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2화
사신(四神).
신수와 비슷하나 주신(主神)이 창조한 생명체가 아니었다.
지구의 춥고 덥고 깊고 높은 극한의 기운이 맺히고 뭉쳐 생겨난 신비로운 존재.
순수한 기운의 집합체.
사신은 어찌 보면 정령보다 더 순수한 힘과 영혼을 가진 존재였다.
그렇다 보니 현무가 강대한 힘이 있음에도 ‘암흑마기’에 대한 저항력이 약해 그렇게 쉽게 당했던 것이었다.
-우리도 오래 살았지?
현재 사신은 육체를 완전히 벗어내고 순수한 기운으로 변해 세계수와 완전히 합일된 상태였다.
-오래 살긴 오래 살았지. 그것도 더럽게 오래 말이야. 못 볼 것도 많이 보면서.
현무의 말에 대답한 이는 성격이 거친 백호였다.
-이번에 마기에 잠식되며 느낀 건데 이제 우리가 사라질 때가 되지 않았나 싶은 생각이 들더군.
-왜 그렇지? 물론 나도 삶에 욕심이 없지만.
청룡도 현무의 말에 동의하며 물었다.
-세계수가 성장해 침략을 막아 내면 새로운 세상이 오겠지. 그런 시대가 와도 과연 우리가 필요할까? 여기 있는 금봉황이나 세계수가 훨씬 더 잘 할 건데.
-그건 그래. 필요 없는 존재는 사라져 주는 게 자연의 이치이기도 하고.
주작 역시 현무의 말에 동의했다.
자연의 기운 속에서 태어난 존재이기에 자연으로 회귀하는 것에 대한 거부감이나 두려움은 없었다.
남을 짓밟고라도 어떻게든 더 가지고 더 살려고 하는 인간과 달리 욕심이 없는 순수한 존재니 가능한 대화였다.
-그럼. 어떡할 텐가?
-세계수에 지금부터 힘을 더 흘려 넣어 줍시다.
-뭐. 그럽시다. 금봉황도 잘 크고 있으니….
지금까지 세계수에 직접 기운을 흘려 주는 대신 활성화하는 방법으로 성장을 도와주고 있던 사신들이었다.
생각도 빨랐고 결정도 빨랐으며 행동 역시 그랬다.
그때부터 세계수는 엄청난 속도로 자라기 시작했다.
결과적으로 그로 인해 정령석을 쏟아내듯 생산할 수 있었고 경호와 소통도 급진전했다.
그러던 중 경호가 도와 달라며 나타난 것이었다.
사신은 이미 세계수와 한 몸이 됐기에 경호의 말을 다 듣고 있었다.
-용력까지 가지다니 역시 대단한 녀석이야.
-나를 마기에서 벗어나게 해 준 것만 봐도 보통은 아니었지.
-하지만 결국 몸은 인간이야. 청룡, 너도 짝퉁 용족이지만 알잖아. 저런 몸으로 용력의 흉포함을 버틸 수 없음을.
-인간은 가지고 있는 생명력도 담기 어려워 백 년도 겨우 사는 존재인데. 마력에 신력, 정령력에 용력까지. 당장 폭주 안 한 게 용하군.
-그러게. 우리가 마지막으로 할 일이 생긴 거 같은데?
역시나 사신은 생각도 빨랐고 결정도 빨랐으며 행동 역시 그랬다.
***
-사신이세요?
경호가 놀란 얼굴로 세계수에 말을 걸었다.
-그렇네. 지켜보다가 우리가 도와줄 일이라 생각해서 세계수에 부탁해 말을 걸었지.
경호는 아까 사신이 한 말 중 폭주 안 한 게 다행이라는 소리가 생각나 물었다.
-아. 잘 지내시죠? 그나저나 아까 폭주 어쩌고 하셨는데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폭주라뇨?
-말 그대로네. 자네 몸은 지금 빵빵하게 부풀어 오른 풍선 같은 상태거든.
경호는 몰랐지만 지금 그의 상태는 누가 툭 건드리면 당장이라도 터질 듯한 풍선 같은 상황이었다.
아니 계속 바람도 들어가는 중이라 시간이 흐르면 누가 건들지 않아도 터질 그런 풍선.
-그게 무, 무슨.
용력을 제대로 다루지 못해서 세계수를 찾은 거였지 폭주가 걱정돼 찾은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난데없는 소리를 들은 것이었다.
-계속 이렇게 말하는 것도 힘들군.
사신은 기운만 남은 상태로 세계수에 흡수된 상태였기에 아직 영혼이 있어 의지를 전달할 수 있지만 어쨌든 세계수를 거쳐서 의지를 전달하는 것이라 힘들었다.
-그럼. 어떻게 해….
경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몸을 감고 있던 나무줄기가 경호를 끌어당겼다.
“어! 어어!”
그리고 마법처럼 세계수 안으로 끌고 들어갔다.
역시나 생각도, 결정도, 행동도 빠른 사신이었다.
***
경호가 어! 어! 하다가 세계수의 내부로 들어와서 눈을 뜨니.
새하얀 순백에 공간이었다.
오랜만에 찾은 의식의 세계였다.
의식의 세계는 서로 영혼이 공유된다면 함께할 수도 있는 공간이었다.
물론 아무나 가능한 것은 아니었다.
영혼의 공유라는 것 자체가 엄청나게 어려운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것도 상대의 동의도 없이 강제로 영혼을 공유시켜 의식의 세계로 불러들인다는 것은 미르 같은 수호신이나 대정령, 세계수 같은 존재만 가능한 일이었다.
경호가 익숙하지만 낯선 공간을 두리번거렸다.
크기를 인지하기도 어려운 넓디넓은 순백의 공간.
그 가운데 고개를 쳐들고 올려다보아도 그 끝을 가늠하기 어려운 크기의 세계수가 우뚝 서 있었다.
“이게 세계수의 의식의 세계인가?”
-오랜만이구나. 인간이여.
문득 들려오는 소리에 경호가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곳에는 푸른 비늘이 아름다운 용과 커다란 덩치의 하얀 호랑이, 그리고 붉은 깃털을 가진 커다란 새와 목이 뱀처럼 긴 거북이가 있었다.
동청룡, 서백호, 남주작, 북현무.
“정말 오랜만이네요. 잘들 계셨죠?”
-잘 있었다고 해야 하나? 우리는 세계수에 흡수되고 있는 상태네. 아마 곧 모두 흡수되어 사라지겠지.
네엣? 아니 뭐 그런 걸 이렇게 담담하게 이야기한데요?
경호가 놀라 사신들을 다시 살피니 정말 모습의 경계가 흐릿한 게 기운이 약해진 느낌이었다.
아. 그래서 세계수가 이렇게 부쩍 큰 거구나.
경호는 자신이 말을 자주 걸어 주고 용력이 성장하면서 세계수가 말을 잘하게 된 건 줄 알았는데 보니 그런 것도 아닌 모양이었다.
“세계수에 흡수 되다니요? 아니 스스로 흡수되신다고요?”
-새로운 세상엔 새로운 사신이 또 생길 테니까. 금봉황이 잘해 준다면 사신이 또 생길 필요도 없고 말이지.
현무의 말에 옆에 있던 청룡이 고개를 끄덕였다.
-우린 너무 오래 살았어. 기운이 뭉쳐 생긴 존재라 무한한 생명을 가졌으니 말이야. 하지만 이제 할 일을 찾았으니 가야 하는 게 맞는 거지.
“할 일이요?”
-세계수를 성장시키는 일. 그리고 마지막으로 자네에게 기운을 제대로 담을 수 있는 그릇을 만들어 주는 거.
아. 맞다. 나 기운이 폭주한다는 거 때문에 여기 들어온 거지.
“아니 폭주는 도대체 무슨 말입니까? 폭주라뇨? 그런 기미는 한 번도 없었는데요?”
용력이 너무 강해서 폭발하며 다치긴 했지만 기운 전체가 폭주하려는 기미는 지금까지 전혀 보이지 않았다.
경호의 말에 백호가 피식 웃었다.
-둔하군. 둔해. 그런 머리와 감각으로 어떻게 이렇게 강해진 거지?
그건 다 미르의 10년에 걸친 주입식 교육 때문입니다.
백호의 비아냥에도 경호 역시 자신이 둔재라는 걸 너무나 절절히 알기에 그저 쓴웃음만 지었다.
-지금까지는 세 가지 기운이 분리돼 있었으니까. 머리와 심장, 단전으로. 하지만 용력이 생겼으니 어찌 되겠나?
음. 그게….
애초부터 경호가 그런 쪽으로 감각이 좋거나 머리가 똑똑한 편은 아니었다.
나름 머리를 굴렸지만 백호의 질문에 대한 답이 딱히 떠오르지 않았다.
“그게…. 어찌 될까요?”
-청룡이 정확히 답해 줄 수 있겠군. 청룡 역시 짝퉁이긴 하지만 용족이니까.
냉소적인 성격답게 답답해 보이는 경호에게 끝까지 싸가지 없게 말하는 백호였다.
-사실 용력은 저주에 가깝지.
“네에? 그게 무슨….”
-세상을 이루고 있는 힘, 그러니까 기운들은 다 역할이 있고 쓰임이 있다네.
당연한 소리였다.
하지만 이어지는 설명은 경호도 모르던 이야기였다.
신력은 창조, 회복, 성장의 힘이 담겨 있는 창조신인 주신이 품고 있는 힘이었다.
마기는 파괴, 부패, 억제의 힘이 담겨 있는 파괴신인 마신이 가진 힘이었다.
정령력은 우주가 태초부터 가지고 있는 특유의 속성을 가지고 있는 원초적이고 순수한 힘이었다.
마력, 따로 ‘마나’라고 부르는 힘은 신력과 마기, 정령력을 결합해 자연히 흐르게 만드는 접착제 역할을 하는 힘이었다.
그렇기에 마력을 잘 다루면 신력처럼 회복도 가능하고 마기처럼 파괴도 가능하며 정령력처럼 속성의 힘도 쓸 수 있었다.
-하지만 용력은 좀 특별하지.
“네엣?”
진짜 용족인 미르도 겪었던 경호였지만 지금까지도 그냥 강한 힘 정도로 생각했다.
그런데 다른 일을 한다니?
“그냥 힘을 증폭하고 의지를 실현하고 하는 능력 아닌가요?”
용력을 사용해 힘을 증폭시키는 건 경호가 사용하는 ‘폭렬검’이었고.
용력에 의지를 담아 실현하는 것은 흔히 ‘용언 마법’이라고 것이었다.
마법으로 분류하기도 하지만 그것은 사실 용력이 가진 능력이었다.
-그게 용력이 가진 능력이긴 하지. 하지만 용력은 또 다른 힘을 가지고 있어. 하지만 자네가 가진 그 용력은 조금 특이해서 나타나지 않고 있는 거지.
“그게 나쁜 건가요?”
-어쩌면 다행이라고 할 수 있을지도. 지금 상황에서 무작정 용력의 힘이 발휘됐다면 백이면 백 죽었을 테니까.
청룡에 말에 경호가 펄쩍 뛰었다.
“네엣?!”
아니 뭐 죽는다는 소리를 뭐 저렇게 태평하게 하는 거야!
“그런데 용력이 뭘 어떻게 하길래 죽는다는 거죠?”
-용력은 그 기운 자체로 굉장한 힘을 가지고 있지. 말 그대로 용언 마법이 있을 정도로 의지만 강하게 담아도 마법처럼 힘이 실현되는 기운이니까.
하지만 그만큼 다루기 어려운 기운이었다.
-증폭시키는 힘을 써 봤다고 하니 그 힘이 얼마나 사나운지 알겠군.
청룡의 말에 경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안다.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 어떤 힘보다 놀라운 능력을 가졌지만 반대로 손아귀가 터지고 혈맥이 찢겨 지고 온몸에 대미지가 쌓이는 말도 안 되는 힘이라는 걸.
-그래서 용은 해츨링이라는 기간을 거치며 ‘용력’이라는 난폭한 기운을 다룰 수 있는 육체를 만들지. 그런데 여기서 착각하는 게 있어. 뭔지 아나?
알 턱이 있나?
경호가 고개를 절레절레 젓자.
-‘용’이라는 종족이 용력이라는 힘을 다루기 위해 스스로 육체를 강화하는 게 아니라는 거지.
응? 뭐라고요?
뭔 소린지 들어도 헷갈리는 설명이었다.
-그러니까 ‘용력’이 용을 강화한다는 거지.
“네엣? 용력은 용의 심장에서 나오는 기운 아닌가요? 그런데 용이 스스로 몸을 바꾸는 게 아니라 용력이 용의 몸을 바꾼다고요?”
뭔가 주객이 크게 전도된 느낌이었다.
-그렇지. 헌데 너의 용력은 몸을 강화하는 그 능력이 약한 듯하네. 물론 아까도 말했지만 그 덕분에 살았어.
“아. 실은 제가 용력을 가지게 된 것이 암흑마기가 변이를 일으켜 용족의 힘을 가진 개체가 됐고 그걸 제가 흡수한 거거든요.”
경호의 말에 청룡의 눈빛이 묘하게 변했다.
용의 표정을 잘 읽지는 못하지만 대충 흥미로워하는 것 같았다.
-이거 나보다 더 짝퉁이군.
“근데 그 덕분에 살았다니 그게 무슨 말이죠?”
-알겠지만 용족은 아주 강한 종족이야. 창조신이 괜히 세상의 조화를 위해 ‘용’과 ‘세계수’를 만든 것이 아니지.
창조신은 세상을 만들고 인간과 동물, 식물 같은 것들을 만들어 번창하게 했다.
하지만 한편으론 세상이 혼탁해질 것을 걱정했다.
그래서 ‘용’과 ‘세계수’를 만들어 삿된 존재는 ‘용’이 처단하고 삿된 기운은 ‘세계수’가 흡수하게 했다.
물론 세상이 점점 더 끝도 없이 커지고 복잡해지면서 ‘용’과 ‘세계수’의 역할이 점점 사라지며 전설로만 남게 됐지만.
-그 강인한 용족도 용력을 제대로 다루려면 수백 년이라는 긴 세월을 거쳐 몸을 강화해야 하는데 인간인 네가 갑작스레 변화한다면 아마 몸이 버티지 못하고 죽었겠지.
“헐….”
경호가 놀라 입을 쩌억 벌렸다.
-그럼. 지금부터 용력을 다룰 수 있는 몸으로 강화를 시작하지.
다시 말하지만 사신은 생각도, 결정도, 행동도 빨랐다.
“네엣?!”
저, 저기 청룡님! 방금 그러면 죽는다면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