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3화
마신의 명령으로 레비아탄이 바로 지구를 향했고 마계에 남아 있던 마왕의 시선도 그런 레비아탄을 쫓았다.
처음에는 지켜보는 다른 마왕들이 감탄할 정도의 행보를 보였다.
최초의 마수이자 마수의 왕답게 파괴적이고 거침이 없는 모습.
몇 시간 만에 천만이 넘는 대도시가 박살이 났다.
그것도 그냥 때려 부순 것이 아닌 인간을 먹어치워 마수로 변화시키면서….
북경을 향하던 그때 갑자기 레비아탄이 방향을 틀었다.
지켜보던 마왕들 역시 세계수의 등장을 눈치채며 달아올랐다.
-역시 세계수가 있었어! 저 멍청한 놈이 공을 모두 차지하게 둘 순 없는데!
사탄이 엉덩이를 들썩이며 당장이라도 지구를 향할 듯 말하자.
-마신께서 기다리라 한 것을 잊었나? 공(功)에 눈이 멀어 죽고 싶은 것이라면 말리지 않겠다.
마몬이 사악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크윽. 저 멍청이가 세계수를 없애는 꼴을 지켜봐야 하다니.
세계수를 처리하는 일은 지구 침략에 있어 가장 중요한 일 중 하나였다.
그런 공로를 뺏겨야 한다고 생각하니 배가 너무 아팠다.
하지만 마신의 명령은 절대적인 것이었기에 속 타는 심정으로 그런 레비아탄의 활약을 지켜봤다.
그렇게 서해를 건너 인천을 지나 서울 중심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그곳엔 세계수뿐 아니라 죽었다고 알려진 용사와 수호신이 있었다.
-역시나 용사와 수호신도 살아 있었군.
멍청한 모락스가 세계수를 태워 없앨 때 너무 쉽다는 느낌을 받았기에 조작된 것이 아닐까 계속 의심하던 상황이었다.
-레비아탄 놈도 부하인 모락스처럼 멍청한 놈이니 잘 지켜보도록 하세. 세상일은 모르는 거니까 말이야.
모두 같은 마음으로 레비아탄이 죽어 버리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속으로 용사와 수호신을 응원했다.
하지만 모두의 마음과 달리 용사와 수호신은 너무 무기력하게 레비아탄에게 밀리더니 결국 세계수에 처박혀 같이 죽을 위기를 맞았다.
모두가 탄식을 뱉어 낸 그 순간.
-어?
세계수의 가지가 벌어지고 황금빛이 번쩍이더니 레비아탄의 양손이 날아갔다.
그것은 거대한 황금빛 새였다.
마왕인 이들도 처음 보는 신수였지만 한 가지는 알 수 있었다.
레비아탄이 이기지 못할 거라는 거.
와그작.
역시 모두의 예측대로 레비아탄은 그 황금 새에게 머리가 뜯겨 먹혀 버렸다.
그리고 동시에 마왕이 지켜보던 영상이 점점 흐려지더니 지구와의 연결이 끊어졌다.
-허. 이것 참.
-이게 도대체….
한마음, 한뜻으로 레비아탄이 죽어 버리길 응원했지만 정말로 그렇게 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마왕.
마계의 왕이었다.
아무리 방심하던 순간이라고 해도 마계의 절대자 중 하나인 레비아탄이 죽을 줄이야.
정체를 알 수 없는 황금 새는 생각 이상으로 강했다.
자신들이라고 해도 쉽게 승부를 장담하기 힘들 정도로 말이다.
-모두 들어라!
그렇게 레비아탄의 황당한 죽음에 당황하고 있는 마왕들의 귓가에 마신의 음성이 들렸다.
당황한 표정을 지우고 모두 긴장한 채 마신의 명령을 기다렸다.
-지금 당장 지구로 가 인간을 모두 죽여라!
넷 모두 지구로 가서 인간을 모두 죽이라고? 아니 그게 도대체 무슨….
-네엣?
레비아탄의 죽음보다 더 황당한 명령에 사탄이 자신도 모르게 ‘네엣?’이라는 멍청한 실수를 했다.
그와 동시에.
후우우우우우우우우웅!
사탄의 주변으로 갑자기 암흑마기가 피어오르더니 그의 목을 감싸 졸랐다.
커억! 컥!
-지금 당장 지구로 가 인간을 모두 죽여라! 알겠느냐?
사탄이 암흑마기에 졸린 목을 필사적으로 끄덕였다.
그러자 사탄의 목에 감긴 암흑마기가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쓸모없는 것들! 서둘러라!
마신의 분노에 서두르고 있긴 했지만 다들 어리둥절한 상태였다.
갑자기 마신의 명령으로 레비아탄이 지구로 내려간 것도 조금 빠른 감이 있었다.
마왕이 제대로 힘을 쓰기 위해서는 마기의 농도가 더 높아야 했고 그런 면에서 세계수를 처리한다는 명목이 있다고 하더라도 악마군단을 먼저 보내야 맞는 상황이었다.
거기다 이번에는 마왕 모두 지구로 가란다.
그것도 가서 지구를 마계화하는 것도 아니고 인간을 모두 죽이란다.
인간을 구해 주민을 만들고 식량을 삼기 위해서 지구를 침략한 것인데 죽이라니?
도대체 어느 장단에 맞춰 춤을 춰야 한단 말인가!
마왕들은 도무지 마신의 뜻을 파악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 뜻을 파악하지 못한다고 거역할 수는 없었다.
‘계급이 깡패네! 계급이 깡패야!’
사탄이 고통이 남아 있는 목을 쓱쓱 쓸며 미간을 찌푸렸다.
까라면 까야지 마왕이라고 별수 없었다.
-그럼. 나는 미국으로 가겠다.
사탄이 가장 먼저 장소를 정했다.
-나는 유럽으로 가지.
루시퍼 역시 생각해 놓은 장소를 말했다.
-난 더운 곳은 별로라…. 러시아로 가겠다.
-그럼. 난 인도로 가지.
마몬이 러시아, 아스모데우스가 인도로 침략 장소로 정했다.
-그럼. 서두르지.
***
사탄, 루시퍼, 마몬, 아스모데우스.
그렇게 지구에 마왕 넷이 강림했다.
이번에는 레비아탄처럼 잡아먹고 마수를 양산하는 그런 행위도 없었다.
파괴와 죽음.
그들의 행보엔 그 두 가지만 존재했다.
거기다 마왕이 침략한 미국, 프랑스, 러시아, 인도는 최상위 헌터마저 파병으로 빠진 상황.
“진정해! 진정하라고!”
덕분에 ‘마왕전담특별팀’은 난리가 났다.
“당장 뉴욕으로 가야 합니다! 팀장님! 당장이요!”
미국 출신 헌터들이 한목소리를 내자.
“무슨 소리! 프랑스는 유럽의 중심이라 사태가 훨씬 심각해질 겁니다! 원자력발전소도 많다고요!”
프랑스 출신 헌터들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그런 식이면 러시아는 뭐 안 그런지 아나!”
“인도는 중국 다음으로 인구가 많은 곳이라 가장 먼저 가야 합니다!”
러시아나 인도도 다 이유는 있었다.
모두의 말이 틀리지 않았고 단지 선택의 문제였다.
“수호신님과 다현 팀장이 가서 마왕을 처리해 주셔야 합니다!”
문제는 그 어떤 선택을 하더라도 마왕을 처리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다현은 간택을 기다리는 헌터들의 눈빛을 보며 깊은 한숨을 쉬었다.
“마왕을 죽인 것에 대해 솔직히 말할 게 있습니다.”
생각지도 못한 이야기에 웅성거리던 분위기가 조용히 가라앉으며 전체가 다현의 말에 집중했다.
“레비아탄을 죽인 것은 저나 수호신님이 아닙니다.”
엉? 뭐라고?
긴급상황센터 안 회의실 분위기가 갑자기 싸해졌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다현 팀장과 수호신님이 죽이지 않았다뇨?”
“후우. 사실 이렇게 빨리, 또 모든 마왕이 다 넘어오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모든 마왕? 팀장은 마왕이 총 몇 명인지 아십니까?”
마계에 대한 정보는 정말 단편적이었다.
마왕이 얼마나 강한지 얼마나 있는지 같은 정보는 여기 누구도 들어 본 적 없는 내용이었다.
다현은 말을 계속 이었다.
“마왕은 원래 일곱이었습니다. 하지만 얼마 전 둘이 죽었고. 이번에 하나가 더 죽었죠. 그래서 넷이 남은 상황이었습니다.”
“아니. 그게 무슨…. 그걸 다현 팀장은 어찌 알고 있는 겁니까?”
여기 있는 이들 모두 다현보다 랭킹이 낮은 이는 몇 되지 않았다.
그만큼 고급정보에 밝은 이들이었기에 더욱 다현의 말이 믿기 어려웠다.
“혹시 ‘경호’라는 인물에 대해 아시는 분 계신가요?”
174명의 헌터 중 몇몇이 손을 들었다.
“팀장의 어릴 때 친구라던.”
“그래. 식당 주인이라고 하던데.”
경호 역시 나름 유명인사였기에 단편적인 정보라고는 하지만 아는 이들이 꽤 있었다.
“그럼. 그가 10년 전 균열에 빠져서 얼마 전 돌아왔다는 사실도 알고 있나요?”
다현의 물음에 이번에는 두어 명만 손을 들었다.
이런 내용은 관심을 가지고 기사를 찾아봐야 하는 내용이기 때문이었다.
“경호는 사실 10년 전 균열이 아닌 다른 세상, 정령계로 넘어갔습니다.”
갑자기 내용이 판타지 소설의 뻔하디뻔한 회빙환 클리셰로 변했다.
“용사 소환이라는 것을 당한 것이었죠. 그곳에서 마계의 침략을 막기 엄청난 노력을 해야 했고 결국 마왕 둘을 죽이고 침략을 막아 냈죠. 그 후 정령계의 수호신의 도움으로 지구로 귀환했고요.”
믿기지 않는 내용이었지만 이미 세상은 믿기지 않는 이야기가 가득한 이상한 세상이 돼버 린 상태.
어쨌든 희망을 찾았다.
“그럼! 그 ‘경호’라는 사람은 어딨습니까? 아니 그럼 다현 팀장을 대신에 마왕을 죽인 것이 경호라는 사람입니까?”
“우선 ‘마왕을 죽인 것이 경호냐?’라는 질문에 답하자면 그건 아닙니다.”
지금 장난하는 거야?
방금까지 희망을 찾았던 이들의 얼굴이 다시 딱딱하게 굳었다.
“레비아탄을 죽인 것은 신수인 금봉황입니다. 그리고 그 봉황은 경호가 아끼던 신수이고요.”
다현의 이어지는 말에 다시 표정이 풀어지고.
“그러면 경호라는 분과 봉황을 각기 마왕에게 보내고 저희도 둘로 나눠서 다른 곳으로 출발해 시간을 끌면 되지 않습니까!”
다현이 듣기에도 좋은 방법이었다.
하지만 저 좋은 방법을 실행하기 위해서는 ‘꼭’ 필요한 것이 있었다.
바로 ‘경호’와 ‘봉황’.
하지만 둘 중 그 어느 것도 지금 당장 쓸 수 없는 상태였다.
“경호는 세계수 안에서 수련 중이고 봉황 역시 마왕을 죽이고 바로 쓰러져 지금까지 깨어나지 않는 상황이고요.”
다시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팀장. 그래서 그냥 이렇게 지켜보자는 말입니까? 지금 이 순간에도 수도 없이 많은 사람이 죽어 가고 있습니다.”
가 봤자 마왕을 막을 수도 없기에 그저 객기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냥 무시하고 있을 수도 없는 답답한 상황이었다.
다현 역시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깊은 고민에 빠졌다.
그때 회의실 한편에 틀어놓은 TV에서 긴급속보가 흘러나왔다.
-프랑스에서 ‘마왕’으로 추정되는 악마를 상대로 전략 핵무기 사용.
하지만 영상에는 폐허가 된 도시 한 가운데 멀쩡한 모습을 한 루시퍼가 서 있었다.
***
<상태창>
이름:최경호
나이:35
클래스:신의 그릇[???]
레벨:???
특성:[신의 그릇LV4]
카르마:0(중립)
‘신의 그릇’이라는 클래스를 가지고 보니 모든 게 이해됐다.
“주신이라는 양반. 생각보다 더 엉큼한 구석이 있구만.”
우주 만물이 돌아가는 이치는 생각보다 더 단순했다.
개미의 세상과 인간의 세상이 별반 다르지 않았고.
주신이 다스리는 천계와 마신이 다스리는 마계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중 가장 재미있는 것은 주신과 마신의 싸움이었다.
서로 죽고 죽이는 싸움을 계속해 가지만 결국은 빛과 어둠처럼 한쪽이 소멸해도 우주를 관장하는 법칙에 의해 계속 순환하며 끝없이 싸우고 있었다.
그전에는 알 수 없던 것을 이제는 알 수 있었고.
그전에는 할 수 없던 것을 이제는 할 수 있었다.
외부와 모든 것이 단절된 의식의 세계.
그것도 스스로 들어온 경호, 자신의 의식 속이 아닌 세계수의 의식 속이었지만 마왕이 지구에 내려왔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것도 하나가 아닌 넷 모두가.
어떻게 알았는지는 표현하기 어렵지만 그냥 자연스럽게 느껴졌다.
엄청난 수의 사람이 죽어 가는 것이 느껴졌다.
“이러는 이유가 뭘까?”
마왕이, 그것도 나머지 모두가 갑자기 지구로 내려와 말 그대로 ‘멸망’시키려고 했다.
지구를 농장으로, 인간을 가축으로 생각했다면 이런 행동은 말이 안 되는 행동이었다.
그럴 거였으면 애초에 마왕이 다 쓸어버리면 될 일이었다.
-아마도 마신이 신의 그릇을 엿본 모양이군요.
세계수의 말에 경호도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의 존재.
그것을 변수로 두고 생각한다면 이해하기 어려운 지금의 행동도 고개가 끄덕여졌다.
“지구를 구하려고 했는데. 나 때문에 지구가 멸망하게 생겼네.”
인간 모두를 죽여 마왕의 힘을 더욱 키우고 그것을 마신이 모조리 흡수해 마지막으로 자신의 몸을 차지하겠다는 생각.
어차피 농장의 가축으로 천천히 죽느냐. 마신의 영양분으로 바로 죽느냐. 정도의 차이긴 했지만, 경호는 입안이 썼다.
‘신의 그릇’이라는 인간을 초월하는 단계에 올라섰지만, 아직 마음은 인간의 그것이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인간의 영혼이 마왕에게 먹히고 있었고 경호는 그것을 그냥 마왕이 먹게 내버려 두기 싫었다.
“세계수야. 죽은 영혼을 모을 수 있지?”
-모을 수는 있지만 지구 전체에 힘을 쓰기엔 제가 가진 힘이 아직 부족합니다.
부족한 힘이라면 언제든 채워 줄 수 있었다.
1경의 카르마를 흡수한 경호는 이미 반신의 단계를 넘어서고 있었기에.
경호가 세계수에 힘을 불어넣어 주며 말했다.
세계수는 모든 기운을 조화롭게 다루는 존재.
영혼도 생명의 기운으로 볼 수 있기에 마왕에게 죽어 흡수되는 영혼을 끌어올 수도 있었다.
그리고 ‘신의 그릇’이라는 클래스답게 경호는 모든 것을 담을 수 있었다.
“이제부터 죽는 영혼을 내가 모두 담을 수 있게 모아 줘.”
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웅!
경호의 기운을 받은 세계수가 전 세계로 그 힘을 발휘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