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3화
은가누는 자신의 거처 지하에서 휴대 전화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곧 전화를 준다고 했는데….
경호가 구할 수 있는 가장 큰 모델을 선물했지만, 은가누 손에는 마냥 귀여운 사이즈였다.
띠리리리. 띠리리리.
경호만 알고 있는 전화였다.
-그래.
-어. 악마놈한테 잘 말해 놨지?
-어. 지금 하면 되나?
-그래. 다음에 놀러 갈게. 그때 보자.
통화가 끝나고 은가누가 점점 생명력을 잃어 가는 악마를 쳐다보며 말했다.
-지금 바로 아가레스에게 연락해라! 그리고 내가 말했던 것을 전해!
-알겠습니다.
***
아가레스는 머리가 복잡했다.
마혼의 기운을 가진 존재는 자신보다 강한 마계의 존재에게 굴복할 수밖에 없다.
이것은 예외가 없는 절대적인 법칙이었다.
‘그런데 오크와 인간이 대결하고 수호신에게 예를 갖췄다고?’
이해되지 않는 일이었다.
그때였다.
우우우우우웅.
검은 마기가 줄기줄기 허공에 실타래처럼 둥글게 뭉쳤다.
오크를 관리하라고 보낸 악마가 연락한 것이었다.
-마침 잘 됐군.
아가레스가 툭 건들자 뭉쳐진 마기가 벌어지며 악마의 모습이 보였다.
한눈에 봐도 생기가 없었고 얼마 버티지 못할 것 같은 모습이었다.
자신이 직접 지은 피조물의 한심한 모습에 아가레스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주, 주인님. 급히 말씀드릴 것이 있어 연락드렸습니다.
숨이 차서 심하게 헐떡거리는 목소리였다.
-아니 내가 너에게 묻겠다. 오크와 인간이 대결하고 그들이 수호신에게 예를 표했다고 하는데 그것이 사실이냐?
아가레스의 전신에서 눈에 보일 듯 살기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안 그래도 당장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악마였다.
그런 악마가 차원을 넘어 흘러 들어오는 아가레스의 살기에 짓눌려 호흡이 더욱 거칠게 변했다.
-그, 그렇습니다. 주인님.
-네 이놈! 그게 무슨 소리냐?
아가레스가 당장 때려 죽일듯한 눈빛으로 노려봤다.
-용사와 수호신을 속이기 위해 어쩔 수 없었습니다. 인간은 아직도 오크들이 투항한 줄 알고 있고, 그런 상태를 이용해서 가장 큰 이익을 보기 위한 연기였습니다.
이익을 보기 위한 연기?
어쨌든 멍청한 짓거리는 아니라는 소리였다.
아가레스의 살기가 조금씩 누그러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직 이해되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무슨 이익을 위한 연기였다는 거지?
살기가 걷히자 악마의 호흡이 조금 안정됐다.
-주인님. 오늘 보여 준 대결과 수호신에게 예를 갖춘 것은 열흘 뒤로 예정된 2차 오크 웨이브를 합동으로 제압하자고 설득하는 과정에서 벌어진 일입니다. 헌터들도 오크의 실력도 확인했고 수호신에게 예를 갖춘 것도 좋게 봤는지 의도대로 합동 제압 작전을 펼치기로 했습니다. 그렇게 합동 작전이 시작되고 방심하고 있을 때 은가누와 다섯 조장이 용사와 수호신을, 오크 전사들이 상급 헌터를 공격할 생각입니다.
아니? 뭐라고?
아가레스는 가만히 가능성을 계산해 봤다.
합동 작전이 벌어지는 오크 웨이브.
이번에는 오크를 통제할 중급 악마 셋과 상급 마수도 넘어가기에 아무리 용사와 수호신이 준비한다고 해도 1차 웨이브 때처럼 싱겁게 투항하게 만들 순 없었다.
그런 상태에서 벌어지는 ‘동료’라 믿고 옆을 내준 오크의 공격은 치명적일 수밖에 없었다.
‘계획대로만 된다면 무조건 성공한다.’
좋아도 너무 좋았다.
지금 자신의 계약자인 ‘동진’이라는 인간이 하고 있는 그린캔디와 마목을 이용한 계획보다 더 깔끔하고 더 빠르고 더 치명적이었다.
하지만 걸리는 것이 있었다.
정확하게는 모르겠지만, 묘하게 기분 나쁜 감각이었다.
이런 묘한 감각이 느껴질 때가 바로 삶에 있어 변곡점이 된다는 것을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알고 있는 아가레스였다.
‘지금까지 그랬듯 결정해야 한다.’
모든 것을 엎어 버리고 막아야 할지 아니면 최고의 기회를 붙잡아야 할지.
선택의 결과가 위로 향할지 바닥으로 처박힐지는 아가레스도 알 수 없었다.
결과를 모르는 도박 같은 결정.
하지만 아가레스는 지금까지 바닥에 처박힐 것 같은 상황도 어떻게든 끌고 올라갔었다.
‘그래. 혹시나 은가누나 조장들이 용사와 수호신을 기습하고도 이기지 못할 수도 있다!’
불안감의 원인이 그것이라 생각한 아가레스는 동진에게 미완성된 그린캔디를 지급하라고 할 생각이었다.
사용자가 얼마 버티지 못하고 심장이 터져 버리는 부작용이 있지만, 어차피 죽으라고 쏟아부은 오크의 목숨 따위는 신경 쓸 것이 못 됐다.
-그래. 그러면 준비는 확실한 것이냐?
-네. 완벽하게 속은 눈치입니다. 은가누와 조장을 용사 바로 옆에 둘 것으로 이야기하고 있으니 좋은 결과가 있을 것입니다.
만에 하나 실패하더라도 동진의 계획이 남아 있었다.
아가레스는 만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철저히 준비하도록 하라. 실패는 용납하지 않겠다.
***
“비서실장. 이거 참. 이제 미안할 정도네. 내가 기업가에게 이런 마음을 진심으로 가지게 될 줄은 정말 몰랐네. 허허허허.”
비서실장이 VIP, 김이박 대통령이 호탕하게 웃었다.
“그러게나 말입니다. 정말 대한민국의 보물 같은 인재입니다.”
비서실장도 환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김이박 대통령과 그의 오랜 정치적 동지였던 박재호 비서실장이 입을 모아 칭찬하는 이는 바로 ‘이성원’ 신화길드장이었다.
디스팩트의 방송 이후 청와대 비서실 부속 대외연락부서 전화기에 아주 불이 났다.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캐나다, 인도, 러시아, 중국, 일본까지 세계 10대 강국의 헌터관리부서에서 연락이 쇄도한 것이었다.
하는 말은 조금씩 달랐지만, 요점은 모두 같았다.
-저희 자원을 공동으로 개발할 수 있도록 모든 조치를 하겠습니다. 대신 우리나라 헌터가 신화학원에서 배울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신화학원에서 우리나라 헌터를 받아주게 해 주십시오! 그러면 저희가 보유하고 있는 아티팩트의 절반을 삼 년간 무상으로 대여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우리는 한국의 가장 가까운 형제국 아닙니까? 우리나라 헌터를 신화학원에 좀 넣어 주십시오!
이어지는 조건들은 정말 어마어마했다.
자원 공동 개발권부터 마도공학 공동연구, 던전과 아티팩트 대여까지.
돈으로 환산하기 어려운 조건들이 그저 신화학원에 연줄을 대기 위한 수단으로 날아들었다.
청와대 비서실은 밀러드는 전화에 행복한 비명을 질렀다.
사실 이번 정권은 ‘대격변’이라는 말도 안 되는 이벤트를 겪으며 수도 없이 휘청거렸다.
30%를 밑도는 지지율에서 정권 교체가 당연시되던 때가 고작 한 달 하고도 조금 더 전이었다.
예전 극지던전 공략과 신화학원을 만들 때, 거기다 일본의 제국신도교를 해결한 것까지.
그러한 것들이 쌓여 50%, 60%를 금세 넘어가더니 최근 여론 조사에서는 80%에 육박하는 대통령 지지율이 나왔다.
당연시되던 정권 교체는 이제 쑥 들어가고 여당에 다시 힘이 실리기 시작했다.
이 모든 시작은 바로 ‘신화길드’였다.
“실장님. 어떻게 처리하고 있습니까?”
외국의 헌터관리부서 역시 정부 기관이기에 대한민국 정부의 핵심인 청와대 비서실에 연락한 것이었다.
“우선 조건을 확인하고 모두 정리해서 ‘신화길드’에 알려 같이 협의하려고 합니다.”
비서 실장의 의견은 나쁘지 않은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런데 말입니다. 실장님. 어쩌면 저희를 통하지 않고 신화길드와 직접 접촉하면 우리가 이렇게 하는 것이 무슨 소용일까 싶은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문득 그런 생각이 김이박 대통령의 머리를 스쳤다.
과연 이곳에만 이런 접촉을 하는 걸까?
정작 중요한 곳은 ‘신화길드’였다.
신화길드가 운영하는 신화학원은 정부 기관도, 공공 기관도 아니었고 완벽하게 신화그룹의 사적 교육기관이었다.
한마디로 지금 각국에서 날아오는 돈으로 환산하기 어려운 엄청난 제안들도 결국 신화길드의 판단에 따라 모두 사라질 수 있는 것들이었다.
마음을 굳힌 대통령이 비서실장을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지금 당장 신화길드로 가지.”
***
“형님! 정말 형님 말대로 됐네요. 후우.”
방송이 나가고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캐나다, 인도, 러시아, 중국, 일본 등등 다 셀 수 없이 많은 나라의 헌터기관과 길드에서 신화학원에 등록하고 싶다고 연락이 어마어마하게 오고 있었다.
“그런데 저들이 정말 마계의 침략을 막기 위한 순수한 마음으로 연락하는 걸까요?”
경호가 성원의 말에 피식 웃었다.
“순수한 마음? 무슨 말이야?”
“마계의 침략을 막기 위해 힘을 기르려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싶어서요.”
“마계의 침략은 무슨. 열에 아홉은 이권을 위해서지. 지금도 상급 헌터는 쏙 빼고 보낸다고 하잖아. 마계의 침략을 막아 내지 못하면 끝인데 그걸 모르는 거지.”
“뭐. 그래도 이렇게라도 헌터들이 교육에 참여한다는 것만으로도 절반은 성공한 거죠. 마계를 막으려면 어쨌든 헌터들이 강해져야 하니까요.”
“뭐. 그래도 열에 하나는 순수하게 세상을 지키려는 이들도 있을 거다.”
어쨌든 지금 신화길드에는 특성을 개발하고 마계를 막는 데 힘을 보태고 싶다는 연락이 쉴 새 없이 오는 상황이었고 그 정도면 됐다.
“그래도 이렇게 많이 연락 올지는 몰랐어요.”
“그런데 다 받지도 못하잖아. 어떻게 하려고?”
신화학원이 작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전 세계 각국의 수천 명 수준의 헌터를 모두 수용할 수 있는 거대한 규모를 가진 것은 아니었다.
또한 다른 나라의 헌터인 경우는 절차나 규정도 복잡하고 그중에는 빌런이나 악마계약자가 있을 수도 있었다.
“우선은 조율 중이에요. 그리고 정부 쪽과 이야기해 봐야 할 것 같아요. 이게 그냥 보습 학원에서 학생 모집하는 게 아니니까요. 외국의 헌터를 이곳에서 교육하려면 절차나 규정도 있을 테고요.”
경호는 불현듯 성원이 많이 성장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 소멸시킨 소환던전 때문에 실망해서 식당에 찾아온 것이 엊그제 같은데 이제는 각국의 헌터 기관과 길드랑 조율을 하고 있단다.
“대충 생각해 놓은 것은 있고?”
경호가 흐뭇하게 웃으며 성원에게 물었다.
“아. 신화 마도공학 연구소에 부탁해서 특성 활성화 장치를 지금 여러 대 만드는 중이거든요.”
마도공학 쪽으로 무지한 경호가 알기로도 등급 측정 장치 같은 마도공학 장비는 엄청 비싼 걸로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런 게 연구소에 부탁해서 될 일이었나?
아. 이 녀석, 회장님 아들이었지.
경호는 성원을 그냥 아는 동네 동생 정도로 생각해 버려서 가끔 그의 대단한 집안 내력을 까먹었다.
“우선 헌터 등급이 높은 이들이 많은 곳에 먼저 보내 주고요. 마계 침략 막아 내면 값을 치르는 것으로 이야기하려 해요.”
“너는 사업하면 안 되겠다. 그냥 마계 침략 막아 내고 나면 어차피 길드니 헌터니 다 필요 없는 세상이니 그냥 복지 재단 같은 거나 운영해라. 그냥 다 퍼주는구만. 참. 호구도 이런 호구가 없어.”
“어차피 마계 침략 못 막아 내면 돈이고 뭐고 뭐가 필요하겠어요.”
“그러니까 더 뜯어내야지.”
경호의 말에 성원은 그저 풋 하고 가볍게 웃어넘겼다.
“드디어 오늘이 결승이네요.”
뜬금없는 결승 소리에 경호가 고개를 갸웃했다.
“뭐가?”
“네엣? 아니 형님. 뭐긴 뭐예요. 골목대첩이죠. 결승 진출자가 뭐냐고 물으면 어떡해요?”
“그게 오늘이었어?”
“네. 오늘이죠.”
요즘 너무 정신없이 살다 보니 결승인지도 모르고 살았다.
어차피 만들 요리도 정해 놨고 딱히 준비할 게 있는 건 아니어서 상관은 없었다.
“형님. 어차피 이렇게 된 거 그냥 결승까지 이겨 버리죠.”
“그게 뭐. 내가 이겨야지 하면 이길 수 있는 거냐?”
“마혼의 기운 때문에 쉽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지금까지 다 이겼….”
성원의 말이 끝나지 않은 그때.
벌컥!
사무실 문이 열리며 정수가 귀신이라도 본 얼굴로 뛰어 들어왔다.
“뭐야?”
“혀, 형님! 지금 길드로 대, 대통령님이 찾아오셨는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