이었다.
“또 영주님께서 그만한 빚을 졌을 때, 그때 잭팟이 터지듯 저희도 득을 보는 구조니까요.”
록펠러의 말처럼 그들의 계획은 당장 이루어지는 게 아니었다.
어쩌면 수년이 걸릴지도 모르는 일.
그만큼 힘이 없는 자가 힘이 있는 자를 상대로 채권추심을 행하는 게 쉽지 않았던 것이다.
“방금 온 마법사들이 저희 계획을 눈치챌 순 없을 거예요. 당장 불거져 나오는 문제도 없거니와 막상 그 문제가 터진다 해도 저 사람들은 여기 일은 까마득히 잊고 있을걸요? 그땐 여기 시간이 엄청 흘러가 있을 테니까.”
“그렇겠지? 나도 그 생각이다.”
“그러니까 그렇게 너무 맘 졸이지 마세요. 아무 문제 없으니까요.”
“어휴, 나도 크게 맘을 먹어야 하는데 이놈의 작은 가슴이.”
답답함에 제 가슴을 탕탕! 치던 카터가 이내 다른 걸 물어보았다.
기다림 역시 그에겐 또 다른 문제였던 것이다.
“그나저나 우리가 원하는 그때까지 기다리려면 정말 숨이 넘어가겠구나. 대체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는 거니? 보니까 사람들이 슬슬 우리가 만든 새로운 골드 차용증서를 쓰고 있는 것 같던데.”
그 물음에 록펠러는 절대 조급해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대박을 노리는 자가 반드시 가져야하는 게 바로 기다림이란 녀석이었으니까.
“저희의 기다림이 지루하면 지루할수록, 그것이 가져다주는 열매는 아마 상상을 하기 힘들 정도로 달콤할 거예요. 계속 기다리세요. 여기 사람들이 저희가 발행한 골드 차용증서를 마치 돈처럼 쓸 때까지요.”
록펠러가 말을 이었다.
“그리고 이 일은 절대 하루아침에 되는 게 아니죠. 적게는 몇 년, 정말 많으면 10년이 걸릴 수도 있어요.”
록펠러의 나이 아직 15살.
여기서 수년이 더 걸린다 할지라도 록펠러는 그다지 손해 보는 게 없는 나이였다.
그만큼 많이 어렸으니까.
‘여기서 3년, 5년이 걸려도 나야 아쉬울 건 없지. 어차피 너무 어려서 성년이 될 때까지 어느 정도 시간이 필요하거든.’
카터의 그늘에서 벗어나 스스로 독립하기 위해서라도 성년의 나이는 매우 중요했다.
제국 풍습에 의하면 18살이 넘어야 비로소 어엿한 성인 대접을 받을 수 있었으니까.
“그리고 당장 돈이 아쉬운 거라면 그건 너무 걱정 마세요. 저희가 계획한 거 외에 돈을 쓸어 담을 수 있는 방법이야 또 있으니까요.”
그 말에 카터가 두 귀를 쫑긋 세웠다.
“뭐라고? 지금 뭐라고 했니?”
“뭐라고 하긴요. 아저씨가 좋아하시는 돈 버는 방법이 또 있다고 했죠.”
카터는 제 심장이 쿵쾅쿵쾅 요동치는 걸 느꼈다.
그만큼 돈 버는 게 좋았던 것이다.
“대체 어떻게 말이냐? 지금도 나름 나쁘지 않게 벌고 있는데, 여기서 더 벌 수 있다고 말하는 거냐?”
“네, 때가 됐을 때 저희가 큰 득을 보려면 일단 영주님께서 많은 빚을 져야 하잖아요?”
“그렇지! 그래야겠지.”
“그러려면 우선 저희가 가진 돈이 많아야 하지 않겠어요? 그래야 저희가 영주님께 돈을 많이 빌려줄 거 아니에요?”
카터의 고개가 빠르게 끄덕여졌다.
“당연하지. 그런데 대체 어떻게 더 벌 수 있다는 말이냐? 내가 가진 지식으론 이 이상 돈을 벌 수 있는 방법이 없는데.”
그 말에 록펠러는 그저 씨익 웃을 뿐이었다.
‘이제 슬슬 3단계로 넘어가야겠네.’
“아저씨는 이제까지 자기 돈만 빌려주고 이자를 받으셨죠?”
이게 1단계.
그 말을 카터는 부정하지 않았다.
“그랬었지.”
“그다음 제가 오고 나서 몰래 고객들 돈까지 빌려줬구요.”
2단계.
“그래, 그래서 뭘 어떻게 하자는 소리냐?”
현대 금융이 모두를 기만하는 그 깜찍한 수를.
록펠러 역시 모르지 않았다.
노골적으로 자신의 미소를 짙게 하는 록펠러가 마지막 3단계에 대해 언급해 주었다.
“이제부터는 고객들 돈뿐만 아니라 없는 돈까지 빌려줄 거예요.”
그 말에 카터는 한동안 멍한 표정을 지울 수가 없었다.
뭐, 뭐라고?
저게 무슨 정신 나간 소리지?
“그게 무슨 소리야? 없는 돈까지 빌려주겠다니.”
록펠러는 여전히 웃고 있었다.
“뭐랄까? 나름 이 바닥의 서프라이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