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034화
경호가 용아검에 새하얀 불꽃, 백염검기를 씌웠다.
“이것들 더럽게 많이 나오네!”
쏟아져 나오는 독마가의 마족을 향해 달려 나가려는 경호를 붙드는 손이 있었다.
-용사님. 이곳은 저희에게 맡기세요.
거대한 도끼를 든 제롬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저희도 그 정도는 됩니다. 용사님은 가주를 쫓아가셔야지요.
옆에 있던 카혼도 제롬의 말을 거들었다.
-용사님이 괜히 힘 뺄 필요 없습니다. 싸움도 맞는 수준끼리 싸우는 겁니다.
“하지만…….”
‘제가 싸우면 많은 희생을 줄일 수 있습니다.’라고 하려던 경호의 말을 멜리사가 끊었다.
-용사님. 저희의 목표는 용사님이 정령계로 무사히 귀환하는 것입니다. 그곳에서 힘을 모아 마계를 무찔러 주십시오. 자칫 독마가주가 도망치거나 마왕이라도 부르면 모든 것이 끝입니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저희의 희생도 무가치한 일이 되고 맙니다. 그러니 빨리 독마가주를 쫓아가십시오. 그게 진정 저흴 위하는 일입니다.
경호는 멜리사의 말에 반박할 수가 없었다.
이들의 희생을 줄이기 위해 자신이 이곳에 발이 묶일 동안 성 안으로 들어간 케로스가 무슨 짓을 할지 몰랐다.
‘무슨 짓이든 결코 좋은 일은 아니겠지.’
멜리사와 카혼, 제롬을 돌아본 경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럼. 최대한 빨리 케로스의 혈석을 들고 오겠습니다.”
경호가 은신을 펼치고는 그대로 성을 향해 몸을 날렸다.
숫자는 많았지만 하급 마족.
그것도 가주의 강력한 마기에 선동된 이들이기에 은신한 경호를 알아차리고 막아서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성 내부는 결코 단순하지 않았기에 경호는 케로스를 찾기 위해 한참을 헤맸다.
‘제기랄! 문이며 복도며 다 똑같잖아!’
그렇게 이곳저곳 무작정 달려가며 문을 열었다 닫았다 반복하던 그때.
강렬한 마기와 살기가 멀리서 느껴졌다.
거리가 멀었음에도 소름이 오소소 돋을 정도로 강렬한 기운이었기에 경호는 서둘러 그곳을 향해 달렸다.
점점 가까워질수록 기운이 강해졌고 결국 경호는 폐허처럼 한 장소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은밀히 접근해 케로스의 목을 칠 생각이었던 경호였다.
하지만 카르마의 모습을 보자 그런 생각은 말끔히 지워지고 자신도 모르게 이렇게 소리쳤다.
“뭐, 뭐야 이건!”
강력한 독마기를 뿜어내는 케로스의 표정은 왠지 모르게 긴장돼 보였다.
그의 앞에 똬리를 튼 살기 짙은 거대한 뱀.
분명 독마가주가 다루는 독물로 보이는데 사나운 맹수 앞에 선 사냥꾼의 표정이다.
‘뭐지? 이 상황은?’
경호가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 멈칫거릴 때.
-저 인간을 죽여라! 저 인간을 죽여!
케로스가 경호를 가리키며 소리쳤지만.
쉬이익! 쉬이이이익!
카르마는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살기만 흘렸다.
케로스는 황당했다.
듣기로 마왕과도 싸운 강력한 독물이라 조종이 쉽지 않다 생각은 했었지만 독마가의 능력은 단순이 독을 다루는 데에 그치지 않는다.
독물에게도 더 강한 지배력을 가지는 것이 독마가의 마족.
그 정점에 있는 이가 바로 자신이었다.
그런데 거기에 계약의 매개체인 반지까지 사용하고 있었음에도 카르마가 저항하고 있었다.
원래라면 카르마가 저 인간을 공격하는 틈에 자신이 마무리를 지을 생각이었지만 이래서는 계획을 바꿀 수밖에 없었다.
‘이제 와서 다시 봉인할 수도 없다! 무조건 카르마로 저 인간을 처리해야 해!’
이 정도로 반항하는 독물이라면 자칫 힘을 빼다 역으로 공격을 당할 수도 있었다.
카르마의 뒤편으로 이동한 케로스가 반지에 온힘을 쏟아 부었다.
반지에 박힌 보랏빛 보석이 빛을 뿜어내며 카르마를 비추자 케로스를 노려보던 시선을 경호에게로 돌렸다.
-그래! 저놈! 저놈을 죽여라! 저놈을 죽여!
카르마 심장에 박힌 마혼이 케로스의 독마기에 반응하며 마구 날뛰니 더는 반항할 수 없었다.
카르마가 날카로운 독니를 드러내며 경호를 향해 날아들었다.
길이가 족히 20미터가 넘어가는 거대한 크기였지만 그 속도는 정말 빨랐다.
‘이런 미친!’
경호는 속으로 욕을 하며 몸을 옆으로 날려 날아오는 카르마를 피했다.
흑옥 같은 비늘로 쌓여 있는 몸은 강철보다 단단해서 경호 뒤편의 벽을 폭발시키듯 박살 냈다.
“그 덩치에 그 단단함에 그 속도는 반칙 아니냐?”
괜히 싸움에 체급이 있는 게 아니다.
F=ma.
가장 유명한 과학 원리인 뉴턴의 가속도 법칙이다.
힘은 질량과 속도에 비례한다.
그런데 단단하기까지 한다.
어! 어어!
경호가 몸을 돌리는 카르마의 몸에 붙은 비늘이 일어나며 칼날처럼 예리하게 변하는 것을 보며 저도 모르게 한걸음 물러섰다.
“야! 이제 거기다 날카로움까지 더한다고?”
거기다 카르마의 독은 상급 악마도 절명시킬 정도로 강했다.
‘아! 맞다!’
경호는 허리춤에 차고 있는 가죽주머니 속 물건이 번뜩하고 떠올랐다.
‘미친개!’
독마가 영지에 한 차례 뿌리고 남은 미친개를 아직까지 가지고 있던 경호였다.
‘저것도 독물이니까 통하지 않을까?’
독마가에서 키우던 독물과 비교하면 태양과 반딧불 정도의 차이였지만, 그래도 독물은 독물이었다.
‘어쩌면 통할지도 모른다.’
지금 상황에서는 선택지가 많지 않았다.
신력을 쓰게 됐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검을 쓰기에 단단한 외피와 거대한 몸집, 거기다 빠른 움직임을 가진 카르마는 상극이었다.
증폭의 힘을 쓴 백염검기라도 치명상을 입히기 어려웠고 근접 공격을 해야 하기에 위험도가 높았다.
‘그래. 해 보자.’
경호가 미친개를 떠올리며 계획을 떠올리는 사이 비늘을 칼처럼 모두 세운 카르마가 다시 경호를 향해 달려왔다.
경호는 은신으로 몸을 숨기며 곧장 반대로 달렸다.
미친개를 먹이기로 결정했지만 그렇다고 경호가 카르마에게 다가가 입에 넣을 순 없는 노릇.
벌어진 입 속으로 미친개가 들어 있는 주머니를 던져 넣어야 했다.
그렇다고 입을 벌리고 기다려 줄 리 만무했다.
은신.
경호는 이제 자신의 은신이 카닌의 그것을 넘어섰다고 자신했다.
주변의 기운을 받아들여 자신의 기척을 거의 사라지게 만드는 기술.
경호는 도망치며 기회를 엿볼 생각이었다.
하지만 어찌 알았는지 한순간의 망설임도 없이 경호를 향해 몸을 날리는 것이 아닌가!
‘아니! 최상급 마족도 속이는 내 은신을 이렇게 빠르게 알아챈다고?’
경호가 속으로 경악하며 계속 도망쳤지만 카르마는 눈으로 보고 쫓듯 점점 거리를 좁히고 있었다.
카르마의 본질은 뱀.
그냥 뱀도 아니고 마수왕이라 불리는 레비아탄을 제외하고 최강의 마수가 카르마였다.
단순히 감각이 좋은 것이 아닌 적외선 센서처럼 0.001도의 온도 변화까지 감지하는 감각 기관이 있었다.
경호의 은신이 아무리 완벽하다고 해도 체온까지 주변에 동화시킬 순 없었기에 그의 모습은 카르마에게 훤히 보였다.
쉬이이이익! 쉬이익!
카르마가 날카로운 쇳소리를 내며 경호를 노렸다.
콰아앙! 콰앙!
한쪽은 도망가고 한쪽은 쫓는 상황이었지만 카르마의 덩치가 성의 복도를 가득 채울 정도라 폭탄을 터뜨리듯 사방을 부수고 무너뜨리고 있었다.
자신이 이렇게 쉽게 발각되는 것만 빼면 경호가 원하던 그림이었다.
단단한 외피를 뚫고 거대한 몸체에 치명상을 입힐 수도.
엄청난 속도에 치고 빠지며 상처를 주기도 어려운 상대.
하지만 분명 체력에 한계는 있을 것이다.
거대한 육체를 저런 속도로 움직이는데 체력 소모가 빠를 것은 당연했다.
주변에 먹을 마수라도 있다면 먹어 가며 싸우겠지만 이 성 내부엔 경호와 케로스, 카르마 셋이 전부였다.
이렇게 성 자체를 방패삼아 쫓고 쫓기며 시간을 끌다가 지치면 그때 ‘미친개’를 입안에 처넣을 생각이었다.
그런데.
‘미친! 이거 지치기 전에 먹히겠는데!’
머리가 부서질 듯 아팠지만 경호는 상단전을 최대로 열어 은신의 수준을 더욱 높였다.
거기다 하체에 모든 마력을 불어넣어 마치 메뚜기처럼 여기저기로 마구 방향을 틀며 달리는 중이었다.
헌데.
‘이거 진짜 내가 보이는 거 아냐?’
분명 지그재그로 움직이며 도망쳤건만 저 뱀 새끼는 그걸 마치 보고 있는 양 그 중앙으로 쭉 날 듯 기어오고 있었다.
신경을 곤두세워 이리저리 헤매며 찾아다녀야 겨우 체력이 빠질까 하는 상황에서 이러면 오히려 먼저 지치는 쪽은 경호가 될 터였다.
결국 카르마가 경호의 몸을 향해 독니를 드러내며 입을 쫘악 벌렸다.
경호는 은신과 경공에 들인 마력을 모조리 용아검에 불어넣으며 카르마의 콧잔등을 내려쳤다.
콰아아앙!
카르마의 콧잔등과 용아검의 검기가 부딪히며 폭발하듯 터졌다.
“끄억!”
때린 것도 경호였지만 날아간 것도 경호였다.
카르마는 가볍게 고개를 내저은 정도로 끝났지만 경호는 성벽을 뚫고 뚫다 처박혔다.
“커헉!”
제대로 부딪히고 나니 깨달았다.
‘그냥 단단한 게 아니야.’
저 흑옥 같은 검은 비늘은 단순히 단단한 외피가 아니었다.
검은 외피는 단순한 색이 아니라 묵빛 마기가 맺혀 있는 상태였다.
한마디로 칼처럼 세워진 비늘 하나하나가 검기를 품고 있는 명검(名劍)과 같았다.
‘이거 은신도 쫓아오는 것도 환장하겠는데. 검기는 이빨도 안 박히잖아?’
물론 경호 역시 타격 시 충격을 그대로 받아 그 방향으로 몸을 날려 벽을 부수며 처박히긴 했지만 큰 피해를 입은 건 아니었다.
하지만 결말이 뻔히 보였다.
밖에서 반군이 마족을 정리해서 도와준다 해도 숫자로 상대할 수준의 놈이 아니고.
이대로 계속 시간을 끌어 봐야 먼저 지치는 것도 자신이었고 그렇다고 그냥 맞붙어 봐야 이길 상대도 아니었다.
경호가 왼손으로 미친개가 담긴 가죽주머니를 허리춤에서 풀어 쥐었다.
모험. 도박. 승부.
이런 것이 필요한 때였다.
육참골단(肉斬骨斷).
‘살을 내주고 뼈를 취한다.’
물론 상대가 상대니 만큼 살을 내주고 뼈까지 발릴 각오를 해야 했다.
죽음을 각오하자 경호는 지난일이 주마등처럼 빠르게 흘러갔다.
오크 반군과 만남.
중단전 개발과 상단전 개방.
최상위 마족과 결투.
이렇게 말도 안 되는 상대와의 전투까지.
어쩌면 처음 만난 것이 오크 반군이 아닌 마족이었다면 하급 마족 몇과 싸우다 바로 죽음을 맞이했을 터였다.
‘충분히 성장했고 의미 있었다.’
다만 이렇게 싸우다 죽는다면 다시는 엄마와 다현이를 보지 못한다는 사실이 슬펐다.
경호가 다시 마음을 다잡고 자신을 향해 날 듯 기어오는 카르마를 노려봤다.
용아검에 모든 마력을 쏟아 넣고는 증폭까지 최대치로 걸었다.
이제 검으로 놈을 막아 내고 미친개 주머니를 목구멍 속으로 쑤셔 넣을 일만 남았다.
벽에 처박히고 생각은 길었지만 사실 눈 깜빡할 시간이었다.
쉬에에에에에에엑!
괴음과 함께 경호에게 다가온 카르마가 독니를 세워 입을 크게 벌렸다.
그때였다.
뒤편에서 거대한 도끼가 날아와 카르마의 이마를 쪼개듯 날아왔고.
동시에 새하얀 마력을 담은 철시가 카르마의 커다란 눈동자를 때렸다.
콰앙! 쾅!
이마를 때린 도끼가 깨졌고 철시가 휘어지며 튕겨져 나갔다.
이마는 그렇다고 하지만 눈동자마저 마력이 담긴 철시를 튕겨 내는 모습에 허탈하기까지 했지만 이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경호가 멈칫한 카르마를 향해 달렸다.
카르마 역시 더욱 살기를 내뿜으며 다시 경호를 향해 달려들었다.
그때 정령력이 휘몰아치더니 바닥석이 솟아나와 카르마를 옭아맸다.
그렇다고 옴짝달싹 할 수 없는 건 아니었다.
콰르륵!
옭아맨 돌무더기가 힘없이 무너졌다.
이제 정말 경호의 용아검과 카르마의 입이 닿을 듯했다.
-용사님!
그때 멜리사의 외침과 동시에 후끈한 기운이 밀려왔다.
경호가 반사적으로 몸을 낮췄고 커다란 불덩이가 카르마의 벌린 입으로 들어가 터졌다.
쿠헥!
카르마에게 처음으로 반응이 나왔다.
시커먼 연기가 나며 입을 쩍 벌리는 카르마의 입에 경호가 손에 쥔 주머니를 던졌다.
카르마는 눈치채지 못하고 주머니를 삼켰다.
마력을 담지 않은 덕분이었다.
곧 카르마가 미친 듯이 몸을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성이 바닥, 벽, 천장 할 것 없이 부서졌다.
고통에 겨운 비명과 함께 독기와 마기가 뿜어져 나와 더욱 강력했다.
경호는 서둘러 물러섰다.
지금은 공격할 때가 아니라 미친개의 약효가 돌기를 기다릴 때였다.
미친개의 약효이 돌기까지 시간이 제법 걸리기 마련인데 위액이 강한 건지 바로 작용했다.
그렇게 물러선 경호 곁으로 멜리사와 카혼, 맨손의 제롬과 활을 든 아론이 다가왔다.
“밖에는 정리가 끝났나요?”
경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멜리사가 카르마를 보며 중얼거렸다.
-저게 바로 카르마군요.
“카르만지 뭔지 모르겠지만 미친개를 먹었으니 케로스도 조종하는 데 애를 먹을 겁니다.”
경호가 약효가 제대로 퍼지는 것을 확인하고 다시 카르마에게 다가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