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004화
대한민국 청년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판타지 소설을 읽기 마련이다.
그 판타지 소설 속에서 회빙환, 천마, 헌터 만큼이나 잘 나오는 소재가 바로 ‘드래곤’이다.
드래곤이 짠! 하면 어리바리한 주인공도 바로 ‘용사’로 바뀐다.
그런데 미르는 왜!
미르는 의식의 세계니 죽음의 무게니 하며 비효율적인 훈련을 시켰다.
그렇기에 사실 지난 며칠 동안 미르를 무시했던 것도 사실이다.
-느껴지느냐?
미르의 손끝에서 새하얀 기운이 뻗어 나와 눈을 반개한 채 정좌하고 있는 경호의 몸에 닿아 있었다.
“네. 느껴집니다.”
-인간의 육체로 낼 수 있는 가장 효율적인 연공법이니 잘 기억하도록.
미르는 경호의 몸을 관찰하고는 신수의 호흡법을 인간이 쓸 수 있도록 바로 바꿔서 알려 줬다.
‘대단하구나.’
경호는 진심이었다.
판타지 소설처럼 짠! 하고 바로 ‘용사’의 힘을 얻지는 못했지만 대단했다.
‘이게 무협지에서 말하는 운기의 경로 같은 거겠지. 찌릿한 느낌이 있긴 하지만 기분 좋은 느낌이다.’
새하얀 기운이 경호의 몸 구석구석을 옮겨 다니며 찍어대기 시작했다.
-순서와 시간을 정확히 기억해야 한다.
‘왼쪽 어깨 2초. 그리고 옆구리 1초. 엉덩이 3초. 다시 어깨로…….’
기운이 머무는 시간이나 순서가 달랐음에도 처음 몇 개는 기억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개수가 두 자리를 넘어가기 시작하자 점점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해 갔다.
‘어? 어어?’
미르의 연공법은 훌륭했지만 경호의 기억력은 그렇지 않았다.
“자, 잠깐만요.”
-왜 그러지?
“이게 몇 개나 되는 거죠?”
-총 81개지.
81개의 위치를 마나의 흐름대로 시간 계산까지 하며 외울 수 있을까?
경호는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졌고.
‘절대 불가! 죽었다 깨나도 불가!’
바로 답을 찾았다.
구구단도 반에서 꼴찌로 외웠던 기억이 생생하기에 확신할 수 있었다.
‘이건 절대 못 외워!’
무협지의 주인공이라면 쓱 한 번 듣기만 해도 심법을 통달하겠지만 자신은 소설 속 주인공이 절대 아니다.
“미르 님. 81개나 되는 경로를 어떻게 외웁니까?”
그것도 연공하다 실수하면 목숨이 왔다 갔다 할 수 있는 일을.
-아니 이걸 못 한다고? 이걸?
미르에게는 81개나 되는 것이 아니라 고작 81개였다.
1+1보다 쉬운 걸 어떻게 하냐고 물어보면 뭐라고 대답해야 할까?
평균 이상의 ‘용’과 평균 이하의 ‘인간’.
타고난 지력의 격이 아예 다른 존재였다.
그렇기에 미르는 경호의 말이 이해되지 않았다.
-인간은 잠재력이 무한하다 들었는데 편차가 심한 모양이군.
혼잣말처럼 작게 중얼거린 말이었지만 그 말이 화살처럼 날아와 경호의 가슴에 박혀 들었다.
-하필이면……. 어후.
하필이면. 하필이면. 하필이면.
계속해서 가슴에 꽂히는 팩트 화살에 경호도 발끈했다.
“한 번에 외우기는 어렵겠지만 몇 번만 하면 외울 수 있을 겁니다.”
자신은 없었지만 경호는 이를 악물고 말했다.
-그래. 그렇게 복잡하지 않으니 몇 번 하면 외우겠지.
처음에는 10개 정도밖에 못 외웠다.
두 번째는 그래도 30개 정도를 외울 수 있었다.
문제는 세 번째부터였다.
혈도의 위치를 외우긴 했는데 마나가 머무는 시간이 꼬이기 시작했다.
그렇게 꼬이기 시작하니 아무리 들어도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았다.
네 번, 다섯 번…….
‘망했다.’
안 되는 거는 안 되는 거다.
매도 먼저 맞는 게 낫다고 했다.
“미르 님. 저기요.”
-이제 다 외웠나?
말투에서 ‘이제야’ 다 외웠냐? 하는 느낌이 아주 강하게 풍겼다.
“죄송해요. 실은 제가 기억력이 좋지…….”
-설마. 에이. 지금 몇 번을 반복해서 짚어 줬는데 그걸 모른다고?
한참이나 그렇게 미르의 한숨 소리만 계속 흘러나왔다.
-그래. 그럼 이렇게 하자.
“네엣?”
-머리는 기억하지 못해도 육체는 기억할 테지.
“뭐라고요?”
-원래 최고의 교육은 주입식 교육이니까.
아니! 주입식 교육의 병폐가 얼마나 심한데 그런 소릴 하십니까?
미르의 눈빛이 심상치 않았다.
아니 뭘 주입하려고요?
육체에 어떻게 기억하게 할지 모르겠지만 무조건 하기 싫었다.
“그냥 한 번만 더 해 보…….”
휘이익!
미르가 어디서 꺼냈는지 알 수 없는 밧줄로 경호의 몸을 묶었다.
“미르 님. 이게 뭐 하는 겁니까?”
-별거는 아니고 몸부림치면 위험할 수도 있어서. 그게 ‘구속의 밧줄’이라는 건데 굉장히 튼튼해서 걱정 안 해도 될 거야.
그게 왜 별거가 아닌 건데!
거기다 구속의 밧줄은 또 뭐고?
아니 굉장히 튼튼해서 더 걱정이라고!
“미르 님. 그러니까 왜 묶으신 건데요?”
하지만 미르는 이미 경호의 말 따위엔 관심이 없었다.
-서서히 높이면 될 거야. 마나가 폭주할 수 있지만. 정령 몇 불러 회복하면서 하면 될 거 같기도 하고. 쇼크 증상도 조심해야 할 텐데.
계속해서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미르와 그것을 흔들리는 눈으로 바라보는 경호.
“마나폭주요? 회복하면서 하면 된다고요? 쇼크 증상이요?”
미르가 드디어 혼잣말을 멈추고 경호를 쳐다보며 말했다.
-아. 혼잣말이 제법 컸던 모양이군.
분명 들으라고 한 소리 같았는데.
“아니 그러니까 마나코어를 강제로 만든다고요? 강제로? 마나를 주입해서요?”
-보통이라면 불가능하지만 내가 조금 힘을 쓴다면 불가능한 일은…….
“저기 저번에 보통 재능이 있는 인간도 마나코어를 만들고 연공하려면 며칠이 걸린다고 하지 않으셨나요?”
-그렇지. 그러니까 내가 조금 힘을 쓰면 한 시간이면 가능하다는 소리지.
몸을 바로 세우고 고개를 치켜세우는 미르의 모습을 보니 칭찬을 바란 듯하지만 경호는 지금 칭찬할 기분이 아니었다.
“그거 아프겠죠?”
-조금. 참을 만할 거야.
조금인데 밧줄로 꽁꽁 묶었을 리가.
재능이 일반인 수준도 되지 않는 자신에게 며칠이 걸리는 것을 한 시간 만에 하겠다고?
“조금이요?”
-크흠. 성장에는 고통이 따르기 마련이지. 하지만 그 정도도 견디지 못한다면 악마를 상대할 수 없는 법.
‘미르 님. 모르시는 모양인데 저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악마를 상대하고 싶었던 적이 없는데요. 지금도.’
미르를 향해 악을 쓰며 화를 내고 싶었지만 이미 그를 충분히 겪은 후였기에 그저 한숨만 지었다.
‘설마 죽기야 하겠냐. 죽기야 하겠어.’
경호는 속으로 설마 설마 했지만.
연공을 강제로 기억시키는 작업은 끔찍하게 아팠다.
“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경호가 비명을 질렀다.
‘죽는 게 나아! 죽는 게 낫다고!’
경호는 아랫배를 불로 지지는 듯한 고통에 비명을 질렀다.
‘단전’ 또는 ‘마나코어’라 불리는 공간을 활성화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우선 마나를 느껴야 하고, 받아들여야 하며, 담아야 했다.
그것도 몸에 기억될 수준까지 반복해서.
세상 어디에도 마나가 흐르지 않는 곳이 없지만 보통의 인간은 그것을 느끼지도 못한 채 살다 죽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런 것을 강제로 느끼게 한다고 하니 아플 수밖에 없었다.
아니 안 아픈 게 이상한 거였다.
아랫배가 찢어지는 고통에 경호가 미친 듯 몸부림을 쳤지만 이미 구속의 밧줄로 꽁꽁 묶인 상태였기에 소용이 없었다.
끄르르륵.
기절이라도 할라치면.
옆에 선 운디네가 회복을 시켰다.
그리고 다시 밀려드는 마나.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미르가 흘려주는 마나는 ‘뇌전’의 힘까지 담겨 있어 그 고통이 더했다.
머리가 삐쭉 서고 전신에서 김이 폴폴 풍겼다.
그렇게 생사의 기로에 서서 한참을 더 전기고문 당한 끝에.
-마나코어가 완성됐구나.
끄르르르르륵.
이미 눈이 뒤집힌 경호에게 운디네가 손을 뻗었다.
“아, 아빠! 아빠!”
어릴 적 돌아가신 아빠가 멀리서 손을 흔드는 모습을 보고 온 경호였다.
“헉! 여, 여긴…….”
-경호. 마나코어가 완성됐다.
“드, 드디어!”
-연공법은 이제 확실히 기억했겠지?
“물론 입니다!”
이제 해방이라는 생각에 경호의 얼굴에 생기가 돌았다.
“미르 님. 이왕이면 만세라도 한번 외치게 이것 좀 풀어 주시지요.”
-이왕 할 거면 오늘 한 번에 하는 게 낫지 않겠느냐.
오늘 한 번에 뭘 하는데요?
“네엣?”
오늘 저 아빠 만나고 왔는데요?
-이제 삼단전 중 첫 단계를 열었구나.
“미르 님. 그러니까 ‘삼단전’의 ‘삼’이 ‘3. 셋. Three.’의 삼이 맞는 거죠?
그럼. 아직 두 단계가 남았다는 건데?
-처음에 이야기했을 텐데.
분명 그랬지만 한 시간 가까이 전기고문을 당한 터라 머릿속이 다 타 버린 후였다.
-인간에게는 상중하 단전이 존재하지. 모두 연공까지 하진 못해도 활성화는 시켜야 앞으로 제대로 된 수련을 할 수 있다.
“아프겠죠?”
-그럼. 시작하지.
아프냐고 물어봤잖아요!
뇌전을 품은 마나가 심장을 향해 날아왔다.
커어어어어억!
처음과 달리 비명도 지르지 못했다.
가슴이 터지는 듯한 극통과 함께 그대로 기절했다.
뇌전의 기운에 심정지까지 동시에 온 상황.
운디네가 서둘러 정령력을 불어넣었지만 경호는 쉽게 눈을 뜨지 못했다.
-어. 어어.
예상치 못한 상황에 미르까지 당황했다.
“푸하!”
그때 경호가 숨을 토해 내며 눈을 부릅떴다.
아빠가 강하게 등을 떠밀지 않았으면 정말 삼도천을 건널 뻔했다.
‘아빠! 그냥 손잡고 천국 가서 살자고 했잖아요!’
계속되는 전기고문에 삶의 의지가 점점 약해지는 중인 경호였다.
-정신 차리고 받아들이거라.
받아 버리고 싶다! 저 미르 새끼! 진짜 받아 버리고 싶다!
으드득.
미르를 노려보며 경호가 이를 갈았지만.
미르는 아랑곳하지 않고 마나를 날려 경호의 가슴에 꽂아 넣었다.
커어어어어억.
역시나 다시 기절과 함께 심정지.
그렇게 경호는 몇 번의 삶과 죽음을 왔다 갔다 하고 나서야 심장, 중단전을 활성화할 수 있었다.
“그만. 그만. 그만요.”
-이제 마지막이다.
“그건 내일 할게요! 내일 하면 되잖아요! 저 진짜 죽어요! 저 죽는다고요!”
실험실의 냉동 개구리도 아니고 죽었다 살았다를 몇 번이나 반복한 상태.
이제 더 하면 정말 살아나지 못할 거 같은 기분이었다.
-한 번에 뚫지 않으면 내일 다시 막힐 수도 있는데 괜찮겠나?
기가 막혔다.
“막힌다고요?”
-강제로 활성화했기에 동시에 하지 않으면 서서히 굳어져 막혀 버리고 말거든. 스스로 연공을 할 수 없는 상태니까 말이야.
정말 죽을 거 같았다.
그렇다고 내일 이어서 하고 싶진 않았다.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경호가 처절한 비명과 함께 눈물을 쏟으며 말했다.
“흑. 흐흑. 할게요. 한다고요.”
그렇게 경호는 강제로 세 개의 단전을 모두 활성화하고 연공법도 익혔다.
그 후 의식의 세계와 현실을 오가며 마수와 사투를 벌이며 힘을 키웠다.
5년.
시간은 생각보다 빠르게 지나갔고 그 시간이 경호를 강하게 만들었다.
***
리온을 탄 경호가 용아검을 붕붕 휘두르며 소리쳤다.
“오오오! 뿔돼지다! 달려! 리온!”
화염을 다스리는 사도이자 최강의 신수인 리온은 어느새 경호의 자가용으로 전락한 상태였다.
두다다다다다다다다.
바람처럼 달리는 리온.
그 위에서 경호가 손을 뻗었다.
동시에 손에서 날아간 용아검이 제일 앞에서 달리던 뿔돼지의 목덜미에 정확히 꽂혔다.
뀌에에에에에에에에엑. 쿠웅.
돼지 멱따는 소리와 함께 뿔돼지가 쓰러졌다.
“오늘은 뿔돼지 통구이다!”
경호의 외침에 리온이 침을 질질 흘렸다.
신수는 음식을 먹지 않고 신력만으로 살 수 있었지만 지난 5년간 경호의 마수요리에 모두가 푹 빠진 상태였다.
“자아. 그럼. 가자!”
리온이 커다란 뿔돼지를 입에 물고 경호의 주방이 있는 곳으로 서둘러 움직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