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 04. 방코의 조수가 되었다(1)
교구에서 파견 나온 사제 무리가 영주성 근처에 자리한 어느 마을 안으로 들어섰고, 그곳에 자리한 여러 집을 순례하듯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똑똑똑!
그들 중 남의 집 앞까지 찾아가 과감하게 문을 두드리는 사제는 언제나 나이가 어린 사제였다.
똑똑똑!
어느 집 문을 두드리자 한 아녀자가 밖으로 나와 찾아온 사제 무리를 확인하고선 다소 놀란 표정을 지었다.
“어머나! 사제분들께서 여기엔 무슨 일로?”
그녀가 의문을 드러내자 나이 어린 사제가 그들이 찾아온 이유에 대해 간략히 전달해 주었다.
“신의 어린 양들은 항상 굶주려 있습니다. 굶주린 발로 여기까지 찾아왔으니, 아주 적게라도 성의를 표해주셨으면 합니다.”
왜 찾아왔나 했더니 성금 때문에 찾아온 것으로 보였다.
‘무슨 일이지? 이런 적이 거의 없었는데.’
“성금이면…… 주말마다 잘 내고 있는데.”
어린 사제는 대답 대신 조그맣게 웃어 보였고, 잠시 후 그녀는 자신의 집까지 찾아온 신의 어린 양들을 그냥 내칠 수 없어 그들에게 조그마한 성의 표시를 해주었다.
‘어휴, 칼만 안 들었지 이거 날강도가 따로 없네.’
겉으로 그 심정을 드러내지 못하는 아녀자가 어색하게 웃어 보이자 어린 사제가 그녀에게 축복을 내려주었다.
“요한의 가호가 그대와 함께하기를.”
그렇게 여러 집을 돌아다니던 사제 무리가 어느 집 앞에 멈춰 섰다.
‘로스메디치라…….’
이 허름하고 낡은 집은 다른 집들과 다르게 집안의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로스메디치.
못 들어본 이름인 것으로 보아 십중팔구 어느 평민이 사는 집으로 보였다.
‘평민이면 평민답게 성금도 많이 내겠지.’
어린 사제가 또다시 문을 두드렸다.
잠시 후 문을 열고 나온 이는 9살 정도로 보이는 어린 소년이었다.
‘여긴 어른들이 없는 건가?’
“꼬마야, 안에 부모님은 안 계신 거니?”
어린 사제가 성금을 낼 부모를 찾자 그와 마주하고 있던 로스메디치 가의 넷째 레오가 고개를 내저으며 부정의 의미를 내비쳤다.
별다른 말도 없이 그저 고개만 젓는 것으로 보아 아주 내성적인 아이로 보였다.
“부모님은 어디로 가셨는데?”
여전히 말이 없는 아이였지만 그들만의 사정으로 성금이 필요한 어린 사제는 쉽게 물러날 생각이 없었다.
이따금 성금을 내기 싫어 집에 있어도 없는 척 연기하는 사람들이 있었으니까.
‘쉽게는 못 가지.’
평민은 남들과 다르게 영주에게 직접 세금까지 내가며 집안의 이름을 유지할 정도로 나름 부유한 자들이었다.
그런데 이런 데를 그냥 지나친다?
어림도 없는 소리였다.
“신을 모시는 어린 양들을 정당한 이유도 없이 외면한다면 나중에 큰 벌을 받는단다. 그래서 다시 묻는 건데 정말 안에 아무도 안 계신 거니?”
그러자 여태까지 고개만 젓던 레오가 마지못해 입을 열어주었다.
“돌아가셨어요.”
“뭐?”
“…….”
“돌아가셨다고? 두 분 다?”
놀란 사제가 되묻자 레오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그러자 뒤에서 조용히 지켜보고 있던 어느 사제가 살짝 놀란 눈빛으로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최근에 영주님 밑에서 일하던 징세관이 죽었다고 했습니다. 로스메디치란 이름이 낯설지 않은 걸 보니 아마도 그 징세관이 여기 사람이었던 거 같습니다.”
아무리 평민이라도 이런 상태라면 경제적으로 일반 농노보다 못한 상황일 수가 있었다.
당황한 사제들이 어쩔 줄 몰라 하자 그들 중 대장 격으로 보이는 젊은 사제가 무거운 입을 열었다.
“다음 집으로 가세나. 굶주리고 헐벗은 자에게 무조건 성금을 강요하는 건 교리에도 크게 어긋나는 일이네. 이런 데는 오히려 베풀어야지.”
그들도 사정이 급해 영지 안을 돌고 있었지만 두 부모를 잃은 아이에게 성금을 강요할 정도로 그렇게 몰상식한 사람들은 아니었다.
사제장이 어린 사제에게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작게 눈치를 주자 어린 사제는 레오의 손을 꼭 잡고는 그의 머리를 조심스레 쓰다듬어주었다.
“힘들더라도 항상 꿋꿋하게 살아가거라.”
어린 사제를 제외한 나머지 사제 무리가 일제히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고, 사제장의 지시를 받은 어린 사제는 레오에게 무언가를 쥐여주었다.
그것은 그들이 앞전에 받았던 성금 중 극히 일부였다.
“요한 님께선 항상 굶주리고 헐벗은 자들을 외면하지 말라고 하셨단다. 이건 교단에서 보이는 작은 성의니 너희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됐으면 좋겠다.”
말을 마친 어린 사제가 일어나 떠나려고 하자 레오가 갑작스레 그의 옷깃을 붙잡았다.
사제가 고개를 돌려 레오를 내려다보자, 로스메디치 집안의 넷째 레오가 그에게 무언가를 물어보았다.
“저기…… 궁금한 게 있는데요.”
그 물음에 어린 사제는 의문을 품었지만 이내 인자한 미소와 함께 레오와 다시 마주 봐주었다.
“무엇이 궁금하니?”
“그게…….”
레오는 엊그제 형들이 한 말이 떠올라 짙은 의문을 품고 그에게 물어보았다.
“꼭 성금을 많이 내야만…… 천국에 갈 수 있나요?”
무슨 질문인가 했더니 어린애다운 질문이었다.
“꼭 그렇지만은 않단다. 성금을 많이 내도 믿음이 없다면 천국엔 갈 수 없으니까.”
“형들은…… 성금만 많이 내면 천국에 갈 수 있다고 했어요. 저희가 성금을 많이 내면 교회에선 저희가 천국에 갈 수 있도록 더 많이 기도해 준다고 했으니까요.”
잠시 생각해 보던 어린 사제가 이내 옅게 웃어 보였다.
레오의 질문이 귀여웠던 것이다.
“꼭 그렇다고 할 순 없겠지만, 네 형들의 생각이 나쁘다고 볼 순 없겠구나. 하지만 성금만큼이나 중요한 게 바로 믿음이란다.”
말을 마친 어린 사제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리에서 가장 막내라 앞서간 사제들의 눈치가 보였던 것이다.
“아니면 네가 그런 형들을 위해 기도해 주는 건 어떻겠니?”
“제가요?”
놀란 레오가 되묻기도 전에 발걸음을 서두르는 어린 사제가 마지막 말을 전해주었다.
“요한 님의 가호가 항상 로스메디치 가에 있기를 기도하마.”
그렇게 떠난 어린 사제를 레오는 한참 동안 자리에 서서 지켜보았다.
레오의 머릿속에는 아직도 성금과 믿음, 그리고 천국이라는 단어가 맴돌고 있었다.
* * *
“교구의 사제들이 왔다 갔다고?”
방코에서 일자리를 얻은 록펠러는 저녁 식사 자리에서 오늘 있었던 일들을 동생들에게 전해 들었다.
동생들 중 가장 먼저 소식을 전한 건 다름 아닌 넷째 레오 로스메디치였다.
“응.”
소극적인 레오가 답하자 록펠러는 의문을 품을 수밖에 없었다.
‘사제들이 왜 찾아온 거지? 자주 있는 일은 아닐 텐데.’
“그래서? 별일은 없었지?”
걱정스러운 물음에 넷째 레오는 잠시 고개를 젓더니 이내 어린 사제에게서 받았던 무언가를 꺼내 식탁 위에 조용히 내려놓았다.
“그거 뭐야?”
“은화잖아!”
은화를 보고 놀라지 않은 이가 없었다.
록펠러도 놀란 눈치였고, 다른 동생들도 마찬가지였다.
“사제들이 은화까지 주고 갔다고?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밖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었던 둘째가 목소리를 냈다.
“이상하다. 내가 듣기론 예배당 확장하는 일로 사제들이 찾아와서 성금을 받아갔다고 했는데.”
그렇다고 소심한 넷째가 감히 사제들의 성금을 가로챌 리가 없기에 그들의 의문은 더욱 커질 수밖에 없었다.
“레오야, 낮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자세히 좀 말해줄 수 있어?”
록펠러의 말에 넷째 레오가 아까 낮에 있었던 일을 자세히 말해주었고, 그제야 모두는 웃음바다가 됐다.
자초지종에 대해 듣고 난 록펠러는 피식 웃으며 생각했다.
‘삥 뜯으러 왔다가 오히려 삥을 뜯겨버렸네.’
“나쁘진 않네.”
록펠러가 말했고, 뒤이어 동생들도 말을 이었다.
“항상 없는 척해야겠다! 우리가 없어 보이니까 교단에서 도와준 거 아니야?”
“맞아. 항상 없는 척해야 돼. 그래야 불쌍해서 은화라도 얻는 거잖아.”
조그마한 은화 한 닢에 들뜬 동생들에게 록펠러가 말을 이었다.
“뭐 틀린 말은 아니겠다. 우리가 있는 척, 아니면 평민이라서 알량한 자존심이라도 내세웠다면 절대 오늘 같은 자비는 없었을 테니까. 레오야, 잘했어. 지금 우리 형편에선 은화 한 닢도 아쉬운 상황이니까.”
사금 채취를 한 이후로 그들은 저녁 식사는 항상 챙겨 먹었고, 그것은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자, 그럼 저녁 먹자.”
록펠러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오늘 하루 동안 있었던 일들을 그에게 보고했던 동생들이 왁자지껄 떠들며 그들 앞에 차려진 조촐한 저녁 식사를 해치우기 시작했다.
곡물가루와 간단한 채소로 만든 정말 간단한 식사였지만 하루 종일 배고팠던 동생들에겐 최고의 만찬이었다.
시장이 반찬이라고 허겁지겁 식탁에 놓인 음식들을 해치우던 셋째가 기분 좋게 목소리를 냈다.
“요즘 따라 맨날 밥 먹는 거 같아! 너무 좋아!”
그 말에 갑작스레 둘째가 의기소침해졌다.
록펠러에겐 말하지 않았지만 안 좋은 소식을 들었던 것이다.
“앤드류, 왜 그래? 무슨 안 좋은 일이라도 있어?”
록펠러의 물음에 다소 의기소침해졌던 둘째가 조심스레 입을 떼기 시작했다.
“록펠러 형, 그 이야기 들었어?”
“무슨 얘기?”
“그게…… 갑자기 오크들이 나타났대. 지금 난데없이 나타난 오크들 때문에 옆 마을이랑 여기도 난리야. 어른들이 절대 위험한 곳으로 가지 말래. 우리 이러다 사금 채취도 못 하면 어떻게 해?”
무슨 얘긴가 했더니 이미 금세공업자를 통해 들었던 이야기였다.
“아까 너희들에게 못 해준 말이 있어. 형이 취직했거든.”
“정말? 어디에?”
“방코에. 금세공업자 아저씨와 말은 잘 끝내놨어. 그러니까 앞으로 굶을 걱정은 하지 마. 형이 벌어서 어떻게든 너희를 먹여 살릴 테니까.”
“그게 정말이야? 와! 진짜 방코에 취직한 거야?”
록펠러는 그 어느 때보다 진지한 얼굴로 동생들에게 무한한 신뢰감을 주었다.
“그래, 내일부터 금세공업자 밑에서 일하게 될 거야. 물론 당장 벌어오는 벌이가 시원찮을 순 있어도 적어도 너희들이 이전처럼 굶을 일은 없을 거야.”
그러자 기대감에 부푼 셋째가 이상적인 말을 내뱉기 시작했다.
“이야! 이제 우리 부자 되겠다. 록펠러 형이 방코에서 일하고 나랑 앤드류 형이 사금을 캐오면 우리 금방 부자 될 거 아니야? 맞지?”
들뜬 셋째 동생이 좋아서 노래를 부르려는 순간 둘째가 표정을 구기며 그를 나무라기 시작했다.
“야 이 바보야! 오크들이 돌아다닌다는데 위험하게 사금 채취를 어떻게 해!”
“그거야 망을 잘 보면 되지. 여기에 레오랑 루시아도 있는데 무슨 걱정이야?”
“루시아는 너무 어리잖아!”
“그래도 망보는 건 할 수 있잖아.”
둘째와 셋째가 티격태격하자 지켜보던 록펠러가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아니, 거기에 대해선 형이 할 말이 있어.”
모두의 이목이 록펠러에게 집중되었고, 록펠러는 자신만 뚫어지게 쳐다보는 어린 동생들을 향해 말을 이어주었다.
“앞으로 사금 채취는 안 하는 게 좋겠다.”
그 말에 가장 실망한 건 셋째였다.
“아니, 왜? 록펠러 형이 취직했으니까 나와 앤드류 형이 사금까지 캐오면 더 좋은 거 아니야? 그럼 벌이가 두 배가 되는 거잖아?”
그 말에 록펠러는 차분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그러기엔 요즘 도는 소문이 너무 안 좋은 거 같아. 그러다 너희들이 오크라도 마주치면 정말 큰일 나는 거니까. 그리고 형이 일자리도 얻었으니까 굳이 사금 캐는 일에 목매달 필요가 없어.”
“하지만 아쉽잖아? 그럼 계속 하지 말라는 소리야?”
사금 채취가 아쉬웠는지 셋째가 볼멘소리를 내자 록펠러는 사금 채취를 하지 말아야 할 이유에 대해 설명해 주기 시작했다.
“가장 중요한 건 너희들의 안전이야. 당장 굶어 죽을 일이 없는데 굳이 무리하면서까지 사금 채취를 할 필요가 없어.”
“그거야…… 그렇긴 한데.”
“그리고 당장이야 우리가 사금 채취를 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누군가에게 들킨 적이 없었지만, 형 생각엔 여기 몬테펠트로 영지에서 사금이 많이 나온다는 비밀이 절대 새어 나가서는 안 돼.”
아리송한 말에 셋째를 포함한 둘째도 의문을 품기 시작했다.
“무슨 이유가 있는 거야?”
“이유야 당연히 있지.”
록펠러는 어린 동생들에게 이 말을 해야 할까 말아야 할까 고민을 많이 했었다.
왜냐면 너무 허황될지도 모를 꿈이었기에 그러했다.
‘뭐 말해도 괜찮겠지.’
“형은 말이야. 나중에 돈을 많이 벌어서 이 영지를 사들일 생각이거든. 왜냐면 이 땅은 사금까지 나올 정도로 엄청 좋은 땅이니까.”
그 말에 동생들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정말?”
“진짜야?”
“근데 그게 가능해?”
의문이야 있었지만 록펠러의 대답은 간단했다.
“당연히 가능하지. 이 땅을 사고팔 수 있는 건 영주가 갖는 당연한 권리니까. 그러니까 돈만 있으면 여기 영지도 충분히 살 수 있는 거야. 여기 영주가 돈 많은 평민에게 땅을 팔지 안 팔지는 나중의 문제겠지만, 그거야 웃돈을 더 얹어주면 될 테고.”
정말 돈만 있으면 됐다.
정말로 많은 돈이…….
동생들도 록펠러의 말을 부정하진 않았지만 그게 불가능한 현실이란 것 역시 부정하지 않았다.
“그러려면 진짜 부자여야 하잖아…….”
“영주님이 푼돈에 이 땅을 넘기지 않을 거 같은데.”
“맞아. 그러니까 엄청난 부자가 돼야지.”
“가능할까?”
“나도 모르겠어…….”
의기소침한 동생들에게 록펠러가 웃으며 운을 뗐다.
“우리가 평생 밭만 간다거나 아니면 다른 노동을 해서는 절대 이 영지를 사들일 수 있을 정도로 큰돈을 벌 순 없을 거야. 그건 애당초 불가능한 일이니까. 하지만 형이 일전에 너희들에게 했던 말이 있었지? 대답해 봐. 큰돈은 어떻게 버는 거라고 했지?”
그 물음에 동생들이 이구동성으로 답해주었다.
“앉아서 버는 거다!”
“그래, 맞아. 큰돈은 노동으로 버는 게 절대 아니야. 사업을 하든가 아니면 어떻게든 불로소득을 창출해야 하는 거야. 그런 의미에서 형은 방코에 취직하는 것으로 그 첫 단추를 이미 끼웠어.”
어린 동생들이야 지금 록펠러의 뜻을 이해하지도, 받아들이기도 힘들 것이다.
하지만 록펠러는 제 뜻을 확고히 하며 이 자리에서 분명히 말해주었다.
“너희들과 나, 여기 집안사람들은 전부 큰 재능도 없이 태어났지만 그렇다고 해서 평생 가난하게 살라는 법은 없어. 나름의 노력과 의지가 있다면 이처럼 비루한 인생을 바꾸는 것도 충분히 가능한 일이야. 그러니까 너희들은 앞으로 형만 지켜보면 돼. 형이 어떻게 부자가 될 수 있는지 몸소 보여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