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8화
경호는 정령계에서 마계 침략을 막고 귀환 후 힘을 숨기고 엄마와 오순도순 살겠다고 다짐했었다.
‘이게 다 악마 새끼들 때문이야!’
바빠도 너무 바빴다.
솔딘이나 파루스를 달래 가면서 공방 상황도 확인해야지.
다현이나 이나를 비롯한 다른 이들도 가르쳐야지.
하루가 다르게 정령계에 있는 엄마나무를 닮아 가는 세계수도 관리해 줘야지.
은가누와 함께 인원이 확 늘어난 오크 일행도 봐줘야지.
거기다 요즘엔 대통령 호출도 잦아진 편이었다.
똑똑똑!
오늘도 경호는 전에 왔던 청와대 내부 비밀 회의실 문을 두드렸다.
“찾으셨다고요!”
경호가 피로가 가득 쌓여 보이는 얼굴로 문을 열었다.
사실 경호 정도의 능력자가 육체적으로 피로를 느낄 것도 없지만 심적으로 부담이 크기에 느끼는 피로감은 그도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회의실 안에는 있는 대통령과 비서실장, 안보실장의 얼굴은 경호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았다.
“요즘 자주 자네에게 의지하는 것 같아서 미안하네.”
김이박 대통령이 생기 없는 미소를 지으며 경호를 반겼다.
피곤에 찌든 얼굴이었지만 대통령 말에 담겨 있는 진심을 느끼고는 경호는 고개를 저었다.
“더 의지하셔도 괜찮습니다.”
어차피 마계를 못 막으면 끝나는 세상에서 서로에게 미안하고 말고 하는 건 문제가 아니었다.
“그나저나 무슨 일입니까? 급하다고 하셨잖아요.”
경호가 자리에 앉으며 묻자.
“우선 이걸 보시겠습니까?”
안보실장의 말과 함께 회의실 스크린에 영상이 흘러나왔다.
영상의 구도를 봤을 땐 특전팀 요원의 전투 헬멧에 내장된 캠 영상 같았다.
좁은 골목길.
그 끝에 부서진 창고.
그리고 불타오르는 잔해를 해치고 나오는 거대한 악마.
콰앙!
“아니!”
자신도 모르게 놀라 회의실 탁상을 주먹을 내려쳤다.
경호의 주먹에 탁상은 박살 나 쪼개졌고 셋은 놀라 그런 경호를 쳐다봤다.
‘마르바스 저 새끼가 왜 저기서 나와!’
저놈은 루시퍼의 오른팔인 놈이었다.
악마 귀족 중에서도 그 위치가 손가락에 꼽는 최강자였다.
솔딘, 파루스의 활약으로 내려오게 된 것이었지만 상상도 못 한 부분이었다.
“아는 악마입니까?”
이상한 질문이었지만 경호의 반응을 보면 아는 것 같기도 했다.
“최상위 악마 귀족 중 하나입니다. 저번에 김동진 대표의 악마 사건 때 악마와 비슷한 놈이죠. 강하긴 이놈이 더 강할 겁니다.”
분위기가 한층 더 가라앉았다.
멈췄던 영상이 다시 돌아갔다.
훈련이 잘된 이들이었다.
서둘러 목표물인 마르바스를 향해 정령석으로 작동하는 마나 캐논을 쏘았다.
마르바스가 우습다는 듯 날아오는 마력 광선을 파리 쫓듯 손을 휘휘 저었다.
하지만.
쾅! 콰앙!
그때마다 튕겨 나가지 않고 마력 광선이 몸에 꽂혔다.
흐릿한 영상이었지만 마르바스가 당황했다는 것은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쾅! 쾅! 쾅! 쾅! 쾅!
마력 광선이 쉬지 않고 마르바스의 몸을 때렸다.
하급 악마였다면 진작에 한 줌의 먼지로 화해 흩어졌을 정도의 공격이었다.
하지만 상대는 그저 그런 악마가 아니었다.
마르바스는 미간을 찌푸리더니 흐릿하게 변해 사라졌다.
순신간에 사라진 마르바스의 모습에 당황했는지 캠의 움직임이 요란스러워졌다.
상하좌우 바쁘게 움직이는 카메라 앵글이 어느 순간 멈췄다.
지상이 아닌 허공이었다.
그리고 그곳에 마르바스가 떠 있었다.
크아아아아아아아아아!
찢어지고 패였던 상처가 모두 아문 마르바스가 포효와 함께 빠르게 달려들었다.
영상 속에서도 잔상이 생길 정도의 움직임.
마력 광선 몇 발이 쏘아져 나가긴 했지만 영상은 곧 끝이 났다.
이를 악문 안보실장의 눈가가 붉어졌다.
“후우. 저기 간 녀석들 정말 괜찮은 놈들이었습니다.”
경호가 보기에도 그래 보였다.
마르바스가 날아오는 그 마지막 순간까지도 포기하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아쉽게도 마르바스는 그 정도 각오만으로 이길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경호 씨. 저 악마를 잡을 좋은 방법이 있을까요?”
대통령 말에 잠시 고민하던 경호가 고개를 저었다.
“죄송하지만 저 악마는 그냥 돌려보내야 할 거 같습니다.”
“네엣? 경호 씨. 그게 도대체 무슨 소리입니까? 저런 악마를 다시 마계로 돌려보내자고요?”
“인류가 가진 것 중 악마를 상대할 최고의 무기는 마나 캐논입니다.”
마계의 마왕이나 최상급 악마는 경호나 최상급 헌터, 신수, 정령의 힘이 필요하지만, 악마군단의 대부분은 중급 이하의 악마였다.
그런 악마에게 마나 캐논은 최고의 대안이었다.
최상급 헌터나 신수, 정령은 마나 캐논처럼 공장에서 뚝딱뚝딱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경호의 당연한 말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마르바스 정도 되는 악마라면 이번 격돌로 배터리가 단순한 전기 에너지가 아니라는 걸 알았을 겁니다. 어쩌면 정령석이라는 걸 알았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그것을 마계에 알려 침략이 늦어지더라도 방비를 할 겁니다.”
마나 캐논에 대한 방비가 된 악마와 싸우는 것은 몇 배는 힘겨울 것이 뻔했다.
“그렇다는 건 그전에 한 이야기처럼 미끼를 쓰면서 저 악마는 살려 보낸다는 거지요?”
미끼로 만든 서울 외곽의 공장에 계약자를 모두 모아 폭사시키려고 했던 작전에 마르바스까지 끼우려면 조금 바꿀 필요가 있었다.
“네. 악마라면 눈이 뒤집힐 그런 미끼를 준비해서 아슬아슬하게 공장을 날리고 마르바스를 보내 주려고요.”
마르바스급 악마라면 멀리서 공장을 날려 버릴 수도 있었기에 제대로 된 미끼가 필요했다.
그 뒤로도 경호는 대통령과 한참을 더 이야기를 나누고 나서야 회의실을 나섰다.
***
어두컴컴한 저녁 시간 경호는 흰둥이와 울피를 데리고 세계수를 찾았다.
대통령에게는 마나 캐논을 이야기했지만 사실 인류의 가진 최고의 무기는 바로 ‘세계수’였다.
‘미르가 정말 좋은 선물을 줬어.’
미르가 선물로 건넨 엄마나무의 씨앗.
그것이 어느새 이렇게 자랐다.
크기는 동물원에 어울릴 정도를 유지하고 있었지만.
-경호 님. 세계수가 요즘 들어 더 성장하는 거 같네요.
-그러게요. 기운이 점점 강해지네요.
흰둥이와 울피의 말처럼 경호가 보기에도 그랬다.
‘정령계의 엄마나무 만큼이나 성장했다.’
수령을 알 수 없을 정도의 엄마나무와 몇 달밖에 안 된 경호가 심은 세계수가 비교되는 것이 이상하지만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사신이 세계수를 성장시키기 위해 힘을 전달하고 있기도 하지만 최근 들어 마기 농도도 엄청나게 높아졌으니 그럴 거야. 그나저나 흰둥이 너는? 아직 레벨 7이야?”
-신수들이 늘어나서 곧 8로 오를 거 같아요.
7레벨부터는 단계 단계가 차이가 크기에 도움이 될 것이었다.
-그런데 경호 님. 여러 가지로 바쁘신데 왜 이곳은 오자고 하신 거예요?
단순히 세계수나 구경하며 산책하기엔 경호나 흰둥이나 너무나 바빴다.
경호도 경호였지만 흰둥이도 마계 침략이 코앞으로 오면서 신수를 관리하고 사도로 임명하며 최대한 힘을 키우기 위해 애쓰는 중이었다.
“미끼를 더 맛있어 보이게 만들려는 중이거든.”
-미끼를 더 맛있게 보이게 만든다고요?
경호가 의지를 일으켜 세계수에게 전달했다.
잠시 후 세계수에서 번쩍이는 빛이 나며 가지 하나가 쑤욱하고 자랐다.
그렇게 자란 가지가 경호의 손에 다가오더니 작은 열매가 맺히며 툭하고 내민 손에 떨어졌다.
“자두처럼 생겼네.”
그것을 아공간에 넣은 경호가 흰둥이와 울피의 목덜미를 잡았다.
-경호 님! 저도 이제 제법 빨라서 달려…. 아아악!
흰둥이의 말이 끝나기 전 경호가 몸을 날렸다.
심지어 울피는 너무 갑작스러워 말도 한마디 못 하고 그대로 끌려갔다.
***
타악.
엄청난 속도로 밤하늘을 날아온 경호가 한 커다란 창고 같은 건물 지붕에 내려섰다.
-윽. 이건 여전히 적응이 안 되네요.
그도 그럴 것이 경호가 예전보다 훨씬 강해지며 비행 속도가 엄청나게 빨라졌기 때문이었다.
-아이고. 골이 다 흔들리네.
머리를 흔들며 투덜거리는 흰둥이 옆에서.
-케엑! 켁!
울피는 켁켁 거리며 울렁거리는 속을 진정시키고 있었다.
흰둥이가 안타까운 눈으로 그런 울피를 보다 물었다.
-그나저나 여긴 어딥니까?
“악마도 홀딱 빠질 미끼를 설치할 곳.”
-아. 여기 들었어요. 마나 캐논 만드는 곳이라고 속이고 있는 곳이잖아요.
국방과학연구소 생산공장.
흰둥이는 길드원과 계약한 신수를 통해 들어 알고 있었다.
“맞아. 그럼. 들어가자.”
옥상 문으로 들어가 아래로 내려가니 텅 빈 넣은 공간이 나타났다.
-아무것도 없네요. 여기서 계약하고 한다던데?
울피도 정신을 차리곤 주변을 둘러봤다.
“내가 오늘 치워 달라고 했거든.”
비서실장이 빠르게 처리한다고 하더니 역시나 일 처리가 확실한 인물이었다.
어차피 이곳에서 더는 계약할 필요가 없다.
악마계약자에게 약을 치기 위해서 장소를 공개하고 이곳까지 오게 해서 팔았던 것인데 마르바스라는 대어가 입질을 하는 상황이었다.
그 대어만 물면 계약자 같은 잡고기는 알아서 따라오기에 더는 물건을 팔지 않아도 상관없었다.
경호는 아공간에서 아까 세계수가 손에 떨어뜨렸던 열매를 꺼냈다.
-그런데 그게 뭡니까?
-열매 같긴 한데.
흰둥이와 울피가 경호가 꺼낸 열매에 호기심을 보였다.
“먹어 볼래? 이거 맛있거든.”
-네?
“먹어 봐.”
경호가 반신반의하는 표정으로 머뭇거리는 흰둥이의 입에 열매를 밀어 넣었다.
우웁! 우우웁!
처음에는 숨 막힌다는 듯한 얼굴이던 흰둥이 표정이 점점 밝게 펴졌다.
-우아앙. 이고 증말 마씨느데영!
정말 잘 익은 자두 같은 새콤달콤한 맛이 나는 과일이었다.
입을 우물거리며 야무지게 먹은 흰둥이가 입을 벌려 퉤엣하고 엄지손톱만 한 씨를 뱉었다.
“어때?”
-맛있네요. 씨가 좀 크긴 하지만요.
“넌 뭐 먹을 때 모든 감각을 다 미각에 쏟아붓는 거냐?”
-그게 무슨….
“먹을 때 다른 기운은 못 느꼈냐?”
그때 바닥에 떨어져 있던, 흰둥이가 뱉어 낸 씨에서 신력이 감돌기 시작했다.
-어? 저, 저거!
울피가 바닥에 떨어진 씨를 보며 놀라 소리쳤다.
씨가 벌어지고 뿌리와 싹이 나왔다.
씨라면 응당 그럴 수 있지만, 바닥에 떨어진 지 몇 초가 지나지 않은 시간이었다.
거기다 자연스레 뿌리가 바닥을 파고들고 있었다.
문제는 공장의 바닥이 부드러운 흙바닥이 아닌 강화 콘크리트 바닥이라는 점이었다.
-이, 이게 뭡니까?
울피가 경호를 쳐다보며 물었다.
“세계수 짝퉁이라고 해야 하나?”
금세 묘목같이 성장한 세계수가 초 단위로 변화를 일으키고 있었다.
나무가 점점 높아지며 굵기도 계속 굵어졌다.
-세계수 짝퉁이요?
흰둥이도 놀라 다시 물었다.
“어. 자세히 안 보면 구분 안 되는 걸 만들어 달라고 했지.”
-아니. 그런 게 된다고요?
흰둥이도 수호신으로 이것저것 많이 알고 있었지만 세계수는 분야가 좀 달랐기에 그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 부분이 많았다.
“사실 나도 안 되면 말고 하는 마음이었어.”
별거 아니라는 듯 말했지만 사실 잘 모르는 것은 경호도 마찬가지였다.
“뭐 됐으면 됐지.”
경호와 흰둥이가 계속 자라나는 세계수를 보며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때 전화가 울렸다.
대통령이었다.
“네. 대통령님.”
-준비가 끝났네.
“네. 그럼. 가겠습니다.”
경호가 다시 흰둥이와 울피의 목덜미를 잡고 날아올랐다.
-끼아아아아아!
-끼우우우우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