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9화
이제 세상의 모든 이들이 진실을 알게 됐다.
빌어먹게도 대격변은 마도공학으로 인류를 더욱 발전시킬 새로운 기회가 아니었다.
또한, 지금의 이 아슬아슬한 평화 역시 정말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도 알았다.
악마군단이 쏟아져 나오는 3페이즈가 다가오고 있었다.
그리고 곧이어 악마 귀족과 마왕도 넘어오게 될 마지막 페이즈가 도래할 것이었다.
종말이 다가오면 세상이 어떤 모습이 될까?
우리는 대충 예상할 수 있는 일들을 이미 겪은 적이 있었다.
홍수, 지진, 폭동, 전쟁 등등.
불안은 공포를 낳고 광기를 일으킨다.
“겨, 경호야. 저건….”
“후우. 완전 개판이구나.”
경호가 식당 일을 마치고 지숙과 함께 홀에 앉아 TV를 틀었다.
화면에선 전쟁이 난듯한 장면들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부서진 가게와 불타는 차량.
강도로 변한 시민들과 그런 시민을 막기보다 앞장서는 각성자들.
그것은 영화가 아닌 전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는 소요 사태에 대한 뉴스였다.
“아들. 저게 도대체 뭐니? 어딘데 저래?”
어디라고 특정할 것도 없었다.
치안이 가장 좋은 편인 한국 정도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저런 지옥 같은 상황이었다.
‘지옥은 꼭 마계에서 악마가 넘어와야 펼쳐지는 게 아니구나.’
경호는 화면을 보며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내일 지구의 종말이 온다고 할지라도, 나는 오늘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 하는 이는 사실 별로 없었다.
‘사과를 훔친다면 모를까. 그래. 저게 인간의 본성이지.’
TV를 보고 있던 지숙의 표정이 점점 더 어두워졌다.
“엄마. 안 그래도 성원이랑 이야기했는데 식당 일을 잠시 쉬어야 할 거 같아. 이제 한국도 치안이 불안해질 거 같기도 하고 마계 침략도 더 강해질 테니까. 그래서 지금 골목 정비 사업도 뒤로 미룬 상태고 말이야.”
사실 골목 정비 사업은 마수고기 요리를 활성화할 요량으로 기획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미 마수고기는 최고의 히트 상품이 되어 신화 그룹의 가장 덩치가 큰 캐시카우가 된 상태였기에 그럴 필요가 없었다.
TV에서 끔찍할 현실을 지켜본 후였기에 지숙도 고개를 끄덕였다.
“엄마. 그리고 내일부터는 미호랑 같이 길드 하우스에서 지냈으면 좋겠어. 거기 구내식당에서 일을 도우면서 말이야. 어때?”
“그래. 그러는 게 좋겠다. 알았어. 아들.”
아들이 걱정하는 마음을 알기에 지숙도 애써 웃으며 말했다.
우우웅. 우우웅.
그때 경호의 손목에 진동이 울렸다.
‘허업!’
발신자 이름을 확인한 경호가 서둘러 숨을 삼켰다.
-김이박 대통령님.
아니! 대통령이 왜?
물론 이나를 치료하며 전화번호를 알려 준 적은 있었다.
“아들 누군데?”
“어. 다현이. 잠깐만 전화 받고 올게.”
경호는 괜히 지숙이 놀라 밤새 잠을 설칠까 염려되어 대충 얼버무리며 밖으로 나왔다.
물론 지금 이런 행동이 지숙을 더 놀라게 만들 일이라는 건 생각하지 못하는 경호였다.
“여, 여보세요?”
역시나 대통령은 어려운 상대였다.
-경호 씨. 대통령입니다.
정치인이라 그런지 목소리도 참 좋은 사람이었다.
“네. 대통령님. 무슨 일이십니까?”
-정말 죄송하지만 제가 있는 곳으로 와 주실 수 있을까요? 상의드릴 일이 있습니다.
“급한 일인가요?”
-네. 급합니다.
“알겠습니다.”
경호가 다시 가게로 들어왔다.
갑작스러운 대통령의 전화에 조금 상기된 얼굴이었다.
“그래. 다현이랑 전화는 잘했니?”
지숙이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물었지만, 경호는 그 표정의 숨은 뜻까진 알아차리진 못했다.
“어. 그게 갑자기 할 이야기가 있다네. 좀 보고 올게. 그래도 될까?”
“어휴. 엄마가 무슨 애니? 왜? 혼자 못 있을까 봐? 어서 가봐.”
“어. 그럼. 금방 다녀올게.”
“아니 아들 금방 안 와도 된다. 천천히 있다가 와!”
경호가 지숙의 말에 고개를 갸웃했지만 급한 일이라는 대통령의 말에 서둘러 가게를 나섰다.
경호가 들뜬 표정으로 급하게 나가자 지숙이 큭큭거리며 웃었다.
“아휴. 둘이 그런 사이였는 줄은 전혀 몰랐네.”
***
“정말 심각하군.”
청와대 내부 비밀 회의실에 대통령과 비서실장, 안보실장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들이 앉아 있는 테이블에 여러 사진과 문서가 어지러이 펼쳐져 있었다.
똑똑똑.
그때 회의실 문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다.
설마 하는 표정으로 모두의 시선이 문을 향했고.
“안녕하십니까? 대통령님.”
경호가 문을 열고 대통령을 향해 인사를 했다.
“허허허. 청와대 입구에서 연락이 올 줄 알았더니…. 어떻게 들어왔습니까?”
누군가와 같이 왔다면 저렇게 경호가 문을 열고 들어왔을 리가 없었기에 대통령이 놀라 물었다.
“아. 다들 바빠 보이길래 조용히 들어왔습니다.”
물론 경호에게는 허수아비에 불과했지만, 청와대 요원은 갑작스러운 균열 및 빌런의 침입에 대처하기 위해 모두 A급 이상의 헌터들로 배치되어 있었다.
“어쨌든 잘 왔어요. 여기 앉아요.”
안보실장이 경호가 자리에 앉아 앞에 놓인 사진과 서류를 정리해서 건넸다.
“반갑습니다. 이규석 국가안보실장입니다.”
단단한 인상의 중년 남성이 옅은 미소와 함께 인사를 건넸다.
“네. ‘최경호’라고 합니다.”
“지금 드린 자료는 우리나라에 암약하고 있는 대형 빌런 조직 관련 최근 조사 자료입니다.”
경호가 고개를 끄덕이며 사진과 서류를 훑었다.
빌런 조직이라고 하지만 대격변 전 조폭과 크게 다를 건 없었다.
덩치 좋은 깡패에서 특성 좋은 각성자라는 것만 다를 뿐이었다.
그렇기에 제정신 박힌 녀석들은 예전 조폭과 크게 다르지 않은 범위에서 활동할 뿐이었다.
불법과 합법, 그 교묘한 사이를 균형감 있게 지키는 그런 일들.
“무기를 사 모으고 있네요? 이거 단순하게 빌런 조직이 가지고 있을 수준이 아닌데요?”
사시미, 알루미늄배트 같은 게 아니라 마나 캐논이나 최용사 공방 아이템 같은 걸 빌런 조직에서 대량으로 사 모으고 있었다.
빌런 조직에 대한 지식이 없는 경호가 보더라도 분명 문제가 있어 보였다.
“저희가 알아본 바로는 악마계약자 조직에서 빌런 조직을 흡수하려고 하는 것 같습니다. 거기다 무기도 챙기려고 하는 것 같고요. 자신들의 정체를 들키지 않기 위해 빌런 조직을 쓰는 것이지요.”
“확실한 겁니까?”
“빌런 조직과 접선하는 이들에게서 악마계약자의 특징인 몸에 문양과 마기를 파악했습니다.”
“그들은 추적했습니까?”
경호의 물음에 안보실장이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아쉽게도 중간에 놓쳤습니다. 그래서 ‘비스트’ 헌터님에게 추적을 요청했습니다. 그리고 빌런 조직에 대한 대처를 위해 이성원 길드장님에게 협조 요청을 드리는 와중에 최경호 씨에게 연락해 보라는 권유를 받았습니다.”
응? 성원이? 짬 처리 한 것은 아닐 텐데?
머릿속에 물음표가 떠오른 순간.
“신화길드원은 얼굴이 알려진 이들이 많아서 쓰기 어렵다고 하면서 그래서 은밀하게 힘을 쓰는 것은 경호 형님이 훨씬 나을 거라고 했습니다.”
은밀하게 라고 하니 떠오르는 이들이 있었다.
사실 이런 일을 위해 키운 힘은 아니었지만 지금 쓰기에 딱 좋은 힘이었다.
“경찰이나 군대를 쓰기 어렵겠지요?”
경호의 말에 안보실장이 고개를 저었다.
“부끄러운 말이지만 악마계약자의 손이 어디까지 닿아있는지 파악하기 어렵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경호는 고개를 저었다.
스스로 부끄러움을 알고 사과하는 모습도 훌륭했고 실제로 전 세계에서 가장 안정된 치안 상태를 보이는 나라가 한국이었다.
물론 그 이유 중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가장 큰 악마계약자 조직인 김동진 패거리가 아가레스와 함께 죽어 버린 탓이기도 했지만.
“제가 처리할 조직이 어디입니까?”
“여기입니다. 우리나라 최대 빌런 조직이자 아시아 3대 조직 중 하나인 ‘혈랑회’입니다. 각성자만 백여 명이고 A급 이상도 삼십이 넘습니다. 특히 두목과 사대천왕이라고 부르는 간부는 거의 S급에 근접한 실력자입니다.”
거의 대형 길드에 맞먹는 전력이었다.
그러한 점을 알기에 안보실장은 자신이 부탁하고도 입이 타는지 침을 꿀꺽 삼켰다.
그러나 1초의 망설임도 없이.
“알겠습니다. 오늘 바로 가겠습니다.”
“네엣?!”
너무나 쉽게 수락하는 경호를 보고 오히려 안보실장이 당황할 정도였다.
초조하게 둘의 대화를 지켜보던 대통령의 표정이 환해졌다.
“저, 정말 도와줄 수 있겠나?”
도움이 절실하긴 했지만 이미 충분히 넘치게 도움을 받은 상황에서 더 도움을 강요할 수 없다는 걸 대통령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다른 조직은 청와대 직속 부대를 동원해 정리가 가능했지만 ‘혈랑회’는 헌터본부나 군부대의 힘 없이는 해결이 불가한 수준이었다.
그래서 초조하게 경호의 입만 바라보고 있던 것이었다.
“어차피 세상을 위해 해야 할 일입니다. 그리고 저에게 이 일에 딱 맞는 이들이 있거든요.”
김이박 대통령이 벌떡 일어났다.
경호가 ‘왜?’하고 멈칫거릴 때.
“정말 고맙네. 정말 고마워.”
대통령이 진심을 담아 감사를 표했다.
그 모습에 박재호 비서실장과 이규석 국가안보실장도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했다.
“당연히 할 일인데요. 감사 인사는 끝나고 받도록 하지요. 그리고 저는 괜찮지만, 이번 일에 함께할 이들은 좀 더 나은 대접을 받게 노력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당연하죠. 꼭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럼. 처리하고 연락드리겠습니다.”
경호가 혈랑회 자료를 들고 회의실을 빠져나왔다.
***
자정이 다 되어 가는 늦은 밤이었다.
“오랜만이네요. 테일러.”
“경호 님. 드디어 저희가 나설 일이 생긴 겁니까?”
터질 듯한 근육질 몸을 가진 검푸른 갈기를 가진 워울프, 테일러가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며 웃었다.
분명 기분 좋다는 표현이었는데 보는 입장에서는 간담이 서늘한 기분이 드는 모습이었다.
“그동안 많이 찾지 않아서 미안해요.”
“아닙니다. 크릉. 이계인 보호구역에서 빼 주시고 이렇게 전사의 긍지를 가질 수 있게 해 주신 게 다 경호 님 덕분인 걸 잘 알고 있습니다.”
훈련과 퀘스트를 수행하며 예전보다 월등히 강해진 이들이었다.
특히 대전사인 테일러는 하급 악마와 싸워도 밀리지 않을 정도의 투기를 흘리고 있었다.
“그렇게 생각해 주면 감사하고요.”
“그런데 무슨 일로 이런 시각에 찾으신 겁니까?”
경호가 빌런 조직인 혈랑회에 대해 설명했다.
“실전이군요.”
테일러의 몸에서 투기가 더 강하게 흘러나오며 눈빛이 번들거리기 시작했다.
전투에 있어 긴장하기보다 먼저 흥분하는 종족답게 푸른 이빨 부족의 삼십여 명의 전사들 모두가 “아우! 아우! 아우우우우!” 하며 하울링 하며 기뻐하는 모습이었다.
“조용히 가야 하는데 가능하겠습니까?”
사실 지금 전력으로 아무리 강하다고 해도 A급 빌런은 어려운 상대가 아니었다.
하지만 악마계약자가 알아채고 숨어버리는 ‘타초경사’의 우(愚)를 범하면 안 되는 일이었다.
경호의 물음에 테일러가 다시 간담이 서늘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뚜득. 뚜드득.
그리고 그 자리에서 2미터가 훌쩍 넘는 테일러가 몸을 둥글게 말더니 뼈가 어긋나는 소리와 함께 몸이 들썩이며 모습이 변하기 시작했다.
크릉!
-이러면 크게 눈에 띄지 않고 갈 수 있을 겁니다.
검푸른 갈기를 가진 멋들어진 늑대로 모습이 변한 테일러가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었다.
확실히 은밀하게 움직일 수 있을 법한 모습이었다.
-모두 변신하도록!
“아우! 아우! 아우우우우!”
하울링과 함께 삼십여 명의 전사들 역시 북슬북슬한 털을 가진 늑대의 모습으로 변신을 마쳤다.
달빛 아래 잿빛 늑대 삼십여 마리가 살기를 일으키며 뭉쳐 있는 모습은 꽤나 장관이었다.
테일러가 전사들을 돌아보다 고개를 쳐들었다.
아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
‘어후. 야!’
경호가 테일러를 보며 짧은 한숨과 함께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니, 조용히 가자고 했는데 그때부터 지금 몇 번이나 소리 지르는 거냐고!’
외형은 은밀하게 변했는지 모르겠지만 목청은 더 커진 듯했다.
그 와중에도 또 테일러의 하울링을 이어받아 아우! 아우! 거리는 전사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