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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융명가의 창시자-27화 (27/181)

§27화 08. 화폐는 믿음이다(2)

조용하던 소녀가 갑작스레 목소리를 내자 같이 있던 사내가 순간 당황했으나, 이내 당혹감을 지우며 차분해졌다.

종종 이러한 일이 있었던 것이다.

“높으신 분이다. 예를 갖춰라, 평민.”

사내가 엄하게 목소리를 내자 록펠러는 당황하지 않고 소녀를 향해 예를 보였다.

소녀가 종종 그랬던 것처럼, 록펠러 역시 이런 상황을 전에도 겪어봤기 때문.

‘귀족인가?’

처음부터 그런 느낌이 없지는 않았으나 록펠러가 한 가지 예상하지 못 했던 것은 저 둘 중에 소녀가 윗사람이라는 것에 있었다.

아무래도 소녀는 어느 귀족 가문의 영애로 보였다.

그리고 같이 온 사내는 소녀의 수행원 정도 될 것이다.

록펠러는 그렇게 넘겨짚었다.

‘그런데 어디 가문 사람들이지? 이번에 처음 보는 거 같은데.’

몬테펠트로 영지에 속한 귀족들이나 부유층 중에서 록펠러가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이제까지 방코 일을 해오면서 적어도 한두 번은 봤었으니까.

‘그럼 외지인인가?’

“몰라봬서 죄송합니다. 제가 아직 일을 한 지 얼마 안 돼서 높으신 분들을 잘 알아보지 못합니다. 부디 너그러이 용서해 주십시오.”

록펠러가 예를 갖춰 용서를 구하자 사내는 만족하며 입을 닫았다.

대화할 분위기가 어느 정도 조성하자 사내는 신호를 보냈고, 소녀는 록펠러를 향해 목소리를 냈다.

“우선 그대 이름이 무엇이냐?”

이곳에선 이름 따윈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건 그가 속한 집안과 가문의 이름.

그러니 소녀가 이름까지 물으며 확인하고 싶은 것은 록펠러가 어디 출신인지 알아보고자 함이었다.

가문이나 집안에 대해 알게 되면 어떤 사람인지 대충 짐작할 수 있었으니까.

“록펠러 로스메디치라 합니다.”

“로스메디치?”

태어나 처음 들어보는 곳이었다.

그래도 혹시 몰라 사내에게 시선을 주니 사내는 문제없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편하게 대화하셔도 되는 상대입니다.”

사내가 그렇게까지 말했다는 것은 소년을 상대함에 있어 그 무엇을 해도 괜찮다는 뜻이었다.

기분이 나빠 그의 뺨을 마음대로 때리거나, 아니면 죽이는 일까지 가능하다는 소리.

하지만 그녀는 단지 호기심이 동했을 뿐, 록펠러에게 위해를 가할 생각 따윈 추호도 없었다.

“로스메디치라…… 처음 들어보는구나. 평민인 그대에게 묻고 싶은 게 있다.”

“네, 무엇이든 답해드리겠습니다.”

“아까 거래한 차용증서, 거기서 아무런 문제도 못 느꼈느냐?”

록펠러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들어 소녀와 눈을 마주치려 했다가 급히 고개를 숙였다.

순간이었지만 마주친 시선이 제법 차가웠다.

‘이렇게 대화한 적이 처음이라 많이 낯설기는 하네. 그보다 방금 실수한 거 같은데.’

영주가 찾아와도 이렇게 대화한 적이 없었다.

그래서 본의 아니게 실수를 하고 말았는데, 소녀는 크게 개의치 않는 표정이었다.

“서로 보면서 대화하고 싶은데 괜찮겠지? 난 편한 대화를 원해.”

소녀가 묻자 사내는 조용히 고개만 끄덕여주었다.

소년에게 얼굴을 보여도 문제가 없을 정도로 록펠러의 존재가 아주 하찮다는 의미였다.

사내의 허락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스스로 후드를 벗는 소녀가 말을 이었다.

“고개를 들고 편히 보거라. 편하게 대화하고 싶으니.”

록펠러가 고개를 들자 자줏빛 머리칼을 가진 소녀가 자신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귀족 영애는 처음 보는 것 같은데.’

확실히 귀족 영애라 그런지 같은 또래의 순박한 평민 소녀들과는 느낌 자체가 달랐다.

대하기 어려운 느낌이랄까?

이것은 소녀가 귀족 영애라는 것도 있었지만, 그것보단 우월한 외모에서 오는 위압감이 더 컸다.

‘그래 봤자 새파란 애지.’

이내 자신이 성인의 정신을 가졌다는 것을 자각한 록펠러가 맘을 편히 먹자 마주한 소녀가 다시 물었다.

“이제 답해보거라. 거기서 아무 문제도 못 느꼈느냐?”

편하게 하라고 했으니 편하게 대할 수밖에.

“네, 저는 거기서 아무 문제도 못 느꼈습니다. 오히려 왜 그걸 물으시는지 제가 반대로 묻고 싶습니다.”

자리를 아무리 편하게 해줬다지만 묘하게 태도가 바뀐 그를 두고 사내가 살며시 미간 사이를 좁혔다.

‘겁이 없는 건가?’

보통 농노라 하면 귀족의 그림자조차 감히 밟을 수 없었고, 이것은 평민이라 해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신분이 낮은 자들이 귀족과 대화를 할 때도 보통 안절부절 못 하는 게 다반사인데, 감히 집안조차 제대로 알려져 있지 않은 한낱 평민 따위가 고위 가문의 영애를 상대로 저리 태연하게 말할 수 있다니.

살짝 언짢아졌던 사내는 이내 그 이유를 대강이나마 짐작할 수 있었다.

‘아직 애니까 겁이 없는 건가? 아니면…… 방코에서 계속 일하다 보니 귀족이 다소 만만하게 보인 걸까?’

콧대 높은 귀족들도 이따금씩 고압적인 자세를 누그러뜨리는 곳이 바로 방코라는 곳이었다.

자신의 피 같은 돈을 맡기거나 아니면 돈을 빌려가야 하니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되는 것인데, 그런 방코에서 일하는 소년이니 사내는 그런 이유가 아닐까 제 스스로 넘겨짚고 말았다.

‘어떻게 하면 날 저런 식으로 쳐다볼 수 있는 거지? 보통은 눈도 제대로 못 마주치던데.’

그리고 이것은 록펠러와 마주한 소녀 역시 마찬가지였다.

말이야 편하게 하길 바랐지만, 저 정도로 편하게 대할 줄은 상상도 못 한 것이다.

확실히 록펠러란 소년은 자신이 마주한 평민 중에서 가장 당돌하고 고개가 빳빳한 소년이었다.

‘이상한 사람이야.’

제 의지로 마련된 자리에서 오히려 불편함을 느낀 건 소녀 자신이었다.

반면 록펠러는 자신과 같은 평민을 상대하듯 소녀를 대함에 있어 전혀 불편함이 없는 상태였다.

‘왜 이렇게 뜸을 들여? 편하게 하라고 해서 편하게 했는데.’

“어디서 문제를 느끼셨는지 답해주신다면 저 역시 성실히 답해드리겠습니다.”

록펠러가 다시 묻자 그제야 소녀가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 차용증서엔 금화를 보장해 준다는 내용이 그 어디에도 없었다. 그런데도 여기선 문제없이 달란트를 내줬지. 여기서 이상한 점을 못 느끼겠느냐?”

“네, 그건 사실인데, 그 차용증서에 적힌 대로 그것은 영주님이 발행한 차용증서를 담보로 하는 것이니까요. 그러니 달란트로 교환해 준 겁니다.”

“여기 사람들은 영주의 신용이 영원불멸할 거라 믿는 거냐?”

“네, 물론이죠. 하늘 같은 영주님이시잖아요.”

그러자 같이 있던 사내가 둘 사이에 끼어들었다.

“영주도 영지도 영원불멸한 것은 없다 소년. 이날 이 시간에도 외세의 침략을 받거나 아니면 제국 내부의 정치적인 문제로 사라지는 영주 또는 영지는 존재할 테니까.”

록펠러는 그들이 어떤 부분에서 의문을 품고 문제를 삼으려는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이 문제 삼는 부분이 크게 드러나지 않는 게 바로 록펠러가 원하는 바였다.

‘나도 잘 알고 있지. 하지만 그런 무지함을 이용해야 하는 게 바로 우린데.’

“저희는 단 한 번도 영주님이나 이 영지가 망할 거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거든요. 그리고 하늘 같은 영주님인데 과연 문제가 생길까요?”

사내가 재차 지적했다.

“그런 안이한 생각이 문제라는 것이다. 제국 황실도 아닌 이런 변방의 영주가 발행한 아무것도 아닌 차용증서를 담보로 또 다른 차용증서를 발행하다니. 보통 차용증서라 하면 금화를 담보로 한다. 영주의 신용이 아니라.”

“저기, 말씀 도중에 굉장히 죄송한데요. 저희가 내준 달란트에 무슨 문제라도 있는 건가요?”

“그건 왜 묻는 거지?”

“방금 말씀하신 부분이 문제가 된다면 피해를 입는 건 당연히 저희 가게가 되는 건데, 지금 저희 가게를 걱정해서 하시는 말인가 해서요. 말씀하신 것처럼 영주님의 신용이 무너지면 그 피해는 고스란히 저희가 받는 거잖아요? 저흰 그걸 담보로 그 차용증서를 발행해 주고 또 금화를 내줬는데 말이죠.”

그 말엔 소녀가 조그맣게 대꾸해 주었다.

“그대뿐만 아니라 영주 때문에 여러 사람이 피해를 보겠지.”

“말씀하신 것처럼 그건 영주님께서 망할 때 얘기잖아요. 그렇죠?”

소녀는 록펠러가 이어서 무슨 말을 할지 가만히 기다려 보았다.

“그런데 지금 영주님 신용 상태가 아주 좋거든요. 저희 영주님께서는요. 이자도 제때 내시고, 채무 문제로 어디서 말썽을 일으키신 적이 단 한 번도 없어요.”

록펠러가 기다렸다는 듯이 사람 좋은 미소를 꺼내 보였다.

“그래서 저희도 영주님이 써주신 차용증서를 담보로 할 수 있는 거구요. 만약 영주님 신용이 안 좋은데 저희가 휴짓조각이 될지도 모르는 차용증서를 담보로 달란트를 내줄까요? 그건 아니죠.”

영주의 신용 상태가 생각보다 좋다는 말에 소녀가 사내를 흘겨보았고, 사내는 잠시 생각에 잠기다 이내 록펠러가 원하는 반응을 내놓기 시작했다.

“여기 영주의 신용이 건실하다면…… 큰 문제는 없을 것 같습니다.”

“여긴 아무 위협도 없는 거야?”

“말씀드렸다시피 이곳은 제국의 변방입니다. 딱히 생각나는 이권 다툼조차 없는 아주 평화로운 곳이죠.

사내는 이곳의 옛 지명을 우연찮게 떠올릴 수 있었다.

“아주 예전엔 이곳이 아즈락 골드마인이라 불리며 드워프의 땅이기도 했습니다.”

“아즈락 골드마인? 어디서 들어본 거 같아.”

“네, 대륙에서 제법 알아주는 금광지대였다고 하더군요. 하지만 지금은 그 금맥이 전부 말라 죽은 땅이 되었고, 드워프들이 철수한 이후 제국 영토로 편입됐다고 들었습니다.”

소녀가 혹시 모를 가능성에 대해 짚어주었다.

“예전에 그렇게 큰 금맥이 있었다면 지금도 어딘가에 남아 있는 거 아니야?”

그 말에 사내는 가능성 전체를 부정했다.

“아가씨, 황금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드워프들이 그렇게 무른 자들이 아닙니다. 만약 이 땅에 금맥이 조금이라도 살아 있었다면 그들이 이 땅을 버리고 갈 이유가 전혀 없었겠죠. 하지만 그들은 떠나갔습니다. 아무 미련도 없이. 그 말은 이 땅은 이미 죽었다는 말입니다.”

사내가 강조하듯 다음 말을 이었다.

“아가씨, 세상 모든 일엔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겁니다.”

그나마 분쟁 가능성이 있는 금맥조차 말라버렸다는 말에 소녀는 할 말을 잃어버렸다.

분명한 것은 이 방코에서 발행된 차용증서엔 문제가 있다는 점이었다.

하지만 그 문제가 불거지려면 영지 사정이 지금보다 나빠지거나 아니면 영주의 신용에 문제가 생겨야만 했다.

하지만 그럴 낌새조차 없으니 내부인도 아닌 외지인인 그녀가 굳이 오지랖 넓게 문제 삼을 순 없었다.

“그런가?”

딱히 문제가 생기지 않는다면 더 이상 관여하는 건 오히려 폐가 되는 문제였다.

소녀도 그 문제에 대해선 더 이상 토를 달지 않으려고 하자 록펠러가 마무리를 지어주었다.

“아가씨께서 저희 가게를 걱정해 주시는 마음이야 정말 감사하지만, 영주님 신용이 건재하다면 아마 큰 문제는 없을 겁니다.”

가져온 차용증서를 달란트로 바꿨겠다.

들고 있던 의문도 풀었겠다.

더 이상 볼일이 없어지자 소녀는 사내를 쳐다봤고, 그 의미를 알아차렸는지 사내가 눈치 빠르게 행동했다.

“밖으로 가시죠.”

대꾸 없이 사내를 따라가던 소녀가 돌연 돌아서며 록펠러에게 돌발적인 질문을 던져보았다.

“만약 여기 영주 신용에 문제가 생긴다면? 아마 그럴 일은 없겠지만, 만약 그렇다면?”

만에 하나.

천만 분의 하나라도 그런 일이 생긴다면 어떻게 하려고?

소녀의 물음에 록펠러는 잠시 뜸을 들이다 거짓 없이 답해주었다.

“그땐 어떻게 해서든 저희가 빌려준 돈을 다시 받아낼 겁니다.”

소녀 자신도 무심결에 던진 말이었고 답변도 크게 기대하지 않았었다.

하지만 돌아온 대답이 꽤나 놀라웠는지 소녀가 다소 놀란 표정을 지었고, 가게 문턱에 걸쳐 있던 사내마저 몸을 틀어 록펠러를 쳐다보았다.

과연 저 말이 15살 소년에게서 나올 말일까?

이 순간 록펠러는 더 이상 귀족을 상대하기 위해 스스로를 낮추던 어린 방코 조수가 아니었다.

그 모습은 마치 꿔간 돈을 돌려받기 위해 찾아간 악마 같은 채권자의 모습이었다.

“영주님께 받아갈 돈이 없다면 그에 상응하는 걸 대신 가져갈 겁니다. 변제할 돈이 없으시다면 성과 영주님이 가진 권리를, 그런 것도 없다면 땅을. 그 땅조차 없다면 영주님의 영혼이라도 가져가야겠죠.”

아직도 발걸음을 옮기지 못한 그들에게 록펠러가 사람 좋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저희는 절대 손해 보는 장사를 하지 않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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