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06. 방코의 조수가 되었다 #3(2)
록펠러와 잠시간 눈빛 싸움을 이어가던 대장 카를이 마지못해 록펠러의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가게 주인에 대해 잘 모르니 이번 기회를 놓친다면 방금 전 제안받았던 것보다 보관료가 더 비싸질 것을 염려했던 것이다.
“좋다. 그닥 내키진 않지만 그렇게 하자꾸나. 대신 거짓말은 아니겠지?”
“거짓말은요. 제가 아저씨같이 험한 사람을 두고 어떻게 거짓말을 하겠어요?”
카를은 똥 씹은 표정으로 나중에 만날 제 부하들을 떠올렸다.
‘그렇게나 떵떵거리고 왔는데, 여기서 금화 보관료로 6퍼센트나 줬다고 하면 제대로 웃음거리가 되겠군.’
“대신 한 가지 조건이 있다.”
그 말에 록펠러가 고개를 갸웃했다.
“조건이요? 그게 뭔데요?”
“이 거래, 우리들끼리만 아는 거로 하자꾸나. 그러니까 보관료는 네 말대로 6퍼센트로 줄 테니, 혹여나 누군가 찾아와 여기 일에 대해 물으면 3퍼센트 거래였다고 하자는 소리다. 내 체면도 있으니까.”
“대신 아저씨도 어디 가서 여기 얘기하시면 안 돼요.”
“그건 걱정하지 마라. 여기 이야기는 내 무덤까지 가져갈 테니. 대신 나처럼 험악하게 생긴 녀석들이 찾아와 확인 차 물으면 그냥 3퍼센트로 거래했다고 말해주면 돼. 그거면 된단다.”
그 말에 록펠러가 넘겨짚듯 물어보았다.
“그런데 어디서 오셨어요? 혹시…… 하운드 용병대에서 오셨나요?”
“잘 알고 있구나.”
“아, 아저씨도 그쪽 사람이었구나. 어제도 아저씨 같은 사람들이 찾아왔거든요. 달란트를 환전하려고 찾아왔던데 혹시…… 아는 분들이세요?”
“그놈들이 내 부하들이야.”
“부하들이요? 그럼 아저씨가 거기 대장이라도 된다는 소리예요?”
“그래, 내가 거기 대장이다. 그렇게 안 보였나 보구나.”
“네…… 좀 놀랍네요. 대장이란 사람이 직접 찾아올 줄은 몰랐거든요.”
“다른 일도 아니고 미리 받은 돈을 방코에 맡기는 일인데 당연히 내가 직접 움직여야 하지 않겠니? 돈 문제는 말이다. 믿을 사람이 아무도 없어. 그래서 직접 온 거다.”
카를이 제 소개를 하자 가게 안쪽에서 둘의 대화를 엿듣고 있던 카터가 짐짓 놀란 표정을 지었다.
‘용병대장이라고? 그럼 그 유명한 사냥개 카를이잖아?’
사냥개 카를이라고 한다면 하운드 용병대를 대표할 만큼 아주 유명하고 강한 사람이었다.
카터는 잠시 하던 일을 멈추고 은근슬쩍 가게 안쪽으로 시선을 주어 하운드 용병대장을 살펴봤다.
소문대로 그는 작은 오크와도 주먹다짐을 할 수 있을 만큼 아주 큰 거구의 사내였으며, 어제 찾아왔던 부하들보다 더 흉악하고 험악하게 생긴 자였다.
‘인간 오우거라 불리는 자를 이리 보다니. 운이 좋은 건가?’
그런데 소문의 용병대장도 방코의 어린 조수 하나를 이겨내지 못하고 바가지를 쓰고 있었다.
‘참으로 기가 막히는군. 천하의 사냥개 카를도 이리 바가지를 당하다니 말이야. 이런 걸 보면 내가 정말 조수 하나는 기똥 차게 둔 모양이야.’
제자리로 돌아온 카터는 다시 한번 록펠러의 배짱에 탄복했다.
천하의 하운드 용병대장을 상대로 말도 안 되는 바가지를 씌울 수 있는 배짱은 정말 아무나 가질 수 없는 재능이었으니까.
‘며칠간 지켜봤지만 저놈은 정말 뭘 해도 크게 될 놈이야. 나 같이 소심한 녀석과는 그릇 자체가 달라.’
대장 카를은 방금 전 자신을 힐끔 쳐다보고 간 가게 주인을 상기시켰다.
‘빌어먹을. 여기저기서 웃음거리가 되는 모양이군.’
자리가 불편해진 카를은 어서 빨리 금화를 맡기고 떠나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렇게 마음을 서두르려는 찰나, 문득 자신에게 바가지를 씌운 소년의 이름이 궁금해졌다.
“그런데 넌 이름이 뭐니?”
“제 이름이요? 전 록펠러 로스메디치예요. 편하게 록펠러라 불러주세요.”
“로스메디치?”
카를은 그의 이름을 듣고 그가 평민이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로스메디치란 이름은 평생 동안 들어보지도 못했으니까.
“평민이구나. 하긴 여기 일에 평민이 아닌 자를 쓸 순 없겠지. 그보다 보관증이나 빨리 써 주거라. 바쁜 몸이니.”
한시라도 빨리 가게 밖으로 나가고 싶어 하는 그를 두고 록펠러는 영주에게서 들었던 이야기를 슬슬 꺼내 들기 시작했다.
“보관증이야 바로 써드릴게요. 그런데 여기 일은 잘되고 있는 건가요? 제가 듣기론 오크 토벌 때문에 찾아왔다고 들었거든요.”
카를에게서 금화 주머니를 받아 든 록펠러가 보관증을 쓰기 시작하자 카를이 대꾸를 해주었다.
“걱정 마라. 일은 잘되고 있으니까. 이런 변방에서 오크 토벌이야 우리가 지금껏 쌓아 올린 명성에 비하면 정말 아무것도 아닌 일이지.”
카를이 은근슬쩍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자신감을 드러내 주었다.
“여기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몰라도. 적어도 우린 잠시 쉬어가는 소일거리 정도로 생각하고 있단다. 그까짓 오크가 무슨 대수라고.”
“아, 그래요?”
금화 보관증을 써주며 펜을 굴리던 록펠러가 불현듯 무언가에 대해 물어보았다.
“하운드 용병대 입장에선 오크 같은 건 정말 아무것도 아닌 모양이네요?”
“오크 대군도 아니고 오크 몇 마리 죽이는 건 일도 아니지.”
“그럼 부족 단위여도 별문제가 없는 건가요?”
“차라리 부족 단위였으면 좋겠구나. 그럼 생각했던 것보단 덜 심심할 테니까.”
아직까지도 여유로운 그를 향해 록펠러가 준비된 말을 살며시 흘려주었다.
“그럼 다행이네요. 오크들이 끌고 다니는 괴수병기나 아니면 주술사 같은 게 있어도 별문제가 없다는 소리잖아요? 휴, 다행이다. 갑자기 오크들이 나타났다고 해서 많이 걱정했는데 아저씨가 보인 자신감이면 별문제 없을 것 같네요.”
그사이 금화 보관증을 써낸 록펠러가 가게의 인장까지 찍어 카를에게 넘겨주었다.
“금화 보관증이에요. 어떤 경우에서든 이 보관증이 있어야만 저희 가게나 아니면 리옹 길드에 속한 방코에 찾아가셔서 맡겨놓은 금화를 찾아가실 수 있을 거예요. 물론 저희 말고 다른 가게에서 찾아가시면 수수료가 붙는 건 알고 계시죠? 자 여깄어요. 받아가세요.”
록펠러가 흘린 말에 카를은 생각이 많아진 모양이었다.
‘괴수병기나 오크 주술사?’
카를은 그럴 일은 아마 없을 거라 판단했다.
이곳은 제국에서도 나름 조용하다는 변방이었다.
간혹 오크들이 나타나긴 했으나, 록펠러가 언급한 괴수병기나 주술사는 오크들이 일으키는 전쟁 외에는 거의 볼 일이 없는 희귀한 존재였다.
‘괴수병기라면 몰라도 오크들이 전쟁을 일으키는 것도 아닌데 주술사까지 볼 일은 없겠지.’
카를은 아닐 거라 장담하며 갑자기 생긴 불미스런 생각을 떨쳐버리려 애썼다.
그러자 그의 안 좋은 기색을 귀신같이 잡아낸 록펠러가 그 이유에 대해 물어보았다.
“갑자기 왜 그러세요?”
“뭐가 말이냐?”
“안색이 안 좋아지신 거 같아서요. 혹시, 제가 염려했던 부분이 현실이 되면 문제가 되는 건가요?”
“무슨. 단순히 오크를 토벌하는 일이다. 그런데 네가 말한 것들은 오크들이 전쟁이나 일으킬 때나 볼 수 있는 것들이야. 평시에는 거의 보기 힘들지.”
그러자 록펠러가 거짓된 연기로 놀란 표정을 지어 보였다.
“전쟁이요? 그럼 제가 언급한 괴수병기나 주술사가 나타난다면 여기서 전쟁이라도 일어난다는 말인가요?”
“그게 아니다. 그냥 네가 말한 것들이 나타나려면 이 근방에서 오크들이 전쟁이라도 일으켜야 된다는 소리다. 괴수병기면 몰라도 오크 주술사는 정말 아무 데서나 볼 수 있는 게 아니거든. 오크 주술사는 오크 내에서도 아주 특별한 존재니까.”
“그럼 전쟁 없이 오크 주술사가 토벌하는 무리에 끼어 있다면요?”
“그거야…….”
말끝을 흐리는 그를 향해 록펠러가 재차 물어보았다.
“그렇게 되면 문제가 되는 건가요? 그렇죠?”
카를은 부정하지 못했다.
사실이었으니까.
“오크 주술사면…… 인간으로 치자면 마법사 정도는 된단다. 그러니 문제야 당연히 생기겠지. 우리들이라 해봐야 칼깨나 쓰는 용병들인데 아무 준비도 없이 마법사를 어떻게 잡겠니? 암살 명가로 소문난 이스마일처럼 표적암살이 가능한 것도 아니고.”
“그럼 어떻게 되는 거죠?”
“그럴 리가 없다니까? 오크 주술사는 그만큼 특별한 존재라 쉽게 볼 수 없는 거란다. 그러니 쓸데없는 걱정이지.”
“만에 하나 있다면요?”
록펠러의 집요한 공세에 가게 안쪽에서 일을 보고 있던 카터가 약간 긴장했다.
‘저놈이 뭔 말을 하려는 거지? 오크 주술사가 있다는 말은 비밀로 해야 할 텐데?’
영주 눈치가 보인 카터가 이래저래 걱정하는 사이.
용병대장 카를은 록펠러를 상대하며 짜증 같은 걸 느꼈다.
괜한 걸 집요하게 물어보는 귀찮은 소년 정도로 생각한 것이다.
“큰일은 무슨. 단지 생각했던 것보다 많이 귀찮아질 뿐이지.”
“귀찮아진다구요? 어떻게요?”
“넌 궁금한 것도 많구나. 계속 쓸데없는 거나 물어보고. 그냥 그 주술사에 대항할 수 있는 마법사나 마녀를 대동해서 토벌에 나서면 돼. 주술사의 주술이야 어차피 마법사나 마녀가 알아서 대응해 줄 테니까.”
“그럼 하운드 용병대에도 마법사가 있는 건가요?”
“마법사가 그리 흔한 줄 아느냐? 따로 구해봐야지.”
“포기는 안 하실 거죠?”
오크 주술사라는 숨은 복병을 만난다면 일반적인 용병대의 경우 일의 위험성을 감안하여 그 임무를 포기할 가능성이 아주 높았다.
애당초 불가능한 일인데 왜 맡아서 한단 말인가?
하지만 하운드 용병대에겐 일을 쉽게 포기할 수 없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하긴 위약금 때문이라도 쉽게 포기하진 않겠네요.”
당장 임무를 포기했을 시 계약상 지불해야 하는 위약금 문제도 있었지만, 그들이 임무를 포기할 수 없는 가장 큰 이유는 따로 있었다.
바로 명성.
‘포기는 무슨. 다만 생각했던 것보다 번거롭고 귀찮아질 뿐이지.’
“우린 맡은 임무를 단 한 번도 포기한 적이 없단다. 아예 말도 안 되는 거라면 몰라도 어느 정도 가능한 일이라면, 손해를 보더라도 어떻게든 끝장을 보는 편이지. 그게 결국 우리에겐 남는 장사니까. 몸값이 올라가거든.”
카를이 말을 이었다.
“내가 이끄는 하운드의 명성이 왜 그리 자자한지 모르고 있겠구나?”
“무슨 일이든 다 해결해서 그런 건가요?”
“그렇지. 누구라도 우리에게 일을 맡기면, 뭐든 해결할 수 있단다. 단지 수단과.”
“돈이 문제로군요.”
카를이 눈가를 살며시 좁혔다.
상대는 아직 스물도 넘지 않은 소년이었지만 도저히 어리다는 느낌을 받지 못했으니까.
“아무튼 어떤 경우라도 맡은 임무를 쉽게 포기하는 일은 없을 거다. 그게 우리가 이제까지 어렵게 쌓아 올린 하운드의 명성과 자부심이니.”
“그럼 제 걱정대로 오크 주술사가 있다면 마법사라도 불러내서 끝장 보시겠네요?”
카를은 침묵했지만 그의 눈빛이 모든 걸 말해주고 있었다.
그렇다고.
“쓸데없이 대화가 길어졌구나. 맡긴 돈은 나중에 찾으러 오마.”
그 말을 두고 떠나는 카를을 향해 록펠러는 옅은 웃음을 지어 보였다.
‘마법사야 무조건 필요할 테고, 그렇게 되면 저 사람이든 아니면 여기 영주든 어떤 식으로든 돈이 필요하겠지. 마법사에게 주는 돈은 무조건 선지급이니까.’
그리고 없는 돈을 허공에서 찍어주진 않을 것이다.
물론 영주나 용병대장이나 차용증서를 따로 써서 주는 방법도 있긴 했지만, 그런 식으로는 마법사를 불러들일 수 없었다.
마법사는 차용증서보단 현금을 좋아했으니까.
고로.
‘돈은 여기서 빌려야 한다는 소리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