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2화
쓰러진 골병이를 지켜보던 다현이 비틀거리며 일어나 다른 이들을 살폈다.
“운애? 땅개? 괜찮아요?”
운애와 땅개는 상태가 좋지 못했지만 다현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였다.
정령의 회복력은 파충류보다 더 좋은 편이기에 괜찮다면 정말 괜찮은 것이었다.
“수호신 님과 울피 님도 괜찮죠?”
-다친 곳은 거의 없으니까 괜찮다.
-그래. 걱정마라.
흰둥이와 울피 역시 상태가 좋지 않았지만, 힘을 많이 써서 그런 거라 문제는 없어 보였다.
다현 역시 마찬가지.
그때 멀리서 달려오는 이들이 보였다.
전방에 매복하고 있던 성원 일행과 파병 헌터들이었다.
“누님! 누님!”
다현을 부르며 달려와 주변을 살폈다.
“뭐 하냐?”
“마왕은요? 아니 여기 이 황금 타조는?”
그을린 세계수에 엉망인 이들의 모습, 거기다 기절해 있는 황금 타조까지.
아무리 둘러봐도 상황이 이해되지 않았다.
하지만 다현도 그런 성원에게 설명으로 이해시키긴 어려웠다.
다만.
“마왕은 죽었다.”
“네엣?!”
세계수가 멀쩡했기에 예상은 했지만, 직접 들어도 이해할 수 없었다.
‘마왕’과 ‘죽음’이라는 두 단어의 조합이 너무 낯설었기 때문이었다.
레비아탄.
그 괴물은 죽일 수 있는 생명체가 아니었다.
그런데 죽었다니?
그리고 사람은 죽으면 이름을 남기고 호랑이는 죽으면 가죽을 남긴다 했더랬다.
호랑이도 가죽을 남기는데 그 거대한 괴물이 아무것도 남기지 않고 죽었다는 게 말이나 되는가?
“정말요?”
가장 먼저 달려온 성원뿐 아니라 다른 이들도 속속 도착하면서 상황을 알고는 다들 놀라는 눈치였다.
“여기 골병이가 먹었어.”
“네엣?!”
마왕이 죽었다는 사실을 들었을 때보다 두 배는 더 놀랐다.
저기 쓰러져 있는 황금 타조가 골병이라고?
그리고 그 골병이가 마왕을 먹었다고?
아니 마왕을 먹어도 되는 거야?
인간형으로 변한 모습은 보지 못했던 성원이기에 아무리 상상해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타조 크기의 골병이가 수십 미터의 마왕을 먹다니?
“하여튼 그랬어.”
어쨌든 마왕은 죽었다.
“우리 딸!”
그때 지숙이 걱정이 한가득한 얼굴로 다현에게 다가왔다.
지숙의 손엔 이미 새하얀 빛이 가득했다.
우우우우우우웅.
지숙이 많이 지쳐 보이는 다현을 꼭 안았다.
번쩍이던 새하얀 빛이 다현을 감쌌다.
“괜찮지?”
“으. 응….”
지숙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지만 다현은 그런 엄마의 모습에 목이 메 제대로 대답을 못 했다.
자신이야 대격변 이후 지금까지 마수와 쭉 싸워 온 최상급 헌터였다.
하지만 엄마는 이제 막 각성을 한 상태로 마수와 싸운 경험도 거의 없었다.
그런데 그런 엄마가 자신을 위로하고 있었다.
“나는 괜찮아. 괜찮아. 엄마.”
진짜 위로받아야 할 사람은 다현이 아니라 지숙 본인이었다.
아들인 경호는 강해지기 위해서 세계수로 들어가 아직 상태를 알 수 없는 상황.
담담한 척하고 있지만 괜찮을 리 없었다.
“엄마도 괜찮지?”
“그럼. 괜찮지. 10년도 기다렸는데 걱정 마라. 엄마. 이 정도에 끄떡도 안 한다.”
지숙이 애써 미소 지었지만, 다현은 그 속에 담긴 슬픔을 절절히 느꼈다.
“그래. 엄마. 지각을 좀 해서 그렇지 안 올 녀석은 아니니까. 우리 같이 기다려.”
“그래. 다현아. 그러자.”
“아! 엄마. 골병이 기억나?”
지숙은 다현의 뜬금없는 물음에 잠시 고개를 갸웃하며 대답했다.
“흰둥이 위에 겁도 없이 올라타고 하던 병아리?”
“맞아. 그 병아리가 세계수 안에서 성장해 나와서 마왕을 죽였어.”
정말 말도 안 되는 이야기였지만 이미 더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너무나 많이 접했기에 이제 그러려니 할 뿐이었다.
“엄마가 치료 좀 해 줘. 크게 다친 거 같진 않은데 기절한 상태라서.”
골병이가 쓰러진 것은 마왕과 싸워서가 아닌 사신의 힘을 받아들이고 사용하는 과정에서 받은 충격 때문이었다.
어쨌거나 치료가 필요한 상황.
“우리 경호도 빨리 나와야 할 텐데.”
지숙이 쓰러져 있는 골병이를 치료하며 씁쓸한 표정을 지었고 그 옆에 있던 다현도 세계수를 쳐다보며 낮게 한숨지었다.
“야. 빨리 나와. 이제 좀 그만 기다리게 하라고!”
***
경호는 여전히 의식의 세계 속에서 가만히 누워 있었다.
평온해 보이는 모습과 달리 넘쳐나는 카르마에 미쳐 날뛰는 용력으로 인해 경호의 내부는 완전 전쟁터였다.
‘용력’은 살아 있는 기운.
특히나 경호의 몸 안에 만들어진 용력은 변종 중의 변종이었다.
신력에서 파생된 기운이 용력인데 경호의 몸 안에 있는 용력은 반대로 암흑 마기에서 파생된 정반대의 기운이었다.
안 그래도 거칠고 난폭한 용력이 그로 인해 더 거칠고 난폭했다.
그게 무조건 나쁘다는 뜻은 아니었다.
거칠고 난폭한 힘을 견뎌내기만 한다면 더 강해질 수 있다는 이야기였으니까.
하지만 그것을 견뎌내는 게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경호는 1경이 넘는 카르마를 마구잡이로 밀어 넣고 있음에도 비교적 잘 버티고 있었다.
전투 감각도, 육체적 능력도, 그렇다고 영리하지도 않은 경호에게 한 가지 엄청난 재능이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그릇의 자질이었다.
인간은 주신이 자신의 모습을 본따 지은 창조물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인간이 노오오오오오력 한다고 해서 주신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노오오오오오력과 함께 아주 특별한 상황이 겹친다면 인간도 주신의 힘을 담을 수 있는 그릇은 될 수 있었다.
그릇의 자질이 있어야 하고 그 그릇을 단단하게 만들 기운도 준비돼야 한다.
끝으로 그릇을 만들 조력자가 있어야 했다.
경호에게는 자질이 있었고 정령계를 구하며 쌓은 1경이 넘는 카르마 수치가 있었으며 조력자로 세계수와 사신, 용력이 있었다.
정말 누군가 치밀하게 설계하지 않았으면 일어나기 힘든 우연이 경호에게 펼쳐진 것이었다.
그렇게 경호는 용력의 힘을 빌려 자신 내부의 그릇을 카르마로 단단하고 커다랗게 만들어 나갔다.
“후우.”
자는 것처럼 가만히 누워 있던 경호가 길게 숨을 뱉으며 눈을 번쩍 떴다.
“이런 거였나? 용족 같은 초월적 존재가 된 느낌이…. 상태창!”
경호는 눈앞에 떠오르는 상태창을 살폈다.
<상태창>
이름:최경호
나이:35
클래스:신의 그릇[???]
레벨:???
특성:[신의 그릇LV4]
카르마:0(중립)
“음. 능력치는 모조리 사라지고 신의 그릇만 덜렁 남았네. 그것도 무슨 낱말 퀴즈도 아니고 물음표만 떠 있고.”
경호가 상태창을 없애고는 주변을 살폈다.
경호의 시선은 의식의 세계 안을 훑었지만, 그 너머까지 살피고 있었다.
그리고 사신의 존재가 자신의 감각 안에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신의 그릇’이라는 클래스가 되고 확장된 감각은 지구 전체를 살필 수 있었다.
적어도 사신의 존재는 지구 어느 곳에서도 느껴지지 않았다.
“세계수야. 사신은?”
경호가 의식의 세계 중앙에 우뚝 솟아 있는 세계수를 보며 물었다.
-사신은 레비아탄의 등장에….
세계수는 경호가 신의 그릇으로 빚어지는 동안 일어난 일에 대해서 말했다.
사신의 희생, 골병이의 성장과 레비아탄의 죽음까지.
“그래? 그래. 그럴 거 같았어.”
이미 경호에게 많은 힘을 건네 희미하게 변해 버린 상태임을 그도 알고 있었다.
다만.
“고맙다는 마지막 인사 정도는 하고 싶었는데. 아쉽네.”
털썩.
경호는 의식의 세계에 주저앉았다.
바로 나가서 사람들을 만나고 싶었지만 변화된 자신의 힘을 제대로 다룰 줄 모른다면 애써 성장한 의미가 없었다.
용력을 처음 얻었을 때도 그랬지만 강한 힘은 그만큼 다루기 어렵기 마련이었다.
복잡한 전자기기의 설명서를 대충 읽은 것처럼 자신이 얻은 힘의 특성이 머릿속에 희미하게 떠돌고 있었다.
그것을 확실하게 자신의 것으로 만들 필요가 있었다.
“후우. 이것도 아프진 않겠지?”
가부좌를 틀고 눈을 감은 경호가 ‘신의 그릇’으로 빚어진 자신의 내부를 관조하기 시작했다.
***
마왕 레비아탄이 죽었다.
물론 상처투성이의 승리였다.
중국 천진이 완전히 망가졌고 천만이 넘는 사망자가 생겼다.
또 인천과 서울 서부는 멀쩡한 건물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폐허가 됐다.
하지만 이겼다.
전 세계는 마왕의 죽음에 환호했다.
특히나 죽은 줄 알았던 다현과 수호신이 마왕을 죽였다고 발표했을 때 전 세계 반응은 정말 뜨거웠다.
-마왕을 속이기 위해 죽음마저 위장하다니 진정한 영웅이야!
다현의 생각은 아니었다.
-특성 훈련법을 아무런 조건 없이 공개했을 때부터 알아봤다고!
훈련법 역시 경호가 알려 준 것이고.
-세계 최강 능력에 외모, 몸매, 성격까지 완벽한 누님은 진정 여신!
외모와 몸매까지는 인정하지만 성격은 결코 완벽하지 않았다.
어쨌든 레비아탄의 죽음으로 암울했던 분위기가 많이 좋아졌다.
하지만 아직 끝이 아니었다.
마왕은 죽었지만 마왕전담특별팀은 그대로 유지됐다.
단순히 유지된 정도가 아니라 파병 온 174명의 헌터 모두가 레비아탄과 싸우기 전보다 더 열심히 수련 중이었다.
그전 모습을 알던 이들이 본다면 ‘미쳤다!’라고 외칠 정도의 변화였다.
사실 레비아탄이 죽고 고국으로 돌아간다고 요청한 이가 대부분이었다.
-해독제를 주십시오! 돌아가겠습니다!
-마왕을 죽였습니다. 해독제와 10억 달러를 주십시오!
-특별 상여금은 언제 주는 겁니까?
그때 모두의 계좌로 세금 한 푼 빼지 않고 10억 달러가 입금됐다.
주기로 약속한 거였지만 막상 계좌에 10억 달러가 찍히자 헌터의 눈동자에 욕심이 이글거렸다.
다현은 그때 모두를 불렀다.
“마왕 레비아탄은 죽었습니다. 하지만 아직 마계와 싸움은 완전히 끝난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의 힘이 필요합니다!”
경호는 수련하러 가기 전에 말했다.
마왕전담특별팀은 끝까지 유지해야 한다고.
정령계에서는 두 명의 마왕이 죽고 나서야 포기했다.
정령계보다 지구의 가치가 더 큰지 작은지는 모르나 또 다른 마왕이 침략해 올 수 있었다.
아니 최악의 경우 다섯 마왕이 모두 올 수도 있었다.
서로 경쟁하는 사이다 보니 같이 오진 않겠지만 그래도 대비해야 했다.
“저번에도 말했듯이 지구는 아직 여러분의 힘이 필요합니다! 마계에서 마왕이 추가로 내려올 수 있습니다.”
“….”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이번에 보셔서 알 겁니다. 여기 중국에서 오신 헌터님도 있으니 더 절실히 느끼셨을 텐데요. 마왕이 나타나면 하루아침에 국가 단위의 피해가 발생합니다. 우리의 부모 형제가 그들에게 죽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이미 손에 1조를 쥔 이들이었기에 다현은 더는 이들에게 돈으로 설득할 수 없음을 알았다.
특히나 이겼음에도 짙은 패배감에 젖어 있는 이들이었다.
레비아탄의 강대함.
상대조차 되지 않았던 자신의 무력함에 PTSD 증상마저 보이는 이들이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경호가 언제 나올지 모를 상황에서 마왕을 상대로 시간이라도 끌 수 있는 유일한 존재가 바로 이들이었기에 이대로 팀을 해산시킬 순 없었다.
“여러분. 여러분이 마왕을 상대로 큰 힘을 쓰지 못했다고 자책하지 마세요. 여러분이 레비아탄이 불러낸 마수를 막아 내지 않았다면 저는 결코 그 괴물을 죽일 수 없었을 겁니다.”
사실 ‘골병이’가 없었다면 여기 있는 모두가 죽었을 테지만 당장은 거짓말이라도 해야 했다.
다현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헌터 중 누가 손을 들었다.
“만약 이번처럼 다른 나라에 마왕이 나타나면 이번처럼 이곳으로 유인하는 겁니까?”
그의 물음에 다현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이번에는 우리가 바로 현장으로 날아갈 겁니다.”
세계수가 있는 한국을 바로 쳐들어올 확률이 가장 높았지만 다른 나라로 마왕이 출몰해도 이번처럼 유인하지 않기로 이미 대통령과 이야기를 마친 상태였다.
출몰국의 피해도 크고 마왕이 이동하며 생기는 피해도 무시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여러분. 솔직히 손에 쥔 돈을 신나게 쓰면서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마계 침략 못 막으면 다 소용없습니다.”
1조는 손에 쥐었지만, 마계 침략을 막아 내지 못하면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 숫자에 불과했다.
다들 계좌에 찍혀 있는 숫자를 보다 결심한 듯 수련장으로 달려갔다.
***
세계 최고의 도시라 불리는 뉴욕.
그 뉴욕 한가운데 마왕 ‘사탄’이 나타났다.
그 소식은 바로 ‘마왕전담특별팀’에 전달됐다.
“자아! 모두 출동 준비하세요! 바로 뉴욕으로 날아가겠습…. 어?”
프랑스 파리에 마왕 ‘루시퍼’가 출몰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그리고 러시아의 모스크바엔 마몬이, 인도 뉴델리에는 아스모데우스가.
갑자기 지구에 마왕 넷이 모두 등장했다.
“이, 이게 뭐야. 지금 장난해?”
출동 준비를 하던 다현이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중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