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5화
“대통령이 된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좀 그렇지만 저도 참 기구한 인생을 살았지요.”
대통령의 자리에 오른 그였지만 금수저 출신은 아니었다.
아니 평범보다 못한 수준의 흙수저였다.
그래도 환경을 이겨 내기 위해 열심히 공부해서 서울의 유명 대학 법대에 들어가 어렵게 변호사까지 하게 됐다.
“대단하시네요. 개천에서 용 나기 어려운 시기였는데…. 자수성가하셨네요.”
“뭐. 변호사가 되긴 했는데 그것도 쉬운 일이 아니더군요.”
그렇게 승승장구하면 좋으련만 정의감에 불타던 그는 돈이 되는 일보다는 사람을 위한 일을 했다.
진짜 억울한 사람들.
하지만 신기하게도 그런 사람들을 변호하는 일은 하나 같이 돈벌이는 되지 않았다.
그렇게 소신을 지키며 어려운 생활 중에 아내를 만나 결혼했다.
아내 역시 바르고 착실한 지혜로운 여인이었다.
그녀 덕분에 자신의 신념을 꺾지 않고 지키며 살 수 있었다.
그런 그에게 어쩌면 정치는 운명과도 같은 일이었다.
그렇게 정치에 입문하게 된 그는 변호사 일과 달리 승승장구하게 됐다.
정의로우며 당당한 그의 행동이 그를 그렇게 만들었다.
두 번의 국회의원과 서울시장까지 거치며 결국 대통령의 자리까지 올라갔다.
하지만 그런 그에게도 가슴에 묻고 있는 아픈 상처가 있었다.
김이박 대통령, 그가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딸, 김설아.
그 딸아이는 선천적으로 ‘근이영양증’이라는 불치의 병을 가지고 있었다.
근육이 점점 약해지더니 점점 움직일 수 없을 정도로 팔다리가 구축되어 말라 가고 있었다.
현대의학으로 치료할 수 없는 불치병.
하루하루 더 아프고 힘들기만 하니 딸아이의 성격도 점점 더 날카로워지고 냉소적으로 변했다.
그와 아내는 딸아이를 위해 매일 같이 신에게 빌고 또 빌었지만 괴로움만 커져 갈 뿐이었다.
그러다 대격변이 찾아왔다.
그의 정치 인생은 그때부터 엄청나게 흔들리기 시작했지만, 그로 인해 새로운 희망이 생겼다.
“정말인가? 정말! 우리 딸을 고칠 수 있는 이가 있다고?”
각성자 중에는 흔히 ‘힐러’라고 불리는 이들은 자신이 가진 치유 특성으로 단순한 외상부터 심각한 질병까지 고칠 수 있는 이들이었다.
“네. 대통령님. 확실하진 않지만, 가능성 있는 이를 찾았습니다.”
그가 쓸 수 있는 모든 능력을 동원해서 설아를 치유할 수 있는 이를 찾은 것이었다.
소피아.
30대 초반 정도로 보이는 금발의 미국 국적의 치유 능력 각성자였다.
기적 같은 일이라고 생각했지만 의심스러운 구석이 많은 여성이었다.
민간인 사찰은 불법의 영역이지만 딸아이의 목숨이 달린 문제였기에 국정원과 헌터본부를 동원해 그녀를 철저하게 조사했다.
특별한 문제는 없어 보였다.
‘맡겨도 괜찮을까? 괜히 병이 더 깊어지는 거 아닐까?’
정답은 없었다.
그저 선택의 문제일 뿐이었다.
고민은 깊었지만, 결정에 걸리는 시간은 길지 않았다.
하루하루 고통에 몸부림치는 딸아이를 일분일초라도 빨리 낫게 하고 싶었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소피아를 청와대로 은밀히 들였다.
병의 진행이 심각해서 시간이 오래 걸린다고 했다.
“그럼. 정말 치료가 가능한 것입니까? 치료가 가능하다고요?”
치료가 시작되고 한 달 만에 딸은 혼자 돌아누울 수 있게 되었다.
반년이 흐르자 자리에서 일어서고 혼자서 식사까지 할 수 있었다.
정말 기적 같은 일이었다.
그렇게 딸아이의 완치가 가까워지고 있을 때 그는 뭔가 이상함을 눈치챘다.
아내와 딸아이의 행동이 예전과 뭔가 달라졌다.
이십 년 이상을 같이 살아온 사람이었다.
눈빛. 말투. 미소. 호흡. 걸음걸이까지.
꼭 집어서 뭐가 이상하다고 이야기 어려웠지만 마치 다른 누군가 아내와 딸아이를 흉내 내며 연기하고 있는 그런 느낌이었다.
섬뜩했다.
하지만 그냥 착각일 수 있었다.
그래서 그는 아무에게도 이야기하지 않고 평소와 똑같이 행동하며 더욱 세밀하게 관찰했다.
그런데 그때부터 가끔 술을 진탕 마시고 난 다음 날 필름이 날아간 것처럼 하루 중 어느 순간의 기억이 날아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여기다 자꾸 반복되자 이상함을 느꼈다.
‘분명 뭔가 있다!’
단순하게 치매 같은 질환이라고 하기에도 이상했다.
그는 즉시 비서실장과 국가안보실장을 불렀다.
“은밀하게 관저에 CCTV를 달아서 관찰할 수 있겠나?”
청와대 관저.
말 그대로 대통령이 생활하는 공간이니만큼 청와대 다른 곳처럼 철저하게 감시하고 있지 않았다.
“대통령님.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이유를 알 수 없어 안보실장이 다시 대통령을 향해 질문했다.
“그냥 좀 께름칙한 것이 있어서 확인하고자 하는 거네.”
오랜 지기인 비서실장과 학교 후배인 안보실장은 100% 믿을 수 있는 자신의 사람이었다.
안보실장이 대통령의 눈빛에 담겨 있는 의지를 읽어 냈다.
“경호처의 눈을 피해 작업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닙니다.”
“불가능한 일은 아니라는 소리지?”
“알겠습니다.”
그리고 일주일 뒤 대통령 집무실에 셋이 다시 모였다.
***
“소피아는 악마였습니다. 아내와 딸은 이미 그녀에게 조종당하는 상태였고요. 나중에 그것이 ‘악마계약자’라는 것을 알았죠.”
“네엣? 소피아. 그 치료사가 악마였다고요?”
대통령의 말에 성원이 놀란 얼굴로 경호를 쳐다봤다.
그게 가능한 소리냐고 묻는 얼굴이었다.
-처음부터 대통령을 노렸겠지. 아마 이렇게 눈치채지 못했으면 가족을 빌미로 협박하거나 아니면 악마계약자로 만들었을 수도 있지.
국정원이나 헌터본부도 협조했을 거니 더욱 아무것도 못 하고 나라가 넘어갔을 수도 있었다.
“CCTV가 중간에 모두 고장 나서 제대로 나온 것은 없었지만 분명 소피아는 악마가 분명해 보이더군요. 전신에 검은 연기가 뿜어져 나오고 머리에 뿔도 달린 모습이었습니다.”
관저에 몰래 설치한 CCTV에 찍힌 영상은 충격적이었다.
영상에 노이즈가 심하게 껴 있었지만 분명하게 보였다.
악마로 변한 소피아가 내뿜은 검은 연기에 둘러싸인 아내와 딸이 알아들을 수 없는 대화를 하고 있는 장면을.
즉시 그는 안보실에서 동원할 수 있는 가장 믿을 수 있는 요원을 동원해서 관저로 보냈다.
이미 눈치챘는지 소피아는 사라지고 없었고 반쯤 정신이 나간 아내와 딸을 빼내 안가(安家)로 보내 보호 조치를 했다.
말이 보호 조치였지 사실상 ‘감금’이었다.
“그럼. 그런 일을 숨기려고 아내와 딸이 사고로 죽었다고 발표한 겁니까?”
김이박 대통령의 눈에 물기가 어렸다.
감정이 북받치는 듯 말을 잇는 목소리도 잠겨 있었다.
“내 행동을 이해할 수 없겠지요. 하지만…. 후우.”
“아닙니다. 어느 정도 이해는 됩니다. 모든 것이 꼬여 있는 일이니까요.”
헝클어진 실타래 같은 일이라 가볍게 풀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기에 성원도 이해가 가지 않는 바는 아니었다.
처음부터 적법하지 않았다.
헌터본부와 국정원을 이용한 불법 사찰부터 소피아를 은밀하게 입국시키고 치료한 것 역시 모두 불법이었다.
거기다 악마에 악마계약자라니.
하나만 터져도 탄핵 소리가 튀어나올 일이었다.
“어쩔 수 없었네. 헌터본부와 국정원. 국회 모두를 믿을 수 없었어. 여기 있는 비서실장과 안보실장. 그리고 그들이 추천한 소수의 요원 빼고는 말이야.”
경호나 흰둥이 정도가 아니라면 악마계약자를 구별할 수 없기에 주변 모두를 의심하는 것이 가장 현명한 방법이었다.
“정말 안타까운 일이지만 어쨌든 잘 대처하신 겁니다.”
“내가 탄핵당하는 것은 상관없지만 혹여나 악마와 연관 있는 자가 내 뒤를 이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무섭더군. 변명 같지만 그래서 그랬네.”
“그런데 대통령님 이런 이야기를 저희에게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런 이야기는 아는 이가 적을수록 좋은 것 아닙니까?”
성원은 대통령의 의도가 궁금했다.
당연하게도 비밀은 아는 이가 적을수록 좋았다.
아니 이런 일이라면 살인멸구를 해서라도 아는 이를 줄이는 것이 맞았다.
“오기 전엔 신화길드와 협상해 영향력을 확대할 생각이었습니다. 이를 기반으로 악마계약자를 솎아 내려 했죠.”
각국에서 쏟아지는 신화학원 관련 러브콜에 적절히 대응하면 그만한 힘을 키울 수 있을 거 같았다.
‘하지만 그것으로 과연 악마계약자, 아니 그 뒤에 있는 악마까지 잡아낼 수 있을까? 오히려 타초경사의 우를 범하는 건 아닐까?’
정답이 없는 문제였지만 되돌릴 수 없는 문제이기에 고민이 깊어졌다.
‘권력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괜히 대격변 이후 헌터가 권력의 핵이 된 것이 아니었다.
결국 그는 성원에게 그것을 맡기기로 한 것이었다.
“하지만 저에겐 아무리 큰 권력이 생긴다고 해도 믿고 쓸 수 있는, 악마를 처단할 수 있는 칼이 없더군요.”
그럼. 자신들을 칼로 쓰겠다는 건가?
성원이 대통령의 말에 의문이 떠올랐다.
“그래서 생각을 바꿨죠. 제가 악마와 악마계약자의 존재를 밝혀내겠습니다. 여러분이 그들을 처단해 주십시오.”
응? 뭐라고?
“아니 그게. 그들의 존재를 어떻게 밝혀낸다는 겁니까?”
“제가 모든 것을 밝히고 내려올 생각입니다.”
“네엣? 뭐라고요?”
성원도 놀랐지만.
“대통령님!”
옆에 있던 비서실장도 놀라 소리쳤다.
“그게 무슨! 저와 말도 없이 이러시면 어떡하십니까?”
“실장님에게 미안하지만 그렇게 해서 그들의 존재를 세상에 밝히면 본격적으로 수사할 수 있을 겁니다. 힘이 부족하다면 여기 있는 신화길드 분들이 도울 수 있을 거고요.”
경호는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아까부터 묵묵히 대통령을 보고 있었다.
레벨 10의 [간파] 특성을 가진 경호였다.
악마나 상급 헌터도 아닌 이가 하는 말의 진위를 가려내는 것 정도는 일도 아니었다.
“그럼. 대통령님은요? 아까 탄핵까지 이야기하셨잖아요. 그런데 이제 와 그걸 밝히시겠다고요.”
성원의 말에 대통령이 사람 좋은 미소를 지었다.
처음 비밀을 털어놓을 때보다 한결 마음이 편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아까 이야기하지 않았나요. 악마군단이 넘어오면 정말 다 끝이라고. 대신 그것을 믿느냐 마느냐의 문제인데. 저는 믿습니다. 직접 악마를 보았으니까요. 제가 일 년 남짓한 임기 동안 지지율이 좀 더 오르고 권력을 조금 더 가진다고 해도 바뀌는 것은 크게 없습니다. 오히려 이 모든 것을 수면 위로 올리는 것이 더 나을 거 같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때까지 잠자코 지켜보던 경호가 고개를 저으며 입을 열었다.
“대통령님. 그건 좋은 생각이 아닌 거 같습니다.”
응? 너 낄낄빠빠 모르냐?
경호를 쳐다보는 대통령과 비서실장의 표정엔 딱 이런 뜻이 담겨 있었다.
하지만 경호는 그대로 말을 이었다.
“우선 악마계약자의 규모를 알기도 어렵고 안다고 해도 무작정 다 처리하기도 어렵습니다. 그들은 어쨌든 인간이니까요. 악마계약자를 상대하기보다 지금 당장 넘어올 악마를 막아 내고 헌터들의 힘을 집중할 필요가 있습니다.”
대통령이 성원과 정수를 힐끗 봤다.
당황하긴 했지만 놀란 얼굴은 아니었다.
그렇다는 것은.
“평범한 식당 주인은 아닌 모양이군요.”
“대통령님. 저도 이렇게 끼어들어 이야기할 생각은 없었습니다. 아니 사실 이 자리도 오지 않으려 했었지요. 하지만 대통령님의 진심 어린 이야기에 제가 나서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형님. 저와 이야기해도 되는 문제인데요. 왜 굳이 이렇게.”
성원이 낌새를 눈치채고 바로 경호를 말렸다.
“그러게요. 형님.”
정수 역시 걱정스러운 얼굴이었다.
“아니. 이제부터는 정말 정부 차원의 도움이 필요해. 대통령님도 우릴 믿어 줬으니 우리도 믿음을 줘야지.”
이 셋의 대화를 모두 이해하진 못했지만, 대통령은 좋은 방향으로 일이 진행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대통령님. 저는 10년 전에 균열에 빨려 들어갔다고 이번에 귀환했습니다. 혹시 알고 계십니까?”
대통령이 고개를 끄덕였다.
언론에서 한동안 떠들썩했던 사건이었기에 들어 알고 있었다.
“균열에 빨려 들어가 넘어간 곳은 어떤 던전 같은 곳이었고 그곳에서 악마와 10년을 싸우다 운 좋게 다시 넘어왔습니다. 우습게도 이곳도 마계에 침략을 당하고 있더군요.”
경호는 거짓은 아니었지만 조금 두루뭉술하게 사실을 전했다.
“네엣?!”
대통령과 비서실장이 황망한 눈빛으로 입을 쩍 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