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금융명가의 창시자-3화 (3/181)

§3화 01. 어느 평민 집안의 장남이 되었다(2)

다 죽어가는 마당에 무슨 유훈을 남기려는 걸까?

“조부님께선 말이다. 훌륭한 의술을 가져 여러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았지만, 막상 조부님께선 한평생 교단의 눈치를 보며 살아오셨단다. 따지고 보면 순탄한 인생은 아니셨지. 남을 고치는 일이 누군가에겐 크게 존경받을 수도 있지만, 또 다른 누군가에겐 눈엣가시일 수도 있거든.”

어린 동생들이야 저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록펠러만큼은 달랐다.

그는 비록 15살의 어린 몸이었지만 그의 정신만큼은 서른 살의 경험을 가진 어엿한 어른이었으니까.

‘당연하지. 교단 입장에선 누굴 치료하는 것도 다 돈인데, 정식으로 치유 마법도 안 배운 엄한 녀석이 나타나 갑자기 자기들 대신 돈 받고 누굴 치료해 준다고 하면 당연히 곱게 보진 않겠지. 나 같아도 안 좋게 보겠다.’

한스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주말이 되면 항상 예배가 있는 교구에 찾아가 위아래 할 거 없이 전부 문안 인사를 드리고, 성금 역시 그 누구보다도 많이 내셨지. 남들에겐 존경받는 사람이었어도 정작 본인은 편안한 삶을 살지 못했던 게야. 매사가 살얼음판이었지. 항상 교단의 눈치를 보며 사셨으니까.”

만약 그의 조부가 교단의 눈치를 보지 않고 살아왔다면 지금쯤 이 집안은 어떻게 됐을까?

아마 좋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어느 날 조부님께선 그걸 보신 게야. 그날도 주말 예배가 있던 날이었는데 뜬금없이 어떤 마법사가 찾아왔거든. 아주 무서운 마법사였다고 하더구나. 그 마법사에 대한 소문이 좋지 않았거든. 그런데 그 마법사가 나타나자마자 그 하늘 같던 사제들이 누구나 할 거 없이 넙죽 허리를 숙이기 시작했지.”

그 이야기를 듣고 록펠러는 조부라는 사람이 남겼다는 유훈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었다.

‘이 집안 유훈이 뭔지 대충 알겠네.’

한스의 말은 계속됐다.

“그 모습을 보고서 조부님도 느끼신 게 많았던 게야. 누군가에게 존경을 받는 것보단 차라리 저 악랄한 마법사처럼 모두에게 두려운 대상이 되는 게 낫다고 생각하신 거지. 힘이란 본래 그런 거니까. 그래서 조부님께선 내가 마법사가 되는 걸 그렇게 바라셨단다. 하지만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지. 애당초 자질 자체가 없었는데…….”

그는 이야기를 정리하며 조부가 남긴 유훈에 대해 알려주었다.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을 잘 새겨듣거라. 너희들도 말이다. 꼭 누군가에게 존경받는 사람이 될 필요는 없단다.”

이어지는 말은 나름 뼈가 있는 말이었다.

나름 이 집안의 유훈이었으니까.

“존경받을 바에야 차라리 두려운 사람이 되거라. 모두가 두려워하는 그런 사람이 돼야 돼. 항상…….”

그 말이 록펠러의 아버지이자 한스 로스메디치가 남긴 마지막 말이었다.

그날 저녁.

그는 조용히 눈을 감았고, 그의 장례식은 다음 날 영주성 근처에 자리한 어느 공동묘지에서 치러졌다.

“…….”

구질구질하게 이슬비까지 내리는 날.

영주의 도움으로 간신히 치러진 장례식에서 록펠러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저것도 다 돈인데.’

이번 장례식은 영주가 선심 써서 도와준 게 아니었다.

장례식에 쓰인 관짝, 그와 동생들이 입고 있는 상복까지 전부 다 영주에게 빌린 돈으로 해결한 것이었고, 언젠간 이곳 영주에게 되갚아야 할 빚이었다.

‘그렇다고 장례식도 없이 그냥 넘어갈 수도 없고.’

록펠러는 싸늘하게 식은 표정으로 차디찬 땅바닥에 묻히는 한스의 관을 조용히 내려다보았다.

자신을 낳아준 진짜 아버지가 아닌지라 딱히 슬픈 감정은 일어나지 않았고, 다만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그게 더 걱정이었다.

‘안 그래도 없는 집구석인데 진짜 큰일 났다. 이제 어떻게 살아가면 되는 거지?’

장례식을 치르기 위해 영주에게 빌린 돈도 문제였지만 더 큰 문제는 당장 먹고 사는 문제였다.

‘진짜 총체적 난국이다.’

그때 그의 옆에서 사람 말소리가 들려왔다.

“자네 조부는 그나마 쓸 만한 사람이었지만, 여기 묻히는 한스는 아니었어.”

다소 권위적인 말투.

록펠러가 천천히 고개를 돌리자 그곳엔 나이 서른 정도로 보이는 건장한 체격의 사내가 서 있었다.

체스터 드 몬테펠트로.

과거 아즈락 골드마인이라 불리는 드워프 왕국의 영토를 제국으로 편입시키면서 이름이 바뀐 몬테펠트로 영지의 새 주인이자 이번 장례식을 도와준 영주였다.

“쓸데없이 아카데미에서 글이나 배워 가지고 말이야.”

그가 짓는 표정 역시 록펠러만큼이나 좋지 않았다.

죽은 한스에게 딱히 악감정은 없었지만, 그렇다고 좋은 감정이 있는 것도 아니었으니까.

그는 영주답게 상주인 록펠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제 생각 그대로를 말해주었다.

“그러다 마법사라도 됐으면 또 몰라. 그건 경사니까.”

그가 옅게 웃었다.

죽은 그를 얕잡아본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는 않았지. 재능도 없는데 단순히 아카데미만 간다고 해서 다 마법사가 되면 세상 사람들 전부가 마법사가 되게? 그건 아니지.”

그래도 죽은 이를 이렇게까지 욕보이는 건 그다지 좋은 일은 아니었기에 록펠러는 그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음을 느꼈다.

‘굳이 저렇게까지 말할 필요가 있나? 아무리 영주라지만 너무 막말하네.’

하지만 영주에게 밉보일 수는 없는 노릇.

록펠러가 자연스레 고개를 수그리자 영주는 그 입을 멈추지 않았다.

“쓸데없는 짓을 했어. 사람이란 말이야. 모름지기 제 분수를 알아야 돼.”

상주였지만 록펠러의 나이 너무 어렸기 때문일까?

영주는 절대 제 말을 가리지 않았다.

“농노면 농노답게. 평민이면 평민답게. 귀족은 또 귀족답게.”

영주가 록펠러에게 시선을 옮겼다.

“자네도 한스에게 글을 배웠나?”

놀랍게도 영주는 까막눈이었다.

물론 영주가 될 재목이었기에 글을 배울 기회야 많았지만, 그는 장난으로 임하여 글을 배울 정도로 머리가 좋진 않았다.

오히려 그에게 있어 글보다 더 중요한 것은 황제가 부른 전쟁터에서 자신의 가문을 알릴 강인한 육신과 타를 압도할 무력이었고, 그런 핑계로 계속 글공부를 미루다 결국 글을 모르는 사람이 됐다.

하지만 로스메디치 집안의 사람들은 달랐다.

박학다식한 조부의 영향을 받아 록펠러의 아버지 역시 영민했고, 또한 아카데미 출신이라 글과 여러 학문을 배웠던 것이다.

그래서 막둥이 여동생을 제외한 모두는 한스의 가르침이 있어 전부 다 글을 읽고 쓸 줄 알았다.

“네, 아버지께 배웠습니다.”

영주는 비웃음을 머금었다.

같잖은 평민 주제에 자기도 모르는 글을 배웠다는 게 가소로웠으니까.

“꼴에 아카데미까지 가서 글을 배워오다니. 그래도 자식놈들은 까막눈은 아니게 됐군. 그래 봤자 사는 데 별 도움은 안 되겠지만.”

영주인 그가 글을 안 배운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글을 알면 사람은 겁쟁이가 돼. 그런 녀석들은 피와 살점이 난무하는 전장에서 전혀 도움이 안 되지. 막상 사람 피만 봐도 눈깔이 뒤집어져서 도망치기 바쁘거든.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것들이지.”

그런 합리화와 함께 글을 등한시한 게 벌써 30년이 넘어갔다.

물론 그만 글을 모르는 건 아니었다.

그가 알고 있는 몇몇 영주들 역시 까막눈이었고, 그와 비슷한 이유로 글을 배우지 않았다.

말을 마친 그가 록펠러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려주었다.

“자네, 내가 한 말을 잘 알아들었나?”

록펠러가 대답과 함께 고개를 수그렸다.

“네, 잘 알아들었습니다.”

“지금까지 내가 한 말은 사람은 모름지기 제 분수를 알아야 한다는 거야. 여기 한스처럼 제 분수도 모르고 미쳐 날뛰면 안 돼. 그런 놈들은 예의가 없는 거야.”

말을 마친 영주는 록펠러와 함께 있는 어린 동생들을 보았다.

제 영지에 속한 사람들은 그에게 있어 하나의 재산이었다.

하지만 농노가 아닌 평민들은 제멋대로 부리기가 어려웠다.

그들이 갖는 자유는 영주인 그가 일정한 세금을 받는 대가로 어느 정도 보장해 주는 것이었으니까.

“보아하니 앞으로 살길도 막막한 거 같은데. 이제 주제넘는 짓은 그만하고 내 밑으로 들어와 동생들하고 조용히 밭이나 갈지 그러나? 밭을 갈굴 땅이야 뭐 찾아보면 있겠지.”

그가 한 말은 록펠러에게 평민의 신분을 저버리고 자신의 밑으로 들어와 농노가 되라는 말이었다.

평민과 달리 농노에겐 그 어떠한 자유도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록펠러에겐 그의 말은 결코 달콤하지 않은 말이었다.

‘굶어 죽어도 농노는 아니지. 왜 사람들이 평민만 돼도 좋다고 하는데. 농노는 아니야.’

평민에겐 농노와 노예가 누릴 수 없는 자유가 있었다.

그 자유를 위해서라면 당장 배고픔이야 어떻게든 참을 수 있다고 생각한 록펠러가 정중히 그의 제안을 거절하기로 했다.

“말씀은 정말 감사하지만 저희 조부님께선 병자를 고치는 의사셨고, 저희 선친께선 아카데미에서 배운 지식으로 영주님을 도와 영지 내의 여러 사무적인 일을 보시던 분이셨습니다. 그런 조부와 선친을 둔 저희가 갑자기 선대의 뜻을 저버리고 밭으로 돌아갈 순 없는 노릇입니다. 부디 영주님께선 저희의 이런 점을 깊게 헤아려주셨으면 감사하겠습니다.”

나이에 맞지 않은 답변이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답변이 나오자 영주는 약간 벙찐 표정을 지었다.

‘어린놈이 무슨 대답이 이래? 여기 장남이 이리 영특한 놈이었나?’

영주는 잠시간 말을 잇지 못했다.

틀린 말은 아니었으니까.

“그래. 자네 조부님은 의사셨고, 자네 아버지야 내 밑에서 징세관과 문장관 역할을 했었지. 그게 딱히 쓸모없는 일은 아니었으니…… 하지만 그건 자네 아버지라 가능했던 거고. 단순히 까막눈만 면한 그대가 할 말은 아니지 않나?”

한국 사교육이 나름 지X 맞기는 했지만, 그 배움이 어디 가겠는가?

록펠러는 입이 근질근질거렸지만 자리가 또 자리인지라 너무 나서진 않기로 했다.

괜히 주제넘게 나섰다가 그에게 밉보이면 안 되기 때문이다.

‘여기선 이놈이 왕이야. 괜히 심기를 거스르는 말을 하면 안 돼.’

“그럼 영주님과 이 영지에 꼭 필요한 사람이 되도록 노력해 보겠습니다. 그때까지 저희에게 조금 더 시간을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말을 이리하니 영주인 그도 막상 자신이 원하는 대로 강요할 수가 없었다.

물론 자신의 위치를 생각해서 어린 그에게 막무가내로 강요할 수도 있었지만, 그런 식이라면 나중에 문제가 생길 소지가 아주 컸다.

동생들과 함께 다른 영지로 야반도주라든지, 아니면 불만을 품는다든지.

어찌 됐건 사람 다루는 건 영주인 그에게도 어려운 일이었다.

‘무슨 좋은 수가…… 그래, 차라리 그게 좋겠군.’

그러다 생각을 달리하게 됐다.

굳이 그에게 강요할 필요가 없이, 주어진 현실이 그에게 선택을 강요할 거라고 생각한 것이다.

‘당장 굶어 죽을 판인데 제 놈이 뭔 수가 있겠어. 얌전히 내 밑으로 들어와 밭이나 갈아야지.’

“자네도 나름 한 집안의 가장이니 그 뜻을 존중해 주지. 나이야 아직 어리지만…… 그래도 한 집안의 어엿한 가장이니 나도 마냥 무시할 순 없는 노릇이니까.”

영주는 곧바로 말을 이었다.

“하지만 이것만큼은 꼭 명심하게. 세상에 거저 얻는 건 정말 아무것도 없다네. 당장 먹고사는 것도 바쁜 자네에게 남은 선택지가 그리 많다고 생각하지는 않네만.”

록펠러와 그의 어린 동생들을 흘겨보는 영주가 나름 의미심장한 미소를 입가에 드리웠다.

“어린 동생들을 봐서라도 생각이 바뀌면 언제든 날 찾아오게. 앞서 말한 대로 이 영지엔 밭을 갈 사람들이 아주 많이 필요하거든. 굳이 아까운 돈을 내가면서 자유로운 신분을 유지할 필요가 있겠나? 그게 밥 먹여주는 것도 아니고.”

“좀 더 생각할 시간을 주셨으면 합니다.”

“뭐 알았네. 하지만 명심하게. 자네 같은 사람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을 지켜줄 안전한 곳과 굶주리지 않는 배야. 내가 볼 땐 자네들 분수는 딱 그 정도까지면 돼. 그 이상은 사실 예의가 없는 거지. 사람이란 모름지기 예의가 없으면 안 돼. 항상 제 분수에 맞춰 살아가야 하지. 제 분수에 맞게 말이야.”

그렇게 예의와 분수를 운운하던 영주는 장례식이 끝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자신을 따르는 시어(Seer)들과 함께 떠나가 버렸다.

여기서 시어는 영주인 그를 따라 영지의 치안을 맡는 경비병 같은 존재였다.

‘미쳐 버리겠네.’

모두가 떠나가고 어린 동생들밖에 없는 아버지의 묘 근처에서 록펠러의 표정은 그 어느 때보다 심각해져 있었다.

‘평민 신분이라는 것도 전부 다 돈으로 유지되는 건데…….’

로스메디치라는 성도 이곳의 영주가 인정했기에 가질 수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당장 먹고사는 게 급한 마당에 평민 신분을 유지할 수 있는 돈이란 게 있을까?

‘당장 먹고 살기도 막막한데, 그나마 가진 자유까지 뺏길 수는…….’

돈이 문제였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줄곧 말이다.

‘돈을 어떻게 벌지? 무슨 좋은 수가…….’

그때 그의 뇌를 스치는 무언가가 있었다.

분명 소설 속에서 봤던 내용이었다.

‘잠깐만. 몬테펠트로 영지면…….’

소설에서 봤었던 여러 사건들 중에 그의 기억에도 남아 있는 거대한 전쟁 하나가 있었다.

금맥전쟁.

과거 제 땅을 되찾으려는 드워프들과 이를 불허하는 제국 사이에 발발한 전쟁으로 그 원흉이 되는 곳이 바로 이곳이었다.

몬테펠트로 영지의 이전 이름은 바로 아즈락 골드마인.

과거 거대한 금맥이 발견된 뒤 그 금맥이 끊기기 전까지 드워프들이 마구잡이로 금을 채굴했던 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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