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031화
-준비가 끝났느냐.
철마가주 헤이드가 부관을 보며 물었다.
성을 지킬 최소한의 인원을 제외하고 출진 준비를 명한 지 10분이 흐른 때였다.
-성을 지킬 흑철대를 제하고 금, 은, 백의 철마대 모두 준비 완료했습니다.
금철대, 은철대, 백철대, 흑철대.
철마가를 지탱하는 사대 무력 부대 중 3개 부대.
삼십의 악마가 준비를 마쳤다.
거대한 숲을 뚫고 전투를 하러 가는 것에 삼십의 악마가 적어 보일 수 있지만 모두 상급의 악마였다.
어차피 카닌을 죽일 정도의 강자가 있는 칠흑의 숲에서 어중이떠중이를 모아 놓은 숫자는 의미가 없었다.
-서두르자. 늦으면 모든 것을 망칠 수 있다.
서둘러야 했다.
철마가의 악마는 모두 단단하고 강했지만.
특히 이들은 강철보다 단단하고 질긴 육체를 가지고 있었다.
거기다 무게 역시 엄청나기에 이들의 진군을 막을 수 있는 존재는 없었다.
다만 느렸다.
날렵한 혈마가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었고 독마가와 비교해도 훨씬 느렸다.
-독마가 놈들이 끼어들기 전에 속전속결로 끝내야 할 일이니 당장 출발하겠다.
집무실을 나서 광장을 향할 때 병사 하나가 빠르게 다가와 헤이드 앞에 섰다.
-가주님! 독마가에 있는 밀정에게서 긴급 첩보가 들어왔습니다!
병사의 손에 붉은 봉투가 들려 있었다.
-독마가에서 첩보가?
적보다 못한 두 마가가 서로에게 밀정을 심어 놓았기에, 정기적으로 첩보가 오는 상황이다.
그런데 하필 지금 긴급 첩보라니?
‘설마 우리보다 먼저 출정한 것은 아니겠지!’
헤이드가 서둘러 봉투를 받아 첩보 문서를 펼쳤다.
심각한 얼굴로 읽어 나가던 헤이드가 갑자기 크게 웃었다.
-하하하하하하핫! 마신의 가호가 나와 함께하는구나!
부관은 최근 들어 이렇게 호쾌하게 웃는 가주의 모습을 본 적이 없던 터였다.
내용을 모르기에 부관이 당황스러워하며 이유를 물었다.
-가주님. 그것이 무슨 첩보이기에 그리 웃으십니까?
-독마가의 독물 농장에 마수들이 갑자기 미쳐 날뛴다고 하는구나. 가주까지 나서서 마수를 진정시키는 중이라고 하니 적어도 하루는 눈 돌림 틈도 없겠구나.
-저희로서는 소중한 시간을 벌었습니다.
하루.
길지 않은 시간이지만 걱정하지 않고 진군할 수 있는 시간을 벌었다.
가주가 웃음을 터뜨릴 만큼 좋은 소식이었다.
-자! 그럼! 서두르자!
독마가 놈들이 오기 전에 서둘러야 했다.
***
광장에 모인 삼백여 오크들이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어? 용사님?
분주한 움직임 속에서 오크 하나가 경호를 보고 아는 체를 했다.
“혹시 멜리사가 어디 있는지 아세요?”
-아. 멜리사 님은 카혼 님과 함께 철마가의 진군을 늦출 마법을 설치하신다고 북쪽으로 올라가셨습니다.
“아. 그래요. 그럼. 이곳 책임자는 제롬인가요?”
-네. 제롬 님은 지금 회관에 계십……. 아니 저기 나오시네요.
“아. 그렇네요. 고맙습니다.”
회관에서 다른 부족장들과 나오는 제롬을 본 경호가 그곳을 향했다.
-용사님! 다녀오셨습니까? 별일 없으셨죠?
제롬이 경호의 안부를 물었다.
“물론입니다. 아마 지금쯤 난리가 났을 겁니다.”
-하하하. 그렇겠네요. 시간도 딱 맞게 오셨습니다. 안 그래도 지금 막 출발할 생각이었습니다. 철마가에서도 곧 골짜기에 도착할 듯합니다.
“거기에 멜리사와 카혼이 있는 건가요?”
-맞습니다. 철마가에서 숲의 중앙으로 오려면 꼭 지나야 하는 곳입니다. 사곡(死谷)이라는 곳이죠.
“죽음의 골짜기라……. 멜리사와 카혼이라면 이름대로 그곳을 아주 지옥으로 만들겠군요.”
원래도 대단했지만 신력까지 연구하면서 더욱 발전한 둘이었기에 뭔가 대단한 작품이 나올 듯했다.
-저 종자들에겐 지옥보다 천국이라 해야 맞겠지요. 어쨌든 준비를 단단히 했으니 대단할 겁니다. 그럼. 출발하시죠.
“네. 가시죠. 손님보다 주인이 늦으면 안 되니까요.”
***
쾅! 쾅! 쾅! 쾅!
금, 은, 백색의 갑주를 입은 거대한 악마들이 발을 내디딜 때마다 굉음과 함께 칠흑의 숲이 흔들렸다.
결코 느리다고 할 수 없는 진군이었지만, 상급 정예 마족임을 고려하면 달팽이처럼 느리다고 할 수 있었다.
철마가의 전투 부대는 느린 이동 속도 때문에 평소 쇠뿔소라 불리는 거대한 마수를 타고 다닌다.
기동력과 전투력 모두가 높아지는 최고의 이동 수단이지만 오늘 출정엔 평소와 다르게 쇠뿔소를 탈 수 없었다.
칠흑의 숲.
단단한 거목이 빽빽하게 솟아 있는 울창한 수림 때문이었다.
-더 빨리 움직여라! 해가 지기 전에 숲 중앙에 도착해야 한다!
검은 갑주를 걸친 헤이드가 선두에 서서 크게 외쳤다.
물론 더 빨리 갈 방법이 없지는 않았다.
비행.
철마가의 인원 역시 악마이기에 비행할 수 있었다.
하지만 연비가 너무 안 좋았다.
마족은 비행 마법이 아닌 마기를 뿜어내서 비행하는데, 당연히 덩치가 크고 무거울수록 마기의 소모가 컸다.
철마가의 악마가 비행해 움직이면 이계의 존재와 싸우기 전에 탈진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렇기에 느리지만 우직하게 달려갈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한참을 걸어가자 주변의 숲이 더욱 울창해지며 전방에 양쪽으로 절벽이 솟아 있는 길이 보였다.
그 유명한 사곡이었다.
무시무시한 이름에 맞지 않게 사곡의 길이는 짧았다.
빠르게 움직이면 지나가는 데 몇 분도 걸리지 않는 거리.
하지만 ‘죽음의 골짜기’로 불리는 사곡은 칠흑의 숲에서도 유명했다.
마족도 조심해야 할 독충이 우글거리는 곳이기 때문이다.
우회로도 있었지만 거리가 멀고 늪지대가 펼쳐져 있어 시간이 최소 수십 배는 더 걸렸다.
수십 배의 시간.
철마가에게 있어 지금 가장 부족한 것은 시간이었다.
마수의 폭주로 정신없는 독마가가 언제 수습하고 달려들지 몰랐다.
‘문제는 저곳이 함정을 파기엔 최고의 장소라는 점이지.’
전략의 귀재까지는 아니지만 헤이드는 바보가 아니었다.
‘내가 그들이어도 저곳에 함정을 팔 것이다.’
하지만 딱히 좋은 방법이 없었다.
아니 정찰을 하고 대책을 세우고 하는 모든 것은 시간이 들기 마련.
하지만 그들에게는 시간이 없었다.
선두에 선 헤이드가 짧게 한숨을 내쉬곤 뒤를 돌아보며 외쳤다.
-철마가의 전사는 들어라! 저 사곡만 지나면 숲의 중앙으로 들어선다! 저곳에 함정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저곳을 지나야 한다! 내 말이 무슨 말인지 알겠느냐!
앞선 사곡 전체를 쩌렁쩌렁 울리는 헤이드의 목소리에.
-함정이든 지옥이든 뭐든 뚫고 갈 수 있습니다!
-철마를 막을 수 있는 것은 그 무엇도 없습니다!
-저 골짜기를 모조리 부숴 버리겠습니다!
철마가의 용사 역시 우렁찬 목소리로 답했다.
-모두 나를 따르라!
그들의 외침에 흡족한 헤이드가 크게 외치며 앞으로 달려 나갔다.
***
사곡의 양쪽 절벽 위.
삼백의 오크가 활을 매긴 상태로 몸을 숨기고 있었다.
쿵! 쿵! 쿵! 쿵! 쿵! 쿵! 쿵!
철마가의 움직임은 은밀함과는 거리가 멀었기에 딱히 귀를 기울이지 않아도 위치를 파악할 수 있었다.
‘지금이다!’
철마가주와 그의 부관, 삼십의 용사가 사곡의 입구에 들어서자 삼백의 오크가 시위에 매긴 철시를 날렸다.
핑! 피잉! 핑!
마법이 인챈트 된 활에 정령력까지 담긴 화살이라 그 위력이 무시무시했다.
거기다 절벽 위에서 골짜기 아래를 향해 쏜 화살이니 그 위력이 배가 됐다.
-화살 공격이다! 모두 더 빠르게 달린다!
헤이드의 외침에 괴성으로 답하며 더욱 속도를 올렸다.
캉! 카앙! 캉! 캉!
비처럼 쏟아지는 화살은 그 강대한 위력에도 강철에 부딪히는 소리를 내며 튕겨 나가고 있었다.
혈마가의 마족에게도 통하지 않는 화살이 철마가에게 통할 리 없었다.
하지만 개중에 몇몇은 그렇지 않았다.
쇄에에에에에엑.
빛살처럼 날아온 철시 끝에 영롱한 마력이 선명하게 맺혀 있었다.
푸욱.
섬뜩한 소리와 함께 백철대원의 어깨에 철시가 깊숙이 박혀 들었다.
크윽!
멈칫한 백철대원이 짧은 비명과 함께 곧장 철시를 뽑아내며 별일 아니라는 듯 다시 달렸지만.
머리에 맞았다면 분명 치명상일 수 있는 공격이었다.
쇄에에엑! 쇄에에에엑!
빗발같이 쏟아지는 화살 공격 속에 위협적인 공격이 섞여 있었다.
바로 아론과 제롬 같은 부족장들의 화살이었다.
-크아아아악!
아론이 쏜 화살이 은철대원의 투구를 뚫고 들어가 머리를 꿰뚫었다.
아무리 단단하고 강인한 철마가의 용사였지만 머리가 뚫리면 즉사였다.
아드드득.
이를 간 헤이드가 더욱 속도를 높이며 외쳤다.
-이제 거의 다 왔다! 모두 비행해서 통과한다!
비행을 위해 마기를 쏟아 내면 방어가 더 취약해지지만 빠르게 벗어날 수 있었다.
곧 이글거리는 마기를 두른 그들은 가볍게 날아올라 빠르게 앞으로 나아갔다.
비행 중 화살 공격에 두엇이 더 목숨을 잃었지만 결국 화살이 멎었다.
헤이드가 그에 안도할 때.
갑자기 좌우 절벽에서 마법진이 떠오르더니 선명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멜리사가 미리 새겨 놓은 마법진이 그들의 움직임에 작동한 것이다.
-커억!
날아가던 철마가의 마족 모두가 엄청난 압력을 느끼며 바닥에 떨어졌다.
숫제 하늘에서 내동댕이쳐진 듯한 모습이었다.
-크윽.
절벽 전체에 새겨진 역중력 마법진의 위력이었다.
헤이드가 모래를 뱉으며 인상을 썼다.
‘멍청했다! 멍청했어!’
빨리 지나간다는 생각만 하느라 주변에 깔린 마력을 놓쳤다.
주의를 기울였다면 미리 마법진을 처리해 이리 땅에 처박힐 일은 없었을 거였다.
‘감히! 감히 오크 따위가!’
멜리사라는 대마도사가 있다는 걸 헤이드도 알았지만 그래 봐야 오크였다.
‘내 모조리 씹어 먹어 주마!’
안 그래도 커다란 육체와 무거운 체중을 가진 그들이기에 역중력 마법은 아주 절묘했다.
헤이드의 몸에서 살기가 눈에 보일 듯 일렁이는 듯했다.
우드드득.
관절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지만 이를 악물고 땅에 처박힌 몸을 일으켰다.
철푸덕.
그때 몸을 일으키려 땅을 짚은 헤이드의 손이 쑥하고 바닥으로 들어갔다.
-어. 어어.
애써 담담한 척하던 헤이드의 입에서 처음으로 당황한 외마디 말이 터져 나왔다.
철푸덕. 철푸덕.
헤이드뿐 아니라 처박힌 모든 이들이 마치 늪에 빠진 것처럼 바닥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위기 상황을 헤쳐 나가기 위해서는 빠른 판단과 정확한 지시가 필요했다.
헤이드의 감각에 정령력이 느껴졌다.
‘땅과 물의 정령을 이용해 수작을 부렸구나!’
헤이드가 고개를 들어 절벽 위를 보니 오크 둘이 양손을 들고 마력을 쏟아 내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멜리사와 카혼이었다.
-죽인다! 죽인다!
헤이드는 순간적으로 판단을 내렸다.
‘이 상황을 뒤집을 유일한 방법은 하나다!’
탈진하더라도 역중력 마법을 뚫고 날아올라 절벽 위 저 둘을 처리하는 것.
유일한 방법이었다.
-으아아아아아아아아!
헤이드의 몸에서 끔찍할 정도로 강력한 마기가 치솟았다.
땅 깊숙이 처박힌 몸이 서서히 떠올랐다.
물과 땅의 정령력이 헤이드의 발목을 붙잡았지만 일렁이는 마기에 스러졌다.
으드득.
헤이드가 이를 갈며 평소의 수십 배에 달하는 중력 마법진의 힘을 마기로 찢어 내며 날아올랐다.
-네 이노오오오오오옴!
멜리사와 카혼의 앞으로 날아오른 헤이드가 괴성과 함께 양손에 마기를 집중시켰다.
단번에 머리를 으스러뜨릴 작정이었다.
하지만 그 모습에도 허옇게 질린 얼굴을 한 멜리사와 카혼은 마법에 집중하느라 아무런 대처도 할 수 없었다.
-벌레 같은 놈들! 감히……. 어!
헤이드가 양손을 들어 후려치려는 순간.
섬뜩한 기운이 뒤에서 느껴졌다.
고개를 돌린 헤이드가 낯선 존재, 경호와 눈빛을 마주쳤다.
쉐에에에에엑!
빛살처럼 빠르게 눈부신 검날이 날았다.
죽음.
그것은 헤이드가 수백 년간 한 번도 느껴 보지 못한 낯선 기운이었다.
스악!
-이, 인간.
그것이 헤이드의 유언이 되었다.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목이 잘려 나갔다.
죽음이 믿기지 않는지 두 눈을 부릅뜬 채 잘린 머리는 그대로 바닥에 처박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