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8화
오만의 루시퍼, 탐욕의 마몬, 질투의 레비아탄, 분노의 사탄, 색욕의 아스모데우스.
이들 다섯 마왕은 불꽃이 다시 피어오를 때만 하더라도 모락스가 용사와 수호신의 목을 틀어쥐고 있을 거라 생각했다.
너무나 당연한 일이라 의심조차 하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실제는 달라도 너무 달랐다.
반으로 갈라져 죽어 있는 모락스.
아니 누가 어떻게?
누가 있어 모락스를 저렇게 반으로 갈라 죽인단 말인가!
용사와 수호신, 사도가 함께 덤벼든 것은 마왕들도 보았다.
하지만 마왕은 초월적인 존재이기에 대충 보기만 해도 상대의 강함을 알 수 있는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분명히 느꼈다.
모락스가 더 강하다는 것을.
근소하게 차이 나는 정도도 아니었다.
셋이 동시에 덤벼든다 해도 압살할 수 있는 힘을 가진 모락스였다.
그런데 어찌!
-크아아아아아악! 네놈! 이게 어찌 된 일이냐! 아니 모락스가 죽었는데 지금 통신은 어찌 연 것이야!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이냐!
차원을 건너 영상만 전달되는 구조였지만 레비아탄의 분노는 그것을 뛰어넘어 무출에게 전달됐다.
무출은 숨이 턱턱 막히는 살기에 바로 바닥에 꿇어 빌었다.
“레비아탄 님! 살, 살려 주십시오! 저는 그저 꼭 알려야 할 것 같아 생명력을 갈아 이렇게 연락을 드린 것입니다요. 정말 그뿐입니다!”
무출의 말은 당연히 거짓이었다.
울피의 조종으로 거짓을 진실처럼 연기하는 중이었다.
연락도 생명력을 갈아서 연락한 것이 아닌 경호의 용력으로 계약의 문양에 담긴 마기를 증폭시켜 연락한 것이었다.
어쨌든 그것을 모르는 레비아탄은 생명력을 갈아서 연락했다는 무출의 말에 분노를 삭이며 물었다.
-그래. 고작 반으로 쪼개진 모락스를 보여 주려고 생명력을 태우진 않았겠지?
레비아탄의 말에 무출이 화면을 옆으로 돌렸다.
그리고 그곳엔 용사와 수호신, 울피가 쓰러져 있었다.
딱 봐도 살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몸에서 흘러내린 피와 풍기는 죽음의 기운이 강한 것이 곧 죽을 것이 분명했다.
물론 일부러 그렇게 연기 중인 상태였다.
-양패구상한 것이로구나! 에잇! 멍청한 놈! 세계수만 태워도 족하거늘 왜 욕심을 부려서는!
다른 마왕들은 부하를 소모품, 그 이상으로 취급하지 않았지만 레비아탄의 악마군단은 모두 혼혈이나 마수 출신이라 다른 마왕의 군단과 다른 끈끈함이 있었다.
-후우. 알았다. 나중에 너에게 상을 내리도록 하마.
“감사합….”
마기가 부족했는지 그렇게 불꽃이 꺼지고 레비아탄은 비통한 표정을 지었다.
물론 나머지 마왕들의 얼굴엔 애써 웃음을 참는 기색이 역력했다.
큭큭큭큭큭큭.
심지어 아스모데우스는 대놓고 큭큭거리며 웃음을 터뜨렸다.
안 그래도 화를 참고 있던 레비아탄의 몸에서 살기가 칼날처럼 예기를 띠며 솟구치기 시작했다.
커다란 날개로 몸을 감싸고 있던 아스모데우스가 손을 휘젓자 그런 레비아탄의 칼날 같은 살기가 흩어졌다.
-미안. 레비아탄. 힘만 센 멍청이라는 생각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네.
명백한 도발이었다.
원래부터 아스모데우스와 레비아탄은 사이가 좋지 않았다.
혈통을 중시하는 아스모데우스는 마수 출신의 마왕 레비아탄을 저급하다고 무시하는 경향이 강했기 때문이었다.
-네놈 대가리에 내 이빨이 박혀도 그런 소릴 할 수 있는지 보겠다.
쉬익! 쉬익! 쉬익!
거대한 뱀의 모습을 한 레비아탄이 새빨간 독니를 드러내며 쇳소리를 냈다.
-미안하다고 말하는데도 덤벼드는 꼴이란….
아스모데우스도 그런 그를 비웃으며 날개를 펴고 자신의 애병, 마창(魔槍) 텔룸을 꺼내 들었다.
-둘 다 그만하게. 아니 하더라도 지구 침략이 끝나고 하라고! 지금 싸우면 마신님께서 무슨 벌을 내리실지 모르니 말이야!
루시퍼가 나서서 말리자 아스모데우스를 죽일 듯 노려보던 레비아탄이 아무 말 없이 몸을 돌려 회의실을 빠져나갔다.
-쳇. 덩치만 커다란 뱀 새끼가 너무 건방져.
아스모데우스가 자리에 앉아서 투덜거렸다.
-잘 참았다. 저런 힘만 센 마수에게 괜히 엮여서 문제가 생기면 우리만 손해라고.
아스모데우스 정도는 아니었지만 다들 마수의 왕이라 불리는 레비아탄을 견제하고 배척하고 있었다.
-그나저나 이제 용사도, 수호신도 없고 세계수까지 정리됐으니 서둘러 군단을 꾸려서 가자고! 그럼. 지금 사령관과 부사령관도 정하세!
‘속전속결’이라는 마신의 계시가 아니었어도 마왕이라는 족속 자체가 참을성이 없는 놈들이었다.
***
퍼엉!
용력으로 증폭시킨 마기가 불안정해지며 마계에 연결된 불꽃이 터지며 꺼졌다.
“컷! 좋았어!”
경호의 말에 다현과 흰둥이, 울피가 비척비척 몸을 일으켰다.
“어서 치료…. 타이밍 예술이네.”
경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멀리서 특전팀 차량들과 구급차가 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계약자가 공격한다는 소식을 들은 대통령이 보낸 인원들이었다.
“크억! 크어억! 살려 주십시오! 제….”
경호가 바닥에 쓰러져 켁켁거리고 있는 무출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용력으로 마기를 증폭시켜 마계에 연락한 것까지는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용력이 마기를 증폭하는 것을 넘어 폭주시키면서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마계와 연결도 끊어지고 문양에만 심어져 있던 마기가 마구 날뛰며 심장을 침범했다.
단순한 마기가 용력을 만나 폭주하며 마치 암흑마기나 마혼의 기운처럼 변질돼 버렸다.
그리고….
바닥에 엎어져 살려달라고 하던 무출의 모습이 변하기 시작했다.
쫘악! 쫘아악!
몸이 부풀며 옷이 찢어지고.
뚜둑! 뚜두둑!
관절이 뒤틀리며 둔탁한 소리가 터져 나왔다.
-크악! 크아악!
입에서 나오는 소리도 더 이상 인간의 말이 아니었다.
주둥이가 튀어나오고 커다랗게 변한 몸에서는 숭숭 털도 솟아났다.
그렇게 무출은 한 마리의 마수로 변했다.
-크르르르르르르.
무출, 아미 마수가 씁쓸한 표정의 경호를 살피더니 본능적으로 두려움을 느끼고는 반대편으로 도망쳤다.
흑색지대가 펼쳐진 방향이었다.
무리도 짓지 않은 변종 마수가 흑색지대로 가서 버틸 수 있을 리 없었다.
“쯧쯧.”
경호는 마수로 변해 도망치는 무출을 보며 혀를 찼다.
‘어차피 악마계약자의 끝은 다 저렇거늘….’
악마의 계약은 당장에 큰 힘을 주는 것이 맞지만 결국 마기로 인해 저렇게 마수가 되거나 잘 해 봐야 오크가 될 뿐이었다.
인간의 왕?
그게 뭐?
양계장 안에 닭 중 왕이 된다고 변하는 게 없는 것과 같은 소리였다.
지구를 침략하는 이유가 ‘인간’을 이용해 마계의 노동력으로 쓸 주민을 만들거나 악마들의 배를 채우려고 하는 것인데 설사 왕이 된다 한들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아! 그래!”
경호는 반쯤 부서진 공장 외벽에 군데군데 붙어 있는 CCTV 카메라를 확인하며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뭐해?”
갑자기 마수로 변해 도망가는 무출을 보며 혀를 차고는 머리를 갸웃거리다 끄덕거리는 경호를 보며 다현이 물었다.
“아직 남아 있을 악마계약자들도 처리하고 마왕놈들도 더 방심하게 만들 수 있는 방법이 떠올라서. 그럼. 나는 가 볼게.”
어차피 특전팀과 의료진이 오고 있기에 자신이 있어 봐야 논란만 생길 뿐이었다.
“이참에 좀 쉬어. 요즘 못 쉬었으니까. 알았냐?”
“걱정 마. 끄떡없으니까.”
“알았다.”
경호가 그대로 몸을 날려 청와대로 향했다.
***
제법 늦은 시간이었지만 청와대 대통령 집무실엔 불이 꺼지지 않았다.
“이번에도 경호 씨의 도움이 없었으면 정말 큰일 날 뻔했군요.”
한국뿐 아니라 전 세계에 너무나 많은 악마계약자가 존재하고 있었다.
거기다 가진 권력과 힘도 대단했다.
그런 그들을 이번에 경호의 작전으로 일망타진했을 뿐 아니라 마계의 악마까지 잡은 것이었다.
복덩이도 이런 복덩이가 없었다.
똑똑똑.
집무실에 울리는 노크 소리에 대통령과 비서실장, 안보실장이 놀라 문을 바라봤다.
늦은 시간이었고 중요한 이야기 중이니 찾지 말라고 언질한 후였기 때문이었다.
“무슨 일이지?”
비서실장이 묻자.
대답도 없이 문이 열렸다.
그리고 열린 틈으로 경호의 얼굴이 쓱하고 나왔다.
“서둘러 말씀 드릴게 있어서 이렇게 불쑥 찾아왔습니다.”
경호의 모습에 대통령이 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이고. 미리 연락이라도 주지. 그래. 고생 많았어요.”
집무실 중앙에 있는 소파로 가서 모두 앉았다.
“뭐라도 줄까요? 라면도 제대로 못 먹던데.”
“네엣? 아니 그걸 어떻게?”
“아. 경호 씨에게 이야기를 안 했던가요? 그 공장에 달린 카메라는 모두 이곳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대통령이 탁자 위에 있는 리모컨을 누르자 벽에 있는 대형 TV가 켜지며 다현이 구급대원에게 응급 처지를 받고 있는 영상이 나오고 있었다.
“어! 어어!”
“관제실을 따로 두어서 실시간 영상 편집해서 이렇게 보고 있었습니다.”
역시 대한민국은 IT 강국이었다.
그렇다면 이야기가 훨씬 편했다.
“아. 그럼. 부탁드릴 게 있습니다.”
“경호 씨. 부탁이라면 뭐든 들어드릴 수 있습니다. 편하게 말씀하세요.”
“우선 저곳 인원 모두 통제해 주시고요. 대통령님께서 직접 기자회견 하나 해 주시죠.”
“기자회견이요?”
“아. 정확히는 대국민 사기극 정도 되겠네요.”
“네엣? 뭐라고요?”
대통령은 물론 옆에 있던 비서실장과 안보실장도 놀란 얼굴로 경호를 쳐다봤다.
***
세상에 완전한 비밀은 없다.
뭔가 안 좋은 소문이 어젯밤부터 돌기 시작했다.
정부 연구소 공장이 폭발했다는 둥, 그곳에서 엄청난 전투가 있었다는 둥.
몇몇 발로 뛰는 기자들이 그곳을 직접 찾았지만 군 병력이 철통같이 지키고 있어서 접근이 어려웠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뭔가 일이 터졌다!’
대놓고 기사는 쓰기 어려운 정황과 소문이었지만 세상은 ‘기사’를 꼭 신문이나 뉴스에 내보낼 필요는 없었다.
그때부터 온갖 찌라시가 너튜브나 SNS를 통해 전파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빌런이 정부의 마나캐논 공장을 공격했다는 정도로 퍼지던 찌라시가 곧 그곳에 다현과 수호신도 갔었다는 내용으로 진화했다.
그러다 최종에는 악마와 싸우다 함께 죽었다는 내용까지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너무도 충격적인 내용이라 사람들이 믿지는 않았지만, 소문이라는 게 그렇듯 믿기 힘든 이야기일수록 더 빠르게 퍼지고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외부로 모습을 보이던 다현과 수호신의 모습이 소문이 돌고부터 사라졌다.
그리고 몇몇 기자가 찍은 파괴된 공장의 사진은 그러한 소문에 더욱 힘을 실어 주었다.
카더라 통신에서 시작한 소문이 점점 살이 붙으며 어느새 기정사실로 변해 더 많은 의혹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결국 청와대가 나서서 이 의혹에 대해서 기자 회견을 하겠다고 나섰다.
다현과 수호신은 이미 대한민국을 넘어 전 세계의 관심을 받는 존재였기에 세계의 눈과 귀가 대통령의 기자 회견에 쏠렸다.
그리고 김이박 대통령은 기자 회견에서 이렇게 말했다.
“다현 헌터님과 수호신님은 악마와 싸워 큰 부상을 입었고 여러 차례 수술하며 애를 썼지만 결국 어젯밤 운명하셨습니다.”
다현과 수호신의 죽음.
마계의 침략에 맞서는 유일한 희망으로 대두되던 존재의 죽음에 전 세계는 충격에 빠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