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6화
경호가 황금빛 기운이 뻗어 나오는 구슬을 옆구리에 끼고 하늘에서 천천히 내려왔다.
“저건 뭐지?”
하늘을 보며 기도하고 있던 지숙은 그런 경호를 보며 중얼거렸다.
설마 아들일 거라는 생각은 하지 못하고 있었다.
‘속보’ 방송을 통해 각국의 마왕이 사라졌다는 것을 모두가 들었지만 경호와 눈물의 작별을 고한지 삼십 분도 채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다.
황금빛을 뿌리는 존재가 점점 더 가까워졌다.
“어어! 아. 아들?”
지숙이 경호의 무사 귀환을 바라면서 바치는 기도가 채 끝나지도 않았는데….
“엄마. 나 돌아왔어.”
경호가 무사 귀환을 해 버렸다.
“야! 너 뭐야!”
경호가 가고 나서 한바탕 크게 울었는지 눈이 퉁퉁 불어 있는 다현이 경호를 향해 달려왔다.
퍼억!
“커윽!”
마왕 넷을 죽일 때도 타격 한 번 입지 않았던 경호가 다현의 주먹을 맞고 신음을 뱉었다.
물론 진짜로 아프진 않았다.
퍽! 퍽! 퍼억!
다만 주먹에 실린 힘보다 주먹에 실린 감정 때문에 아팠다.
걱정하는 다현의 마음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그런 주먹질이었다.
윽윽거리며 신음을 내면서도 경호는 밝게 웃었다.
“다현이 너 우는 거야. 웃는 거야. 한 가지만 하면서 때려! 맞아 죽기 전에 무서워 죽겠어!”
큰 눈에는 눈물이 가득 고여 있으면서 입은 또 웃고 있는 다현을 보며 경호가 피식거리며 말했다.
“뭐래! 그나저나 마왕은? 마왕은 어쩌고 내려왔어?”
“다 잡고 왔지.”
“뭐라고!”
“이게 그놈들이 남긴 마석 같은 거야.”
경호가 옆구리에 낀 구슬을 보이며 말하자 질문한 다현은 물론 옆에 있던 지숙과 성원, 흰둥이와 운애, 땅개까지 모두가 입을 쩌억 벌렸다.
“뭐? 마왕을 다 잡았다고? 넷 다?”
마왕의 강함을 그 누구보다 잘 아는 다현이었기에 지금 상황이 더더욱 이해되지 않았다.
레비아탄만 하더라도 몸서리치게 강했고 다른 마왕들도 분명 그만큼 강했을 터였다.
경호가 신의 그릇인가 뭔가 하면서 강해진 건 알겠지만 하늘로 쓩하고 올라가서는 얼마 지나지 않아서 황금 구슬 두 개를 들고 와서는 다 잡았다고 하니 그저 어안이 벙벙할 따름이었다.
경호는 그런 이들을 차근차근 설명해서 이해시킬 시간도, 방법도 없었다.
지금쯤 마신은 분명 마왕의 죽음을 알아챘을 것이고 그렇다면 또 무슨 수작을 부릴지 알 수 없었다.
자신도 ‘신’의 뜻을 알지는 못하기에.
새로운 마왕을 만들 수도 있었고 미친 척하고 마계를 통째로 지구와 연결할 수도 있었다.
희박한 가능성이긴 하지만 마신이 강림하여 자신을 노릴 수도 있었다.
그전에 빨리 마왕의 암흑마기를 응축시킨 이 황금 구슬을 흡수해서 힘을 키워 마신과 싸울 준비를 해야 했다.
“흰둥아. 지금부터 마왕의 기운을 흡수할 거니까 결계를 쳐 줘. 혹시나 기운이 외부로 흘러 나가면 마왕의 힘에 사람들이 오염돼서 폭주할 수도 있으니까.”
흰둥이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경호 님이 직접 치는 결계가 제가 치는 결계보다 훨씬 강할 텐데요. 직접 치시는 게 낫지 않을까요?
“아니 모든 힘….”
흰둥이의 질문에 대답하던 경호가 전음으로 바꿔 말을 이었다.
-아니 모든 힘을 다해서 흡수해야 해. 마신이 뭔 짓을 할지도 모르니까. 최대한 빨리 흡수해서 마신 잡으러 갈 거야. 그러니까 부탁할게. 그리고 우리 엄마 좀 재워 줘. 걱정하지 않게 말이야. 알았지?
-정말 마신과 싸우….
흰둥이가 다른 방법이 없다는 것을 알고는 뒷말을 삼켰다.
-알겠습니다! 경호 님!
흰둥이가 앞발로 경례하며 대답했다.
“엄마. 나 잠시만 있다 나올게. 알았지? 이번에는 십 분도 안 걸릴 거야.”
“그래. 아들 장하다! 장해! 네가 지구를 구했구나.”
지숙이 고개를 끄덕이며 뒤로 물러서자 흰둥이가 곧장 경호 주변으로 강력한 결계를 쳤다.
투명한 결계에 뇌전이 일더니 곧 새하얀 빛으로 감싸였다.
***
-이거 생각보다 훨씬 더 대단한 그릇이었군.
루시퍼를 가볍게 죽인 것까지는 충분히 예상했던 수준이었다.
하지만 마몬과 사탄, 아스모데우스가 그리도 쉽게 죽을지 예상하지 못한 부분이었다.
마신은 손해를 좀 보더라도 지금 내려가 신의 그릇을 취할 것인지 아니면 암흑마기를 흡수하다 문제가 생기면 내려가 신의 그릇을 취할 것인지 고민했다.
-암흑마기를 흡수하다 폭주해 지구를 멸망시키면 그때 내려가는 게 좋겠군.
암흑마기를 흡수하기 위해 결계 안으로 들어간 경호를 본 마신은 그의 폭주를 확신했다.
신의 그릇이라고 할지라도 신력과 마력, 정령력, 용력이 더해져 만들어진 그릇이었다.
마왕의 암흑마기.
그것도 자신의 근원인 진정한 암흑마기였다.
그런 기운을 아무리 ‘신의 그릇’이라고 해도 담아낼 수 있을 리 없었다.
그렇게 신의 그릇이 폭주를 일으키면 지구는 빠르게 파괴될 것이고 그렇게 암흑마기가 흐르는 곳으로 변한 지구에 힘의 제약 없이 강림할 수 있을 터였다.
-그럼. 어쩌나 한 번 볼까?
마신은 말 그대로 신이었다.
전지전능한 존재.
아무리 레벨을 높인 흰둥이의 결계라 하더라도 마신은 그것을 뚫어내고 경호의 행동을 모두 지켜볼 수 있었다.
-폭주해서 엄마와 친구를 죽이는 모습도 꽤 볼만하겠군.
경호를 지켜보는 마신의 얼굴에 미소가 피어올랐다.
***
경호는 양손에 들린 황금 구슬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후우. 우선은 작은 거부터 흡수해 볼까?”
사실 암흑마기는 강력한 기운이긴 이전에 독이 든 보약 같은 존재였다.
독만 잘 제거한다면 몸에 좋은 약이지만 잘못하면 오히려 몸을 해칠 수 있는 그런 기운.
터억.
경호는 우선 작은 황금 구슬에 손을 얹고는 원기를 일으켰다.
짜자작!
구슬에 금이 가며 루시퍼의 암흑마기가 슬금슬금 흘러나왔다.
암흑마기는 기본적으로 스스로는 존재하지 못하는 힘이기에 숙주를 만들기 위해 움직였다.
스르르륵.
경호의 손을 타고 전신을 감싸던 암흑마기가 피부에 흡수되기 시작했다.
“이거 엄청 욱신거리는구만.”
기본적으로 파괴, 부패, 억제의 힘을 가진 기운이기에 경호가 품고 있는 원기와는 어울리지 않았다.
특히나 마왕의 암흑마기라 그런 성향이 더 강했다.
그렇기에 마신도 흡수하지 못하고 폭주할 거라 확신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경호는 마신의 확신과 달리 폭주를 걱정하지 않았다.
바로 탐욕스러운 가짜 ‘용력’이 원기 안에 자리하고 있었으니까.
‘그래. 잘한다. 역시 아주 게걸스럽다니까!’
원기를 이룬 기운 중 가장 큰 지분을 가진 용력이 몸 안에 침투한 암흑마기를 보자마자 움직였다.
암흑마기와 마도공학의 끔찍한 혼종이 변이를 거듭해 만들어진 용력의 본체가 암흑마기이기에 마신의 예상과 달리 마왕의 암흑마기도 소화해 낼 수 있었다.
암흑마기를 먹어 치우며 내부의 독기를 곧장 태워 버리기까지 했다.
후우우우우우.
경호가 길게 숨을 내뱉자 짙은 녹색 연기가 입을 통해 흘러나왔다.
암흑마기 안에 담겨 있던 독기를 태우고 나온 그을음 같은 것이었다.
십 분.
엄청나게 짧은 시간 동안 루시퍼의 암흑마기를 모조리 먹어 치운 것이었다.
그리고 원기 역시 달라져 있었다.
“우와. 이 힘은 정말 계속 진화하는구나.”
그것은 진화(進化)라고 불러도 이상하지 않았다.
단순한 기운을 뛰어넘어선지 오래였다.
무기에 원기를 불어넣으면 스스로 살아 움직였고 몸 안에서 끊임없이 움직이며 부족하고 다친 곳을 알아서 찾아 채우고 치료했다.
그런 원기가 마왕의 암흑마기를 흡수하더니 조금 부족하다고 생각했던 부분이 엄청나게 늘어 있었다.
바로 날카로운 살기와 파괴적인 기운이었다.
물론 그전의 원기도 강하고 단단한 느낌을 풍겼긴 했었지만 지금은 기운 자체에 살기가 흐르는 것이 또 완전히 다르게 변해 있었다.
“생각보다 훨씬 좋은데….”
마신을 상대하려면 이 정도 기운은 담겨 있어야 했다.
경호는 서둘러 더 커다란 구슬에도 손을 얹었다.
짜자자자작!
이번에도 구슬에 금이 가며 아까보다 훨씬 거대한 암흑마기가 슬금슬금 흘러나왔다.
“후우. 자아. 그럼. 또 흡수해 볼까.”
***
마신은 눈을 부릅떴다.
-이, 이게 도대체!
전지전능.
말 그대로 모든 것을 알고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신이었다.
하지만 경호에 대한 것은 계속해서 틀리고 있었다.
이번에도 이렇게 쉽게 루시퍼의 암흑마기를 흡수할지 상상도 하지 못했다.
마신은 화가 났다.
자신이 틀렸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싫었고.
그래서 자꾸 자신을 틀리게 만드는 경호라는 인간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당장 가서 경호의 영혼을 지우고 신의 그릇을 차지하고 싶은 마음이었지만.
마계 너머에 있는 자신이 지구에 강림하기 위해서 쏟아부어야 할 암흑마기의 양이 너무나 컸다.
되려 잘못하면 신의 그릇에게 자신의 기운을 뺏길 수도 있었다.
그렇기에 폭주하면서 쏟아져 나올 암흑마기를 이용할 생각이었던 것이었는데.
경호가 암흑마기를 흡수하는 모습을 보니 폭주 가능성이 전혀 없어 보였다.
그렇다면 더 흡수해 강해지기 전에 움직여야 했다.
-당장 움직여야겠군.
마계 너머에서 경호를 지켜보던 마신이 드디어 움직이기 시작했다.
***
경호가 결계 안에서 커다란 황금 구슬을 흡수하고 있을 때였다.
“어! 어어! 저거 뭐야!”
밖에서 경호를 기다리고 있던 다현이 갑자기 하늘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마수들이 날아오르고 있었다.
대부분이 하수구에 사는 하급 마수들이었다.
수백, 수천, 수만의 마수가 새까맣게 줄지어 하늘로 날아가는 광경에 다들 눈만 껌뻑이며 바라보고 있었다.
단순하게 이곳에서만 일어난 일이 아니었다.
전 세계 곳곳에서 마수와 아이템이 하늘로 솟구쳐 대한민국 상공으로 모이고 있다는 뉴스 속보가 떴다.
수백만의 마수가 동서남북 사방팔방에서 끝도 없이 모여들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하늘에 모인 마수들로 해가 가려져 밤처럼 어두컴컴해졌다.
“이게 도대체 뭐야?”
다현이 놀라 중얼거릴 때.
콰드드드득! 콰드드드드드득!
마수가 마치 믹서기에 갈리는 것처럼 통째로 으깨지기 시작했다.
“이런 미친!”
마수라고 하지만 수백만의 살아 움직이는 존재가 생으로 으깨지는 장면은 정말로 끔찍했다.
그렇게 으깨진 마수에서 마기가 흘러나와 뭉치기 시작하더니 정말 엄청나게 거대한 마법진이 하늘에 새겨지기 시작했다.
마법진의 크기가 워낙 커서 한눈에 다 들어오지 않을 정도였다.
다들 ‘또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거지?’ 하며 웅성거릴 때.
흰둥이는 그것이 어떤 마법진인지 파악할 수 있었다.
덜덜덜덜덜덜.
다현은 갑자기 덜덜 떨기 시작하는 흰둥이를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수호신님. 왜 그래요? 무슨 일인데 그렇게 떨어요?”
다현의 물음에 흰둥이가 두렵다는 듯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마, 마신이 강림할 생각인 거 같아요.
마신? 마신이라고?
분명 경호가 마왕의 힘을 모두 흡수하고 나서 마신을 처리하러 간다고 했었는데.
“경호가 처리하러 간다고 했던 그 마신이요?”
-맞아요. 그 마신이 지금 지구로, 바로 이곳으로 강림하려고 하는 것 같아요.
마왕만 해도 현실감이 없었는데 마신이라니….
이건 정말 산 넘어 산이었다.
결국 거대한 마법진이 완성되고.
그곳에서 끔찍한 마기가 넘실거리기 시작했다.
불쑥.
그리고 갑자기 마법진에서 무언가가 튀어나왔다.
너무 거대해서 한 눈에 무엇인지 파악하기 어려운 뭔가 날카로운 칼날 같은 것이었다.
“저, 저거 손이잖아! 거대한 칼날이 손톱이고!”
마신의 손에서 뿜어져 나오는 강렬한 기운에 다현은 전신이 뻣뻣해지는 것을 느꼈다.
이제 겨우 마법진에서 손 하나 빠져나온 것에 불과했는데도 그 기운에 제대로 하늘을 올려다보기도 어려웠다.
그때였다.
“와! 정말 더럽게 크네!”
어느새 나타난 경호가 하늘을 올려다보며 중얼거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