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009화
염전 노예 사건.
한때 대한민국을 떠들썩하게 만든 참으로 슬프고 잔혹했던 사건이다.
‘늦게 배운 도둑이 날 새는 줄 모른다더니.’
경호는 염전 노예 사건을 방불케 하는 신룡 노예 사건을 직접 목격 중이었다.
보물에 대한 용족의 탐욕은 생각보다 더 강했다.
다만 미르에게 그것을 표출할 방법이 없었을 뿐.
드워프 만난 용족은 정말이지 악마보다 더 악랄했다.
땅! 땅! 땅! 땅! 땅!
망치 소리가 끊어지지 않은 게 벌써 며칠인지 모르겠다.
대충 보름은 넘은 듯했다.
옆에서 허드렛일을 도와주고 있는 경호의 귀에 이명이 울릴 정도.
‘힘들어 죽겠다’라는 입에 발린 말이 곧 현실이 될 것 같기에 경호는 미르를 불렀다.
“미르. 이제 저들도 좀 쉬어야 할 거 같은데? 저거 봐! 저거!”
거의 좀비 수준의 드워프를 경호가 가리키며 말했다.
-조금 지쳐 보이는군.
조금 지쳐 보인다고? 좀비도 저것보다 활기차 보일 텐데?
오늘만 이런 대화가 스무 번이 넘었다.
그때마다 ‘조금 지쳐 보이는군.’을 반복하며 회복 마법을 걸어 주고 있는 미르.
‘이건 병 주고 약 주고도 아니고!’
드워프들은 좀비처럼 어찌어찌 움직이고 있었다.
죽어 가는 이도 벌떡 세운다는 신룡의 회복 마법 덕분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보름이나 지속되면 문제가 생기기 마련이다.
땅! 땅! 땅! 퍼억!
끄아아아아악!
“족장님! 제롬이 망치로 손을 찍었습니다!”
비명을 지르며 피가 터져 나오는 손을 붙들고 있는 이도 있었고.
“야! 정신 차려! 임마! 눈 떠! 너 그러다 죽어!”
쇳물이 나오는 화로 앞에서 그대로 서서 잠든 이도 있었다.
육체야 회복이 되지만 정신력 고갈은 답이 없기에 벌어진 일이다.
이젠 슬슬 한계가 오는 상황.
그래. 그래도 저 정도면 다행이다.
어젯밤에는 차라리 죽겠다며 망치로 머릴 때린 드워프도 한 명 나왔다.
‘회복 마법으로 육체만 회복시키니 이 사달이 벌어지지!’
보물을 만드는 일은 정신력 소모가 엄청났다.
제련, 대장, 세공 같은 위험한 작업이 포함되어 극도의 섬세함이 요구되기 때문이었다.
피로감이 극한까지 쌓인 드워프들이 제대로 일하지 못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미르. 이젠 정말 회복 마법으로는 안 될 거 같은데.”
-그래. 내가 멍청한 짓을 하고 있었어.
양손에 수정으로 미스릴로 만든 용 조각상 든 미르가 몽롱하게 풀린 눈으로 경호에게 말했다.
-경호. 이렇게 아름다운 보물을 처음 접하다 보니 나도 모르게 바보 같은 짓을 했어.
조금만 바보 같은 짓을 더했으면 정말 큰일 치를 뻔했다.
미르의 말처럼 용 조각상은 미적 감각이 없는 경호가 보기에도 정말 대단했다.
용의 비늘 하나하나가 다 살아 있는 듯이 새겨져 있었고, 수정을 깎아 만든 눈과 여의주는 그야말로 작품의 화룡점정이었다.
“그래. 미르. 잘 생각했어. 이제 보물도 제법 쌓였으니 그만 만들게 해도 될 거 같아.”
부족원 모두가 회복 마법의 힘으로 열과 성을 다해 만들었기에 보름 만에 수백 개의 작품이 만들어졌다.
-그래. 여기를 다 채우려면 쉬긴 해야지. 그래. 하루만 쉬고 내일부터 다시 시작하는 거로.
“엥?”
경호가 놀란 눈으로 미르의 레어를 둘러봤다.
‘그거 농담 아니었어?’
미르가 사는 레어가 결코 작을 리 없었다.
거기다 이참에 레어를 넓히겠다며 보름 동안 확장해서 대충 올림픽 주경기장 정도의 크기로 커졌다.
“에이. 농담이지?”
여길 진짜 다 채운다고?
왜 우리가 ‘인사치레’라는 게 있잖은가.
우리 다음에 밥 한번 먹자!
너 오늘 너무 예쁘다!
너 정말 살 많이 빠졌네!
이런 말들은 보통 상대에게 크게 의미 없이 하는 말이다.
올림픽 주경기장 크기의 레어를 가득 채울 보물을 만든다는 말도 마찬가지.
어떤 미친놈이 진짜 이곳을 보물로 다 채울 생각을 하겠는가?
‘그 미친놈, 아니 미친 용이 여기 있네! 여기 있었어!’
경호의 표정을 살핀 미르가 헛기침을 했다.
-크흠. 그럼. 하루가 아닌 이틀 쉬는 거로.
당장 쓰러져 응급실로 실려 가도 이상하지 않은 이들이다.
하루 이틀이 문제가 아니었다.
“아니. 더 하면 정말 죽어. 지금도 제법 채웠잖아. 푹 쉬게 하고 그 뒤로는 노동 강도나 시간을 더 줄여야지. 여기 와서 저들 한숨도 제대로 못 잤다고.”
-그래서 2교대로 한 건데. 그게 좀 과했나? 그래도 지금까지 잘 버텼잖아.
지금까지 버틴 게 신기한 거다.
거기다 이곳의 일주일은 월화수목금금금이었다.
휴일? 점심시간? 그딴 건 모두 회복 마법으로 건너뛰고 있는 상황.
워라벨이라고는 눈 씻고 찾아봐도 없는 현장이었다.
“미르. 노예도 먹이고 재워 가면서 일 시킨다고.”
경호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하자.
-크흠. 알았다. 모두 그만! 모두 작업 중지! 이제 보물은 충분하다!
미르가 마지못해 드워프의 작업을 종료시켰다.
털썩. 털썩.
다들 기절하듯 바닥에 쓰려졌다.
철야 작업 보름 정도 하는 것쯤이야 장인정신으로 무장한 드워프에게 사실 그렇게 힘든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건 일반적인 환경에서 작업할 때였다.
신룡이 눈을 부릅뜨고 지켜보는 와중에 보통 강철도 아닌 그보다 몇십 배는 다루기 힘든 미스릴을 가지고 인생 역작을 만들어야 한다는 부담감을 가지고 상태에서 작업해야 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쉬고 있어도 기력이 쑥쑥 빠져나가는 최악의 작업 환경.
어쨌든 검은 망치 부족 모두 잘 버텨 냈다.
기쁨의 환호성이라도 지르고 싶었지만 그럴 힘도 없었고 힘이 있더라도 신룡이라는 존재감에 모두 숨을 죽이고 있었다.
그때 묘한 소리가 적막을 깼다.
꼬르르르르르르륵.
아주 친근한 소리였다.
꼬르르르르륵.
꼬륵. 꼬르르륵.
꾸르르르르르륵.
마치 전염병처럼 꼬르륵 소리가 여기저기서 울려 퍼졌다.
“다들 보름 동안 물만 먹고 망치만 휘둘렀으니. 쯧쯧.”
절대적인 회복 마법의 힘으로 배고픔을 지웠다고 하지만.
‘링거 맞는다고 밥 안 먹어도 되는 건 아니지!’
보름 만에 몰라보게 핼쑥해진 솔딘이 눈치를 살피며 경호에게 힘겹게 다가왔다.
“용사님. 정말 송구하지만 먹을 게 있을까요?”
“아. 그게…….”
경호가 솔딘의 말에 생각에 잠겼다.
‘이건 사실 내 책임도 있다.’
말려도 진작에 말렸어야 했다.
하지만 그 역시 빨리 보물을 만들고 자신의 조리도구도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으로 크게 신경 쓰지 않은 책임도 있었다.
“제가 고기 스프라도 끓일 테니 그동안 다들 좀 눈이라도 붙이는 게 어떻겠습니까?”
마수 고기 요리는 압력솥 같은 게 없는 상황에서 오래 끓여야 부드럽게 먹을 수 있기에 시간이 걸렸다.
“용사님. 너무 배고파서 잠이 안 옵니다.”
“아…….”
원래 너무 배고프면 잠도 안 오는 법이다.
“알겠어요. 솔딘. 그럼. 최대한 빨리 만들 수 있는 요리를 찾아보죠.”
백여 명의 드워프가 배부르게 먹을 수 있을 정도로 양이 많아야 하고 빨리 만들 수 있는 요리.
아무리 생각해도 그런 요리가 있을 리 없었다.
“혹시 솔딘 압력솥을 만들 순 없겠죠?”
“무슨 솥이요?”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하지?
“그러니까 내부 압력이 높은 냄비요.”
“내부 압력이 높은 냄비라. 혹시 용사님의 세상에 있던 냄비입니까?”
경호가 고개를 끄덕이자.
“내부 압력을 높여 고온을 내는 도구인가 보군요. 혹시 구조가 어떻게 되는지 아십니까?”
경호도 솔딘이 말한 수준밖에 알지 못했다.
아니 솔딘의 머릿속에 더 정확하고 자세한 이론이 들어 있을 확률이 높았다.
“아니 대충 그렇게만 알고 있어요.”
“그렇군요. 뭐. 그래도 몇 번 만들어 보면 가능할 거 같지만 당장은 어렵습니다.”
거기다 산처럼 쌓여있던 미스릴이 모두 떨어진 상태.
다시 광석을 제련해서 미스릴 괴를 뽑아내 만들려면 압력솥이 아니라 그냥 냄비라 해도 한참 걸릴 듯했다.
어?
화로 주변을 보던 경호의 눈에 땅을 파고 다질 때 쓰던 삽이 눈에 들어왔다.
미스릴도 녹이는 화로와 크고 단단한 삽.
“이거 잘하면 되겠는데?”
어쩌면 가능할 거 같았다.
고민할 시간도 없었다.
“리온! 아니. 미르! 빨리!”
경호는 이 사건의 원흉인 미르를 불렀다.
-어? 왜?
“가면서 말할게! 빨리!”
경호가 미르의 머리 위에 올라타고는 외쳤다.
“솔딘! 금방 올 테니까 조금만 기다려요! 내가 끝내주는 요리 해 줄게요!”
***
경호가 빠르게 검을 휘둘렀다.
스가악.
새하얀 검기에 바위 위에 놓인 거대한 뿔돼지가 마법처럼 반으로 갈라졌다.
처음에는 고기 손질에 반나절이 걸렸던 경호였지만 이제는 순식간이었다.
내장을 빼내고 피를 뽑아냈다.
마력이나 염력을 이용하기에 그 시간이 몇 배나 빨랐다.
뿔돼지 중에서도 대장인 녀석이었기에 덩치가 코뿔소만큼 컸다.
경호는 돼지고기 중 가장 맛있는 삼겹살 부위를 잘라 냈다.
덩치가 워낙 컸기에 그렇게 해도 어마어마한 크기였다.
다들 저걸 어떻게 하나 지켜보고 있는 상황에서 경호가 굽기 좋게 삼겹살을 잘랐다.
“자! 모두 저를 보고 따라 하세요!”
경호가 바닥에 놓인 삽을 집어 툭툭 털어 내고는 바위 위에 가지런히 잘라 놓은 삼겹살을 그 위에 얹었다.
“아니! 요, 용사님! 뭐 하시는 겁니까! 왜 삽에다 아깝게 손질한 고기를!”
그런 경호의 모습에 지켜보던 솔딘이 소리쳤다.
“아. 잠시만요.”
경호가 삽을 화로에 쑥하고 집어넣었다.
해괴한 짓에 모두가 놀라고 있을 때.
“하나! 둘! 셋!”
경호가 크게 숫자를 세더니 삽을 빼냈다.
“어! 어어엇!”
주변에서 지켜보던 이들의 탄성이 터져 나왔다.
놀랍게도 맛있는 냄새가 물씬 풍기는 맛깔스러운 삼겹살 구이가 완성되어 나온 것이었다.
‘성공이다!’
미스릴도 녹이는 화로이기에 내심 고기가 탈까 걱정했는데 사냥하고 고기 손질할 동안 마력이 끊어진 화로가 식어 딱 맛있게 익었다.
“솔딘. 한번 맛보세요.”
다가온 솔딘은 삽 위에서 아직도 지글지글 끓고 있는 삼겹살을 보며 군침을 삼켰다.
“용사님. 이건 먹어 보지 않아도 맛을 알 거 같네요.”
굳이 먹어 보지 않아도 눈과 코와 귀가 이미 맛있다고 외치는 중이었다.
“뜨거우니 조심하시고요.”
“뜨거운 건 상관없습니다.”
평생을 불과 함께 살아가는 드워프는 열에 강했기에.
솔딘은 망설임 없이 지글거리는 삼겹살을 손으로 집어 입에 넣었다.
우물우물우물.
삼겹살을 씹던 솔딘의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소리 없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솔딘?”
경호가 눈물의 의미를 몰라 당황하고 있을 때.
삼겹살 한 줄을 말끔하게 먹어 치운 솔딘이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
“용사님. 정말 맛있습니다. 이렇게 맛있는 음식을 얼마 만에 먹어 보는 건지 모르겠네요.”
마계의 침략 속에서 치열하게 살아온 이들이었기에 제대로 된 식사를 언제 했는지도 모를 정도였다.
그건 이곳에 와서도 마찬가지였고.
“입에 맞으셨다니 다행이네요. 그럼. 빨리 줄 서세요! 줄!”
경호가 삼겹살을 썰어 놓은 바위 위에 올라 소리치자 입맛만 다시던 이들이 저마다 삽을 들고 바위 앞으로 몰려들었다.
“3초만 넣었다가 빼면 끝입니다! 고기는 많으니 걱정하지 마시고 줄 서세요!”
삽 위에 뿔돼지 삼겹살을 받아 간 이들이 모두 삼겹살 구이를 먹고는 솔딘처럼 눈물을 흘렸다.
정신없이 몰아치다 이제야 살았다는 사실이 실감 난듯했다.
“너무 맛있어! 너무 맛있다고!”
“기름진 음식을 얼마 만에 먹는 건지 모르겠네.”
“이게 마수 고기라고? 이게?”
“아니 양념도 안 했는데 왜 맛있는 거야?”
“고기가 입에서 녹아! 입에서 사라진다고!”
이렇게 3초 뿔돼지 삼겹살의 전설이 시작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