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화 06. 방코의 조수가 되었다 #3(4)
하운드 용병대에선 마법사를 고용할 추가 비용을 영주에게 요구했고, 영주 입장에선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재산을 일부 처분한다면 굳이 방코까지 찾아가 추가적으로 대출을 받을 필요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방코에 찾아가는 것은 그게 싫었다는 것이다.
‘돈이야 가서 또 빌리면 될 일이지. 굳이 내 것까지 건드릴 필요가 있을까?’
선대 영주이자 그의 아버지인 웨일스 드 몬테펠트로가 누누이 강조하던 말이 “빚을 조심하라.”였다.
‘빚이야 많으면 당연히 문제라는 걸 누가 모르나?’
갑자기 영지에 흉년이 들거나, 아니면 뜻하지 않은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영지 사정이 급작스레 어려워진다면 당장 세수 확보에 문제가 생겨 곤란해질 수도 있겠지만, 그런 일들이 없다면 마법사 고용에 따른 추가 비용 정도야 추가적인 대출로 충분히 감내할 수 있는 문제였다.
‘지금 와서 든 생각이지만 아버지는 너무 빚을 두려워하셨어. 영지가 당장 망할 것도 아니고, 망할 조짐도 안 보인다면 그렇게까지 빚을 두려워할 필요가 있었나 모르겠군.’
최근 들어 방코에 들르는 일이 잦아지다 보니 현 영주인 그도 선친이 남긴 유훈을 다시 생각하는 계기가 됐다.
‘영지 내에서 큰 문제가 없다면 세수야 꾸준히 걷히는 거고, 정 사정이 안 좋아지면 내가 여기 주인이니 어느 정도 배짱을 부려도 되고 말이야. 주인인 내가 나중에 갚겠다고 하는데, 대체 누가 뭐라고 하겠어.’
아마 돌아가신 그의 선친이 그의 생각을 읽었다면 노발대발할 상황이었겠지만, 이미 대출이란 늪에 서서히 들어선 그에겐 선친이 남긴 유훈 따윈 점점 무의미해져 가고 있었다.
“크흠!”
큰 헛기침과 함께 제 인기척을 알린 영주가 방코 안으로 들어서자 안에서 볼일을 보고 있던 록펠러가 그를 알아보았다.
정중히 고개를 숙이는 록펠러가 찾아온 이유에 대해 묻자 영주가 잠시간 뜸을 들이다 이내 찾아온 목적에 대해 알려주었다.
“이번 오크 토벌에서 마법사 고용에 따른 추가 비용을 내가 내주기로 했네.”
어느 정도 짐작한 내용이었으나 아무것도 모르는 척 연기를 이어가는 록펠러가 놀란 얼굴로 반문했다.
“마법사요? 마법사면…… 혹시 오크 토벌에 무슨 문제라도 생긴 건가요?”
상대는 15살 정도의 어린 소년이었다.
하지만 방코의 조수였고, 또한 한 집안의 가정이었기에 영주도 록펠러를 너무 무시할 생각은 없었다.
“큰일은 아니니 자네가 그렇게까지 걱정할 필요는 없네. 그보다 카터는 어딨나?”
자연스레 주인장을 찾는 그에게 록펠러가 모든 손님에게 그랬던 것처럼 같은 말을 반복해 주었다.
“주인아저씨는 지금 바쁘셔서 가게 일은 제가 전담하고 있습니다. 필요한 게 있으시다면 저와 대화하시면 됩니다, 영주님.”
그 말을 듣고 영주가 눈가를 살며시 좁혔다.
조수가 된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부터 가게 일을 전담하고 있는지.
“카터가…… 자네를 많이 믿는 모양이군. 그럴 사람이 아닐 텐데. 그는 의심이 많은 사람이야.”
“네, 하지만 절 믿으시는걸요. 저희 선친이나 조부님께서도 훌륭한 분이셨구요.”
“집안 내력이라 이건가?”
서글서글한 인상으로 웃어 보이는 록펠러가 고개를 숙이자 영주가 다른 생각을 품었다.
생각해 보니 능구렁이 같은 카터보다 어린 록펠러를 상대로 돈을 빌리는 게 더 낫다고 판단한 것이다.
‘차라리 애가 낫겠지. 카터는 너무 능구렁이 같단 말이야. 고블린처럼.’
“크흠! 그럼 자네에게 돈을 빌려 가도 문제가 없을 거란 소리군.”
“네, 문제 되실 건 전혀 없습니다.”
“그렇다면 굳이 카터와 만날 필요도 없겠군. 그럼 바로 용건에 대해 말하겠네.”
영주가 바로 말을 이었다.
“하운드에선 이번 마법사 고용으로 인해 100달란트를 추가적으로 요구하더군. 그래서 100달란트가 당장 필요한 상황이야.”
“100달란트씩이나요?”
1달란트가 대충 시골 노동자의 한 달 품삯이니 한 번 고용으로 100달란트나 가져가는 마법사의 몸값이야 정말 대단하긴 했다.
‘마법사 몸값이 진짜 세긴 하네.’
현대로 따지면 의사나 변호사와 같은 전문직종의 고소득자였다.
“마법사 일당이 그렇게 비싼가요?”
“아무나 될 수 없는 마법사니 당연히 단가야 센 편이지. 안 그럼 괜히 마법사겠나?”
영주는 문득 죽은 한스가 떠올랐는지 옅게 웃어 보였다.
“그러고 보니 자네 아버지도 마법사가 되려다 실패했었지. 내가 잘 모르긴 해도 한스가 마법사가 됐다면 꽤나 잘 나갔을 거야. 운이 좋았다면 작은 영지라도 사서 귀족이 됐을지도 모르지.”
그의 옅은 웃음은 점차 비웃음으로 변질되어 갔다.
“하지만 그러진 못했지. 마법사가 될 그릇이 전혀 아니었으니까.”
이 자리서 죽은 사람은 왜 들먹이는지.
그것도 은근슬쩍 비웃는 얼굴로 말이다.
록펠러는 기분이 언짢아졌지만 전혀 내색하지 않고 다른 질문을 던져보았다.
“그런데 영주님. 이건 굉장히 외람된 질문일 수도 있겠지만 저희 같은 사람들에게 100달란트라면 엄청나게 큰돈이겠지만 영주님 입장에서 100달란트 정도면 그렇게 큰돈은 아니지 않나요?”
당신 정도의 재력을 가진 자가 왜 굳이 여기까지 와서 돈을 빌리느냐는 말에 영주의 표정이 굳어졌다.
수중에 돈이 있었다면 굳이 수고스럽게 찾아왔을까?
요 근래에 돈 들어갈 곳이 너무 많은 게 탈이었다.
“쓸데없는 걸 묻는구나.”
“실례가 되었다면 죄송합니다. 저는 단지 영주님께서 여기서 빌린 돈 때문에 곤란해지실까 봐 걱정돼서요.”
“내가 곤란해져?”
영주가 피식 웃었다.
“그럴 리가 있겠느냐?”
“그래도 빚이 많아지면 누구든 곤란해지는 법이잖아요.”
영주는 자신이 써준 차용증서가 다른 곳에서 거래될 수 있음을 상기시키고 이내 표정을 고쳤다.
‘곤란해질 일이야…… 확실히 가능한 일이지. 내가 써준 차용증서가 엉뚱하게 된다면 말이야.’
“쓸데없이 걱정해 주는 마음이야 고맙지만 그거야 네가 신경 쓸 바가 아니니 어서 달란트나 내주거라. 바쁜 몸이란다.”
“네, 영주님.”
곧바로 가게 안쪽으로 들어간 록펠러가 금고 열쇠를 가지고 있던 카터에게 찾아갔다.
영주에게 내줄 달란트를 가져가기 위해서였다.
이때 카터는 좋지 못한 표정으로 자리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록펠러는 그가 들고 있던 차용증서 묶음을 보고선 그 이유를 대강 짐작할 수 있었다.
‘회수 못 한 채권이 저렇게나 있었네. 영주 신용을 봐선 저 정도는 미미한 정도지만 기분이 나쁠 정도는 되겠어.’
일반적인 경우라면 저 채권들은 다시 영주에게 돌아가 금화가 되어 돌아와야만 했다.
그것도 이자와 함께 말이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영주는 차용증서만 써주고 가게의 금화만 가져가고 있었다.
그러니 금화가 아닌 종이 쪼가리만 가지고 있던 카터의 표정이 굳어 있었던 것이다.
“저기 아저씨? 영주님께서 오셨거든요. 100달란트를 요구하시는데 어떻게 할까요?”
록펠러의 물음에 표정을 구기고 있던 카터가 이내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상대는 이 영지의 주인이었다.
마음에 안 들어도 그의 요구를 무조건 들어줘야만 하는 것이다.
‘진짜 여기 영주만 아니었어도 가서 한바탕했을 텐데.’
그렇게 방코에서 100달란트를 빌려 간 영주가 떠나가자 카터가 록펠러에게 찾아와 불만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영주에 대한 불만이었다.
“아니, 저놈은 돈을 빌려 간 지가 바로 엊그제 같은데 왜 또 와서 빌려 가는 거야? 명색이 영주란 놈이 돈도 없나?”
“갑자기 왜 그러세요, 아저씨. 돈이야 신용 좋은 영주님께서 많이 빌려 가면 저희야 당연히 좋은 거 아닌가요?”
그러자 카터는 손에 들려 있던 영주의 차용증서 뭉치를 록펠러에게 보이며 언성을 높였다.
“빌려 가는 것도 적당해야지! 갚지는 않고 오로지 빌려만 가면 그게 좋은 일이란 말이냐! 록펠러야, 이건 말이다.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그저 종이 쪼가리란다.”
여기에 대해선 록펠러도 지극히 공감하고 있었다.
‘맞아. 당신 말대로 그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종이 쪼가리일 뿐이지.’
카터가 품에서 금화 하나를 꺼내 록펠러에게 보이며 말을 이었다.
“진짜 돈은 바로 이거지. 이런 종이 쪼까리가 아니야.”
록펠러는 그를 진정시키기 위해 살가운 미소와 함께 입을 열었다.
“그래도 영주님 신용이 살아 있는 한 문제 될 건 없어 보이는데요? 이자도 제때 갚고 계시고, 당장 채무불이행에 빠질 위험은 없으니 저희야 많이 빌려주면 좋죠. 빌려 간 돈이야 당장 돌려받는 데 문제는 없잖아요?”
카터는 제법 경험이 많은 금세공업자였다.
그러니 우량(프라임) 채무자가 어떻게 불량(서브프라임) 채무자로 변질되는지 그 과정에 대해서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록펠러야. 너는 불량 채무자가 어떻게 생겨나는지 잘 모르고 있구나. 모든 불량 채무자가 처음부터 악질스러운 불량 채무자였던 건 아니란다. 대다수는 방금 찾아온 영주님처럼 신용도 좋고, 이자도 제때 갚는 그런 우량 채무자였었지.”
그는 불만 가득한 표정으로 말을 이어나갔다.
“하지만 그런 우량 채무자들이 제때 돈을 갚지 않기 시작하고, 또 제 신용만 팔아 금화만 받아가게 된다면 그때부턴 너도 알고, 나도 치를 떠는 그 불량 채무자가 되는 거란다.”
지금 카터의 촉이 말해주고 있었다.
영주 놈에게서 서브프라임, 즉, 불량 채무자의 냄새가 나고 있다고.
‘저러다 원금 상환을 늦추고 거기다 이자 갚는 것까지 늦추기 시작하면 십중팔구 그놈들처럼 되겠지. 특히나 힘을 가진 놈들이 더 그런다니까. 그 어떤 채무자보다 가장 악질 같은 놈들이지.’
“앞으론 말이다. 영주님이라 해도 함부로 돈을 빌려주지 말거라. 일단 돈이 없다고 잡아떼야 돼. 그리고 빌려 간 돈을 갚기 시작하면 그때 다시 빌려주거라. 우리가 무슨 땅 파서 장사하는 것도 아니고, 돈도 안 갚는 놈에게 계속 돈을 빌려줄 순 없지 않겠느냐?”
록펠러 역시 카터의 걱정을 모르는 건 아니었으나 생각 자체는 그와 달랐다.
카터는 영주의 채무불이행에 대한 걱정하고 있었지만, 록펠러는 반대로 그를 잡아먹을 수 있는 ‘기회’로 보고 있었으니까.
‘저런 노다지를 왜 벌써부터 경계하는지 모르겠네? 나 같으면 제대로 작업 쳐서 한번 해 먹을 거 같은데.’
카터가 저리 설레발을 치며 걱정하는 것은 훗날 채무불이행에 따른 문제가 생겼을 시 영주란 채무자에게서 돈을 돌려받지 못할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었다.
영주는 이 땅에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진 지배자였다.
그런 지배자에게 세금이나 주고 사는 일개 금세공업자가 어떻게 덤빈단 말인가?
하지만 록펠러는 달랐다.
‘애당초 빌려준 돈을 돌려받을 생각으로 차용증서도 다른 사람하고도 거래할 수 있도록 하지 않았나?’
영주가 써준 차용증서는 굳이 이곳에서만 거래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다른 곳, 다른 권력자와도 충분히 거래가 가능한 물건이었다.
그러니 단순 종이 쪼가리가 아닌 것이다.
그것은 그의 모든 것을 한순간 빼앗을 수 있는 죽음의 트랩이나 마찬가지였다.
‘예전부터 이 땅을 어떻게 가져갈까 고민 좀 했었는데, 대충 그림이 그려지기 시작하네.’
멀쩡한 영지를 제 돈을 주고 사 가는 건 바보나 할 짓이었다.
‘사실 그것보다 더 좋은 방법이 있지. 그것도 제값도 아니고 아주 싼 가격에 제대로 후려칠 수 있는 방법이.’
은행이란 곳이 때론 선한 얼굴로 무리하게 돈을 빌려주는 것은 그들이 착해서가 아니었다.
그들이 쓰고 있는 가면 이면에는 더한 악마가 자리하고 있었고, 록펠러는 그들이 이용하는 방법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칼로 사람을 죽이는 건 원시적이고 다소 저급한 방법이지.’
배운 자는 좀 더 다른 방식으로 상대방을 죽일 뿐.
‘좀 더 품위 있게 죽이려면 빚으로 깔아뭉개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