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5화
헌터본부에 있는 자신의 사무실로 돌아온 무출은 모든 게 꿈만 같았다.
하지만 이마에 만져지는 개 발바닥 모양의 문양은 자신이 겪은 일이 꿈이 아니라는 걸 확인시켜 줬다.
“그래. 이중 스파이 짓 해서 더 잘 먹고 잘살면 그만이…. 엇?”
무출이 놀라 옷깃을 걷어 손목을 쳐다봤다.
손목 안쪽에 작게 새겨진 소뿔 문양이 붉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자신과 계약한 악마, 모락스의 문양이었다.
문양에서 갑자기 불꽃이 치솟더니 허공에 커다란 불덩이가 생겼다.
그리고 불덩이 안에는 거대한 뿔이 달린 소머리의 악마 모락스가 있었다.
털썩.
곧장 무출을 무릎을 꿇고 바닥에 고개를 처박았다.
그의 심장이 터질 듯 두근거렸다.
‘모르겠지? 모를 거야! 절대 몰라야 해!’
혹시 알아차릴까 싶어 앞머리를 내려 문양은 가렸고 곧장 머리를 바닥에 처박아 원천봉쇄했다.
“미천한 종. 최무출이 레비아탄 마왕님의 돌격대장이자 가장 용맹한 악마이신 모락스 님을 뵙습니다.”
칭찬은 악마도 춤추게 만드는 법.
무출의 인사에 모락스의 입 꼬리가 씰룩였다.
-그래. 내 너에게 내릴 명이 있다.
갑자기 명을 내린다고?
-전 세계 악마계약자가 서울로 갈 것이다.
저, 정말이었어! 정말 악마계약자가 모인다고?
아니 이걸 어떻게 알았지? 마계에 스파이라도 심은 거야? 근데 왜? 뭐 하러? 숨어 있어도 모자랄 판국에.
특히나 한국은 치안이 좋고 헌터 수준도 높아서 그렇게 모이면 위험했다.
-너도 알고 있겠지. 마나 캐논 공장에 대해서 말이야.
마나캐논 공장이 갑자기 왜 나와?
하지만 무출을 빨리 눈치를 살펴 답을 했다.
“서울 외곽 남양주시에 있는 정부 관할 마나 캐논 공장 말씀하시는 거라면 알고 있습니다.”
-그래. 맞다.
다행히 정답이었다.
-그곳에 세계수가 있다.
엉? 세계수? 뭐라고? 세계수?
무출이 여전히 고개를 처박은 채로 뭐라 답할지 몰라 가만히 있자.
-세계수는 우주의 기운을 조화롭게 만드는 초월적인 존재다. 우리의 계획에 방해가 되는 존재이기도 하고.
“그럼. 계약자를 모아 그곳을 치면 되는 것입니까?”
-그렇다. 그리고 나도 그곳에 갈 것이다. 가능하겠느냐?
지구에 온다는 모락스의 말에 너무 놀라 고개를 들 뻔한 무출은 애써 담담하게 대답했다.
“물론입니다. 제가 힘을 쓰면 충분히 이동시킬 수 있습니다.”
가능하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었다.
모락스가 직접 와서 확인한다는데 제대로 못 하면 바로 죽음이었다.
-그럼. 내일 저녁까지 모두 데리고 오도록 해라.
“알겠습니다. 모락스 님.”하고 연락을 마치니 정말 기적처럼 계약자들이 서울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아니 어떻게?
대격변 이후 세계에서 입국이 가장 깐깐하기로 소문난 대한민국이었다.
그런데 누가 봐도 어설픈 녀석들이 섞여 있음에도 그냥 막 통과돼서 나타났다.
그렇게 모인 이들과 함께 미리 준비한 대형 버스를 나눠 타고 공장을 향해 달렸다.
물론 대통령과 흰둥이에게 이미 연락한 상태였다.
***
“흰둥아! 공장 강화 마법진은 계속 가동할 수 있는 거지?”
-넵! 걱정 마세요. 경호 님.
“울피. 너는 내가 알려 준 대로 그놈 잘 조종하고. 알았지?”
-용사님. 걱정 마세요.
흰둥이와 울피에게 임무를 확인한 경호가 마지막으로 다현을 봤다.
“다현! 여긴 우리끼리 해도 되니까. 그냥 돌아가서 쉬고 있어. 계속 수련하느라 피곤하잖아.”
경호가 다현을 보며 묻자.
“걱정 마. 너보다 훨씬 쌩쌩하니까.”
“정말 괜찮아?”
“괜찮다니까! 뭐든 시켜 줘. 나도 악마놈들이랑 좀 싸우고 싶으니까.”
“그래? 그럼. 너 연기 좀 하자!”
“엉? 뭘 해?”
정상적인 의식의 흐름이라면 싸우겠다고 하면 ‘그래? 그럼. 같이 싸우자!’가 돼야 하는 거 아닌가?
그런데 갑자기 연기라니?
아니 어찌 요즘 들어 싸우는 것보다 연기하는 게 더 많아진 느낌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경호의 진지한 눈빛을 보니 그냥 허튼소리는 아닌 모양이었다.
하아. 팔자에도 없는 연기라니.
“그래. 뭔데?”
“오늘 전투의 주인공이 되는 거지! 어때?”
뭐? 주인공?
***
멀리 공장이 보이는 장소에서 버스 두 대가 멈춰 섰다.
통일성이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찾을 수 없는 각양각색의 인물들이 차량에서 내렸다.
남녀노소 가리지 않았고 인종도 흑인, 백인, 황인 등등 다양했다.
옷도 정장부터 운동복까지 자유로웠으며 심지어 애완동물을 안고 있는 이도 있었다.
다만 모두 악마계약자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다.
웅성거리는 와중에 무출이 가장 앞으로 나갔다.
짝짝짝짝!
크게 박수를 쳐서 시선을 모은 무출을 그들을 훑어봤다.
다만 훑어보는 무출의 눈빛이 조금 풀려 있었다.
“다들 한국에 오시느라 수고하셨습니다. 저는 오늘 작전의 책임자 최무출입니다. 마왕 레비아탄 님의 용맹한 종복, 모락스 님의 계약자죠. 여기 모인 이유를 모두 잘 알고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감정이 느껴지지 않아 마치 기계음 같은 느낌이 드는 말투였다.
어쨌든 모두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계약한 악마를 통해 오늘 일에 대해 자세히 들었고 최무출에게 작전 지시를 받으라고 지시를 받은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오늘 작전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아시다시피 공장 안에 있는 세계수를 불태우는 것이 우리의 임무입니다.”
그때 앞줄에 있던 중년 남성이 손을 들었다.
“뭐죠?”
“모락스 님도 오신다고 하던데 정말입니까?”
“네. 맞습니다.”
“그럼. 저희가 이렇게 모일 필요 없는 거 아닙니까? 모락스 님이 가볍게 손만 휘저어도 끝날 일인데. 만약 그분이 못 할 일이라면 저희가 백 명이 아니라 천 명이 모여도 못 할 일이고요.”
지금의 지구에서 모락스가 계약자의 백 명, 천 명의 힘을 내진 못하지만, 일리가 없는 말은 아니었다.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군요. 세계수에 대해서 모르니까 말이죠. 음…. 그러니까.”
울피가 대본을 읽다 다음 페이지로 넘어가며 버퍼링이 생겼다.
“아. 그러니까 세계수는 말이죠. 단순한 나무가 아닙니다. 그렇기에 공격을 할 수도 있고 정령이나 신수를 소환할 수도 있습니다. 특히나 상대가 품고 있는 마기가 강하면 강할수록 강해진다고 하네요.”
그렇기에 세계수는 악마에게 천적과도 같은 존재였다.
그렇기에 엄마나무뿐 아니라 곳곳에 세계수가 심어져 있는 정령계는 악마에게 최악의 전장이었다.
모두 무출의 말을 이해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하늘이 울고 땅이 흔들렸다.
그리고 불꽃이 일어나며 허공에 불길이 이리저리 휘날리며 마법진을 만들기 시작했다.
“어엇!”
“뭐야!”
모두 컴컴한 저녁에 허공에 새겨지는 마법진을 보며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모락스가 모습을 드러내며 서서히 땅으로 내려섰다.
3미터가 넘는 거대하지만 단단해 보이는 몸이며 완만하게 휘어져 강해 보이는 뿔과 양손으로 쥔 거대한 전투 도끼까지.
강렬한 마기가 흘러나오는 존재감에 다들 모락스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모락스 님!”
무출이 그런 모락스를 향해 달려가 고개를 땅에 처박고는 소리치듯 말했다.
“모든 준비를 마치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여전히 울피가 조종하는 상태였지만 이제 어느 정도 적응이 된 듯 제법 감정이 실려 있는 듯한 목소리였다.
-수고했다.
모락스가 손을 휘젓자 작은 마법진이 허공에 맺히더니 마석으로 만들어진 마나 소드와 마나 폭탄이 우르르 쏟아져 쌓였다.
시중에 돌고 있는 것보다 더 좋은 제품.
-이것을 가지고 가도록. 나는 외곽에서 혹시 모를 인간들의 공격을 막도록 하겠다.
아무리 대통령의 지시로 쉽게 입국한 이들이라고 해도 무기까지 반입할 수는 없었다.
그렇기에 공장을 지키는 킬러로봇을 처리하는 것에 대해 걱정하던 이들도 있는 상태였다.
마나 소드와 마나 폭탄이 어떤 물건인가?
하급 각성자도 손에 들기만 하면 큰소리치게 만들어 주는 물건 아닌가!
-그럼. 지금 당장 무기를 챙겨 출발하도록!
무기가 생긴 이상 딱히 공장을 공략할 전술 따위도 필요치 않았다.
이곳의 책임자이자 하급 각성자인 최모출을 제외하고는 A급 수준의 각성자였다.
그렇기에 그냥 마나 소드와 폭탄을 들고 재주껏 공장을 지키는 킬러로봇인 가디언을 향해 돌진해 가면 되는 일이었다.
모두가 무기를 챙기던 그때.
“모락스 님.”
악마계약자의 면면을 살핀 모락스가 흐뭇한 표정을 짓다 자신을 부른 무출에게 고개를 돌렸다.
-나의 충실한 종, 무출아. 왜 그러느냐?
공을 세운다는 기대감에 평소보다 한껏 부드러운 목소리의 모락스였다.
“모락스 님. 세계수를 불태우는 것은 이미 기정사실과 같습니다. 저는 이번 작전이 지구 침략에 앞장서는 것보다 더 대단한 일이라 생각합니다.”
실제로 이곳에 인원을 모은 것은 무출이 한 일이었고 세계수를 불태우는 것도 계약자들이 할 일이었다.
모락스가 이 일에 한 일이라고는 지구로 넘어와 무기를 건네준 것이 전부.
하지만 세계수를 없애는 일은 무출의 말처럼 작은 일이 아니었기에 모락스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렇지. 너의 말이 맞다. 헌데….
“하지만 마계에 계신 마왕님들은 결국 모락스님의 이 업적을 잊고 지구 침략에 대한 공만 가지고 논공행상(論功行賞)을 할까 저는 너무 걱정이 됩니다. 사실 오늘 일을 성공한다면 모락스님께서 가장 큰 상을 받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소처럼 우직하고 끈기가 좋은 편이나 단순하고 기분파인 모락스는 무출의 말에 냄비처럼 화르르 달아올랐다.
-그렇지! 분명 그리될 것이야! 약아 빠진 오로바스와 베리드가 내가 잘되는 꼴을 볼 리 없으니까 말이지.
“모락스 님의 업적을 제대로 알릴 방법이 있습니다.”
무출, 아니 울피가 미끼를 던졌고.
-그게 무엇이냐?
모락스는 바로 목구멍 깊숙이 삼켜 버렸다.
“바로 세계수를 공략하는 모습을 마왕님들에게 생중계를 하는 것입니다.”
-생중계?
생소한 단어에 모락스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무출이 생중계에 대해서 설명했다.
짜악!
무출의 설명에 모락스는 아이처럼 손뼉까지 치며 좋아했다.
-그래! 아주 좋다! 아주 좋은 생각이야! 역시 나의 훌륭한 종이로다!
당장에 모락스는 마계에 영상을 보낼 수 있는 마법진을 허공에 새기기 시작했다.
***
오만의 루시퍼, 탐욕의 마몬, 질투의 레비아탄, 분노의 사탄, 색욕의 아스모데우스가 한 자리에 모여 있었다.
이제 정말 늦출 수 없는 지구 침략에 대한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서였다.
-사령관을 누구로 세울 건지 우선 정합시다!
-아니 그것보다 악마군단의 병졸 숫자에 대한 것부터 정해야지요.
-침략 후에 시끄럽게 싸우지 말고 지금 전리품에 대해서 어찌할 건지 정합시다!
서로 유리한 것만 내세우니 회의는 한 걸음도 진행되지 않고 제자리걸음 중이었다.
그때 세계수를 처리하러 간 모락스에게서 연락이 왔다.
화르르르르르륵!
거대한 불꽃이 피어오르고 그 속에서 모락스가 고개를 숙여 예를 표했다.
-이제 곧 세계수를 태워 버릴 수 있을 듯합니다.
다들 답 없이 질질 시간만 낭비 중인 회의에 짜증이 나던 참에 기분 좋은 소식이었다.
-지금부터 그 장면을 직접 보여 드리고자 연락드렸습니다.
모락스의 말에 다들 놀란 표정이었다.
-어허! 그거 좋군!
-그 장면을 보여 준다라!
-좋은 생각이군!
-모락스가 그런 생각을 하다니?
-연락은 하면서 지켜볼 생각은 안했군 그래!
거기다 다른 이도 아닌 ‘모락스’가 이런 생각을 하다니!
마계에서 가장 유명한 단순 무식 과격의 대명사 아니던가!
물론 보통 전투에서는 불가능한 방법이기도 했다.
차원 통신 자체가 꽤나 많은 마기를 소모하기도 하고 집중이 필요한 일이기에 전투 중에는 사용하기가 불가능에 가깝기 때문이었다.
-그럼. 즐겁게 감상해 주십시오.
그 말을 끝으로 모락스의 모습이 사라지고 활활 타오르는 불꽃 브라운관 속에서 악마계약자들이 세계수가 천장 위로 삐죽 튀어나온 공장을 향해 달려가는 모습이 나왔다.
흥미로운 표정으로 지켜보는 다섯 마왕은 손에 팝콘 하나씩 들고 있어도 어울릴 것 같은 모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