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금융명가의 창시자-26화 (26/181)

§26화 08. 화폐는 믿음이다(1)

“여기 있습니다.”

무릎까지 내려오는 긴 가운의 로브를 입은 사내가 의문을 표했다.

“이것은…… 무엇입니까?”

자신은 분명 마석을 건넸고, 그 값으로 당연히 제국의 금화인 달란트를 예상하고 있었는데, 마석 상인이 엉뚱하게도 정체 모를 종이를 건네는 게 아닌가?

당혹감도 잠시.

같이 있던 어린 소녀가 의문스레 목소리를 냈다.

“무슨 일이라도 있느냐?”

작은 키에 후드를 깊게 눌러 써 그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말투만 보면 같이 온 사내보다 높은 위치에 있는 것으로 보였다.

“이자벨라 아가씨, 이자가 마석 값으로 달란트가 아닌 다른 걸 내주었습니다. 하여 제대로 된 거래가 맞는지 제 스스로 의심하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달란트가 아니라 다른 걸 줬다고?”

“네, 아가씨.”

나이는 비록 어렸지만 밖을 돌아다닌 시간이 있어 소녀는 세상 물정에 그렇게 어둡지 않았다.

“달란트 대신 뭘 줬는데?”

사내는 마석 상인이 건넨 종이를 빠르게 살펴봤다.

대충 보니 어느 방코에서 발행된 차용증서였다.

“그게…… 차용증서입니다.”

“차용증서?”

소녀가 알고 있기론 이따금씩 물건 값으로 차용증서를 받기도 했다.

“카터 방코라는 곳에서 나온 차용증서인데…….”

“차용증서라면 방코에 가서 다시 달란트로 교환하면 되지 않느냐?”

“그렇기야 한데…….”

사내가 곤란해하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그가 건네받은 건 일반적으로 알려진 차용증서와는 조금 다른 형태의 차용증서였다.

대개 차용증서라 하면 그 차용증서를 방코에 가져갔을 때 해당 금액의 금화를 내주겠다는 글귀가 적혀 있게 마련이었는데, 이 차용증서엔 그러한 것이 아닌 영주가 써준 차용증서를 담보로 발행되었다는 이야기만 덩그러니 적혀 있을 뿐이었다.

“내용이 좀 이상합니다. 이 차용증서엔 그 어떠한 금화도 보장해 준다는 내용이 없습니다.”

그는 학식이 높은 마법교관이었다.

그러니 영지민들이 간과하여 넘겼던 것을 물고 늘어지며 강한 의심을 품은 것이다.

“보장해 준다는 내용이 없다고? 그럴 리가 없을 텐데.”

“단지 영주의 신용을 담보로 발행된 것 같습니다.”

졸지에 사기꾼이 될 판국에 놓이자 상점 주인이 급히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아, 그 내용은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걸 가지고 카터 방코에 가시면 방코 주인이 문제없이 해당 양만큼의 달란트를 내줄 겁니다. 만약 방코에서 내주지 않는다면 다시 저희 가게를 찾아오십시오. 그럼 제가 다른 방식으로 마석 값을 어떻게든 치러드리겠습니다.”

이 이상한 차용증서를 가지고 방코에 가면 문제없이 금화로 바꿀 수 있다니!

찾아온 두 손님은 도저히 납득할 수 없다는 얼굴이었다.

“그 방코에선 정말로 이것을 가져가면 금화로 바꿔주는 겁니까?”

“네, 정말입니다. 지금까지 별문제 없었습니다.”

“이상하군요. 저희로서는 납득이 잘 안 됩니다. 여기 영주의 신용이 황실에 버금가는 것도 아닐 텐데요.”

“그래도 저희 영주님이십니다. 예전이야 금이 나던 곳이었지만 지금은 아무도 관심을 안 주는 곳인데 별문제 야 있겠습니까? 제국에서 전쟁만 나지 않는다면 아무 문제 없을 겁니다.”

사내가 상점 주인과 이런저런 대화를 하는 사이 차용증서를 살피던 소녀가 이내 고개를 저으며 부정했다.

‘여기엔 그 어디에도 금화를 보장해 준다는 내용이 없는데.’

소녀가 고개를 들어 상점 주인을 살펴보았다.

당혹감만 가득한 그의 표정엔 거짓이라곤 눈을 씻고 찾아보아도 찾을 수가 없었다.

이 이상한 차용증서를 믿고 있는 것이다.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고.’

소녀는 그들이 말하는 방코에 관심이 동했다.

‘찾아가서 물어보는 게 좋겠어.’

* * *

록펠러는 가게를 찾아온 정체불명의 두 손님과 마주하게 됐다.

한 명은 이목구비가 뚜렷하며 키가 훤칠한 사내였으며 또 다른 한 명은 제 동생뻘 정도로 보이는 나이 어린 소녀였다.

소녀는 로브 후드를 눌러 쓰고 있어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지만 사내는 후드를 벗어 자신의 존재감을 훤히 드러내고 있었다.

‘뭐 하는 사람들이지?’

방코에 찾아오는 사람들 중에서 어중이떠중이는 없었다.

대부분 귀족이거나 아니면 돈깨나 만지는 상인들이 대부분이었으니까.

그들의 정체는 알 수 없었지만 록펠러는 장사치답게 자연스레 미소를 띠며 그들을 상대해 주었다.

“여기엔 무슨 일로 찾아오셨나요?”

록펠러가 운을 떼자 사내가 가게 안을 살피며 목소리를 냈다.

“주인은 어딨지?”

“주인아저씨요? 주인아저씨는 왜 찾으시는데요?”

사내는 록펠러가 이 가게 안에서 일을 보고 있는 아이일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그러기엔 록펠러가 너무 어렸던 탓이다.

“여기 주인이랑 할 얘기가 있다.”

사내가 무표정한 얼굴로 답하자 록펠러는 그가 무슨 일로 찾아왔는지 의심부터 했다.

‘별일은 아니겠지?’

“가게 일 때문에 그러시는 거라면 저한테 그냥 말하셔도 될 거 같은데요? 가게 일은 제가 보고 있거든요.”

그 말에 사내가 적잖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이렇게나 어린 소년이 방코에서 어른들의 일을 보고 있다니.

‘이렇게 어린 애가 방코 일을 보고 있다고?’

그러자 이제까지 둘의 대화에 관심조차 없었던 소녀가 록펠러에게 시선을 주기 시작했다.

‘방코에도 어린 사람을 썼었나?’

자신도 어리긴 했지만, 자신보다 고작 몇 살 많아 보이는 소년이 방코에서 주인 대신 일을 보고 있다니 나름 호기심이 동한 것이다.

‘신기하네.’

잠시 당황했던 사내가 이내 록펠러의 눈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그는 마법사였다.

거짓을 고하는 자가 내면에 감추고 있는 탁하고 부정한 기운을 읽어내지 못할 정도로 형편없지 않았으니 그의 눈을 들여다보는 것으로 말의 진위를 가려낸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같이 따라온 소녀 역시 마찬가지였다.

‘거짓말은 아니야. 그렇다고 순수하지도 않은 것 같은데…….’

소녀가 이런저런 생각을 하던 사이 사내가 말했다.

“네가 감히 거짓을 고했다고 생각이 들지 않구나. 그래, 찾아온 이유에 대해 말해주마.”

사내가 품에서 차용증서를 꺼내 록펠러에게 보였다.

“단도직입적으로 이것 때문에 찾아왔다. 달란트로 바꿔 가고 싶은데, 가능하겠지?”

짓는 표정과 다르게 찾아온 이유는 아주 단순했다.

‘이 사람들 뭐야?’

혹시나 자신에게 사기를 치는 건 아닌지 의심한 록펠러가 자연스레 품에서 특수감별용 아티팩트를 꺼내 들었다.

돋보기처럼 생긴 그것은 싱클레어 가문에서 만들었다는 마법 도구였다.

그러자 이를 지켜보던 사내와 소녀의 얼굴에 미묘한 변화가 생겼다.

록펠러가 꺼낸 마법 도구를 알아봤던 것이다.

잠시 후 확인을 마친 록펠러가 환한 미소로 화답해 주었다.

“전부 달란트로 바꿔드릴까요? 아니면 여기 실링도 필요하신가요?”

그 말을 듣고 사내는 어처구니없는 웃음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저 엉뚱한 차용증서가 별문제 없이 금화로 교환 가능하다는 사실에 기가 찬 것이다.

“그걸 달란트로 교환하는 데 별문제가 없는 거냐?”

“문제요? 무슨 문제를 말씀하시는 거죠?”

그 순간 록펠러는 그들이 처음 찾아왔을 때 왜 그리 표정이 좋지 않았는지 눈치를 챌 수 있었다.

그들 같은 사람이 아예 없진 않았던 것이다.

‘그것 때문이었나? 하긴 모든 사람이 다 똑같지는 않겠지. 개중에 의심하는 사람도 분명 있을 거고.’

“혹시 이 차용증서에 대해 물으시는 거라면 아무 문제 없는데요?”

록펠러는 보란 듯이 한 손에 들고 있던 특수감별용 아티팩트를 흔들어주었다.

“이건 싱클레어 가문에서 만든 마법 도구인데 이걸로 감별했거든요. 차용증서엔 아무 문제 없어요.”

“문제가 없다라…….”

무언가 탐탁지 않았는지 사내가 말꼬리를 길게 늘였다.

‘문제가 없을 리가 없는데 이상하군.’

그리고 그 생각은 같이 따라온 소녀 역시 마찬가지였다.

‘문제가 없다고? 그럴 리가 있어?’

사실 둘의 입장에선 가져온 차용증서를 문제없이 달란트로 바꿔 갈 수 있다면 별 이상한 차용증서에 굳이 의문을 붙일 필요가 없었다.

그들의 일도 아닐뿐더러 귀찮고 오지랖 넓은 일이었으니까.

“일부만 실링으로 바꿔주고 나머진 달란트로 주게.”

“네, 그럼 잠시만 기다리세요.”

록펠러가 차용증서와 맞바꿀 달란트를 가져오기 위해 가게 안쪽으로 사라지자 사내가 소녀에게 정중히 물어보았다.

“아가씨,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모든 결정은 그가 아닌 그녀가 내려야만 했다.

그녀는 그의 윗사람이자 대륙에서 가장 큰 가문의 일원이었으니까.

이자벨라는 여전히 납득이 안 된다는 표정이었다.

“어떻게 저 엉터리 차용증서에 문제가 없을 수 있는 거야? 여기 사람들은 전부 바보야? 아니면 여기 영주나 영지가 평생 안 망할 거라고 보는 건 아니겠지?”

대다수의 영지민 입장에선 영주는 마치 하늘 같은 존재라 감히 망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게 일반적이었다.

하지만 그런 영주가 우습게 보이는 그녀의 입장에선 영주라는 존재는 절대로 무소불위의 권력자이자 영원불멸한 존재가 아니었다.

영주라는 것도 결국 따지고 보면 한낱 인간에 불과했고, 정치 싸움에 잘못 휘말리거나 아니면 다른 잘못을 했을 때 충분히 그 지위를 잃을 수 있는 자들이었다.

그러니 그녀가 강한 의구심을 품은 것이다.

“저 차용증서를 황실에서 직접 보증해 주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다른 가문에서 확실히 보증해 주는 것도 아니잖아? 여기 영주가 망하면 당장 휴짓조각이 될 그런 차용증서인데 달란트로 바꿔준다고?”

사내도 같은 생각이었으나 이곳 영지민들의 생각을 완전 모르는 건 아니었다.

“일반적으로 영지민들은 영주의 힘이 절대적이라 믿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대부분 영지민들은 영주가 절대 안 망할 거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죠. 그래서 여기 영지 사람들은 저희와 좀 다르게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그럴 리가 없잖아? 이번에 우리 가문에서 밀어버린 영지만 해도 몇 갠데, 여기 사람들은 그런 소문조차 못 듣는 거야?”

“그렇긴 합니다만…… 그래도 이곳은 제국 변방에 위치한 곳인지라 여러 이권이 얽혀 있는 다른 영지들보단 상대적으로 많이 안정된 편입니다. 그래서 여기 영주가 별다른 말썽만 일으키지 않는다면 이 영지가 망할 일은 아마 없을 것 같기도 합니다.”

말을 하고 생각해 보니 사내는 여기 영지민들이 왜 그런 차용증서를 신뢰하고 있는지 대충 느낌이 왔다.

제국이 영원불멸할 것처럼 영주 또한 안 망할 거라 생각하는 것이다.

또한 해당 차용증서가 문제없이 달란트로 교환이 되니, 굳이 피곤하게 의심할 필요가 있겠는가?

“나는 아직도 이해가 안 되는데. 황제폐하도 아니고 한낱 영주의 신용을 담보로 그런 차용증서를 신뢰한다는 게 좀 웃기잖아?”

“여기서는 그런 게 가능한 것 같습니다.”

“예전에 그런 차용증서 본 적 있어?”

“아니요. 저 역시 그런 차용증서는 이번에 처음 봤습니다. 그것도 그렇지만 여기 상인들은 이상하게 차용증서를 마치 돈처럼 쓰고 있더군요. 영지마다 사정이 전부 다르다지만 여긴 리옹처럼 다소 특별한 곳인 것 같습니다.”

리옹은 무역과 금융이 발달된 곳으로 제국에서 가장 부유한 도시 중 하나였다.

그런데 이런 변방의 영지가 그런 곳과 비슷하다니.

“여긴 변방이잖아? 그런데 어떻게 제국에서 가장 부유한 곳과 비교할 수 있어?”

“그렇긴 해도 여기 시스템 자체는 뭔가…… 리옹하고 비슷한 느낌이 많이 납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제이슨도 돈과 관련된 건 잘 모르지?”

“금융에 대해 말하시는 거라면, 그런 하등한 쪽은 고결한 마법사가 관심 가질 분야는 전혀 아닙니다.”

“그럼 누가 관심을 갖는 건데? 돈 문제라면 나름 중요한 거 아니야?”

“중요하긴 하지만, 그런 일은 대체적으로 면죄부를 받은 사제가 맡거나 아니면 숫자 좀 다룰 줄 아는, 그리고 지옥도 두려워하지 않는 겁 없는 평민들이나 관심 갖는 일입니다. 절대 고결한 마법사가 관심 가질 분야는 아니죠.”

“그래?”

여러 생각을 해보던 소녀가 작게 중얼거렸다.

“그 사람들은 천국 대신 돈을 택한 건가?”

그사이.

록펠러는 가게 안쪽에서 그들이 원하는 달란트와 실링을 챙겨 나왔다.

“세어보세요. 전부 맞을 거예요.”

확인을 마친 사내가 소녀에게 문제가 없음을 알리자 무슨 영문에서인지 소녀는 가게 밖으로 나가는 게 아닌 제 안의 의문에 대해 묻기 시작했다.

“그대는 방코에서 일을 하고 있으니 당연히 평민이겠지. 그대에게 묻고 싶은 게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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