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귀환용사의 골목식당-316화 (316/335)

#외전 016화

“하아. 그런데 이제 어쩐다.”

마계에서 악마를 죽이다니.

미쳤다.

그것도 정령계의 용사로 활약하며 한창 미운털이 박힌 상태에서 말이다.

이 사실이 알려진다면 악마 놈들이 아주 환장하고 달려들 터였다.

경호는 목이 잘린 파시드의 시체를 쳐다보다 그루터기에 힘없이 주저앉았다.

“이거 미치겠네. 하아.”

마계로 차원이동 한 순간부터 이미 망한 상황이긴 했지만 이제 제법 강해 보이는 악마까지 죽였으니 완전히 망한 상황으로 보였다.

원래 계획 없이 대충대충 사는 인생이었지만 여기서 그랬다가는 지구가 아닌 정령계도 못 돌아갈 수 있었다.

무조건 정령계는 돌아가야 했다.

하지만 차원이동이라는 게 쉬운 게 아니었다.

탈주한 오크를 잘 모아 중단전도 개방시켜 주고 검술도 가르쳐주면서 힘을 키우면 큰 도움이 되긴 하겠지만.

“차원이동은 어차피 불가능하고.”

결국엔 악마가 사용하는 게이트를 이용해야 했다.

“어차피 악마랑 엮일 거긴 했지만 이거 너무 빠른데.”

빨라도 너무 빨랐다.

반군은 마족이 오크를 무서워해서 살아남은 게 아니라 벌레처럼 무시했기에 살아남을 수 있던 거였다.

그런데 그런 벌레가 악마를 죽였으니 당장에 추적대를 꾸려 밀려들어 와도 할 말이 없는 상황까지 왔다.

“그냥 나 혼자 떠나야 하나.”

경호가 머리를 쥐어뜯으며 한숨을 거듭 쉬다 고개를 들어 숲의 저편을 바라봤다.

돼지 멱따는 소리가 바람을 타고 멀리서 들려왔다.

“하룬 녀석. 생각보다 의리 있는 놈이였네.”

잠시 후 도끼를 든 오크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대략 백여 명이 되는 걸 보면 모조리 달려온 모양이다.

“뭐야. 다 왔냐.”

경호는 내심 고마웠다.

가장 선두에는 조악하지만 투구까지 갖춘 제롬과 양쪽 손목을 대충 붕대로 감은 하룬이 있었다.

-경호! 뭐야? 악마는! 악마는 어디 갔어! 어떻게 도망친 거야!

설마 경호가 죽였다고 생각 못 하는 하룬이 걱정하는 얼굴로 물었다.

경호가 손가락으로 위를 가리키며 말했다.

“내가 하늘나라로 보냈지.”

경호의 말에 다들 하늘을 올려다봤다.

-하늘에 보냈다고? 날아갔다는 건가?

-그런데 악마가 보낸다고 갈 놈이 아닌데?

-마계 하늘에 나라가 있었어?

웅성거리는 꼴을 보고 경호가 서둘러 말을 바꿨다.

“아니 그게 아니라 저기.”

경호가 비켜서며 목이 날아간 파시드의 시체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수십 명의 오크가 동시에 눈이 커지며 입을 쩍 벌리는 놀라운 광경이 펼쳐졌다.

-죽였다고? 정말로 순혈 악마를 죽였어?

“까딱했으면 내가 죽을 뻔하긴 했지.”

-이런 미친. 너 진짜 용사였어?

“가짜 용사도 있냐?”

사실 모두 하룬과 같은 마음이었다.

경호가 정령계의 용사라고 소개했지만 다들 반신반의하던 상황이었다.

소환용사라는 게 흔히 있는 존재가 아니고 경호의 외모나 풍기는 기운도 강렬하지 않기에 그럴 수밖에 없었다.

‘용사님’이라고 부르며 존대하는 제롬 역시 의구심을 품을 정도였다.

빠악!

제롬이 하룬의 뒤통수를 강하게 때렸다.

-악! 왜 때려요! 그리고 저 환잡니다! 환자!

하룬이 붕대가 둘둘 감긴 양손을 들어 보이며 투덜거리자.

-이놈아! 용사님에게 그게 무슨 말버릇이냐!

원래도 은인이었지만 이제는 영웅이었다.

-쳇! 알았다고요. 알았어요.

하룬이 입을 삐죽 내밀었다.

험상궂게 생긴 오크가 그러니 삐친 게 아니라 무섭게 보였다.

경호는 하룬이 입을 내밀고 있는 꼴을 계속 볼 자신이 없었다.

“아니 그냥 편하게 대하라고 하세요. 제롬도 저한테 그냥 경호라고 해 주시고요. 서로 편해져야 더 가까워질 수 있는 거 아니겠습니까.”

-은인인데 어찌. 저는 용사님이 더 편합니다.

“에이. 어떻게 그게 편합니까. 용사님은 들을 때마다 어색해서 기운이 쫙 빠지니까 그냥 편하게 불러 주세요.”

고래 힘줄보다 질긴 솔딘의 고집을 꺾지 못해 용사님이라 계속 불렸지만 내심 불편했던 경호였다.

-정말입니다. 용사님이 더 편합니다. 말이 편해지면 행동도 편해지기 마련. 은인에게 그럴 순 없습니다.

제롬도 고집이라면 솔딘 못지않았다.

경호도 호칭으로 계속 투닥거릴 수 없었기에 넘어가기로 했다.

“알았습니다. 그럼. 그렇게 하세요. 하지만 제롬을 제외한 다른 분들은 자유입니다. 하룬은 나한테 반말해도 되니까. 그냥 해.”

그제야 하룬의 삐죽 나왔던 입이 들어갔다.

-오케이. 경호.

긴장됐던 분위기가 많이 풀렸다.

물론 마냥 좋은 건 아니었다.

지금 당장은 해결했지만 앞으로가 문제였다.

“제롬. 어쩌실 겁니까?”

제롬이 고개를 저었다.

-용사님. 사실 도망쳐 나와 숨어든 것에 불과한 이들입니다. 악마는커녕 상급 마수도 두려워하는 우리가 뭘 어떻게 하겠습니까.

사실 반군이라는 거창한 이름으로 소개했지만 스스로 어떠한 처지인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탈주했음에도 지금까지 살아 있을 수 있던 이유는 그저 숲이라는 장벽 때문에 귀찮음을 감수하지 않는 마족 때문이었다.

하지만 악마가 죽었다.

그것도 귀족일지 모를 순혈의 악마가.

이제 독충이 우글거리는 거대한 칠흑의 숲도 방어막이 될 수 없었다.

-용사님.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칠흑의 숲에 숨어든 반군 중 가장 크고 강한 세력을 가졌지만 악마 하나에 지워질 수준.

그렇기에 제롬도 경호에게 방법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

“하아.”

한숨을 크게 쉰 경호가 자신을 구하기 위해 달려온 이들을 둘러봤다.

만난 지 하루도 되지 않은 이들에게 무슨 특별한 감정이 있는 건 아니었지만 어쨌든 목숨을 걸고 돕고 도와주려 한 사이가 됐다.

“사실 혼자 마족에게 접근해 은밀히 정령계로 돌아갈 방법이나 찾으려 했습니다.”

위험천만한 방법이었지만 떠오르는 방법 중 가장 현실적인 방법이었다.

경호의 말에 제롬도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중단전을 개방하고 속성의 힘을 다룰 수 있다면 이야기가 좀 달라질 수 있습니다.”

-네엣?

“제가 악마를 죽인 방법입니다. 여러분도 할 수 있습니다.”

-경호. 정말?

하룬의 눈에서 의욕의 불꽃이 이글거렸다.

“그래. 중단전을 개방하는 것보단 오히려 쉽지. 하지만 여기서 할 이야기는 아니니 우선 이동합시다. 여긴 숲의 외곽이니 최대한 흔적을 남기지 않고 깊숙이 들어가죠. 혹시 갈 만한 곳이 있습니까?”

경호의 물음에 제롬이 답했다.

-사실 반군이라 부르는 이들이 가장 많이 모이는 곳이 칠흑의 숲입니다. 마계에서도 금지(禁地)라 칭하는 험한 지형이라 그렇지요. 그리고 저희가 부끄럽지만 가장 강한 집단입니다. 그리고 저희와 비슷한 규모와 무력을 가진 또 다른 집단이 있습니다. 그곳이 숲에서 가장 깊숙이 자리 잡고 있으니 그곳으로 가는 게 좋을 듯합니다.

마나를 다룰 수 있는 오크 백여 명.

악마라는 말도 안 되는 적이 존재하기 그렇지 사실 어디에 내놔도 부끄럽지 않은 집단이었다.

당장이라도 전략만 잘 세우면 하급 악마 정도는 사냥이 가능할 정도이고 중단전을 모두 개방하고 속성력까지 다루면 상급 악마도 겨뤄 볼 만한 전력이었다.

“그곳과 사이가 나쁘지 않나 보네요? 그래도 이 인원이 갑자기 찾아가도 되겠습니까?”

-아. 오해하셨군요.

오해? 무슨 오해?

경호가 제롬의 말에 고개를 갸웃하자.

-그곳의 위치나 시설이 가장 좋기에 가는 거지. 사이가 좋아서 가는 게 아닙니다. 당연히 그냥 받아 주지도 않겠지요.

“그럼. 설마 간다는 게.”

-가서 싸워서 굴복시켜야지요. 지금까지는 서로 싸워 봐야 손해니까 그냥 두고 봤지만 이제 악마와 싸움이 날 상황이니까 칠흑의 숲을 통일하고 모두 힘을 합쳐야지요.

그러니까 악마의 공격을 대비해서 힘을 합쳐야 한다는 제롬의 말은 참 맞는 말이다.

그런데 힘을 합치는데 왜 싸워서 차지하고 굴복시켜야 하는 거지?

괴물의 대명사 오크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인간이다.

그것도 오러를 쓰는 최상급의 기사.

돼지 멱따는 소리긴 하지만 대화가 안 되는 것도 아니고 노예보다 못한 삶을 살다 도망쳤으면서 왜 또 싸운단 말인가.

‘지구에도 미치광이 전쟁광 같은 독재자가 없진 않았지만 그래도 대화를 해야지!’

21세기를 살다 온 현대인으로서 이해가 가지 않았다.

“제롬. 싸워서 굴복시킨다고요? 왜요?”

경호가 물었지만 제롬은 답변이 아닌 질문을 던졌다.

-용사님. 왜라뇨? 그게 무슨 소립니까? 다른 방법이 있다는 말씀입니까?

경호가 오크의 표정을 정확히 읽어 낼 재주는 없었지만 분명 정말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아니 그러니까. 지금 악마가 이 숲에 숨은 이들을 모조리 죽이겠다고 쳐들어올 수도 있는 거잖아요. 그런데 싸우겠다고요?”

-그러니까 싸워야지요. 힘을 뭉치려면 굴복시켜야 하니까요. 강함의 증명. 그것이 바로 이곳의 유일한 법칙입니다.

경호는 뭔가 벽을 보고 말하는 듯한 답답한 느낌을 받았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같은 나라, 같은 민족, 같은 세대라도 갈등이 생기고 차이가 있기 마련이다.

그런데 이들은 다른 차원에서 모인 이들이다.

거기다 세계관 역시 힘이 모든 걸 결정하던 중세시대에 가까운 세상에서 살던 이들.

뭉치려면 마계의 절대 법칙인 강함을 증명하는 것밖에 없었다.

우습게도 마계의 악마에게 노예로 사는 게 싫어 도망친 이들이지만 그들의 법칙에 맞춰 살아오고 있었다.

“강함의 증명이라……. 뭐. 나 역시 그렇게 받아들여졌기도 하고 이곳의 법칙이라니 할 말이 없기도 하지만. 싸우면 피해가 생기고 시간이 든다는 게 문젭니다.”

원래 비슷한 수준의 집단이라면 제롬이 이끄는 이곳이 이기는 건 당연했다.

바로 경호가 있기에.

하지만 숲에 있는 이들을 모두 싸워서 통합하려면 시간이 많이 들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습니다. 저희는 모두 같은 차원에서 건너와 서로 뜻이 맞아 이렇게 뭉쳤지만 다른 이들은 아닙니다. 이들에게 용사님이니 악마니 설명해도 안 통할 게 뻔합니다. 아니 그런 말을 하기도 전에 공격부터 할 놈들입니다. 모두 탈주한 오크라는 한 가지 공통점을 제외하고는 모두 다른 차원에서 다른 힘을 가졌던 이들이니까요.

제롬의 말을 듣던 경호가 ‘다른 힘’에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그런데 다른 힘이라뇨? 다른 힘이라면 혹시 마법 같은 걸 말하는 건가요?”

-마법이나 정령술, 변신술. 다른 초능력도 있습니다. 암흑마기에 오염된 마나만 쓸 수 있다면 자신의 능력을 쓸 수 있으니까요.

“아.”

오크라고 해서 단순하게 도끼질만 하는 전사 타입만 생각했던 경호였다.

들어 보니 인간일 적에 쓰던 능력을 모두 쓸 수 있는 모양이다.

‘그렇다면 마석이나 아티팩트 같은 거만 잘 모으면 차원 이동을 할 수도 있다!’

차원 이동을 쓸 정도의 마법사가 있을지 모르지만 가능성이 아주 없는 건 아니었다.

“제롬. 강함을 증명만 하면 되는 거 아닙니까? 그게 싸워서 이겨야 하는 건 꼭 아닌 거죠?”

-하지만 그렇지 않으면…….

푸욱.

경호가 용아검으로 파시드의 잘린 머리를 푹 찍었다.

“이거 보고도 덤비면 제가 상대하겠습니다.”

제롬이 놀란 얼굴로 용아검에 꽂혀있는 파시드의 흉측한 머리를 쳐다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방법이 있었군요. 용사님.

“가시죠. 빼놓지 말고 아시는 곳이면 다 들르면서 갑시다. 어차피 이 숲에 있는 이들을 모두 통합하는 게 더 유리합니다. 괜히 흩어져 있으면 붙잡혀 정보만 흘릴 수 있으니까요. 서두르죠.”

제롬이 오크를 돌아보며 소리쳤다.

-‘카혼의 부대’로 이동한다! 모두 흔적을 최대한 남기지 말고 이동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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