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4화
“이나야…. 아빠는.”
김이박 대통령은 흔들림 없는 딸의 눈동자를 쳐다보며 말을 멈췄다.
속으로는 백번이고 천번이고 말리고 싶었지만.
“우리 딸이 이렇게 멋진 말을 하는 게 너무나 자랑스럽구나.”
“여보!”
김이박 대통령의 말에 옆에서 묵묵히 지켜보던 최영숙 여사가 놀라 그를 불렀다.
누구보다 딸을 아끼는 아빠라는 걸 잘 알고 있는 그녀였다.
‘정말 괜찮겠어요?’라고 그녀가 눈빛으로 물었다.
“당신도 그렇지? 우리 딸이 이렇게 멋진 말을 할 줄 누가 알았어?”
흔들림 없는 딸의 눈빛과 달리 지진이라도 난 듯 떨리는 남편의 눈빛을 본 그녀였다.
“당신은 이렇게 거짓말 못 해서 어떻게 대통령을 했대.”
“아빠. 걱정하지 마. 여기 수호신님도 나에게 특별한 힘이 있다고 하잖아. 응원해 줄 거지?”
“물론이지. 아빠가 우리 딸을 위해 매일 기도할게.”
그렇게 이나를 꼭 끌어안아 준 그는 몸을 돌려 수호신과 경호, 성원을 봤다.
지진이 일 듯 떨리던 눈동자는 어느새 멈춰 있었다.
대통령이 경호를 보며 허리를 굽혀 정중하게 인사를 했다.
“잘 부탁드립니다.”
경호 역시 그런 대통령을 향해 허리를 굽혔다.
“알겠습니다. 대통령님.”
둘의 인사를 지켜보던 이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분명 그녀가 아는 선에선 이 자리에서 가장 위치가 낮은 이가 바로 저 사람이었다.
수호신은 말할 것도 없고 이성원 길드장의 의형이라고는 하나 헌터도 아닌 사람이었다.
하지만 지금 반응은 오히려 이곳에서 가장 높은 위치에 있는 이처럼 인사를 했고 그도 자연스럽게 인사를 받았다.
물론 이나는 가슴속에서 피어나는 궁금증을 바로 터뜨릴 정도로 어린아이는 아니었다.
“그럼. 오늘은 맛있는 저녁 드시면서 이야기 나누시고 영애분은 내일 아침 신화길드로 오시는 거로 하죠.”
“내 이번 일을 어떻게 보답해야 할지 모르겠네. 뭐 도울 일이라도 있는가?”
경호를 향해 말하는 대통령의 목소리와 눈빛에서 진심을 철철 흘러넘쳤다.
“지금처럼 잘 도…. 아니 성원이가 필요하면 연락드릴 겁니다.”
괜찮다고 그냥 넘어가려 했던 경호는 성원의 떨리는 눈동자를 보고 급히 말을 바꿨다.
대통령의 도움이라는 것은 다다익선(多多益善)이었다.
그렇게 대통령 내외가 차를 타고 떠났다.
최측근인 비서실장과 극소수의 요원들만 동원됐기에 이와 관련된 그 어떤 소문도 돌지 않았다.
어차피 세상에는 죽었다고 소문난 딸과 아내였기에 악마계약자에 대한 정보를 더 모으고 여론의 지지를 얻을 수 있는 시기에 알리기로 했다.
“그나저나 형님. 상태창 보셨죠?”
경호는 얼마 전 흰둥이를 통해 상대의 상태창을 볼 수 있다는 것을 이야기했다.
그 이야기를 들은 성원이 펄쩍 뛰었다.
‘아니! 정말 소설 속 ’상태창‘이 진짜로 존재한다고요?’
경호는 상태창 이야기를 전하며 그것으로 특성을 알아서 성원에게 활을 주고 호돈의 특성을 깨우기 위해 몰래 괴롭혔던 것까지 전했다.
‘그럼. 앞으로 수호신님이랑 다니면서 잠재력 좋은 이들 좀 모아서 악마군단 TF팀을 만드는 것도 괜찮겠는데요.’
이런 이야기도 나왔기에 경호는 이나를 보자마자 잡아야 하는 ‘인재’라는 생각을 한 것이었다.
“너 뭐냐? 신내림이라도 받은 거냐?”
경호의 말에 성원이 피식 웃었다.
“아무리 봐도 형님이 수호신님에게 영애를 붙잡게 시킨 것 같아서요. 맞죠?”
“헐.”
아주 용한 신이 들러붙은 것이 확실해 보였다.
“지금 당장 점집 차려야겠는데?”
“그나저나 어떤 식으로 훈련을 해야 할까요? 형님이 특성을 보셨으니 알 거 아닙니까? 그냥 빠르기만 해서는 포지션이 좀 애매하거든요.”
성원의 말에 경호가 씨익 웃었다.
***
다음 날 아침.
편한 운동복 차림의 이나가 신화길드를 찾았다.
길드 하우스 앞에서 경호와 성원이 그녀를 맞았다.
“안녕하세요! 어제 아버지에게 이야기 많이 들었습니다.”
경호는 자신의 정체를 가족에게까지는 밝혀도 된다고 미리 이야기해 놨었다.
물론 그것도 대부분 거짓말이었지만.
“네. 어제보다 훨씬 좋아 보이시네요. 다행입니다.”
검은 긴 생머리에 갸름한 얼굴, 키도 제법 컸고 시원시원하게 생긴 미인형이었다.
경호가 그런 이나의 안색을 살피며 말했다.
“그러네요. 어제보다 훨씬 좋아 보입니다.”
성원도 한마디 거들었다.
각성하며 마나코어가 활성화되었기에 자연스럽게 그동안 병약했던 육체와 어두웠던 안색이 좋아진 것이었다.
“몸도 좋아지니 마음도 가벼워지더라고요. 그전까지 그렇게 예민하게 굴었던 것이 까마득하게 느껴질 정도로요.”
“다행입니다. 앞으로 몸도 더, 마음도 더 좋아지실 겁니다.”
이나가 그런 경호의 눈을 빤히 바라봤다.
경호가 그런 이나의 행동에 당황해 고개를 돌려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고 있는 순간.
“그냥 편하게 말 놓으세요. 나이만 따지면 조카뻘이기도 하고 대한민국을 여러 번 구하신 용사님에게 존댓말은 제가 너무 불편해요.”
“그게….”
저 깊은 곳에 소시민 ‘흙 수저’라는 의식이 잠재해 있는 경호는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그때 ‘티타늄 수저’이자 재벌집 막내아들 성원이 그런 경호를 보다 나섰다.
“음. 그럴까? 그럼. 이나라고 불러도 되지? 이제 스물이니 형님이랑 나랑은 띠동갑보다 더 차이 나긴 하지만 그래도 삼촌보다는 오빠가 듣기 좋으니까 그렇게 불러 줄래?”
경호가 술술 이야기를 꺼내는 성원을 좋아하는 아이돌을 본 여고생의 눈빛으로 쳐다봤다.
‘그래. 저게 정상이고 내가 비정상인 거지.’
아무래도 다현을 만나기 전까지 빵셔틀이나 하던 잉여로운 삶을 살다가 10년간 정령계를 갔다 왔던 경호는 ‘여성’이라는 존재를 대하는 것이 아직도 어려웠다.
경호에게 여성이라는 존재는 분명 존재하지만, 신기루 같은 존재였다.
물론 주변에 절세 미녀라고 불릴 여성이 존재하지 않는 건 아니었다.
아니 대한민국 그 누구보다 주변에 미녀가 많은 경호였다.
다현, 운애, 제니, 미호.
모두가 눈이 번쩍 뜨일 정도의 미녀였다.
하지만 다현이야 불알친구라서 크게 감흥이 없었고 운애도 두근두근할 때가 더러 있었지만, 근본적으로 사람이 아니었다.
미호랑 제니도 그저 동생 같은 느낌이 강했다.
“네. 경호 오빠. 성원 오빠.”
오빠라는 소리에 경호는 입꼬리가 귀에 걸리려고 하는 것을 막기 위해 애를 썼다.
성원이 그런 경호를 보고 피식하고는.
“그럼. 훈련하러 가 볼까요?”
“오빠. 우리 말 편하게 하기로 했잖아요. 그냥 말 놓으라니까요.”
이나의 내공이 성원보다 더 심후한 느낌이었다.
“아. 그래. 그럼. 훈련장으로 바로 가자.”
“그런데 어제 각성하고 바로 길드 훈련 참여해도 되는 거였어요? 내가 나름 찾아보니 기본 훈련도 받고 특성 활성화 장치 같은 거로 자신의 특성을 익혀야 제대로 된 훈련이 가능하다던데.”
내공만 심후한 게 아니라 아주 똑 부러지는 스타일이었다.
둘의 대화를 가운데서 지켜보던 경호가 끼어들었다.
“그건 내가 가르쳐 줄게요. 아니 가르쳐 줄게.”
아빠에게 들어 판타지 소설에 나오는 주인공처럼 던전에 빠져 몇 년 동안 강해져 귀환한 힘을 숨긴 진정한 강자라는 것을 알고 있는 이나가 밝게 웃었다.
“경호 오빠만 믿을게요. 잘 부탁해요.”
경호가 기분 좋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
신화길드 하우스의 지하 훈련장.
훈련장 중 가장 큰 훈련장에 신화길드 소속 모든 탱커가 소집된 상태였다.
“형님. 근데 오늘 왜 모인 겁니까?”
부조장인 주원이 조장인 호돈에게 물었다.
모두 모인 탱커는 13명.
모두 A급 이상의 상급 헌터들이었는데 정작 모인 이유를 모르고 있는 상태였다.
오직 탱커조 조장인 호돈만 그 이유를 성원에게 들어 알고 있었다.
“길드장님이 딜러를 새로 영입할 생각이신데 우리 보고 한번 맞춰 봐 달라고 하시더라고.”
물론 성원은 호돈에게 훈련할 딜러가 죽은 것으로 알려진 대통령의 딸이라는 것은 비밀로 하라고 했다.
“아니 신입 딜러 하나 보려고 저희를 다 불렀다고요? 신입이 무슨 다현 헌터님 수준이라도 되는 겁니까?”
부조장의 질문에 호돈이 피식 웃었다.
“다현 헌터님 수준이면 우리 조에다가 원딜 한 개조 더 붙어도 힘들어. 하여간 요즘 특성 개발해서 어깨에 힘만 들어가서는.”
“에엑. 그렇게 강하다고요? 형님만 해도 S급에 맞먹는 수준 아니었어요? 거기다 우리 A급 중상급은 다들 걸쳤는데도 안 된다고요?”
“야. 내가 말했잖아. 누님은 규격 외라고. S급이 아니라 SS나 EX급으로 불려야 한다니까 그러네.”
그때 훈련장 문이 열리며 경호와 성원과 함께 호리호리한 여성이 들어왔다.
호돈을 제외하고는 언질을 전혀 받지 못한 이들이 이나의 등장에 조금 당황했다.
첫 번째로 생각보다 너무 초짜 티가 나는 이나의 모습에 당황했고 두 번째로 관련 없어 보이는 경호의 등장에 당황했다.
물론 그것을 티 낼 정도로 어수룩한 이는 아무도 없었다.
“길드장님. 오셨습니까.”
“유조장. 오늘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편한 자리에서는 호돈이 형이니 하며 편하게 지냈지만, 공석에서는 깍듯하게 선을 지켰다.
“알겠습니다. 길드장님.”
성원이 당황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있는 이들을 돌아봤다.
“다들 표정을 보니 무슨 생각을 하는 줄 잘 알 것 같군요. 우선 여기 모셔온 신입 헌터는 잠재력이 엄청나다고 판단해서 제가 특별히 모셔온 분입니다.”
성원의 말에 그제야 탱커 조원들의 당황한 표정이 조금 누그러들었다.
“그리고 여기 형님은 오늘 훈련 끝나고 아침 식사를 만들어 주신다고 해서 모시고 왔습니다. 다들 아시죠? 최면의 힘도 이기는 마법 같은 요리를 만드는 분이라는 거.”
물론 경호는 진짜 목적은 어제 각성한 이나에게 전음으로 도움을 주기 위해서였다.
어쨌거나 경호의 아침 식사 이야기에 탱커 조원들의 당황한 표정이 모두 풀렸다.
“아! 말씀드리지 않은 게 있네요. 여기 신입 헌터분은 어제 각성한 분이라 아직 특성 활용이 매끄럽지 않으니 너무 몰아붙이지는 말아 주세요.”
마지막으로 성원이 이나에 대해 덧붙이자 탱커 조원들은 처음보다 더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그들 역시 초짜 시절이 있었기에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었다.
‘아니! 각성 하루면 마력도 겨우 느끼는 수준일 텐데!’
이나의 정체를 알고 있고 경호가 도와줄 거라 들은 호돈조차 당황스러울 정도니 이들이 느끼는 감정은 더욱 컸다.
이나가 활짝 웃으며 그들 앞으로 나섰다.
“안녕하세요! 어제 우연히 각성하게 된 김이나입니다! 오늘 훈련 잘 부탁드립니다!”
밝은 에너지가 느껴지는 인사였지만 그 인사를 받는 탱커 조원 누구 하나 밝지 않았다.
설마 이거 장난인가? 아니면 지금 우릴 무시하는 건가?
그런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그녀가 대통령의 딸이라는 걸 아무도 모른다는 것 정도였다.
“자아! 훈련에 쓸데없이 감정 이입하는 녀석은 따로 특별 수업 진행할 테니 그리들 알아!”
그런 분위기를 눈치챈 호돈이 조원들 돌아보며 소리쳤다.
물론 분위기는 그리 나아지지 않았다.
“그럼. 대련 방식으로 진행하겠습니다. 탱커 조는 모두 달려들어서 김이나 씨를 제압하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네엣?”
“길드장님?”
“한 번에 다 덤비라고요?”
“엉?”
모두 비슷한 표정, 비슷한 반응을 보였다.
저런 병아리와 대련하는 것도 말이 안 되는데 모두 달려들어서 제압하라니.
분위기는 점점 더 험악해졌다.
그 분위기를 당연히 경호와 성원, 이나도 눈치챘다.
-이나야. 너는 저들 모두를 상대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강하니까. 걱정하지 마. 알았지?
경호의 전음에 이나가 고개를 끄덕이며 앞으로 나섰다.
“그럼. 잘 부탁드려요!”
그렇게 어제 각성한 이나와 신화길드 탱커와의 대련이 시작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