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1화
다현의 외침에 흰둥이와 울피뿐 아니라 쓰러져 있던 운애와 땅개까지 몸을 일으켰다.
한계 이상의 힘을 쥐어짰다.
지금 이 공격을 쏟아 내고 죽어도 좋다는 각오를 모두 마친 상태였기에 폭주 따위의 걱정 따위는 버렸다.
흰둥이의 온몸에 번갯불이 튀었고 울피는 새파란 불이 피어올랐다.
운애 역시 날카로운 물줄기를 뽑아 냈고 땅개는 주변으로 단단한 암석을 띄웠다.
“땅개는 움직임을 막아 주고 나머지는 동시에 머리를 노려요!”
다현의 말에 한쪽 눈이 터진 상태로 바닥을 마구 구르며 괴성을 지르는 레비아탄을 향해 땅개가 암석을 날리며 동시에 주변 땅을 꺼트렸다.
콰가가가가가가가가강!
평소의 레비아탄이라면 몸을 들썩이는 것만으로도 암석을 튕겨 내겠지만 눈알이 터지는 고통에 제대로 마기를 다루지 못했다.
레비아탄에게 고통은 익숙하지 않은 감각이었기에 더욱 그랬다.
땅개가 모든 힘을 다해 땅속에 묻힌 몸통 위에 암석을 날리고 그것을 땅의 기운으로 결속시켰다.
배배 꼬며 몸부림치던 레비아탄이 고정되며 머리만 땅 위로 삐죽 나왔다.
어쩌면 마지막일 수 있는 기회였다.
마왕을 죽일 수 있는 절호의 기회!
다현의 수백 개의 백염이 쏟아졌고 흰둥이의 뻗은 앞발을 따라 거대한 뇌전이 번쩍이며 날았다.
울피는 여우 구슬과 함께 새파란 불꽃을 뿜었고 운애는 날카로운 물줄기를 엄청난 속도로 쏘아 보냈다.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네 가지 서로 다른 기운이 레비아탄의 머리를 동시에 때리며 엄청난 폭발과 함께 천지가 무너져 내릴 듯한 굉음을 터뜨렸다.
신력, 마력, 정령력에 뇌전, 화염, 물줄기 같은 서로 다른 기운과 특성이 서로 섞이며 폭발력이 더욱 강해졌다.
시커먼 연기로 레비아탄의 상태를 알 수 없는 상태.
아무런 기운도 느껴지지 않았다.
제발. 제발. 제발. 제발.
다현은 속으로 빌고 또 빌었다.
한쪽 눈이 터진 상태의 마왕.
그것도 아직 지구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한 상태.
거기다 몸은 속박되고 얼굴에 모든 공격을 받았….
콰아아아앙!
그때 연기 속에서 레비아탄을 속박했던 암석들이 튀어나왔다.
크르르르르르르.
그리고 동시에 듣는 것만으로 몸이 뻣뻣해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 벌레 새끼들이 감히…. 감히!
목소리에 담긴 살기만으로 모두 힘이 쭉 빠져나갈 정도였다.
저벅. 저벅.
연기를 뚫고 인간 모습을 한 낯선 존재가 모습을 드러냈다.
마수의 왕, 레비아탄이었다.
거대한 뱀의 형상이 아닌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었지만 ‘레비아탄’이라는 걸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3m 정도 되는 거대한 육체에 세로로 쪼개진 새빨간 뱀눈에 삐죽 튀어나온 독니와 전신에 돋아 있는 검은 광택이 나는 비늘까지.
왼쪽 눈이 있어야 할 자리는 검게 비어져 누런 진물이 흐르고 있었지만 품고 있는 기운은 더 강렬해진 모습이었다.
으으으으으으.
몸이 달달 떨렸다.
마치 고양이 앞에 생쥐 같은 그런 모습.
다현은 손발을 달달 떨며 꼼짝 못 하는 것을 벗어나려 이를 악물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이, 이게 뭐야!’
너무나 무력했다.
계속 힘을 썼지만, 마치 꿈속인 듯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힘겹게 눈동자만 겨우 돌려 주변을 살피니 흰둥이, 울피, 운애, 땅개도 벌벌 떨며 꼼짝도 못 하고 있었다.
-다 같이 죽여 주마.
레비아탄이 손을 들어 가볍게 휘두르자 모두가 종잇장처럼 가볍게 날아갔다.
퍼벅! 퍽! 퍽!
우뚝 서 있는 세계수에 박히듯 내동댕이쳐졌다.
그리고 레비아탄의 양손에 암흑마기가 모이기 시작했다.
화르르르르르르륵!
악마의 생명력인 암흑마기.
최초의 마수이자 마왕인 레비아탄의 성향처럼 강렬한 암흑마기가 불꽃처럼 이글거리며 솟아올랐다.
저벅. 저벅. 저벅.
레비아탄은 벌레 같은 놈들에 의해 자신의 한쪽 눈이 터지며 분노가 치솟았지만 이제 다시 미소를 머금을 정도로 기분이 좋아진 상태였다.
눈동자 따위 회복하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세계수를 파괴하고 지구를 손안에 넣는 공로는 지금 끓어오르는 화를 누그러뜨리기 충분했다.
저벅. 저벅. 저벅. 탁.
-크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세계수 앞에 선 레비아탄이 고개를 젖히며 크게 웃었다.
-내가 해냈다! 내가 해냈어!
그러고는 암흑마기가 활활 타오르는 양손을 세계수를 향해 뻗었다.
치지지지지지지지지지직.
세상의 모든 기운을 받아들여 조화롭게 만드는 힘을 가진 세계수였지만 마왕의 암흑마기까지 받아들이진 못했다.
레비아탄의 암흑마기가 닿은 부분이 마치 불로 지진 것처럼 검게 그을리더니 곧 마기가 옮겨붙으며 활활 타오르기 시작했다.
***
-세계수가 위험해!
사신은 세계수를 암흑 마기로 태우려는 레비아탄을 보며 결정해야 했다.
-경호나 금봉황 둘 중 하나를 깨워 저놈을 막아야 해!
백호가 씩씩거리며 말했다.
하지만 방법이 없었다.
경호는 아직 용력이 강화를 멈추지 않은 상태였다.
그런 상태에서 강제로 깨운다 해도 제대로 힘을 쓸 수 없을 터였다.
반대로 골병이는 아직 깨어날 상태가 아니긴 했지만 세계수와 사신이 힘을 보탠다면 깨울 순 있었다.
하지만 골병이를 깨운대도 문제는 있었다.
-금봉황의 힘으로는 저놈을 못 이길 텐데? 온전히 힘을 기르고 나가는 것도 아니고 말이야.
금봉황은 사신의 힘을 이어받은 대단한 존재이지만 아직 상태가 완전하지 않아 마왕과 싸워 이기긴 어려웠다.
가장 신중한 성격의 현무가 다른 사신들을 보며 말했다.
-우리가 참 오래 살았어. 저번에 경호를 제대로 만들고 나면 우리도 사라지자고 했던 거 기억하지?
수십억 년의 기억을 가지고 살아온 이들이 며칠 전 일을 기억 못 할 리 없었다.
-그래. 그랬지.
-그럼. 우리 지금 줘 버리고 가세.
-응?
-뭐?
-지금?
주작, 백호, 청룡의 반응에 현무가 고개를 끄덕였다.
-금봉황에게 우리의 기운을 모두 몰아 주면 잠시나마 저놈을 상대할 힘을 가질 수 있을 거야. 물론 그 뒤로 고생 좀 하겠지만.
-그래.
-그러자.
-좋아!
역시나 생각도, 결정도, 행동도 빨랐다.
바로 그들은 자신의 기운을 금봉황을 품고 있는 황금빛 기운으로 보내기 시작했다.
청룡의 목기와 주작의 화기, 백호의 금기, 현무의 수기가 합쳐져 금봉황의 토기와 섞이며 그 기운이 엄청나게 커지기 시작했다.
많이 약해졌다고 하지만 그래도 세상을 조율하는 존재인 사신이 가진 힘이었다.
-생각보다 더 좋은 마무리군.
현무의 몸이 서서히 사라졌다.
-난 좀 아쉬운 점도 있어.
코를 씰룩이던 백호가 먼지처럼 흩어졌다.
-오래 살긴 오래 살았으니.
주작이 불꽃으로 변해 확 피어오르다 꺼졌다.
-모두 수고했고 즐거웠다.
청룡이 모두가 사라지는 모습을 보며 환하게 웃었다.
그를 끝으로 세계수 안에 자리했던 사신은 모두 사라졌다.
그리고 금봉황, 골병이의 감겨 있던 눈이 번쩍 떠졌다.
***
우우우우우우우우우웅.
세계수가 떨며 울 듯 낮은 소리를 내었다.
레비아탄의 미소가 더 짙어지고 세계수를 태우는 암흑마기가 더욱 커질 때.
꾸득. 꾸드득. 꾸드드드득.
세계수의 가지가 커다란 소리를 내며 이리저리 벌어지고 있었다.
-크크크크크큭. 몸부림쳐 봐야 소용없다.
세계수는 용족 같은 세계의 조화를 위해 주신이 만든 존재지만 스스로 싸울 수 있는 존재는 아니었다.
레비아탄이 더욱 심장에 꿈틀거리고 있는 암흑마기를 일깨워 양손으로 보냈다.
화아아아아아악!
세계수의 가지가 더 크게 벌어지며 그 안에서 뭔가 튀어나오며 황금빛을 뿌렸다.
그제야 뭔가 이상함을 눈치챈 레비아탄이 세계수에 손을 떼고 위를 쳐다봤다.
쉐에에에에에에에에에엑!
세계수 가지에서 공기를 가르는 소리와 함께 금빛이 나는 뾰족한 거대한 무언가가 레비아탄을 향해 내리꽂히고 있었다.
-이, 이익!
그것을 향해 암흑마기가 실린 손을 내쳤다.
퍼어억!
하지만 그것은 레비아탄의 예상과 달리 너무 가볍게 그의 손을 짓이겼다.
끄아아아아아악!
눈이 터져 나간 것을 훨씬 넘어서는 고통이 전신을 때렸다.
암흑마기가 잔뜩 실린 양손이 터져 나가며 생명력과 같은 그 기운도 같이 흩어져 버린 것이었다.
양손이 날아간 레비아탄이 당황스러운 얼굴로 자신의 손을 날려 버린 황금빛 존재를 확인했다.
-너, 너는 뭐냐? 뭐야!
하지만 그건 처음 보는 생명체였다.
거대했다.
자신의 본체로 싸워도 크기로는 밀리지 않을 정도로 거대한 황금새.
자신의 손을 박살 낸 그것은 그 새의 날카롭고 커다란 부리였다.
어이가 없었다.
신수?
하여간 그게 무엇이든 ‘용족’도 아닌 저딴 듣도 보도 못한 희한한 생명체에게 속수무책으로 당하다니 스스로에 화가 났다.
-나? 나 골병이야. 내가 간식으로 지렁이를 가장 좋아하는데….
꿀꺽.
침을 삼킨 골병이가 레비아탄을 노려보며 말을 이었다.
-너 맛있겠다.
화아악!
골병이가 날개를 활짝 펴자 금빛 기운이 주변으로 퍼졌다.
火水木金土.
황금빛 기운은 신기하게도 오행의 기운이 모두 담겨 있었다.
생기가 느껴지면서 뜨겁고 동시에 차가우면서 단단하고 날카롭기까지 한 기운이 레비아탄을 감쌌다.
-으윽!
골병이의 부리에 찢긴 양손에서 암흑마기가 마구 솟구쳤지만 밀어닥치는 황금빛 기운에 상쇄되며 사라졌다.
-이게, 이게 도대체! 말, 말도 안 돼!
레비아탄은 처음으로 두려움이라는 감정을 느꼈다.
고통도 낯선 감각이었지만 두려움은 더 생소한 감정이었다.
자신은 최초의 마수이자 질투의 마왕이었다.
두려움을 주는 존재이지 받는 존재가 아니었다.
휘익.
골병이 커다랗고 단단한 발이 혼란스러워하는 레비아탄의 몸을 움켜잡았다.
콰악!
-으윽!
암흑마기를 지워내는 오행의 기운 때문에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그리고 그러한 상황이 레비아탄을 더욱 두렵게 만들었다.
죽음.
마왕에게 죽음은 아주 가까운 존재였지만 그 대상이 자신이 되면 안 되는 것이었다.
자신은 세계수를 파괴하고 지구를 지배해야 했다.
쉐에에에에에에에엑.
금빛 부리가 벌어져 레비아탄의 머리를 삼켰다.
콰직. 콰직. 콰지직.
섬뜩한 소리와 함께 레비아탄의 머리가 몸통에서 분리돼 삼켰다.
꿀꺽.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은 골병이가 발로 잡고 있던 레비아탄의 몸통마저 그대로 입안에 넣고 씹어 삼켰다.
“허어.”
골병이의 병아리처럼 귀여운 모습을 기억하고 있던 다현이 세계수에 처박힌 채 입을 쩌억 벌리고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흰둥이나 울피, 운애, 땅개 역시 다현과 크게 다르지 않은 표정이었다.
한참을 쩝쩝거리던 골병이의 황금빛 거대한 육체가 갑자기 타조 정도 되는 크기 정도로 확 작아졌다.
허억. 허억. 허억. 허억.
거칠게 숨을 쉬는 골병이의 지쳐 보이는 모습은 레비아탄을 순식간에 제압하고 한입에 씹어 삼키는 것과는 굉장히 대조적이었다.
세계수에 박혀 있던 몸을 빼낸 다현이 그런 골병이에게 힘겹게 다가갔다.
“골병아. 괜찮아?”
후우. 후우. 후우우우우.
힘겹게 호흡을 가다듬은 골병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신이 건네준 힘을 모두 써서 그래요. 사실 마계에서 지켜보는 시선 때문에 허세를 부리고 있었거든요. 저 그럼 조금….
털썩.
골병이가 말도 다 하지 못하고 그대로 기절하며 바닥에 쓰러졌다.
***
마계 너머에서 지켜보던 마신의 눈동자가 부릅떠졌다.
레비아탄이 죽은 것 때문이 아니었다.
사신의 힘을 받은 금봉황 때문도 아니었다.
사신의 힘이 대단하지만 일회용일 뿐.
마신이 놀란 이유는 금봉황이 빠져나올 때 세계수 깊숙한 곳에서 느껴진 존재 때문이었다.
경호.
마신은 변화되고 있는 경호를 느꼈다.
그릇.
그것은 신을 담을 수 있는 그릇이었다.
아직 완전하지 않았지만 분명 그랬다.
-지구를 차지해야 할 이유가 새롭게 생겼구나.
마신의 입이 길게 찢어지듯 벌어지며 킬킬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