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018화
바닥에 엎드린 멜리사를 보고 놀란 건 경호만이 아니었다.
-어? 멜리사?
제롬도 놀랐고.
-이게 도대체…….
카혼도 말을 잇지 못했다.
예전 그 대단했던 과거의 모습이 사라졌다곤 하지만 멜리사는 모두가 인정하는 최고의 강자였다.
그런 그녀가 제롬이 말한 사실만 듣고는 달려와 바닥에 엎드려 용사임을 인정한 것이다.
경호가 손을 뻗어 엎드려 있는 멜리사를 일으켜 세웠다.
녹색 피부에 튀어나온 어금니에 어울리지 않는 보랏빛 긴 생머리에 깊고 맑은 눈동자였다.
-용사님.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아. 그러셨군요. 안 그래도 대마도사이자 예언가라고 들었습니다. 의심하지 않고 받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신의 종복으로서 당연한 일입니다. 모두가 지내기 충분하니 들어오시지요.
멜리사의 안내에 모두가 목책 안으로 들어갔고 다시 목책 주변에서 작은 스파크가 튀더니 다시 숲으로 변해 마을의 모습을 감췄다.
***
딱! 딱! 딱!
독마가의 가주 케로스는 손가락을 까닥거리며 탁자를 때리고 있었다.
일이 제대로 풀리지 않을 때 하는 그의 오랜 습관이었다.
-파시드가 올 시간이 지났는데.
3일.
칠흑의 숲이 금지이고 크다고 하지만 파시드는 그저 그런 악마가 아니다.
돌아와도 진작 돌아왔어야 한다.
아마도 오크를 처리하면서 너무 깊숙이 들어간 듯했다.
-적당히 하고 올 것이지. 또 욕심을 부리는 모양이군.
케로스가 탁자를 때리던 손가락을 들어 올려 허공에 통신 마법진을 만들었다.
파시드에게 연락을 취하기 위함이었다.
-어?
마법진이 완성되면 불꽃이 일며 통신이 연결돼야 했다.
치지지지직.
불꽃이 힘없이 꺼지며 마법진이 사려졌다.
최상급 악마인 케로스가 통신 마법 따위에 실패할 리가 없었다.
-어?
단순한 일이 아니다.
이렇게 마법진이 완성됐음에도 연결되지 않는다는 건 상대방이 존재하지 않는단 뜻이다.
죽음.
마계에서 상급 악마의 죽음은 절대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다.
콰아아아앙!
케로스가 주먹으로 탁자를 때렸다.
평소에 아끼던 만년마목으로 만든 귀한 탁자가 산산이 조각나 흩어졌다.
-죽었다고? 파시드가 죽었다고?
아끼던 부하가 죽었다는 상실감이나 슬픔 따위는 없었다.
다만 이해하기 어려운 상황에 짜증이 일었다.
‘탈주한 오크 따위가 그 어떤 함정을 파 놨다 해도 파시드를 죽이는 건 불가능하다. 그렇다는 건…….’
파시드를 죽일 만한 강자가 차원 이동을 해 왔다는 거다.
마신의 힘을 이어받은 존재가 아닌 이상 마계에서 제힘을 쓰지 못하기에 존재에 대한 의문과 짜증이 커졌다.
-부관! 부관!
케로스의 외침에 집무실로 악마 하나가 뛰어들어왔다.
-리리스. 리리스를 들라하라.
독마가주의 외침이 있고 잠시 후 집무실 문이 열리고 서큐버스 하나가 요염한 미소를 띠며 들어왔다.
리리스.
상대를 정욕에 빠뜨려 기운을 빨아먹는 서큐버스로 독마가를 지탱하는 절대오악 중 하나였다.
오악이었던 파시드보다 약체로 평가되지만 성욕을 가진 존재에게 절대적인 힘을 발휘하기에 부른 것이었다.
-부르셨습니까. 가주님.
이마 양옆으로 난 손톱만 한 뿔을 제외한다면 리리스는 금발을 한 절세미녀처럼 보였다.
-그래. 내 너에게 시킬 일이 있어서 불렀다.
-정령계입니까?
-아니 칠흑의 숲으로 가 줘야겠다.
당연히 정령계를 염두에 두고 있던 리리스였기에 가주의 말에 고개를 갸웃할 수밖에 없었다.
-칠흑의 숲이라면 도망자를 쫓으라는 말씀이십니까? 들리는 소문으로는 파시드가 갔다고 하던데. 아닙니까?
파시드가 관리하던 오크가 대량으로 탈주하여 그 뒤를 쫓고 있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연락이 끊겼다.
-통신 두절입니까?
통신 두절이 곧 사망이라는 걸 리리스도 잘 알고 있었기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니! 가주님! 어떻게 그런…….
-그러니 너를 부른 것이다. 파시드는 그 외에도 차원 이동에 대한 흔적을 찾고 있었다. 아니 탈주한 오크보다 차원 이동에 대한 조사가 우선이었지.
리리스는 궁금증이 마구 떠올랐지만 케로스의 살기 띤 표정에 입을 다물고 눈치만 살폈다.
-리리스야. 내가 하는 말이 무슨 말인지 알겠지?
-파시드의 죽음과 차원 이동, 탈주한 오크까지 모두 조사해 오도록 하겠습니다. 칠흑의 숲에선 제가 그 누구보다 강합니다. 믿고 맡겨 주십시오.
서큐버스인 리리스는 유체(幽體)화 할 수 있었기에 독충이 득실거리는 험한 숲도 빠르게 돌파할 수 있었다.
-파시드가 죽고 오크 녀석들이 뭉쳤을 수도 있으니 부하들을 이끌고 가도록. 파시드를 죽인 인물도 함께할 수 있으니 조심하고.
-가주님. 그놈을 저의 노예로 만들어 끌고 오겠습니다.
-그래. 너를 믿으마.
케로스의 말에 리리스가 요사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물러났다.
***
“네엣? 제가 신이 계시한 용사라고요? 하하하. 악마와 싸울 용사라뇨?”
용사는 맞지만 어디까지 미르가 어설프게 골라 소환된 용사일 뿐이다.
경호는 눈앞에 앉아서 고개를 끄덕이는 멜리사를 보며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역시 처음부터 저는 용사님이 대단한 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제롬. 그게 무슨 소리냐? 처음부터 알았다니? 넌 저 예언을 기억도 못 했잖아.
카혼이야 멜리사의 예언을 기억했기에 혹시나 하는 의문을 가졌지만 제롬은 그런 것도 아니었다.
-용사님은 우리의 사정을 듣고는 심장에 마나코어를 만들어 마기를 정화하는 법을 알려 주셨네. 정말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말이지.
-뭐어?
-정말인가?
제롬의 말에 멜리사와 카혼의 눈이 튀어나올 듯 커졌다.
마나연공법은 단순히 귀하고 말고 하는 문제가 아니었다.
그것도 보통의 것이 아닌 마계에 꼭 맞는 혁신적인 연공법이다.
아무리 서로 도와야 하는 처지라고 하지만 그런 결정은 그냥 쉽게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뭔가 거래를 하거나 요구를 해도 들어줄 수밖에 없는 가치를 가진 것이었다.
-정말 대단하십니다. 용사님.
멜리사의 눈동자에 존경심이 피어나고 있었다.
“뭐. 어쨌든 모두가 강해져야 제가 마계에서 정령계로 넘어갈 확률이 높아지니까 그런 겁니다. 크게 의미를 두지 마시고요. 그리고 전 그렇게 대단한 인물이 아닙니다. 신이 예언한 용사라뇨. 정령계의 수호신도 포기할 뻔한 인물인데요. 절대로 그런 인물 아닙니다.”
-하지만 분명 예언의 모습 그대로입니다. 신력을 품고 있으며 정령의 향기가 나고 마력이 일렁이는 모든 기운이 조화로운 존재가 마계에 나타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가 결국 악을 물리친다고 했습니다.
대충 느낌은 비슷했지만 자신은 그런 대단한 인물이 아니었다.
“멜리사. 저한테는 너무 과분한 목표네요. 어휴. 당장 정령계로 돌아갈 것만 생각해도 머리가 어질어질한데요. 뭐. 그래도 열심히 해 보죠. 그리고 당장 세 분께 중단전을 개방시켜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하룬을 보니 그 차이가 정말 확연하더라고요. 세분은 그보다 더 강하니 아마 더 크게 성장하실 겁니다.”
-용사님. 부탁드리겠습니다.
제롬과 멜리사, 카혼이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소드마스터 제롬.
대마도사 멜리사.
대정령사 카혼.
모두 한 대륙을 풍미했던 절대자들이기에 기감이나 오성도 뛰어났다.
당연히 제롬과 다르게 기운의 흐름을 익히는 것도 더 빠를 터였다.
거기다 하룬을 실험체로 써서 이제 오크의 마나회로도 익힌 상태였다.
가장 먼저 경호가 중단전 개방을 도운 이는 제롬이었다.
이유는 경호와 가장 비슷한 경로로 힘을 길렀기 때문에 다른 이들에게 문제가 생겼을 때 도와줄 수 있기 때문이었다.
제롬은 역시나 하룬과 달랐다.
경호가 이끄는 기운을 제롬은 바로 받아들이며 회로의 흐름을 더 원활하게 만들었다.
많이 헤맨 것도 있지만 어쨌든 하룬은 반나절 가까운 시간이 걸렸다.
하지만 제롬은 딱 한 시간이 걸렸다.
그 후 제롬은 가부좌를 틀고 앉아서는 바로 마나연공을 시작했다.
후끈한 열기가 그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더니 전신에서 검은 액체가 고약한 냄새와 함께 뿜어져 나왔다.
마나회로 구석구석에 남아 있던 마기의 찌꺼기였다.
마력을 쓰기에는 충분한 정도였지만 마기의 찌꺼기 때문에 제대로 힘을 발휘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거기다 이제 외부에서 들어오는 마기도 바로 중단전에서 태워 버릴 수 있게 됐다.
길게 숨을 뱉어 낸 제롬이 눈을 떴다.
전보다 더 깊고 맑아진 눈빛이었다.
-어떤가?
묻지 않아도 느낄 수 있었지만 카혼은 굳이 질문을 던졌다.
-전성기보다는 못하지만 악마놈이 나타난다고 무작정 도망치지 않아도 될 정도는 되는 것 같군.
-이제 막 배운 주제에 허세는. 넌 우선 좀 씻어야겠다.
카혼이 운디네를 소환해 몸에 붙은 마기의 찌꺼기를 물로 씻어 내 밖으로 날려 보냈다.
-그럼. 부탁합니다.
경호가 기운을 카혼에게 불어넣어 내부를 살폈다.
제롬은 하룬의 스승격이기에 차이가 없었지만 카혼은 정령술사이기에 마나회로가 약간 다를 수도 있었다.
‘역시나 조금 다르군. 마나코어에 들어 있는 기운도 마력이 아니라 정령력이고.’
경호는 자신의 마력을 심장으로 옮겨 오른손에는 불의 정령력을, 왼손에는 물의 정령력을 담았다.
-아니! 두 정령력을 동시에 다룬다고!
경호의 행동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있던 카혼이 벌떡 일어났다.
“중단전을 개방하면 카혼도 할 수 있을 겁니다. 제롬이나 멜리사도 마찬가지고요. 다들 저보다 재능도 뛰어나시니 더 잘하실 겁니다.”
마음이 급해진 카혼이 다시 서둘러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경호가 불의 기운으로 먼저 길을 내고 물의 기운으로 안정화하며 마나회로를 따라 움직였다.
역시나 카혼도 제롬만큼이나 잘 따라왔고 한 시간도 되지 않아 개통을 마칠 수 있었다.
‘후. 이거 힘드네.’
제롬가 달리 카혼에게는 더 적합한 정령력으로 기운을 변화시키느라고 힘이 두 배는 더 든 것 같은 기분이었다.
우우우우우웅.
그때 중단전을 연 카혼의 몸에서 불, 물, 바람, 땅의 기운이 마구 뻗쳐 나왔다.
가르쳐 주지도 않았는데 정령력 변환에 대해서 깨달은 모양이었다.
한참이나 기운이 서로 얽히고설키며 휘몰아치다 잠잠해졌다.
-마계에 넘어와 가장 친화력이 높은 물의 기운밖에 쓸 수 없었는데…….
사대 정령력을 모두 일으키고는 감회가 젖어 말을 채 잇지 못하는 카혼이었다.
-고생하셨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카혼이 깍듯하게 말하며 고개를 숙였다.
동시에 더욱 선명해진 운디네가 나타나 경호의 몸을 휘돌며 떨어진 체력을 회복시켜 줬다.
“별거 아닙니다. 그럼. 멜리사도 앉으세요.”
멜리사는 마도사라 앞선 제롬과 카혼과 다르게 마나코어가 아닌 심장에 서클을 형성한 이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중단전을 개통하면 기운이 더욱 정순해지기에 도움이 될 거라 생각이 들었다.
“저도 마법에는 문외한이라 잘 모르지만 어쨌든 중단전 개통이 도움이 될 겁니다.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경호의 마력이 멜리사의 마나회로로 흘러 들어갔다.
제롬과 카혼도 대단한 실력자이지만 마나를 조절하는 것에 있어서는 대마도사인 멜리사를 따라갈 순 없었다.
그렇게 멜리사는 삼십 분도 되지 않아 개통을 마무리했다.
-이거 신기하네요. 심장 외부로 써클을 만들어 사용하는 게 마법의 이치인데. 심장 내부에 회로를 만들어 기운을 변화시키고 정화할 수 있다니. 정말 놀랍네요.
멜리사는 따로 운공을 더 하지 않고 곧장 손을 뻗어 불꽃을 일으켰다.
가장 기본적인 ‘파이어볼’이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새빨간 불꽃의 색깔이 점점 새파랗게 변하며 열기를 더했다.
내부가 후끈하게 달아오르자 멜리사가 손을 저어 불꽃을 지웠다.
-용사님. 감사합니다. 목숨 걸고 제가 꼭 정령계로 다시 돌아갈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멜리사뿐 아니라 제롬이나 카혼의 표정도 아주 의지가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적당히 웃어넘기려고 했던 경호도 그런 분위기에 진지하게 답할 수밖에 없었다.
“제가 악을 물리칠 용사인 건 솔직히 모르겠지만 저 역시 최선을 다해 여러분을 돕겠습니다.”
-그럼. 조금만 더 수고해 주십시오. 저는 옆에서 회복마법을, 카혼은 회복술을 걸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네엣?”
경호가 당황해할 때 제롬은 벌써 회관 밖으로 나가 대기하고 있던 오크를 들이고 있었다.
“하아.”
경호가 좌우에 붙은 멜리사와 카혼을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한숨을 뱉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