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금융명가의 창시자-12화 (12/181)

§12화 03. 금세공업자와 만나다(6)

그동안 목숨처럼 여겨왔던 신용과 신뢰를 기반으로 고객들을 기만하라니.

정말이지 신박하면서도 재미난 발상이었다.

‘확실히…… 틀린 말은 아니야. 사람들이 날 믿는다면 내게 맡긴 금화도 문제없을 거라 생각할 테니까.’

카터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듣고 보니 네 말도 일리가 있구나.”

공감은 했지만 그보다 더 의문인 게 있었다.

“그런데 그런 생각은 대체 어떻게 한 거니?”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그보다 제 생각은 어떠세요?”

나름 혹할 만한 제안이었다.

다만 그 제안의 당사자가 같은 금세공업자도 아닌 불과 15살짜리 소년이었다는 게 신기할 따름이었다.

“사실은 말이다. 리옹에서 너처럼 장사하는 금세공업자가 없진 않단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장사하기가 싫었지. 내게 금화를 맡긴 고객들이 찾아와 그 금화를 전부 요구할까 그게 두려웠거든.”

모든 금세공업자들이 카터처럼 겁쟁이는 아닌 모양이었다.

나름 록펠러의 생각대로 배짱 좋게 장사하는 금세공업자도 있는 모양.

이를 두고 록펠러가 생각했다.

‘여기보다 한 단계 더 나아간 녀석들이 있나 보네. 하긴 모두가 같진 않겠지.’

금세공업자가 하는 대부업에도 나름의 발전 과정이 있었다.

여기서 카터가 자기 돈만 빌려주는 방식은 가장 원시적인 형태라 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다음 단계가 리옹이나 록펠러가 제안했던 것처럼 고객의 돈까지 몰래 손대는 것이다.

‘여기서 나름 은행이라 불리는 고블린방크도 리옹에서 대부업하는 금세공업자들과 크게 다르지 않을 거야. 끽해야 고객들 돈까지 빌려줘서 이익을 보는 형태겠지.’

경제학을 전공한 록펠러에겐 정말이지 애들 장난 수준의 돈놀이였다.

‘여기 사람들은 진짜 기만을 몰라. 진짜 기만을.’

“지금은 어떠세요? 하실 생각은 있으신가요?”

카터가 잠시 갈등하는 모습을 보였다.

탐욕이야 있었지만 문제는 소심한 성격 탓이었다.

“끌리기야 하는데…….”

“저와 밀거래까지 하셨잖아요? 그런 분이 너무 소심하신 거 아닌가요?”

“그 정도 밀거래야 어차피 크게 티가 나는 게 아니니까 상관없지만, 이건 한 번만 어긋나면 내가 이제껏 쌓아왔던 기반이 전부 날아가는 문제라 쉽게 결정을 못 내리겠구나.”

고객들의 돈을 몰래 빌려줄 배짱이 있었다면 진작 그 일을 했을 것이다.

록펠러는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하는 그를 보고선 그의 소심한 성격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었다.

‘욕심이 없진 않은데 겁은 또 있는 모양이야.’

록펠러는 꾀를 내기로 했다.

어차피 이 대화의 종착역은 그에게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 결과물이 바로 취직이었다.

‘그럼 이렇게 하면 되겠네. 어차피 나야 저 사람 밑으로 들어가는 게 본래 목적이었으니까.’

“그럼 이건 어떨까요?”

록펠러가 무언가를 제안하려고 하자 카터가 의문을 표했다.

“뭘 말이냐?”

“제가 아저씨 밑으로 들어갈게요. 이건 어떻게 생각하세요?”

“뭐? 네가 내 밑으로 들어온다고?”

“네.”

일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조그마한 영지에서 조수를 둘 정도로 그는 그렇게까지 바쁜 사람이 아니었다.

“그건 좀 곤란하겠는데? 내가 그렇게 바쁜 것도 아니고 잘 알지도 못하는 널 왜 조수로 데려다 쓰겠니?”

“아저씨께서 제가 제안한 일을 못 하시는 건 나중에 문제가 생겼을 때 곤란해지기 때문이잖아요?

“그거야 그렇지.”

“그럼 그 일에 대한 책임은 제가 질게요. 그럼 절 조수로 쓸 수 있지 않나요?”

뜻밖의 제안이었다.

그 일의 책임을 자신이 전부 지겠다니.

“뭐라고? 지금 뭐라고 했니?”

“했던 말 그대로예요. 제가 책임을 질게요.”

“네가 전부 책임을 지겠다고?”

“네, 그럼 나중에 문제가 생기더라도 아저씨께선 절 팔아넘기면 되잖아요? 어차피 아저씨야 모른다고 잡아떼면 그만이고.”

책임만 회피할 수 있다면 카터 입장에서도 나쁠 것은 없었다.

록펠러가 말했던 것처럼 고객들의 금화까지 몰래 손대서 빌려준다면 지금보다 이자 수익이 몇 배나 늘어날 테니까.

‘지금 내가 가진 금화만 빌려주는 게 아니라 감히 손댈 수 없는 고객들 금화까지 아무도 모르게 빌려준다면 지금보다 이자 수익이 곱절로 늘어날 거야. 그렇게 되면 조수 하나를 써도 손해는 아닌데…….’

머릿속 계산기를 아무리 두들겨 봐도 남는 장사였다.

그렇기에 카터 입장에선 당연히 의문일 수밖에 없었다.

“나야 좋지만, 네 입장에서 굳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는 게냐?”

그러자 록펠러는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준비된 답안을 읊어나가기 시작했다.

“아저씨. 가장인 제가 당장 책임져야 할 동생들만 해도 넷이나 돼요. 그 동생들을 전부 먹여 살려야 한다면 돈이야 많이 필요하지 않겠어요? 지금 하고 있는 일도 언제까지 할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는 상태고, 여기서 일자리를 구할 수 있다면 저야 당연히 환영할 일이죠.”

일하려는 이유야 충분히 납득될 만한 것이었기에 카터도 그 부분에 대해서는 토를 달지 않았다.

대신 걱정되는 부분은 따로 있었다.

“그래도 여기 일은 말이다. 아무도 할 수 없는 일이란다. 글이랑 장부도 볼 줄 알아야 하고 특히나 셈법을 할 줄 알아야 해. 금화를 다루는 일이라 은근히 계산할 게 많거든.”

영주도 까막눈인 마당에 평민이라 해서 모두가 글을 알고 있는 건 아니었다.

더군다나 장부를 보는 일이나 셈법까지 알고 있는 건 더더욱 그러했다.

하지만 록펠러만큼은 달랐다.

그는 이미 준비된 인재였던 것이다.

“그런 거라면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제 아버지께서 징세관이셨잖아요? 그럼 그 징세관 아들이 뭘 배웠겠어요?”

“세상에. 셈법까지 알고 있다고?”

“간단한 암산이나 복잡한 계산도 문제없이 해결할 수 있어요. 아니면 시험해 보시겠어요?”

카터는 록펠러가 진짜 셈법을 알고 있는지 간단한 문제를 내보았다.

어지간한 교육을 받지 않고서는 손도 댈 수 없는 문제였지만, 록펠러는 그런 문제들을 너무나도 쉽게 풀어냈다.

그것도 단순 암산으로 말이다.

“허…… 놀랍구나. 네가 이리 천재일 줄은 몰랐다.”

“전 천재가 아니에요. 그냥 많이 배웠을 뿐이죠.”

“배워서 이 정도라고? 대체 어디서 배운 거니?”

“아버지께 배웠다고 말씀드렸잖아요.”

“그 사람이 이렇게까지 배웠다고? 하긴…… 아케데미 출신이라고 듣긴 했다.”

카터가 처음 걱정했던 것과 달리 록펠러는 조수로 쓰기에 모자람이 없는 상태였다.

아니, 모자란 게 아니라 오히려 차고 넘칠 정도였다.

‘조수로 써도 문제는 없을 거 같은데…….’

“진짜 문제가 생기면 책임질 자신은 있는 게냐?”

록펠러는 은연중 웃으며 나름의 자신감을 보였다.

“제가 장담하는데 아저씨가 걱정하는 일은 절대 생기지 않아요. 아까 아저씨가 그랬잖아요? 이제까지 단 한 번도 고객들이 한날한시에 찾아와 자기들이 맡긴 금화를 찾아간 적이 없다고. 그런데 제게 문제가 생기겠어요?”

“그렇기야 한데…….”

“그 일에서 아저씨가 책임지실 건 아무것도 없어요. 문제가 생기면 전부 저한테 떠넘기세요.”

수많은 금화가 오가는 방코의 일은 일하는 자의 정직과 신뢰가 우선이었다.

하여 그 어떤 불미스러운 일도 생겨선 안 되기에 카터 입장에선 생판 모르는 남을 제 조수로 앉히기가 다소 꺼려졌지만, 단순히 그 이유만으로 록펠러를 내치기엔 그의 탐욕이 절대 작지 않았다.

“좋다. 네 사정이 딱하고 나 역시 돈 욕심이 없지 않으니 서로 상부상조하는 입장에서 한번 해보자꾸나. 대신 네가 제안한 일을 하면서 만에 하나 문제가 생긴다면 난 모르쇠로 일관할 거다. 그게 필요도 없는 널 고용한 이유였으니까.”

일자리를 얻었다는 사실에 록펠러가 적잖이 흥분하고 있을 때.

카터는 이제까지와 사뭇 다른 진지한 투로 그에게 주의를 주기 시작했다.

“그리고 말이다. 이건 네가 분명히 명심해야 할 일인데 여기 일을 도와주면서 절대 불미스러운 일이 생기면 안 된단다. 나는 말이다. 그날 일과가 끝날 때마다 그날 거래했던 금화들을 전부 하나씩 세서 장부에 적어놓는 사람이거든. 그 정도로 세심한 사람이니 절대 새는 돈이 있을 수 없단다. 만약 그런 게 있다면 그 범인이 너라는 합리적인 의심도 할 수 있겠지.”

그러자 록펠러는 그에게 신뢰를 주기 위해 그간 로스메디치 집안이 쌓아왔던 신용과 신뢰에 대해 읊어주기로 했다.

“아저씨, 저희 조부님께서는 병자를 치료하는 의사셨고, 제 아버지께서도 영주님 밑에서 일을 하면서 단 한 번도 말썽을 일으킨 적이 없는 성실한 징세관이셨습니다. 그런데 그런 훌륭한 조부님과 선친을 둔 제가 감히 여기서 허튼짓을 할 수 있을까요?”

신용과 신뢰를 기반으로 고객들을 기만하는 금세공업자처럼 록펠러 역시 로스메디치 집안이 쌓아 올린 신용과 신뢰를 들먹이며 그에게 신뢰를 주었다.

“물론 당장 먹고사는 문제 때문에 밀거래에 잠시 손대긴 했지만, 정말 굶어 죽을 걱정이 없었다면 그런 일엔 절대 손대지 않았을 거예요.”

그런 록펠러의 말을 듣고 잠시 생각에 잠겼던 카터는 이내 웃는 얼굴로 그에게 손을 내밀어주었다.

“앞으로 잘해보자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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