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04. 방코의 조수가 되었다(2)
“늦지 않게 왔구나.”
카터는 손에 들린 회중시계를 힐끔 살피더니 제시간에 맞춰 찾아온 록펠러를 반겨주었다.
“좋은 아침이네요. 카터 아저씨.”
“그래, 좋은 아침이구나.”
카터는 일과를 시작하기 전에 록펠러와 마주 보고 앉았다.
그들 사이에 위치한 고풍스러운 원목 탁자 위에는 양팔 저울이 자리하고 있었다.
“이런 일은 처음이라고 했지?”
“네.”
“그럼 일을 시작하기 전에 몇 가지 설명해 줘야겠구나.”
아무것도 모르는 소년에게 다짜고짜 일을 맡길 수 없었기에 카터는 자기가 하는 일에 대해 설명하고자 했다.
“금세공업자가 무슨 일을 하는지 알고 있는 게냐?”
“대충은요.”
“그래 대충은 알고 있겠지. 우선 내가 하는 일은 크게 세 가지란다.”
크흠!
짧은 헛기침과 함께 제 턱수염을 매만지는 카터가 말을 잇기 시작했다.
“그중에 가장 큰 일은 바로 금을 세공하여 금화를 만드는 일이지. 일반적인 금은 그 형태가 제각각이라 거래할 때 엄청 불편하거든. 기준도 없고.”
“그래서 금화 같은 걸 만들잖아요. 휴대하기 쉽고 또 거래하기 쉽게.”
“잘 알고 있구나. 하지만 금화를 만드는 일은 아무나 쉽게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란다.”
록펠러는 그의 말을 부정하지 않았다.
그의 말대로 금세공업은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이었으니까.
“이 일을 하기 위해선 우선 황실에서 발급해 준 특별허가증이 필요하지. 그리고 금화를 세공하기 위한 전문적인 기술도 필요하단다. 이걸 배우려면 적잖은 시간이 필요하지. 그래서 금화를 세공하는 일을 네게 시킬 생각은 없단다. 대신 다른 일을 맡길 생각이야.”
“네.”
“우선 이걸 보거라. 어제 내가 만든 금화란다.”
카터는 품에서 제국 초대 황제의 초상화가 새겨진 금화 하나를 꺼내 록펠러에게 보여주었다.
“이게 바로 제국의 금화인 달란트란다. 너도 평민이니 한 번쯤은 봤을 테지만, 이거 하나면 적어도 한 달 정도는 타지에서 충분히 먹고 잘 수 있지.”
일반적으로 시골 노동자의 하루 품삯은 은화 1개였고, 그 은화 32개가 모이면 금화 1개로 바꿀 수 있었다.
“저도 알아요. 시골 노동자 하루 급여가 1실링이잖아요. 그게 한 달 치 모여야 금화 하나로 바꿀 수 있다고 들었어요.”
“정확히는 32실링에 1달란트지만, 대충 계산하면 네 말대로 시골 노동자가 한 달은 꼬박 벌어야 금화 하나를 가질 수 있지.”
“네.”
카터는 이번에 은화를 꺼내 록펠러에게 보여주었다.
“이건 네가 말한 실링이란다. 은화라고도 하지. 여기서 은화는 영주님이 정한 세공업자가 알아서 만들 수 있지만, 이 금화 달란트만큼은 오로지 황실의 허가를 받은 우리들만 만들 수 있단다.”
록펠러도 이미 알고 있는 이야기였다.
“그 이야기도 들었어요.”
“사실 이 은화 같은 경우는 정해진 규격 같은 게 없어서 크기와 모양이 전부 제각각이란다. 영주들이 지 꼴리는 대로 정하거든. 그래서 이곳에서 쓸 수 있는 은화가 다른 영지에서 전혀 사용할 수 없는 경우가 더러 생기기도 하지.”
“전부 다 그런가요?”
“그건 아니란다. 대부분 32실링에 1달란트라는 규칙을 지키고 있지만 경우에 따라선 이걸 안 지키는 곳도 있거든.”
“그럼 여기 은화를 다른 영지에서 쓰면 문제가 생길 수도 있겠네요?”
“그렇지. 그래서 제국 어디서든 그 가치가 변하지 않는 이 금화가 아주 중요한 거란다.”
“그럼 제국에서 이뤄지는 모든 거래는 전부 금화로 하는 건가요?”
“그렇지. 은화야 모두 제각각이지만 금화는 그렇지 않거든.”
현대로 치자면 제국의 금화는 기축통화인 달러 같은 것이었고, 은화는 각국의 화폐 같은 개념이었다.
“하나 궁금한 게 있는데요.”
“뭐든 물어 보거라.”
“제국 안에서 거래를 하기 위해선 금화가 필요하잖아요? 그럼 제국 밖에서 이뤄지는 거래는 어떻게 되는 건가요? 거기서도 제국 금화로 거래하는 건가요?”
그 물음에 카터는 제 턱수염을 매만지며 어떻게 답변해야 할지 잠시 고민 좀 했다.
“좀 난해하긴 한데. 일단 제국 금화로 거래하는 게 불가능하진 않단다. 다만 고블린 금화인 두카트를 선호하는 편이지.”
록펠러도 제국 외의 세력들이 제국 금화보단 고블린 금화를 더 선호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다만 궁금한 것은 그것의 이유였다.
‘왜 굳이 고블린들이 만든 금화를 선호하는 거지?’
“그 이유가 뭔가요?”
이유까지 설명하려면 좀 더 복잡한 이야기가 나와야만 했다.
그렇기에 잠시 심호흡을 한 카터가 말을 이어나가기 시작했다.
“이 세상에 금화는 딱 세 종류란다. 제국에서 만든 달란트(Talent), 드워프가 만든 소브린(Sovereign), 그리고 고블린들이 만든 두카트(Ducat)가 있지. 이름을 외우기 어렵다면 쉽게 제국 금화, 드워프 금화, 고블린 금화라 불러도 된단다.”
“그 금화들 간에 차이라도 있나요? 제가 알기론 없는 걸로 아는데.”
예리한 질문이었다.
“차이라면…… 있기야 한데, 본래는 없는 게 맞는 거란다. 제국 황실에서 정한 금화 규격도 사실 드워프 금화인 소브린의 금 함량에 맞춘 거거든. 이건 서로 간에 거래의 편의성을 위한 일이었지. 고블린 금화인 두카트 역시 마찬가지고. 그래서 원칙적으로 본다면 세 금화 간의 금 함량은 전부 같아서 가치 역시 동등한 게 맞단다.”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단 소리죠?”
예리한 질문이었다.
사실 방코 일을 하면서 굳이 몰라도 되는 내용이었지만 카터는 록펠러를 배려하는 마음으로 자세히 설명해 주기로 했다.
“사실 그렇단다. 형태를 떠나서 단순히 금화 무게만 놓고 본다면 세 금화 모두 동일하단다. 하지만 다른 세력들은 제국에서 만든 금화를 전혀 신뢰하지 않고 있지.”
“신뢰하지 않는 이유가 뭔가요? 제가 모르는 무슨 이유라도 있나요?”
“그게…… 예전에 제국 금화인 달란트에 문제가 생긴 적이 있었거든. 지금도 달란트 중에 금 함량이 조금 낮고 구리가 섞인 게 있단다.”
그제야 록펠러는 제국 밖 거래에 있어 모두가 제국 금화를 기피하는 이유를 알게 되었다.
‘이제야 이해가 되네. 역시 모든 종족 중에 잔머리를 지독하게 굴리는 건 인간이라니까.’
“금화에 구리가 섞였다고요? 그럼 안 되는 거 아닌가요? 금화엔 오로지 금만 들어가야 하잖아요.”
록펠러의 말에 카터는 부정하지 않았다.
“네 말이 맞단다. 금화엔 당연히 금만 들어가야지. 하지만 구리를 조금만 섞으면 덜 들어간 금만큼 또 다른 금화를 만들어낼 수 있단다.”
“그러다가 잡히면 문제가 생기는 거 아닌가요?”
“그렇긴 한데…… 예전에 제국과 리자드맨 사이에 큰 전쟁이 있었단다. 화염 전쟁이라고 해서 와이번 알 때문에 생긴 자잘한 마찰이 두 세력 간의 전면전까지 갔었던 전쟁이었지.”
리자드맨.
과거 제국에 패해 이제는 이름만 남은 대륙의 소수종족이었다.
“너도 알다시피 결과는 제국의 승리였단다. 하지만 그 당시 제국은 엄청난 재정난에 시달리고 있었어. 당장 리자드맨과 전쟁을 해야 하는데 황실엔 돈이 없었지.”
록펠러는 그다음에 나올 이야기를 대략 짐작할 수 있었다.
“설마…… 전쟁 때문에 구리 섞은 금화를 만들어낸 건가요?”
“그렇게 된 거지. 허공에서 없는 돈이 나오는 것도 아니잖니? 당연히 제국에선 꼼수를 썼지. 멀쩡한 금화에 구리를 섞어서 금화의 양을 늘리는 방법을 쓴 거야. 덕분에 화염전쟁은 이겼지만 그 후유증으로 제국 금화는 모두로부터 신뢰를 잃었고, 그때 당시 어마무시하게 찍어낸 가짜 금화는 지금까지도 시중에 유통되고 있단다. 우린 그 금화를 바스타드 달란트라고 부르고 있지.”
바스타드 달란트(Bastard telent).
구리가 섞인 제국 금화를 뜻하는 말로 제국 금화가 대륙에서 신뢰를 잃게 된 배경이 되었다.
“그런 가짜 금화가 아직도 많이 있나요?”
“화염전쟁 당시에 제국에선 금화가 아주 많이 필요했었지. 그렇게 찍어낸 금화가 설마 하루아침에 다 없어졌겠니? 아직도 많이 있단다.”
“그런 금화면 좀 솎아내야지 않나요?”
“솎아내는 게 좋긴 한데, 그런 게 한두 개여야지. 적어도 제국 내에선 문제없이 쓰이고 있으니 나도 받아주고는 있단다. 다만 바스타드 달란트보다 구리 함량이 더 많은 건 안 받고 있지. 이건 나를 포함해서 모두가 마찬가지야. 제국에서 허용되는 건 딱 바스타드 달란트까지란다.”
“그건 그나마 다행이네요.”
록펠러는 제국 금화가 신뢰를 잃게 된 배경을 이해했다.
다만 고블린 금화가 더 선호되는 이유에 대해선 아직도 의문이었다.
“그런데 품질 좋은 드워프 금화를 놔두고 왜 고블린 금화를 쓰는 건가요? 순수한 금 함량은 두카트보다 소브린이 더 좋지 않나요?”
소설에선 드워프 금화인 소브린이 가장 품질이 좋다고 했었다.
순수 금 함량도 최고였고.
다만 그런 고품질의 금화가 쓰이지 않는 것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소브린이야 품질은 확실히 좋지. 다른 누구도 아닌 드워프들이 만든 금화인데.”
“그럼 뭐가 문제죠?”
“문제는 이 드워프들이 워낙 치졸하고 졸렬해서 소브린을 대륙 여기저기서 쓰기엔 문제가 많다는 거지.”
록펠러는 드워프가 치졸하고 졸렬하다는 것에는 의문을 달지 않았다.
‘그렇게 속 좁은 놈들도 없긴 하지. 아주 밴댕이 소갈딱지마냥 치졸하게 사는 놈들이니까.’
카터가 말을 이어나갔다.
“소브린도 종류가 여러 가지가 있는데, 가끔 드워프들과 거래하다 보면 특정 소브린을 아예 안 받는다고 하더구나. 그것도 모자라 자신들이 안 받는 소브린으로 다른 녀석들과 거래하다 들키면 그날부로 완전히 남남이 되어버린다고 하는데 이걸 어떻게 쓸 수 있겠니? 드워프들과 거래를 아예 안 할 것도 아닌데.”
대륙에서 드워프란 존재를 무시할 수 있는 세력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들은 대륙에서 가장 부유했으며 또한 여러 희귀한 자원들을 독점하고 있었기에 싫어도 어쩔 수 없이 어울릴 수밖에 없는 종족이었던 것이다.
“드워프 녀석들도 참 대단하네요. 그렇게 속 좁아서 어떻게 살까요?”
“그러게 말이다. 그래서 고블린 금화인 두카트가 두루두루 쓰이는 거지. 고블린들이야 속 좁은 드워프들과 달리 제 원수하고도 거래할 수 있는 놈들이니까. 이놈들도 진짜 골 때리는 놈들이지만 그래도 드워프보단 나은 거 같아.”
“그래서 고블린 금화가 여기저기서 쓰이는 거군요. 이제 알았네요.”
“두카트도 품질 면에서 보면 제국 달란트와 별 차이가 없지만, 그래도 고블린들은 거기다 구리를 섞는 바보 같은 짓은 하지 않았거든. 고블린들도 그걸 잘 알기에 절대 구리를 섞지 않고 있단다. 걔들도 바보라서 안 섞는 게 아니야. 오히려 인간들보다 더 영악한 놈들이지.”
저도 모르게 고개를 주억이는 록펠러가 생각했다.
‘다른 소설에서 이런 말을 하면 웃겠지만 적어도 여기선 고블린=신용이란 소리겠군. 고블린 금화가 대륙 전체적으로 쓰이고 있으니까.’
이어지는 생각은 먼 훗날을 위한 것이었다.
‘나중에 고블린이란 이름을 이용할만한 가치가 있겠어. 신용이란 건 하루아침에 쌓이는 게 절대 아니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