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금융명가의 창시자-21화 (21/181)

§21화 06. 방코의 조수가 되었다 #3(3)

몬테펠트로 영주에게 받았던 선금을 방코에 맡기러 갔던 용병대장 카를이 야영지로 돌아왔다.

말을 타고 돌아온 그에게 부하 하나가 붙었는데, 앞서 그에게 주의를 주었던 세 용병 중 하나인 세트였다.

세트는 돌아온 대장에게 스스럼없이 다가가 말고삐를 건네받으며 말을 붙였다.

“방코에 갔다 온 일은 어떻게 됐어?”

물어보는 낌새를 보니 아마도 제 동료들하고 내기를 한 듯싶었다.

무슨 내기였는지는 안 봐도 뻔했다.

“대장도 바가지 썼지?”

세트가 물어봄과 동시에 멀찌감치 서서 둘의 대화를 엿듣고 있는 무리가 보였다.

이번 내기에 배팅한 당사자들이었다.

“별일 없었다.”

최대한 침착하고 태연하게 대꾸했으나, 그와 붙어먹은 세월이 많았던 세트의 촉을 피할 순 없었다.

“대장도 털렸지? 그렇지?”

“크흠!”

카를이 대답을 피하자 세트가 곧바로 휘파람을 불며 목청을 높였다.

“야! 내가 말했지? 대장도 가서 분명히 털릴 거라고!”

자신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조용히 넘어가지는 못할망정 오히려 소리까지 치는 부하를 보니 기분이 언짢아졌다.

“글쎄, 아무 일 없었다니까?”

“진짜야? 거기서 아무 일 없었다고?”

세트가 반문하자 대장 카를은 근엄한 표정으로 고개만 주억였다.

그동안 살아온 짬밥이 얼만데 고작 낯가죽 하나 관리 못 해서 부하들에게 웃음거리가 될 순 없었다.

대장 카를이 무심히 제 막사로 돌아가자 세트의 표정이 대번 구겨졌다.

당연히 바가지를 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던 것이다.

“아이썅!”

용병대장 카를은 야영지로 돌아온 직후 곧바로 오크 토벌을 준비했다.

그들의 명성에 비해 오크 토벌은 정말 같잖은 일이었고, 그런 이유로 그들 역시 이번 임무에 많은 시간을 할애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되도록 빨리 일을 끝내고 다음 일거리를 찾아 움직이리라.

“뭐라고?”

한데 문제가 생겼다.

미리 정찰을 보냈던 부하들이 뜻밖의 소식을 물고 돌아온 것이다.

“오크 주술사라고?”

“확실해. 무리에 주술사가 있었어.”

“그리고 무리 규모도 꽤 크던데? 일반적인 부락 수준이 아니야. 몇 개 부락이 연합한 대부락이었어.”

대장 카를만큼이나 험상궂게 생긴 부하 둘이 그렇게 보고하자 카를과 나머지 부하들이 당혹스러운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별거 아닐 거라 생각했던 오크 토벌이 갑작스러운 오크 주술사의 등장으로 복잡해진 것이다.

‘오크 주술사라니.’

이 순간 카를은 방코에서 쓸데없는 걱정으로 자신에게 여러 질문을 던졌던 소년이 떠올랐다.

그 소년은 분명 오크 주술사에 대해 언급했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생각했는데 어떻게 이런 일이.’

소년과 대화를 나눌 당시만 해도 카를은 오크 주술사는 말도 안 되는 거라며 대화 자체를 무시하려 했었다.

일반적인 오크 토벌에서 오크 주술사와 마주칠 확률은 거의 희박했으니까.

“그게 사실이라면 골치 아파졌군. 주술사라니.”

카를은 당황한 눈치였고, 이는 같이 있던 부하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부하들이 저마다 한마디씩 내뱉기 시작했다.

“주술사면…… 이번 건 무리잖아?”

“오크 주술에 걸리면 답도 없다고. 우리 전문 분야도 아니고.”

“무슨 주술사야! 처음부터 그딴 소리는 없었잖아?”

불만을 토로하는 부하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몇몇 부하들은 이번 의뢰에 대한 의구심을 품기 시작했다.

“어쩐지 일이 너무 쉽다고 했어. 일개 오크를 토벌하는 일에 우릴 왜 불렀을까 의심했다니까.”

“나도 같은 생각이야. 여기 영주 놈이 우릴 속인 거네.”

“그걸 감추고 우릴 불러냈다고? 미친 거 아니야?”

“그럴지도. 있는 그대로 의뢰했다면 우리가 수락 자체를 안 했을 테니까.”

“그런데 어떻게 할 거야? 포기할 거야? 아니면 어떻게든 할 거야?”

“오크 주술사는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아니야.”

그들이 가진 상식으로도 오크 주술사에 대항할 수 있는 직업군은 극히 소수였다.

“마법사나 정령술사가 없으면 아예 안 되겠는데? 주술을 막을 방도가 없어.”

“이 근처 교단에 템플러는 없나? 템플러 정도면 어떻게든 될 거 같은데.”

“아니면 마녀라도 구해봐? 저번에 위치닥터는 마녀 도움으로 해결했잖아.”

“아니, 무슨 마녀야! 그러다 교단에서 말 나오면 어쩌려고! 마녀와 작당한 이단으로 몰리고 싶어?”

“그러니까 최대한 조용히 처리해야지. 누가 동네방네 떠든대?”

부하들의 언성이 높아지자 저 혼자 생각에 잠겼던 대장 카를이 손을 들어 모두를 조용히 시켰다.

잠시간 이어지는 침묵 속.

부하들의 시선이 그에게 모이자 세트가 목소리를 냈다.

“어떻게 할 생각이야?”

그 물음에 카를이 생각하던 바를 말해주었다.

“그렇다고 이번 일을 이렇게 포기할 순 없다. 우리가 이제껏 쌓아 올린 명성이 있으니.”

부하들의 아우성이 다시 나오려 할 때 카를이 재빨리 뒷말을 이어주었다.

“이번 일이야 마법사만 구하면 어떻게든 되겠지. 주술사만 있을 뿐 규모 자체는 우리가 충분히 감당할 수 있는 정도니까.”

그러자 세트가 의문을 드러냈다.

“그럼 마법사라도 불러내려고? 그럼 배보다 배꼽이 더 클 텐데? 마법사를 한두 푼으로 부릴 수 있는 건 아니잖아?”

세트의 말에 대다수 부하들이 동조한 눈치였다.

그 말에 대장 카를이 반응을 보였다.

“그 비용은 우릴 기만한 여기 영주에게 청구할 거다.”

* * *

다음 날.

영주는 자신을 찾아온 하운드 용병대장과 그의 부하들과 대면하게 됐다.

물론 영주 혼자 그들을 맞이한 것은 아니었다.

용병대장과 마주 앉은 영주 뒤엔 시어들의 대장이라 할 수 있는 오버시어와 몇몇 시어들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표정들이 좋지 않은 걸 보니 눈치를 챈 모양이군. 일반적인 토벌이 아니라는 걸 말이야.’

오크 토벌은 부탁했어도 오크 주술사는 별개의 문제였다.

하여 능청을 떠는 영주 체스터가 운을 뗐다.

“여기까진 무슨 일로 찾아왔나? 오크 토벌이라면 이미 시작한 줄 아는데?”

이어 하운드 용병들에게 시선을 주니 그들의 표정은 삭막하기 그지없었다.

“대금의 반도 미리 지급했겠다. 뭐가 문제지?”

영주가 뻔뻔하게 굴자 그를 찾아온 용병대장은 화가 났으나 일단 말로써 풀어보자는 생각이었다.

“일을 진행하는 도중 생각지도 못한 문제가 생겼습니다.”

“생각지도 못한 문제라고?”

제 턱을 긁적이던 영주가 고개를 갸웃했다.

“무슨 문제인데?”

“저희들에게 말을 안 하신 게 있더군요.”

“말을 안 해?”

두 손바닥을 들어 보이는 영주가 영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주변에 있던 시어들에게 시선을 옮겼다.

“내가 뭐 말을 안 한 게 있었나?”

어차피 그들이야 한통속이었기에 시어들도 괜한 헛소리를 할 생각은 없었다.

영주와 마찬가지로 능청을 떠는 시어들이 영주 물음에 답해주었다.

“그런 게 있었습니까?”

“저희도 잘 모르겠습니다.”

대충 반응을 살핀 영주가 용병대장에게 되물었다.

“토벌하려는 오크의 수가 생각보다 많았던 모양이야?”

“그건 아닙니다. 오크의 수는 저희에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래? 시론.”

영주가 시어들의 대장인 오버시어를 불렀다.

오버시어 시론 마크.

그는 영지의 치안을 총괄하는 모든 시어들의 대장이었다.

“네, 영주님.”

“자네가 오크 토벌 건으로 내게 말을 안 한 게 있었나?”

“그런 건 전혀 없었습니다. 저는 영지 내의 아주 사소한 일이라도 영주님께 전부 보고하는 편입니다.”

오버시어가 용병대장에게 시선을 주었다.

“소문의 하운드 용병대라면 충분히 처리할 수 있을 정도의 오크들일 겁니다. 분명 문제가 없을 텐데요?”

그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하운드의 용병들이 고작 오크들 때문에 여기까지 찾아올 일은 없을 텐데 조금 의외로군요. 대체 무슨 이유로 찾아왔는지 저도 감을 못 잡겠습니다.”

예상했던 대로 잡아떼기 시작하는 그들을 두고 용병대장 카를은 심기가 불편해졌으나 애써 불편한 심기를 잠재우려 했다.

이곳 영주와 사이가 틀어져봤자 좋을 건 없기 때문이었다.

“오크 주술사가 있더군요. 이건 저희가 직접 확인한 바입니다.”

“오크 주술사?”

이제야 찾아온 이유를 알았다는 듯 영주와 그의 부하들이 일제히 용병대장이 원하는 반응들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오크 주술사가 있었어? 주술사라면 오크족 마법사 같은 거 아니야?”

“네, 맞습니다. 주술사면 확실히…… 문제로군요.”

보기에도 역겨운 연기에 표정을 살며시 구긴 용병대장이 영주에게 대놓고 물어보았다.

“하여 단가가 맞지 않아 다시 찾아오게 됐습니다.”

“단가가 안 맞다고?”

“네, 당연히 안 맞죠. 저희가 의뢰받은 내용은 오크 토벌이었지, 거기에 오크 주술사 얘기는 없었거든요.”

“흠…….”

어느 용병대라도 마법사가 없는 이상 오크 주술사가 포함된 오크 무리의 토벌이 무리라는 것은 영주 역시 모르는 바가 아니었다.

다만 영주가 그들을 부른 이유는 나름 적정한 선에서 일을 처리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애당초 오크 주술사가 포함되어 있는 오크 무리의 토벌을 요청했더라면 그에 걸맞은 토벌 세력이 찾아왔을 것이고, 그들이 요구하는 금액은 아주 상당했을 테니까.

“그거 난처하게 됐군. 우린 거기에 오크 주술사가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거든. 안 그런가 시론?”

“네, 저도 단순하게 생각했던 오크 무리에 주술사가 있을 줄은 전혀 몰랐습니다.”

“그래, 이렇게 우리는 전혀 모르고 있었네.”

용병대장 카를이 구긴 표정으로 대꾸해 주었다.

“지금이라도 아셔서 다행이군요.”

“어째 자네들 힘만으론 안 되겠나?”

뻔뻔하다 뻔뻔해.

정말 모르고 그랬을까?

“오크 주술사가 있으니 저희 힘만으론 무리입니다. 아시다시피 주술사는 일반적인 영역에서 건드릴 수 없는 존재라, 대항할 마법사가 필요할 듯싶습니다. 그리고 여기에 따른 추가 비용은 영주님께서 감당해 주셨으면 합니다.”

그러자 영주의 표정이 일변했다.

“만약 내가 싫다고 하면?”

“그럼 이번 토벌 건은 없던 거로 해야겠죠.”

“계약 파기에 따른 위약금 문제가 있을 텐데?”

이번엔 용병대장의 표정이 살벌해졌다.

“영주님께선 저희와 전쟁이라도 하실 생각이십니까? 자꾸만 상식에서 벗어나신 걸 요구하신다면 저희도 거기에 맞춰 움직일 수밖에 없습니다.”

영주가 보란 듯이 웃음을 터뜨려주었다.

“하하, 농담일세. 무슨 농담 가지고 그렇게 사람을 죽일 듯이 노려보나. 엉뚱한 사람이 봤으면 우리 사이가 무척 안 좋은 줄 알겠어. 안 그런가 카를?”

“저희는 농담 같은 거 별로 안 좋아하는 사람들입니다만?”

일순간 영주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됐네. 농담은 이쯤하고, 자네 말대로 마법사 고용에 따른 추가 비용은 내가 감당해 주겠네. 그러니 자네들은 너무 걱정하지 말고 주어진 임무나 잘 완수해 주게. 요즘 오크들 때문에 영지 내부가 아주 난리야. 골치 아파 죽겠어.”

기분이 언짢은 건 사실이었으나 마법사 고용에 따른 추가 비용을 대신 지불해 준다면 카를 입장에서도 더 이상 그와 논쟁을 할 필요가 없었다.

‘순순히 들어주는 걸 보니 여기까지 예상한 모양이군. 하긴 정상적이었다면 비용이 더 비쌌을 테니까.’

“그럼 됐군요.”

영주가 미리 준비한 듯한 펜과 차용증서를 탁자 위에 꺼내 들었다.

“그래, 대충 얼마가 필요한가? 생각해 둔 금액이 있을 거 아니야.”

그가 꺼낸 종이 쪼가리를 보며 카를이 또다시 눈살을 구겼다.

“영주님, 지금 그걸로 대신 지불하실 생각은 아니시겠죠?”

펜을 멈춘 영주가 카를을 보며 반문했다.

“무슨 문제라도 있나? 당장 현금이 없어 대신 차용증서를 써주겠다는데.”

“마법사는 선지급입니다. 그리고 영주님이 보장하는 그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종이 쪼까리보단 당장 눈에 보이는 금화를 더 선호하죠.”

차용증서로 어떻게든 해보려고 했던 영주가 약간 씁쓸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내가 여기서 망할 것도 아니고, 세수야 꾸준히 걷히는데 대체 뭐가 문제란 말인가? 내가 써준 이것만 있으면 언제 어디든 나한테 금화를 받아갈 수 있네.”

영주가 다시 물었다.

“아니면 자네는 내 가문과 이 땅이 언젠간 망할 거라 보는가?”

“이 근방에서 큰 전쟁이라도 난다면 혹시 모르죠. 그때 가서 영주님께서 이 땅의 권리를 포기하고 도망칠지 누가 알겠습니까? 그럼 영주님께서 써주신 그 차용증서도 전부 휴짓조각이 되는 건데, 그걸 누가 대신 보장해 주는 것도 아니잖습니까? 아니면 황실에서 보장해 준다고 했습니까? 그럼 마법사가 받을지도 모르겠군요.”

“그건…… 아니네.”

“그럼 힘들겠군요. 마법사는 절대 영주님의 차용증서를 신뢰하지 않을 겁니다.”

씁쓸했지만 자신이 써준 차용증서가 잘 먹히지 않는다는 것은 영주도 아는 사실이었다.

인접 영지 사람들이나 자기 영지 내에서 장사하는 상인들이야 자신이 써준 차용증서를 잘 받아갔지만, 이처럼 자신과 영지를 신뢰하지 않는 외지인들은 달랐다.

그들은 휴짓조각이 될지도 모르는 차용증서보단 당장 어디서든 통용될 수 있는 금화를 선호했으니까.

“그럼 어떻게 했으면 좋겠나? 요즘 영지 사정이 썩 좋진 않아서 말이야. 나도 가진 금화가 많다면 금화를 내줬겠지.”

이 순간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카를은 전에 만났던 방코 소년이 떠올랐다.

“그럼 금화를 빌리셔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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