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금융명가의 창시자-2화 (2/181)

§2화 01. 어느 평민 집안의 장남이 되었다(1)

로스메디치(Rothmedici).

가문의 명칭처럼 보이는 이것은 엄밀히 따지자면 가문의 명칭이 아니라 일개 평민도 가질 수 있는 집안의 성(姓, family name)이다.

제국법에 의하면 자유로운 평민이 되기 위해서는 그들의 출신을 증명할 수 있는 집안의 성이 필요했고, 그 성은 대개 일정한 세금을 내는 것으로 얻을 수 있었다.

그럼 누구는 이런 의문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가문의 명칭과 집안의 성 사이에 대체 무슨 차이가 있냐고.

차이야 있었다.

황실과 같은 최상위 지배계층에서 인정한 것이 바로 가문이란 것이었고, 속된 말로 듣보잡에 단순히 허울만 갖춘 것이 바로 집안의 성이었으니까.

‘최대한 긍정적으로 생각해 보면 완전 최악은 면했지.’

록펠러 로스메디치.

21세기 서른 살 청년의 정신이 빙의된 그에게 주어진 이름이자 남들에게 최소한 평민 대접은 받을 수 있는 나름의 증표였다.

‘그런데…….’

완결까지 본 소설 속 세상에 들어온 건 뭐 그렇다 치더라도, 이왕지사 집어넣었으면 모두가 다 아는 클리셰대로 먼치킨 예정자인 주인공의 몸이나 아니면 최소한으로 어느 명망 높은 귀족가의 망나니 자식으로 빙의시켜주지! 왜 하필 가진 것 하나 없는 어느 거지 집구석의 장남으로 빙의시켜놨는지 당최 알 수가 없었다.

‘진짜 개뿔도 없네.’

록펠러는 빙의된 순간부터 지금까지 제 안에 감춰진 힘이라든지, 아니면 비슷한 무언가라도 있는지 정말 심도 있게 살펴봤었다.

하지만 그런 건 아무것도 없었다.

정말 아무것도.

그가 기억하는 저질스러운 체력은 그대로였고, 대마법사의 기질은커녕 그런 낌새조차 없었으니까.

‘진짜 개뿔도 없다고…….’

그렇다고 출신 성분이 좋으냐?

‘뭐 로스메디치? 그런 이름은 소설을 읽는 동안 한 번도 못 들어본 거 같은데.’

여기선 세상 모두가 알아주는 세 개의 명가가 있었다.

검술명가 테페즈.

마법명가 싱클레어.

암살명가 이스마일.

그 밖에도 제국 황실과 연관되거나 아니면 다른 쪽으로 유명한 귀족 가문들도 많았으나 그가 빙의된 자의 출신은 그저 비루한 평민 집안에 불과했다.

“하…….”

주어진 현실만 생각할수록 한숨만 짙게 새어 나왔다.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이라면 빙의한 몸이 농노나 노예가 아니라는 점이었으나, 다 기울어져 가는 집구석을 보니 이게 거지 집구석인지 아니면 난민들이 임시로 거처하는 곳인지 도무지 분간이 안 될 정도였다.

‘진짜 노답이다.’

거기다 더 최악인 것은 한 집안의 가장이라고 할 수 있는 그의 아버지가 병석에 누워 내일모레 하고 있다는 것과 그가 떠나간 뒤 남은 식구들은 전부 그의 몫이라는 점이었다.

‘그것도 장남이야. 한 집안의 장남이라고…….’

답답한 집구석에서 나와 배고픔도 잊은 채 한숨만 내쉬던 록펠러는 제게 다가오는 인기척을 느낄 수 있었다.

누군가 했더니 이 집안에서 셋째 동생으로 있는 조슈아 로스메디치였다.

‘쟤가 셋째였던가? 이름이 아마 조슈아였지.’

빙의한 순간부터 이전에 록펠러가 가졌던 기억들은 아주 천천히 그에게 흘러들어오고 있었다.

그래서 생판 모르는 가족들과 어울려 지내면서 그가 겪는 어려움은 생각보다 많지 않았다.

“록펠러 형, 지금 아버지가 부르셔.”

셋째 조슈아는 12살의 어린 남동생으로 그와는 딱 3살 차이였다.

“아버지가?”

“응. 지금 형제들 다 모이래. 둘째 형도 내가 데려올게.”

자신을 낳아준 진짜 아버지는 아니었지만, 나름 빙의한 대상의 아버지가 부른다는 말에 록펠러는 그의 부름을 거절할 수가 없었다.

‘부르니까 가긴 가야겠는데…….’

그런데 왜 갑작스레 부르는 걸까?

무슨 이유라도 있는 걸까?

‘모르겠네. 왜 갑자기 부르는 건지. 그것도 형제들을 다.’

셋째는 집안에 없는 둘째를 찾아 밖으로 나갔다.

이전 기억이 어렴풋이 떠오른 록펠러는 형제들 중 가장 활발한 둘째가 집 밖 어딘가에서 또래 친구들이랑 같이 놀고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금방 돌아오겠지. 근처에서 놀고 있을 테니까.’

떠난 셋째를 뒤로하고 허름한 집안으로 들어오니 항상 칭얼대는 6살 막둥이 여동생과 소심하기로는 집안에서 제일인 넷째 남동생이 보였다.

며칠 동안 굶은 탓인지 막둥이 여동생의 칭얼거리는 소리가 오늘따라 유난히 거슬렸고, 그 소리가 싫었던 록펠러는 자연스레 표정을 구기다 우연히 넷째 남동생과 눈을 마주칠 수 있었다.

넷째의 표정이 오늘따라 더욱 침울해 보였다.

아마 막둥이처럼 배가 고픈 탓이리라.

‘진짜 거지 집구석이 따로 없네.’

빙의된 지 얼마 되지 않아 당장 배고픔이야 참을 수 있었지만, 이런 집구석의 장남으로 빙의된 것은 아직도 용서가 안 되는 일이었다.

‘그냥 뒤지라는 소린지.’

좋지 못한 표정으로 난장판이 된 집구석을 쓱 훑어보니 더욱 화가 치밀었다.

집안 살림을 도맡아야 할 그의 어머니가 일찍 돌아가신 터라 안 그래도 아이들 많은 집구석은 완전 엉망이었고, 가장인 아버지 역시 병석에 누워 그 누구 하나 집안 살림을 돌보는 이가 없었다.

그렇다고 얼마 전까지만 해도 생판 남이었던 그가 쉽게 나설 수는 없는 노릇.

그래서 집안 꼴은 그가 빙의된 순간부터 엉망이면 더 엉망이었지 좋아지진 않고 있었다.

‘어차피 내 집도 아닌데 무슨 상관이야.’

그렇게 책임을 회피하며 더러운 집구석을 애써 외면하던 록펠러가 집 안에 있던 두 동생을 향해 입을 열었다.

“안에서 아버지가 부르시니까 가자.”

소심하고 말수가 적은 넷째야 군말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지만 아직도 칭얼대는 어린 여동생만큼은 달랐다.

하긴 세상 물정 모르는 6살짜리 아이에게 무언가를 바란다는 게 바보 같은 일.

록펠러는 칭얼대는 막둥이 여동생을 겨우 어르고 달래서 병석에 누워있는 아버지에게 찾아갔다.

그렇게 몇십 분 뒤.

록펠러의 아버지, 한스 로스메디치의 부름대로 로스메디치 집안의 모든 식구들이 전부 한자리에 모이게 됐다.

“그래 다 모였구나.”

병약한 그는 연신 기침을 해대며 자신의 상태가 좋지 않음을 제 자식들에게 알렸다.

록펠러가 봤을 때도 그에게 남은 시간이 별로 없는 것으로 보였다.

그만큼 상태가 심각해 보였으니까.

“후…….”

끝없는 기침을 끝내고 간신히 한숨을 돌린 한스는 침대에 올곧이 누워 자리에 모인 자식들을 향해 천천히 말을 꺼내기 시작했다.

“너희 조부님께서는 말이다. 정말 유능하고 훌륭한 분이셨지. 남들에게 존경을 많이 받는 분이셨어.”

이 집안의 유일한 자랑거리가 있다면 의사였다던 그들의 조부, 데이비드 로스메디치였다.

“조부님께선 사제들처럼 치유 마법 같은 걸 배우진 않으셨지만 전쟁터에서 어깨너머로 배운 응급치료술과 여러 민간요법 등을 통해 정말 많은 사람들을 돌보셨단다. 굳이 이곳에 사제가 필요하지 않을 정도로 정말 훌륭한 의사셨지.”

부족함이 없던 어린 시절을 회상하던 그는 잠시 감상에 젖어 들었다가 다시 말을 잇기 시작했다.

“이 아비가 어릴 때만 해도 말이다. 이 집안이 이렇게까지 나쁘진 않았단다. 영지 사람들이야 비싼 값을 치러야 하는 사제들을 찾아가는 것보단 자잘한 병이 있으면 항상 조부님을 찾아가 진료를 받았으니까. 그땐 정말 좋았지. 평민이긴 했어도 남부럽지 않게 살았으니까.”

그러던 그가 갑작스레 눈시울을 붉혔다.

“너희 조부님께서 자질도 없는 내게 마법사가 되라고 계속 강요만 하지 않았더라도…… 정말 좋았을 텐데. 괜히 쓸데없는 곳에 돈을 쓰셔서…… 너희들에게 정말 미안하구나.”

“아니에요, 아버지. 저희는 절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조용히 있는 동생들을 대신하여 록펠러가 그를 위로했지만 한스의 귀에는 들리지도 않는 말이었다.

아카데미에 그렇게 많은 돈을 쏟아붓고도 마법사가 되지 못한 것과 병약해져 약값으로 그나마 남아 있던 재산을 전부 써버린 것까지.

멀쩡하던 집안이 이렇게까지 기운 것은 전부 다 제 탓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한동안 기침과 한숨을 이어가던 그가 다시 말을 잇기 시작했다.

“왜 우리가 로스메디치라 불리는지 알고 있느냐?”

그 물음에도 록펠러를 포함한 모두는 조용했다.

알지 못했으니까.

“그건 말이다. 너희 조부님께선 항상 붉은 옷을 입고 다니셔서 로스메디치라는 별칭이 붙게 된 거야. 로스메디치는 말이다. 사실 붉은 의사라는 뜻이거든. 조부님께서 가진 별칭이었지.”

한스는 누렇고 더러운 천을 입으로 가져와 한동안 기침을 해대기 시작했다.

록펠러는 그가 침대 옆 탁자 위로 치운 천에서 각혈을 볼 수 있었다.

‘저러다 진짜 죽겠는데? 상태가 많이 심각하긴 하네.’

진짜 아버지는 아니었기에 그의 병약한 상태가 록펠러에겐 그렇게까지 크게 와닿지는 않았다.

어차피 죽어도 남이 죽는 거라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주변에서 흐느끼는 어린 동생들은 보니 어느 정도 동정이 갔다.

자기야 남으로 느끼겠지만 여기 있는 동생들에게는 진짜 아버지였으니까.

“내가 이렇게 모이라고 한 것은 다름이 아니다.”

어지간해선 울지 않는 둘째 역시 눈시울을 붉히고 있었고, 오직 록펠러만이 담담하게 이 상황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이 아비에게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것 같구나. 그래서 가기 전에 너희들에게 긴히 해줄 말이 있어 이렇게 모이라고 한 게다.”

그 말을 끝으로 어린 동생들이 참았던 울음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마찬가지로 눈시울을 붉히는 그가 장남인 록펠러를 찾았다.

“록펠러.”

“네, 아버지.”

한스는 이 와중에도 담담하게 임하는 자신의 큰아들을 보았다.

그는 오히려 울지 않는 자신의 큰아들이 무척이나 대견스러웠다.

“그나마 네가 있어 다행이구나.”

말을 안 해서 그렇지 록펠러는 지금 죽을 맛이었다.

이대로 저 양반이 간다면 이 집안의 모든 것은 전부 자기 책임이 된다.

생판 모르는 어린 동생들을 짊어지고 살아가야 하는 한 집안의 가장이 된다는 소리다.

“아버지. 저와 어린 동생들을 생각해서라도 어떻게든 쾌유하셔야죠.”

오늘따라 유난히 어른스러워 보이는 큰아들을 보며 한스는 오랜만에 옅게 웃을 수 있었다.

“록펠러, 힘든 일이 있다면 영주님께 찾아가거라. 이전 영주님께서도 조부님의 도움을 많이 받으셨고, 나 역시 영주님 일을 많이 도와줬으니 영주님께서 우리 집안을 그렇게 모른 체하진 않으실 게다.”

록펠러는 그의 말을 공감하지 못했다.

그의 말대로 지금 영주가 자신들을 챙겨주려 했다면 진작 나서서 챙겨줬을 테니까.

“그리고 말이다. 이건 조부님께서 이 집안에 남긴 유훈이다. 이 유훈을 잘 새겨듣거라.”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