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019화
창백하리만큼 새하얀 피부.
백금발의 긴 생머리.
보랏빛이 감도는 눈동자.
새빨간 입술.
도드라진 육감적인 몸 선까지.
리리스는 완벽에 가까운 미를 뽐내고 있었다.
-모두 출동이다!
리리스는 독마가의 절대오악이기도 했지만 서큐버스로 이뤄진 독화대(毒花隊)를 이끄는 수장이기도 했다.
-설마 정령계 출정입니까?
리리스의 말에 부대장인 레일라가 물었다.
-정령계에서 우리가 가서 뭘 하겠느냐?
서큐버스는 상대를 현혹해 정욕을 빨아먹는 악마였다.
신성한 신수나 순수한 정령만 있는 정령계에선 큰 힘을 쓰기 어려웠다.
-가주님의 특수 임무다. 모두 칠흑의 숲으로 가서 오크를 소탕한다.
-칠흑의 숲? 대장. 오크를 잡으러 독화대 모두가 간다는 겁니까?
‘칠흑의 숲’, ‘오크 소탕’이라는 말에 독화대 모두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죽으라면 죽는 이들이지만 너무나 황당한 임무였다.
모든 게 이상했다.
칠흑의 숲으로 탈주한 오크에 대한 소탕을 지시한 적이 여태껏 없었다.
벌레 취급하는 오크이기에 굳이 귀찮은 일을 하지 않으려 한 것도 있지만.
사실 어느 정도는 일부러 놔둔 것이기도 하다.
야생에서 거칠게 자란 놈들이 더 영양도 많고 맛도 특별하니까.
그렇기에 탈주한 오크가 너무 많아 문제가 될 정도가 되면 단속하는 정도가 지금까지의 관례 아닌 관례였다.
그것도 중급 악마 한 명이면 충분한 일이었다.
오크 따위야 밟으면 꿈틀도 못 하는 놈들이니까.
-저희 모두가 간다고요? 그리고 칠흑의 숲이라면 얼마 전에 파시드 님이 갔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레일라의 말에 리리스가 굳은 얼굴로 말했다.
-파시드가 죽었다.
-네엣?!
-가주님의 통신 마법이 먹히지 않았어. 차원을 넘어서도 가능한 통신 마법이 먹히지 않는다는 건 죽었다는 거지.
평소라면 웃으며 농담하지 말라고 할 수준의 내용이었다.
하지만 특별 임무를 앞두고 웃기지도 않은 농담 따위를 할 리 없었다.
-탈주한 오크도 이유였지만 사실 파시드가 칠흑의 숲으로 들어간 건 차원 이동의 흔적을 쫓기 위해서였다.
-그럼. 차원을 넘어온 어떤 존재가 파시드 님을 죽인 겁니까?
레일라의 말에 리리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겠지. 그리고 그걸 조사하는 게 우리 일이다. 오크가 얽혀 있다고 했으니 놈들을 죽이다 보면 뭔가 나오겠지. 그러니 서둘러라.
***
하아.
벌써 삼 일째 뜬눈으로 중단전의 개방을 돕고 있었다.
원래는 대장이나 조장만 개통해 주면 알아서 전파될 줄 알았다.
하지만 지금은 그럴 시간이 없었다.
고위급 악마가 죽었다.
추적이 시작될 게 뻔했다.
힘이야 중단전을 개방하면 해결될 일이다.
하지만 시간이 너무도 부족했다.
그렇기에 경호는 한시도 쉬지 않고 중단전의 개방을 도왔다.
제롬은 경호가 배고프면 식사를 도왔고.
멜리사와 카혼은 경호가 힘들면 마법과 정령술로 회복을 시켰다.
하지만 인간이란 게 배가 부르고 체력이 있다고 무한정으로 일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마법과 정령술로 회복하는 체력은 일종의 각성제 역할을 했다.
수면 부족으로 점점 쌓이는 피로도는 도저히 풀리지 않았다.
경호가 결국 비명을 지르며 대(大)자로 뻗어 누워 몸부림쳤다.
“나 이러다 정말 죽어! 죽는다고! 악을 물리치는 용사니 뭐니 하더니 여기서 이렇게 과로사로 죽는다고! 나 못해! 못한다고!”
이렇게 파업을 선언했지만 그래도 지난 삼 일간 대부분의 오크가 중단전을 개방할 수 있었다.
이제 뭐 거의 달인 수준이라 한 명당 십분 안팎이면 중단전 개방이 가능했다.
하루에 대충 백여 명.
삼 일간 삼백여 명을 끝낼 수 있었다.
-용사님. 죄송합니다.
멜리사가 바닥에 누워 허우적거리는 경호를 보며 사과했다.
인간으로 살다 모든 걸 잃고 마족에게 붙잡혀 와 오크로 살게 된 이들이다.
당연히 누구보다 힘에 대한 갈구가 심한 이들이었다.
중단전 개방.
제롬은 선명한 오러 블레이드를 뽑아낼 수 있었고.
카혼은 상급 정령의 힘을 부릴 수 있었고.
멜리사는 사대 원소의 힘을 자유롭게 쓸 수 있게 됐다.
마계로 끌려와 오크로 변한 이후에 상상도 하지 못했던 경지였다.
그렇기에 욕심이 났다.
-어쩌면 가능할지도 몰라!
칠흑의 숲으로 몰려든 오크는 모두 같은 꿈을 꾸고 있었다.
그전까지는 너무 높고 막연한 꿈이라 포기하고 있었지만 이제는 어쩌면 손에 닿을지도 몰랐다.
마신을 죽이고 마계를 지워 버린다는 말도 안 되는 꿈을 꾸는 게 아니었다.
자신을 이곳으로 끌고 온 마왕 바알의 세력인 삼대 마가의 멸망.
그것이 바로 칠흑의 숲에 사는 오크의 공통된 꿈이다.
-저희 욕심이 과했습니다. 용사님. 그럼. 주무십시오.
멜리사가 마력을 뿜어내 경호를 재웠다.
드르렁. 드르렁
수면 마취라도 한 듯 바로 코를 골며 경호가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이제 한 열 명 남았나? 정말 대단하군. 사실 어제쯤 포기할 줄 알았는데.
고집 세고 독하기로는 누구 못지않은 카혼이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그나저나 멜리사. 악마놈들이 쳐들어오는 데 얼마나 걸릴 거 같나? 예언 같은 거 안 들려?
-카혼. 예언가는 신이 아니라 신의 목소리를 듣는 사람이야. 그나저나 제롬이 너무 늦는데?
수십이던 인원이 수백으로 늘면서 창고에 쌓아놨던 식량이 금세 바닥을 보였다.
이 때문에 경호의 회복을 위해 붙어 있던 멜리사와 카혼보다 여유가 있는 제롬이 십여 명을 이끌고 마수 사냥을 떠난 상태였다.
-어차피 주변에 상급 마수는 없잖아? 아니 지금 제롬이면 상급 마수가 아니라 웬만한 마족도 상대할 수 있을 수준이니 걱정하지 마.
카혼의 말에 멜리사 역시 고개를 끄덕였지만 마음 한구석에 피어오르는 불안감은 여전했다.
예언가의 촉 같은 거였다.
그때 회관 밖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다급한 발소리가 들렸다.
벌컥.
다급하게 문이 열렸다.
제롬과 함께 마수 사냥을 나갔던 하룬이었다.
급하게 달려왔는지 옷은 여기저기 찢어져 있었고 긁힌 상처투성이였다.
-하룬!
-카혼 님! 마족이 나타났습니다!
리리스가 이끄는 독화대였다.
-벌써 왔단 말이냐! 몇 명이냐?
-단장님이 마족의 기운을 느끼자마자 제가 달려온 것이라 정확히는 모르겠습니다. 최대한 시간을 끌 테니 용사님과 멜리사, 카혼 님을 모셔오라고 했습니다.
카혼은 숫자만 적다면 붙어 볼 만하다고 생각했다.
멜리사가 모두에게 이 사실을 알렸고 카혼은 잠들어 있는 경호를 업었다.
-가자!
***
어?
제롬은 눈을 떴다.
아니 뜬 거 같았다.
확신할 수 없었다.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눈도 보이질 않고 귀도 들리지 않았다.
손에 느껴지는 것도 없었고 발에 닿는 느낌도 없었다.
제롬은 기억의 마지막을 떠올렸다.
악마를 보았다.
동료들이 악마에게 당하는 걸 보고 멈칫한 사이…….
기억이 흐릿했다.
아닌가?
기억이 또다시 흐려진다.
반면 시야는 선명해졌다.
여긴?
샛노란 들꽃이 만발한 곳에 앉아 있었다.
“제롬. 저기 봐요. 저기 나비요.”
뭐지?
낯설지만 익숙한 목소리에 제롬이 고개를 돌렸다.
새하얀 얼굴. 커다란 눈. 오뚝한 콧날. 붉은 입술까지.
너무나 아름다운 여인이 싱그러운 웃음을 짓고 있었다.
“제시카?”
낯설면서 익숙한 약혼자의 모습에 제롬은 이상함을 느꼈다.
“왜요? 왜 그런 이상한 표정이에요.”
“어? 아, 아니야!”
제롬은 이상함을 느꼈지만 흐릿한 기억에 그 이상함이 무엇 때문인지 정확히 알 수 없었다.
“꺄아아아아악!”
그리고 흐릿한 기억도 제시카의 비명에 더 이어갈 수 없었다.
“어?”
어디선가 손에 칼을 쥔 악당들이 나타났다.
열 명 남짓.
최연소 황실 기사단장인 제롬이었다.
단칼에 목을 모조리 날려 버릴 수 있었지만 제시카와 데이트에서 피를 보긴 싫었다.
“황실을 수호하는 흑사자 기사단장인 제롬이다! 물러나면 죄를 묻지 않겠다!”
하지만 악당들은 물러나지 않았다.
채앵!
제롬은 제시카를 자신의 뒤로 숨기며 검을 뽑아 들었다.
“마지막으로 말한다! 당장 물러나라!”
제롬의 검에서 소드 마스터의 상징인 선명한 오러가 피어올랐다.
“왜? 오러에 우리가 겁이라도 먹을 거로 생각했나?”
동시에 그들 손에 쥔 단검에서도 선명한 오러가 피어올랐다.
“아, 아니 이게 무슨!”
제롬은 지금 상황이 전혀 이해되지 않았지만 가만히 있을 순 없었다.
“나는 분명 경고했다! 제시카! 내 뒤에 꼭.”
푸욱! 푹! 푹!
“……. 제시카?”
섬뜩한 통증에 제롬이 놀라 돌아봤다.
그곳엔 피 묻은 단검을 움켜쥔 채 환하게 웃고 있는 피범벅인 제시카가 있었다.
칼에 찔린 곳도 치명적이었지만 피 묻은 채 환하게 웃고 있는 제시카의 모습이 더 큰 충격이었다.
휘청.
제롬이 휘청이다 결국 다리가 풀려 바닥에 주저앉았다.
리리스가 만들어 낸 환상 속에서 제롬은 그렇게 서서히 죽어 갔다.
***
앞장선 하룬을 쫓아 멜리사와 경호를 업은 카혼이 달렸다.
점점 멀리서 느껴지던 마기의 파동이 선명해지고 있었다.
-하룬! 먼저 가마!
멜리사와 카혼이 하룬을 넘어 마기가 느껴지는 곳을 향해 달렸다.
그리고 곧 시커먼 마기를 뿜어내고 있는 서큐버스 무리를 발견할 수 있었다.
리리스를 한눈에 알아본 멜리사와 카혼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중급 악마로 강하다고 할 순 없었지만 마기로 환상을 심어 상대를 파멸시키는 수법은 상대하기 까다로웠기 때문이었다.
특히 제롬과 같은 검사는 더더욱 항마력이 낮아 상성이 좋지 않았다.
-리리스! 멈춰라!
멜리사가 양손에 푸른 불꽃을 피워 올리며 소리쳤다.
-당장 제롬을 풀어 줘라!
카혼도 불의 정령을 소환했다.
불길이 확 일더니 시뻘건 불로 된 거인이 소환됐다.
제롬을 마기로 감싸고 있던 리리스가 굳은 얼굴로 나타난 멜리사와 카혼을 살폈다.
‘강하다!’
제롬만 해도 강해도 너무 강했다.
탈주한 오크의 대장이라고 하지만 그래 봐야 가볍게 짓밟을 수 있는 벌레 수준이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제롬과 저 둘은 그런 벌레 수준을 한참 넘어선 상태였다.
‘분명 뭔가 있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다만 차원 이동을 통해 넘어온 존재와 관련이 있으리라 추측할 뿐이었다.
물론 제롬을 제외한 이들은 한 단계 이상 처지는 이들이었다.
그렇기에 먼저 그들을 마기로 휘감아 인질로 삼아서 제롬을 공격했다.
가진 힘은 강했을지 모르겠지만 현혹 마법에 버티는 힘은 약했다.
하지만 지금 나타난 멜리사와 카혼은 달랐다.
“흐아아아아아아……. 어엇?”
카혼이 바닥에 내려놨던 경호가 기지개를 쳐다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상황을 살폈다.
무슨 상황인지 파악은 안 되지만 타이트한 복장의 섹시한 악마들이 마기로 오크를 붙잡아 놓고 있었고 멜리사와 카혼은 불길을 뿜어내며 대치 중이었다.
“이게 도대체……. 무슨 상황인 거죠? 지금 저 마기 안에 있는 게 제롬이죠?”
-맞습니다. 용사님. 저들은 상대를 현혹해 죽이는 악마 서큐버스입니다.
멜리사가 대답에 경호가 새삼 다시 한번 리리스를 훑어봤다.
‘오. 서큐버스. 이쁘긴 엄청 이쁘네. 내 취향은 아니지만.’
딱히 그쪽으론 관심이 없는 경호였기에 취향이랄 것도 없었다.
동시에 리리스도 경호를 훑어봤다.
-검사 타입. 하지만 제롬보다 훨씬 강하다!
리리스는 싸움이 절대적으로 불리함을 깨달았다.
“야! 어차피 우리 못 이겨. 물러가면 봐줄 테니까 가서 더 데려와. 맘 바뀌기 전에 어서!”
리리스는 무식한 파시드와 달랐다.
단순무식한 파시드와 달리 리리스는 영리했다.
도망칠지 싸울지 감정이 아닌 손익을 따져 결정하는 스타일이었다.
도망가도 용서받을 정도의 정보를 얻거나 목숨을 걸더라도 덤빌 이유를 찾아야 했다.
-호호호호호호호호.
경호의 외침에 리리스가 요사스런 웃음을 터뜨렸다.
-네가 파시드를 죽인 놈이구나?
“파시드? 내가 악마를 죽일 때 통성명을 하는 스타일이 아니라서. 그 얼굴 시뻘건 놈이 파시드냐? 뭐. 내가 죽이긴 했지. 생각보다 강해서 애 좀 먹었다.”
-역시 네놈이었구나. 차원 이동으로 넘어온 존재가.
“맞아. 정령계에서 넘어온 용사가 바로 나야.”
정령계의 용사라는 말에 리리스의 눈이 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