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화 08. 화폐는 믿음이다(3)
한 마리의 토끼가 호랑이 굴로 찾아가 돈을 받아온다는 게 현실적으로 가능한 것일까?
아무리 피와 눈물도 없는 방코라지만 둘이 듣기엔 너무 심한 농담이었다.
“…….”
둘 다 자리에 서서 할 말을 잊어버렸다.
저 가당치도 않은 농담을 그저 농담으로 흘려들어야 할지.
아니면 농담이 될지 진담이 될지 이 자리서 자세히 따져봐야 하는 것인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던 것이다.
“……받아낸다고?”
일개 방코 업자가 한 영지의 주인을 상대로?
“어떻게?”
자연스러운 소녀의 반응에 록펠러는 여전히 웃는 얼굴이었다.
“그야 잘 받아내면 되겠죠?”
“농담이…… 좀 지나치구나.”
따져볼 가치도 없다고 판단했는지 문턱에 선 사내가 소녀를 불렀다.
“이자벨라 아가씨, 가시죠.”
록펠러가 너무 당연시 말했기에 사내도 순간 의심을 했었다.
하지만 저 소년이 무엇을 말하든 토끼가 호랑이 굴로 찾아가 빌린 돈을 받아오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기에 사내는 소년의 말을 한낱 개소리로 치부해 버린 것이다.
그사이.
록펠러는 전혀 새로운 것에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잠깐 저 여자 이름이 이자벨라라고?’
록펠러는 찾아온 소녀의 이름을 듣고선 약간 놀란 기색을 보였다.
‘그럼 아까 감별용 아티팩트를 보고 반응을 보인 게 설마 그것 때문인가?’
아주 작은 단서들이었지만.
이 자리서 밝혀진 소녀의 이름과 아까 전 소녀의 미묘한 표정 변화로 인해 록펠러는 소녀의 정체를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게 되었다.
‘정말 놀랄 노 자네. 하긴 소설 속 모든 이야기가 소설에 전부 나와 있는 건 아니니까.’
아주 놀랍게도.
소녀는 훗날 주인공과 엮이게 되는 여러 히로인 중 하나였다.
‘나이트로드 이자벨라.’
마법명가로 불리는 싱클레어 소속의 마법사로 주인공과는 제법 썸씽이 있던 여자 캐릭터였다.
‘그럼 같이 있는 남자는 사냥개 제이슨인가? 이자벨라 성장기엔 스승과 제자처럼 붙어 다녔다고 했었지.’
의심은 곧 확신으로 바뀌었다.
소설 속에 묘사되어 있던 둘의 모습과 완전 판박이었던 것이다.
‘쪽빛 머리칼을 가진 차가운 인상의 마법사. 여기선 아직 어리지만 아마 맞을 거야. 그리고 훤칠한 키에 뚜렷한 이목구비를 가진 교관 출신의 사냥개. 둘 다 소설 속 묘사 그대로네.’
나이트로드란 이명이 붙어 있을 정도로 소녀가 다루는 마법들은 전부 어둠 속성과 관련이 깊었다.
‘그렇다고 마녀 같은 건 아니고.’
다루는 속성 자체가 어둠이었을 뿐, 악마 혹은 사령술과 관련이 깊은 흑마법과는 전혀 무관했고, 소설 속에서도 그녀는 제법 ‘착한 편’이었다.
‘소설 속 히로인을 여기서 볼 줄이야. 어렸을 때 교관 출신 사냥개랑 대륙 여기저기를 돌아다녔다고 하던데 그 말이 사실인가 보네.’
그렇다면 히로인 중 하나인 그녀가 가문의 사냥개와 함께 제국의 변방이라 할 수 있는 이곳에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설마…… 하운드 용병대에서 불렀다는 마법사가 저 사람들인가?’
확신은 할 수 없었지만, 이런 변방에 마법사가 등장하는 일은 그리 흔치 않은 일이었다.
또한 최근에 오크 주술사 문제로 마법사를 고용한다는 이야기가 돌았던 만큼, 어느 정도 의심은 해볼 만한 일이었다.
“혹시…… 마법사 같은 건 아니시죠?”
뜬금없는 질문에 이자벨라가 약간 당황했다.
자신들이 마법사라는 사실을 아직 밝히지도 않았는데, 세상 제일로 평범해 보이는 방코 소년이 자신들의 정체를 넘겨짚듯 맞췄기에 그러했다.
“그걸…… 왜 묻는 거지?”
“그게 오크 토벌로 하운드 용병대에서 마법사를 고용한다는 소문이 돌아서요. 밖에서 온 외지인이고, 또 마법사들이 즐겨 입는다는 로브를 입고 계셔서 혹시나 해서 물어봤습니다.”
“로브는 귀족이나 성직자들도 많이 입는데?”
“로브의 질감이 아주 좋아 보이네요. 제가 이 자리서 여러 귀족들을 만나봤지만 그렇게 질 좋은 로브를 입은 사람은 이번이 처음이거든요. 여기 영부인님도 그런 옷은 못 입어요. 그리고 성직자들이야 대부분 수수하게 입고 다니니 절대 아니죠. 그렇다면 여기 귀족보다 더 상위 귀족이든가 아니면 마법사 같은 거겠죠. 마법사야 부자니까요.”
대답을 피하는 이자벨라가 뒤를 힐끗 돌아보자 제이슨도 약간 난처한 기색을 보이고 있었다.
자신들이 마법사라는 사실을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도록 주변의 마나 흐름까지 극도로 제한한 상태에서 그들의 정체가 탄로 났으니 나름 곤혹스러워진 것이다.
‘촉이 좋은 건가? 그걸 어떻게 맞힌 거지? 보통은 그냥 귀족으로 보던데.’
자신들이 고용된 마법사라는 사실을 굳이 알릴 필요는 없었으나, 소년의 추리가 나름 나쁘지 않았기 무작정 부정할 수도 없는 노릇이 되었다.
“쓸데없는 걸 물어보는구나.”
사내가 불편한 기색을 내비치자 록펠러가 뒷머리를 긁적였다.
“아니면 아닌 거죠 뭘. 그냥 물어본 거예요. 별 의미 없어요.”
제국 변방.
어차피 정체가 탄로 나도 큰 문제가 없을 거라 생각한 제이슨이 이내 그 물음에 긍정해 주었다.
“촉이 좋구나. 네 말대로 우린 마법사다.”
“정말 마법사예요? 와~ 그런데 어쩌다 여기까지 오신 거예요?”
“어쩌다 마주친 용병 하나가 도움을 청하더군. 오크 주술사를 해결할 방법이 없어 곤란한 상황이라고 하더군.”
물론 그들이 보수 때문에 여기까지 온 건 절대 아니었다.
‘아직 실전 경험이 미숙한 아가씨에겐 여러모로 좋은 경험이 될 테니까.’
“제안한 보수도 나쁘지 않아 도와주기로 했다.”
그 말을 듣고 록펠러가 눈가를 살며시 좁혔다.
‘용병대랑 우연히 마주친 건가? 하긴 싱클레어 가문의 마법사가 굳이 돈이 필요해서 움직이진 않았을 거야. 애당초 단가가 안 맞았을 테니까.’
다른 마법사들과 다르게 마법 명가로 불리는 싱클레어 소속 마법사들은 부르는 게 값이었다.
그러니 적당한 값으로 오크 주술사를 누를 수 있는 마법사를 원하던 하운드 용병대와 맞질 않았던 것이다.
“그럼 저희 영지를 위해 찾아오신 마법사분들이 맞는 거죠? 오크 토벌이요.”
아직도 가게 문턱에 선 사내는 대꾸 없이 고개만 끄덕여주었다.
록펠러가 상황에 맞는 반응을 보여주자 이를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소녀가 아까 하던 질문에 대한 답을 원했다.
“아까 하던 이야기나 마저 해줬으면 좋겠는데. 어떻게 하면 영주한테서 돈을 받아올 수 있다고 그렇게 확신한 거야?”
“아가씨, 쓸데없는 관심입니다. 일개 방코 업자가 영주를 상대로 감히 채권행사를 할 수 없습니다. 대체 무슨 수로 돈을 받아오겠습니까? 그는 이 땅의 주인인 자인데.”
사내가 이어 말했다.
“제가 볼 땐 저 소년의 작은 바람일 뿐입니다.”
소녀 역시 처음엔 그렇게 생각했으나 그녀에겐 남들과 다른 눈이 있었다.
순수한 마력으로 빚어진 눈.
그 눈은 사람의 심성까지 간접적으로 엿볼 수 있었고, 그 눈으로 보건대 소년은 아까 그 상황에서 절대 거짓을 고하지 않았었다.
순수하지 못한 기운이 내면에서 일렁이는 걸 보니 마치 자신의 속내를 감춘 자들과 비슷해 보였다.
즉, 숨겨둔 수가 있다는 말.
“말해봐. 난 듣고 싶어.”
근원의 지식에 다가서고 싶은 마법사들의 갈망은 대개 궁금한 것을 못 참는 태생적인 기질에 기반한 것이었다.
그녀 역시 그런 마법사의 기질을 타고 났으니 어떻게든 소년이 품고 있는 생각을 알고 싶어 했다.
하지만 그녀의 가려운 곳을 쉽게 긁어줄 록펠러가 아니었다.
록펠러는 소설 속 히로인이 제게 진한 관심을 보이자 능청스럽게 제 뒷머리를 긁적이기 시작했다.
“돈을 빌려 갔으면 당연히 갚아야 하는 거 아닌가요? 그래서 했던 말인데.”
그 능청스러움은 나름 완벽에 가까웠다.
극단에서 연기를 배운 것처럼 말이다.
그 모습을 보고 소녀가 약간 실망한 기색을 내비쳤으나 그것은 잠시였다.
‘아니야. 분명 무슨 꿍꿍이가 있어.’
그녀가 자신의 망막 위로 투영시킨 마안에는 분명하게 보이고 있었다.
그의 내면에 감춘 무언가가 말이다.
‘말하면 안 되니까? 그런 거야? 어떻게 하면 일개 영지민이 영주를 상대로 빌려준 돈을 다시 받아갈 수 있다는 거지?’
그 궁금증을 이기지 못하고 이자벨라는 저도 모르게 한 발자국 앞으로 나서고 말았다.
그 모습을 본 사내가 짐짓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 어떤 것에도 무덤덤한 반응을 보이는 그녀가 저렇게나 과한 관심을 갖다니.
‘저렇게까지 관심이 있으시다고? 하지만 말도 안 되는 소린데?’
소녀가 가진 마법적인 힘은 사내 역시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워낙 개소리라 의심조차 품지 않았던 것이다.
“아가씨, 아까 말했듯이 절대 불가능한 일입니다.”
“말해봐. 어떻게 하면 당신 같은 자가 영주를 상대로 돈을 받아갈 수 있다고 확신했는지. 아까 자신 있게 말했었잖아?”
사내가 재차 말렸으나 소녀의 의문을 막진 못했다.
“그냥 알려주면 안 돼? 알려줘도 상관없는 거면.”
방금 전까지만 해도 가게 밖으로 나가려던 소녀가 오히려 관한 관심을 보이자 록펠러도 약간 곤란한 입장이 됐다.
‘그러고 보니 쟤 싱클레어 마법사였지? 궁금한 거 못 참는.’
히로인 중 하나인 그녀가 주인공과 엮이게 되는 계기 역시 이런 상황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평소 궁금한 걸 참지 못하는 그녀가 우연히 생긴 의문으로 인해 주인공에게 강한 호기심이 생겼고, 그게 훗날 호감으로까지 변질된 것이었다.
‘저렇게까지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는 걸 보면 내가 거짓말을 했다는 걸 정안(正眼)으로 읽은 것 같은데…….’
그렇긴 해도 같은 힘을 가진 사내가 전혀 상반되는 반응을 보이고 있으니 록펠러 입장에서도 아예 답이 없는 건 아니었다.
“한 분은 말도 안 되는 헛소리라 하시고, 다른 분은 제가 무슨 대단한 생각을 감추고 있는 것처럼 제게 계속 알려달라고 하시는데, 사실 별거 없어요.”
그녀가 자신의 거짓된 속내를 간파할 수 있든 없든.
록펠러는 끝까지 같은 태도를 고수하기로 했다.
“그냥 가서 받아오는 게 당연한 일이잖아요? 그래서 했던 말인데 그걸 그렇게까지 오해하시면 제가 할 말이 없는데.”
소녀는 실망했고, 사내는 쓸데없이 시간을 허비했다고 생각했다.
“아가씨, 대개 방코에 속한 자들이 그렇듯. 그들은 항상 정직하지 않습니다. 웃는 가면을 쓰고 진실을 고하는 것처럼 보여도, 그 내면엔 항상 탐욕의 거짓이 자리하고 있죠. 어쩌면 아가씨께서 오해하신 것도 저 소년이 가진 부정함이 어느 정도 영향을 끼쳤을 수도 있습니다. 저희가 정안의 힘으로 상대의 거짓을 간파할 수 있다고는 하지만 그 본질까지 전부 꿰뚫어 보진 못합니다. 생각 자체를 읽는 건 아니니까요.”
소녀와 같은 힘을 가졌으면서도 사내가 다르게 해석하는 건 이러한 이유가 있었다.
애당초 방코와 관련된 자들은 정직하지 않았던 것이다.
항상 탐욕에 눈이 멀어 거짓말을 일삼고 남을 기만했으니까.
“제가 볼 땐 저 소년의 일방적인 바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다만 그것이 거짓처럼 보였던 것은 아무래도 저 소년이 방코에서 일해서 그런 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듭니다. 어차피 저들은.”
사내의 말이 이어졌다.
“감히 신의 영역에 간섭하여 신에게 노여움을 받는 자들입니다.”
“노여움을 받는다고?”
“본디 저들이 지탄받는 이유 중 하나가 돈을 빌려준 대가로 이자를 받기 때문입니다.”
“그게 문제가 되는 거야?”
“이자라 하면 돈을 빌려준 시간에 대한 반대급부인데, 아가씨도 아시다시피 시간은 오로지 신의 영역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이를 이용해 개인의 사리사욕을 챙기는 일이 용납될 수 없는 겁니다.”
사내가 제가 생각한 결론에 대해 말해주었다.
“그런 자들이니 정안으로 봐도 항상 거짓을 고하는 것처럼 내면이 부정하게 보이는 겁니다. 그걸 아가씨께서 잘못 보고 오해하셨을 수도 있죠.”
“그래?”
“저는 그럴 수도 있다고 말하는 겁니다. 판단은 오로지 아가씨께서 하시는 겁니다.”
그 말을 듣고 록펠러는 하마터면 저도 모르게 실소를 내뱉을 뻔했다.
시간의 영역에 간섭하여 신의 노여움을 받는다라…….
‘칼질로 삥이나 뜯어먹고, 마법으로 깡패가 된 사람들도 밥 먹듯이 드나드는 곳이 바로 시간의 영역인데, 그런 사람들은 신의 노여움이 아니라 아예 원수를 진 건가? 그런 거에 비하면 우린 엄청난 양반인 것 같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