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9화
마르바스는 옅은 흔적이 남은 상처를 손으로 쓰윽 문질렀다.
‘분명 정령의 기운이 담겨 있었다.’
마나 캐논에서 쏟아진 광선엔 분명 정령의 기운이 담겨 있었다.
착각이 아니었다.
하지만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고작해야 거인족에게 가끔 나오는 정령석으로 저리 펑펑 쏟아 낼 정도의 배터리를 만들 수 없었다.
분명 자신이 모르는 뭔가가 있었다.
그것을 찾아야 했다!
‘어차피 이대로는 돌아가지도 못한다.’
정령의 기운에 대한 정체를 밝히는 것이 마나 캐논의 문제를 찾는 거보다 훨씬 중요한 것이라는 걸 직감적으로 느꼈다.
현재로선 아무런 소득도 없이 데리고 온 악마만 죽어 버린 상태였다.
지금 마계로 돌아가는 것은 자살행위였다.
마르바스는 몸이 회복되는 대로 공장을 찾아가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뭐가 됐든 기필코 해결해서 공을 세워야 한다! 그래야 살 수 있다!’
그의 눈동자가 혈기로 번들거렸다.
***
경호는 바빴다.
마르바스는 마왕에 비하면 한참 모자랐지만 분명 최고위 악마였다.
그런 놈이 정령석의 기운을 놓칠 리 없었다.
그렇다면 반드시 공장을 찾을 것이었다.
‘미끼에 너무 큰 물고기가 걸렸어!’
참돔을 노렸는데 고래가 걸려 버렸다.
자칫하면 낚싯줄이 끊어질 수 있었다.
그래서 경호는 서둘러 줄을 튼튼하게 만들었다.
우선 대통령에게 국가적 차원으로 지원을 받았다.
흰둥이와 울피도 반강제적으로 쉬지 않고, 아니 쉬지 못하고 도왔다.
성원의 도움으로 신화의 돈과 인력도 많이 빌렸다.
거기다 바빠서 죽으려고 하는 솔딘과 파루스는 물론 드워프 장인 모두를 써서 공장의 여러 부분을 재건축했다.
꼭 필요한 것만 했는데도 시간이 모자랐다.
하여튼 모두를 갈아 넣어 이틀 만에 얼추 준비를 마칠 수 있었다.
그리고 준비를 마친 그날 밤.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공장을 살피러 마르바스가 나타났다.
나타난 곳이 공장에서 굉장히 멀리 떨어진 하늘이었고 은신까지 하고 있어 그 누구도 그의 존재를 알아채기 어려웠다.
‘왔구나!’
하지만 용력을 이용해 모든 감각을 증폭시키고 있던 경호였기에 마르바스의 존재를 바로 알아챌 수 있었다.
“자아! 그럼. 바늘을 목 깊숙이 밀어 넣어 볼까?”
경호가 공장 안에서 씨익 입 꼬리를 올리며 태블릿 PC를 조작했다.
그러자 공장 천장이 돔구장처럼 양쪽으로 벌어지며 열렸다.
‘엇!’
공장의 천장이 모두 열리자 하늘에 떠서 공장을 훑어보던 마르바스의 눈에 거대한 나무가 눈에 들어왔다.
그냥 단순하게 거대한 나무가 아니었다.
풍기는 기세가 엄청나게 떨어져 있음에도 생생하게 느껴졌다.
-세, 세계수?!
하마터면 은신이 풀릴 뻔했다.
‘세계수’라니?
세계수의 씨앗은 분명 지구 차원계에 존재하지 않는 물건이었다.
아니 존재해서는 안 되는 물건이었다.
그리고 세계수의 씨앗이 존재한다 치더라도 저렇게 자라 있으면 안 되는 거였다.
‘세계수가 분명하다!’
세계수가 그냥 땅에 씨를 뿌리고 물을 주고 비료나 좀 뿌려 준다고 저렇게 자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설마 그럼!
마르바스의 머릿속을 스치는 단어들이 있었다.
‘세계수, 조심.’
마신이 내린 계시.
그때는 정령계에서 세계수의 힘이 넘어오지 않게 조심하라는 거라고 해석했었는데.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허어! 지구에 세계수가 존재하니 조심하라는 계시였구나!
드디어 마신의 계시가 통했다!
그러고 나니 신수가 강해지고 정령이 늘어나고 마나 캐논의 배터리를 만들어 내는 등.
지금까지 들었던 의문이 모두 풀렸다.
반대로 저 세계수만 처리한다면 그 모든 것을 되돌릴 수 있다는 말이었다.
그리된다면 자신은 마계로 돌아가 다시 마왕의 가장 신뢰받던 존재로 돌아가게 될 것이었다.
‘그래. 우선 보고부터 하자!’
처리하는 거야 어렵지 않았다.
마기를 끌어모아 공장 자체를 날려 버리면 그뿐.
따악.
마르바스의 손가락을 튕기자 검붉은 빛깔의 불꽃이 피어올랐다.
화르르르르륵.
작은 불꽃이 점점 커지더니 그 안에서 루시퍼의 모습이 드러났다.
-루시퍼 님. 그들이 마계의 무기를 개조할 수 있었던 이유를 찾았습니다.
마르바스는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그 이유가 무엇이냐?
-정령석이었습니다.
-정령석?
루시퍼의 고개가 모로 기울었다.
고작 거인족 몇에게 얻은 정령석으로는 이렇게 할 수 없음을 루시퍼 역시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세계수가 있었습니다.
-그래. 세계수가 있…. 뭐라! 세계수가 있다고!
세계수?
아니 그게 왜 지구에 있어?
마르바스도 보지 않았으면 믿지 않았을 일이었다.
불신의 표정을 짓고 있는 루시퍼가 볼 수 있도록 불꽃의 방향을 틀어 공장이 보이게 만들었다.
루시퍼의 눈에도 또렷하게 세계수의 모습이 들어왔다.
-세계수?
그것도 크기가 굉장했다.
저 정도 세계수라면 침략 전에 무조건 없애 버려야 했다.
단순히 정령석이 무서워서가 아니었다.
세계수가 제대로 힘을 쓰면 정말 피곤했다.
신력이나 정령력을 뿌리고 마기를 흡수하기도 하며 신수와 정령을 강화하기도 했다.
거기다 정령계의 수호신인 미르처럼 세계수와 소통할 수 있는 존재가 있다면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었다.
-제가 처리하고 돌아가겠습니다.
-알았다. 잘 처리하도록.
루시퍼의 눈빛과 목소리에서 노기가 많이 빠졌음을 느끼고 마르바스는 속으로 웃었다.
-그럼. 잠시 후 뵙겠습니다.
불꽃이 꺼지고 마르바스는 공장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때였다.
뭔가 등 뒤에서 강렬한 기운이 느껴졌다.
-엇!
마르바스가 기운이 느껴지는 곳으로 몸을 돌렸다.
그리고 그곳엔 경호가 해맑게 웃으며 아공간에서 용아검을 꺼내고 있었다.
“오랜만이야. 마르바스.”
-너, 너는 용사….
아가레스는 거의 제정신이 아니었기에 경호를 알아보지 못했지만 마르바스는 달랐다.
한눈에 경호를 알아봤다.
그리고 다시 머릿속에 떠오르는 단어들.
‘한국, 용사, 서울, 던전, 일본, 신수, 세계수, 조심.’
정령계에서 마계를 막아 낸 용사를 보고 나니 그 단어들이 달리 보였다.
-한국에 용사가 왔고 그가 서울 던전도 처리했으며 일본에 신수와 갔으며 세계수까지 가져왔으니 조심하라. 다 네가 한 짓이 맞나?
“아마도 그런 거 같….”
경호가 피식하며 대답할 때.
쉭! 쉭! 쉭!
마르바스의 손에서 검은 마기가 칼날처럼 변해 경호의 목을 노리고 날았다.
바보같이 영화 속 주인공이라도 된 듯 굴었다.
경호가 날아오는 마기를 보며 바로 몸을 회전하여 피했지만.
츠읏!
한발 늦게 움직였기에 완전히 피할 수 없었다.
목덜미와 어깨가 베이며 피가 스며 나왔다.
-죽어라!
그나마 다행인 점은 마르바스가 루시퍼에게 왼팔이 잘려 외팔이라 빠르게 공격을 이어나가지 못했다는 점이었다.
마르바스가 오른손에 마기를 두르고 그대로 경호의 머리를 향해 휘둘렀다.
챙! 챙! 챙! 챙!
경호도 머리와 목, 심장을 노리고 날아오는 마기에 휩싸인 손을 마력검기가 피어오르는 용아검으로 쳐냈다.
검과 손이 만났음에도 쇳소리가 터져 나왔다.
쉬잇!
왼손이 없어 연계 공격이 느렸지만 그에게는 쇠꼬챙이보다 더 강한 꼬리가 있었다.
양손으로 머리를 노리고 꼬리는 허리를 향해 휘둘렀다.
경호는 그대로 몸을 회전하며 마력검기를 뿌렸다.
카앙! 캉!
오른손과 꼬리가 마력검기에 튕겨 나갔다.
비틀거리며 생긴 빈틈.
경호는 바로 몸을 날려 마르바스의 머리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콰악!
이런 미친! 검기가 실린 검을 그렇게 막는다고!
마르바스가 용아검을 그대로 물어 버렸다.
끼익. 끼익.
얼마나 치악력이 강한지 검이 빠지지도 않았다.
마르바스의 손에 마기가 짙게 실렸다.
경호는 검을 놓고 피하기보다 살을 내주고 뼈를 끊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렇게 용력을 끌어내 용아검에 더했다.
후우우우우우웅!
용아검이 덜덜 떨렸다.
폭렬마력검! 폭렬참!
시간이 조금 걸려서 그렇지 피할 순 있어도 막을 순 없는 기술이었다.
용아검에서 강한 기운이 휘몰아치자 마르바스는 물었던 검을 뱉고는 뒤로 피했다.
채에에에에에에에에엥!
용아검에서 날카로운 검명이 터지고, 반짝이는 빛이 마르바스를 쫓았다.
아가레스와 달리 마르바스는 가까스로 몸을 틀어 피해 냈다.
츠읏!
하지만 완전히 피하지 못하고 허리가 한 뼘쯤 베이며 피를 쏟아 냈다.
‘됐다!’
경호도 준비 시간이 긴 폭렬참으로 단번에 마르바스를 죽일 수 있을 거로 생각하지 않았다.
경호가 손을 뻗자 용력이 날아가 마르바스의 감각을 증폭시켰다.
-끄아아아아아아아악!
통했다!
마르바스는 허리의 상처에서 느껴지는 상상을 초월하는 아픔에 상체를 숙이며 비명을 질렀다.
‘아! 이런 제길!’
길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경호가 폭렬참을 다시 쓰기엔 충분했다.
채에에에에에에에에엥!
용아검에서 날카로운 검명이 터지며 다시 한 번 폭렬참이 마르바스를 향해 날아갔다.
스걱!
목이 그대로 날아가며 허공에 떠 있던 마르바스가 머리가 분리된 채 그대로 바닥으로 떨어졌다.
“이거 두 방은 아직 무리…. 크윽.”
경호 역시 말을 끝마치지 못하고 휘청거리더니 그대로 추락했다.
쿠우웅!
바닥에 처박힌 경호가 떨리는 손으로 힘겹게 단축 번호 1번을 눌렀다.
***
“다현 누님. 살살하세요. 그러다 다치면 어쩌려고요!”
성원이 다현을 위해 특별히 만든 훈련장에서 훈련 중인 다현을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요즘 들어 정말 미친 사람처럼 던전 공략을 나서길래 저러다 정말 큰일 날까 싶어 이 훈련장을 특별히 만들어 준 거였다.
최첨단 모션 카메라가 다현의 위치를 파악하면 벽에 뚫린 수백 개의 구멍에서 강화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진 공이 총알처럼 빠르게 쏘아져 나갔다.
다현이 고안하고 신화 마도공학연구소에서 만든 훈련 기계였다.
“아직 느려. 이런 속도면 어차피 악마놈들이랑 싸우면 죽는다고!”
이미 곳곳에 시퍼런 멍이 들어 있는 다현이었다.
하지만 멈출 수 없었다.
여기선 맞아 봐야 고작 멍이 들 뿐이었지만 악마군단이 넘어오면 목숨이 오가는 상황이 될 것이었다.
문득 경호와 했던 대화가 머릿속을 스쳐 갔다.
-다현아. 악마군단이 오면 후방에서 화력 지원해.
-싫어! 전방에 가서 다 때려죽일 거야!
-때려죽이기 전에 니가 맞아 죽으니까 문제지!
불꽃광전사 클래스에 광분까지 있는 다현이었기에 분명 싸우다 보면 전방으로 달려갈 것이 경호는 걱정이었다.
다현은 분명 강했다.
백염을 제 몸처럼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었기에 이제 악마와 싸워도 밀리지 않았다.
하지만 그건 백염을 이용한 공격이 그렇다는 거지.
육탄전은 또 다른 문제였다.
[화염]이란 특성은 공격력은 발군이었지만 방어력은 떨어질 수밖에 없는 특성이었다.
그렇기에 후방 지원을 제안했고 당연히 다현은 거부했다.
그리고 그때부터 훈련 방향을 바꾸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직도 보는 사람이 걱정할 정도로 아슬아슬하기만 했다.
그렇게 한참을 더 훈련하던 다현이 목을 축이러 훈련장을 나왔다.
띠리리리. 띠리리리.
그때 다현의 전화기가 울렸다.
경호의 전화였다.
“어? 요즘 바쁘다더니 뭔 일이래?”
-사, 사.
사. 사. 뭐래?
설마 사랑 고백!
중학교 때부터 자신을 좋아하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하지만.
갑자기 이런 타이밍에 전화로 고백을 한다고?
‘하아. 이 똥멍청이!’
하여간 마음에 드는 구석이 없는 녀석이었다.
“뭐! 뭔데! ‘사’ 다음에 뭔데! 빨리 말해!”
내가 말한다고 뭐 바로 ‘오늘부터 1일이다!’ 이럴 줄 알고?
흥! 우선 운애부터 확실히 정리하고 오라고 해야지!
요즘 대통령 딸도 자주 만난다고 하던데 그것도 그렇고.
하여간 이런 전화 고백으로 어림도 없지!
-사, 살려 줘.
“그래. 니 마음은 아는…. 뭐! 야!”
아니 ‘살려 줘’가 왜 나와!?
“야! 너 어디야? 야!”
-끄으윽.
옆에 있던 성원도 이상함을 느꼈다.
“설마 형님입니까?”
“살려 달라는데!”
분명 오늘 저녁부터 공장에서 미끼를 물 악마를 기다린다고 했었다.
“악마!”
“아니 그게 무슨 소리야?”
따로 이야기하지 않았기에 다현은 모르고 있는 일이었다.
“누님. 우선 차에 타시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