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1화
오만의 루시퍼, 탐욕의 마몬, 질투의 레비아탄, 분노의 사탄, 색욕의 아스모데우스.
이들은 마신의 눈에 들기 위해, 그리고 더 큰 세력과 힘을 가지기 위해 서로 견제하고 경쟁하는 관계였다.
하지만 ‘세계수’라는 문제 앞에서는 하나로 힘을 합칠 수밖에 없었다.
서로 싸우다 지구 침략에 실패하는 멍청한 짓은 피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어떻게 할 생각인지? 우릴 모았으면 무슨 생각이 있을 터인데?
사탄이 물음에 잠시 뜸을 들인 루시퍼가 답했다.
-마르바스가 죽었다. 아무리 마기 농도가 낮아 힘을 쓰지 못한다고 해도 악마 공작인 그가 죽었다는 건 세계수의 정령석으로 만든 무기가 강력하다는 방증이겠지.
어떻게 죽었는지 알 수는 없지만 자신의 과(過)를 지우기 위해 간 마르바스가 허투루 싸웠을 리 없었다.
마르바스의 죽음에 다른 마왕도 모두 놀란 눈치였다.
-악마계약자 모두를 세계수를 없애기 위해 보내고 그들을 통솔할 인원으로 공작급 악마를 추가로 보내는 것이 어떨까 하는데 다른 의견 있나?
마계의 공작은 아가레스와 마르바스가 죽으면서 사탄의 3군단장, ‘오로바스’와 레비아탄의 돌격대장, ‘모락스’. 아스모데우스의 부관, ‘베리드’만 남은 상태였다.
우선 루시퍼의 제안은 나쁘지 않았다.
마신의 눈에 들 좋은 기회였다.
어차피 ‘세계수’는 무슨 수를 쓰더라도 지워 버려야 하는 존재였고 악마계약자의 조력이 있다면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닐 것이었다.
-오로바스가 좋겠군.
-모락스라면 충분할 듯한데.
-베리드를 보내지.
사탄과 레비아탄, 아스모데우스가 모두 나섰다.
마르바스도 죽은 상황.
분명 위험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셋은 공을 세울 좋은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그렇다고 셋을 다 보낼 수도 없었다.
‘하나’보다 ‘셋’이 나을 듯하나 서로 다투다 오히려 하나보다 못할 것이 뻔했다.
-하나로 정해야 할 텐데. 어찌 정하는 것이 좋겠소?
루시퍼의 말에 사탄과 레비아탄, 아스모데우스 모두 눈치만 살폈다.
-어차피 공작급 악마가 맡아야 할 것들이 있으니 나눕시다. 이번 작전과 지구 침공의 악마군단 사령관과 부사령관을 저 셋으로 하도록 하는 거로. 어떻소?
악마의 계급은 단순히 작위를 내리면 되는 것이 아닌 힘과 능력으로 획득하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공작급 악마를 뚝딱 만들어 낼 순 없었다.
그렇기에 루시퍼와 마몬은 제안하고는 뒤로 빠졌다.
세계수 처리, 침공 사령관과 부사령관.
모두 나쁘지 않았다.
세계수 처리는 성공 확률이 높았지만, 침공 사령관과 부사령관의 공에 묻힐 수 있었다.
침공 사령관은 가장 큰 공을 세우게 되겠지만 일 처리를 제대로 못 하면 그만큼 손해도 큰 자리였다.
그에 반해 부사령관은 공은 더 적지만 사령관에 비해 리스크가 적었다.
장단점이 뚜렷하기에 결정이 쉽지 않았다.
-세계수는 모락스가 가도록 하지. 솔직히 모락스가 사령관이나 부사령관을 맡을 정도로 지휘 능력이 좋은 녀석은 아니니까.
마계의 바다인 흑해를 지배하는 거대한 마수이자 마왕인 레비아탄이 말했다.
마수의 왕인 레비아탄의 부하들 역시 마수이거나 혼혈 악마인 경우가 많았고 그의 오른팔인 모락스 역시 마수 삼족우와 혼혈인 악마였다.
그래서 좋게 말하면 소처럼 우직하고 끈기가 좋은 편이나….
단순하고 과격했다.
기분 나쁘면 우선 대가리부터 갖다 박고 보는 스타일.
그런 모락스가 침공 사령관이나 부사령관을 맡기엔 부족한 것이 사실.
아무리 서로 경쟁 관계라고 할지라도 모자란 녀석을 억지로 사령관이나 부사령관에 세워 문제를 만드는 것은 좋은 행동이 아니었다.
레비아탄의 말에 사탄과 아스모데우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그렇게 하도록 하지.
***
널따란 공장 안.
위용이 넘치는 짝퉁 세계수가 우뚝 솟아 있었고 한편에 거대한 로봇이 쌓여 있었다.
신재용 박사가 만들었던 킬러 로봇, 가디언을 챙겨 온 것이었다.
대충 보기에도 100여 기가 넘어 보이는 엄청난 숫자였다.
“오. 저거 아직도 있었네. 저거 그때 난리 나서 그렇지 꽤나 성능은 좋았는데 말이야.”
다현의 말처럼 성능이 꽤나 좋아서 챙겨 온 것이었다.
악마에게는 통하지 않는 물건이지만 악마계약자에게는 강력한 무기가 될 녀석이었다.
“그럼. 한판 할까?”
다현이 앞뒤 다 자르고 말하니 굉장히 야릇하게 들렸다.
물론 그저 대련이나 한번 하자는 소리였다.
‘정말 징하다. 징해.’
경호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냥 자자. 내일 아침에 하자고. 늦었어.”
경호의 말도 딱히 오해를 사지 않을 말은 아니었다.
“그냥 한판 하고 자! 가볍게 하면 되잖아!”
“야. 나 거의 죽다 살아난 사람이라고!”
지금 쌩쌩해 보여도 사실 살려 달라는 경호의 전화에 이렇게 온 것이었다.
“그래. 자자! 자!”
둘은 침낭을 챙겨서는 세계수 아래 대충 누웠다.
남사친 여사친을 넘어 그냥 불알친구에 가까운 관계.
그렇지만 이렇게 단둘이 누워 잠을 청하는 것은 또 처음이었다.
다현의 옆모습을 보다 괜히 머쓱해서 위로 시선을 돌렸다.
열린 천장으로 별이 쏟아질 듯 생생하게 빛나고 있는 것인 경호의 눈에 들어왔다.
“이런 말 하는 게 웃기지만 대격변 때문에 환경오염이 줄어서 그런지 별은 정말 예쁘네.”
그냥 뻘쭘해서 해 본 말이었다.
“뭐래.”
“그냥. 요즘 계속 머릿속이 복잡했는데 별을 보니 조금은 가벼워진 느낌이 들어서.”
진짜 뭐라는 거야.
“….”
“피곤할 텐데 어서 자라. 나도 엄청 피곤하네.”
할 말도 없고 이럴 때는 그냥 자는 게 최고였다.
경호가 크게 기지개를 한번 켜고는 하품을 하며 눈을 감았다.
그런 경호를 힐끗 쳐다본 다현이 무심한 척 말을 꺼냈다.
“너무 무리하지 마라. 다들 열심히 하고 있으니까. 이번 일도 마찬가지고. 네가 강한 건 잘 알고 있지만 무조건 혼자서 다 하려고 하지 마.”
아니 얘가 웬일이래?
“혹시 나 걱정해 주는 거야?”
“걱정은 개뿔. 그냥 엄마가 너 다치거나 하면 걱정하실 거니까 그렇지. 빨리 자!”
‘하여간 솔직하지 못한 녀석이라니까.’
경호가 잠시 후 새근거리며 잠이 든 다현을 쳐다보다 피식 웃었다.
‘은근 저런 면이 귀엽다니까.’
***
다현과 경호가 잠이 든 그 시간.
전 세계 모든 악마계약자에게 연락이 갔다.
한국 수도 서울 외곽에 있는 한 공장의 위치와 함께.
그곳을 파괴하라는 지령이 떨어졌다.
지금까지 자신의 위치에서 정체를 숨기고 암약하던 이들은 갑작스러운 지시에 놀란 것도 잠시 서둘러 움직이기 시작했다.
미국이나 유럽에서 한국으로 가려면 여유가 없었다.
하지만 계약자 중 권력을 가진 고위급 정치인이나 부를 이룬 기업가가 있기에 이동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문제는 입국이었다.
대격변 이후 국가 간의 이동은 굉장히 제한되고 있었다.
각성자는 강력한 능력을 지녔기에, 그러한 제약은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김이박 대통령이 미리 손을 써 둔 덕에 외국에서 오는 각성자의 입국 절차가 거의 없다시피 할 정도로 간소화됐다.
그렇게 수백의 악마계약자들이 서울로 모였다.
***
얼굴이 하얗고 예쁘게 생긴 아이.
경호 옆에서 떡볶이 맛이 어쩌고저쩌고 조잘거리고 있는 다현이었다.
‘어?’
분명 다현이었는데 어렸다.
중학교? 꿈인가?
꿈인 줄 아는 자각몽인가 보다.
그래도 오랜만에 보는 어린 다현이 귀여워 멍하니 조잘거리는 다현을 보고 있었다.
다음 순간, 껄렁거리는 남자애들, 흔히 말하는 ‘일진’들이 등장했다.
자연스럽게 시비가 붙었고 하나둘 다연의 업어치기에 쓰러지기 시작했다.
그래도 머리부터 바닥에 떨어지지 않게 배려하는 것은 잊지 않았다.
아니었으면 꿈속에서 피를 볼 뻔했다.
‘정말 타고났네. 타고났어.’
꿈이었지만 감탄이 나오는 깔끔한 업어치기였다.
일진 셋을 모조리 땅에 처박은 다현이 감탄하고 있는 경호에게 다가왔다.
“야!”
멱살을 마구 흔드는 다현.
‘뭐야!’
고개가 흔들려 머리가 어질어질할 정도.
“야! 일어나라고!”
번쩍!
경호의 감겨 있던 눈이 떠졌다.
“엉?”
다현이 경호를 흔들어 깨우고 있었다.
“뭐야! 누가 접근 중이야?”
놀라 경호가 다현에게 비몽사몽간에 물었다.
아직 주변은 어두컴컴했다.
딱히 느껴지는 것은 없었지만 혹시 몰라 기감을 키워 주변을 살폈다.
딱히 느껴지는 것은 없었다.
“뭔데? 뭐 있어?”
놀라 묻는 경호를 보며 다현이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한판 해야지!”
“하, 하하핫.”
힐끗 시계를 보니 새벽 5시를 막 지나고 있었다.
얘가 이렇게 부지런한 애였어?
“너 몇 신데 벌써 깨워서….”
“한판 하자니까!”
어제 귀엽다고 했던 거 취소다.
아주 징글징글하다 정말!
“그래! 하자! 해! 한판 하자고! 아니 두 판 세 판도 해 줄게!”
경호가 투덜거리며 일어나자 그제야 다현의 표정이 환해졌다.
‘어휴. 정말 ‘불꽃광전사’ 아니랄까 봐.’
예전에도 그랬지만 경호에게 특성을 이용하는 방법을 배우고부터는 정말 ‘미친 전사’가 된 다현이었다.
“그럼. 이 앞으로 나와.”
“왜? 여기도 넓은데.”
여기서 싸우다가는 악마놈들이나 그놈들에게 빌붙은 계약자가 오기도 전에 홀라당 세계수를 태워 먹을 게 뻔했다.
“싫으면 말고.”
“빨리 나가자!”
해맑게 대답하는 다현을 보고 경호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공장 밖으로 나왔다.
새벽 5시가 막 넘은 시간.
이제 초여름으로 넘어가는 시기라 아주 깜깜하진 않았지만 대련하겠다고 설칠 시간은 결코 아니었다.
“하아. 그래. 그럼. 저번에 알려 준 거 조합해서 공격해 봐. 내가 끊어 낼 테니까.”
“원거리 공격하라고?”
“당연하지.”
“싫은데?”
“뭐?”
“싫다고!”
한판 붙자고 했지만, 경호가 가르치는 쪽에 가까운 대련이었다.
그렇기에 원거리 공격을 말한 건데.
싫다고?
대한민국 최고의 원딜러에게 원거리 공격을 시키는 게 당연한 거 아닌가?
그때 갑자기 마력을 끌어올리기 시작한 다현의 몸에서 백염 수십 개가 피어올랐다.
야! 백염은 안 쓴다며!
그리고는 수십 개의 백염이 휘익 휙 날아와 경호 주변을 가운데 두고 ‘강강술래’하듯 맴돌았다.
야! 원거리 공격 싫다며!
경호가 자신 주변을 맴도는 백염에 시선이 팔린 그때,
다현이 양 주먹에 새하얀 불꽃을 달고 경호를 향해 날 듯 달려들었다.
“어엇!”
파앙!
백염을 단 주먹이 경호의 얼굴을 노렸다.
물론 경호는 가볍게 피했지만, 주변을 돌고 있는 백염 중 하나가 피하는 순간을 노려 뒤통수를 노려 날아왔다.
억!
마치 뒤통수에 눈이 달린 것처럼 경호가 즉시 고개를 젖혀 백염을 피했다.
그때 얼굴을 노리고 날아오는 다현의 발차기.
다현과 사실 따지기도 어려울 정도로 실력 차가 나기에 가볍게 상대하려고 했던 경호였다.
그런데.
퍼억!
다현의 발이 경호의 얼굴에 꽂혔다.
‘이런 미친불꽃전사 같으니라고! 이걸 이렇게 쓴다고!’
물론 발로 맞은 것에 대한 충격은 거의 없었다.
그냥 반격하면 바로 역전이었다.
하지만 너무 놀라 그럴 수가 없었다.
불꽃을 주변에 띄우고 그것을 조종하며 격투를 하여 마치 여러 명이 합격진을 펼치는 듯한 공격.
흡사 무협지에 나오는 이기어검술의 고수와 싸우는 느낌이었다.
경호가 슬쩍 물러나 발에 맞는 뺨을 만지며 다현에게 물었다.
“너 이거 언제 익힌 거야?”
“저번에 니가 특성을 그냥 마력을 쏟아내지 말고 의지를 담으라며.”
그래서 담았다고?
분명 지난 주에 이야기하긴 했었다.
그대 대충 ‘의지를 담는다는 느낌을 생각하면서 수련하면 도움이 될 거야.’ 정도로 이야기했던 것 같은데….
그런데 그걸 이렇게 쓴다고?
에라이! 더러운 세상!
에디슨 할아버지! 당신이 틀렸습니다.
천재는 99%의 노력과 1%의 영감이 아니라 그냥 100% 재능이에요!
100%로 재능이라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