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1화
“형님. 그런데 계약서를 쓴다고 그놈들이 말을 들을까요?”
성원은 고개를 갸웃거리고 물었다.
답답해서 경호에게 조언을 구하긴 했지만 성원도 바보가 아니었다.
아무리 위약금이니 뭐니 한다고 해도 막무가내로 나오면 답이 없었다.
“다 생각이 있어. 오크랑 싸움만 만들면 돼. 그건 계약서에다 약만 좀 올리면 되니까. 할 수 있겠지?”
“뭐. 그거면 가능은 하지만….”
오크와 싸워서 이기면 답도 없지만 오크와 싸워서 진다고 해도 그냥 도망가면 끝이었다.
위약금이 크다고 해도 대형 길드로 넘어가면 해결할 수 있는 금액이었다.
“우리에게 필요한 인원은 진심으로 마계와 싸울 인원이잖아요. 위약금 내기 싫어서 붙어 있는 인원이 아니라요.”
“그래. 그건 내가 알아서 한다니까.”
“알겠어요. 그럼. 저도 계약서 만들어 놓을게요.”
성원은 솔직히 경호의 말에 답답함을 느꼈지만 그러한 감정을 애써 눌렀다.
***
“뭐? 연기? 아! 싫어!”
나도 너에게 연기시키기 싫다고.
하지만 장면을 만들기 위해서는 꼭 필요한 역할이었다.
“지금 수준에서는 죽도, 밥도 안 되는 거 알잖아. 다른 헌터들이 다 너처럼 해 주면 내가 이런 부탁 안 하지. 그런데 S급 헌터도 아니고 그저 조금 실력만 있으면 흥청망청 즐기며 사는 세상이야. 그렇다고 그냥 네가 9시 뉴스에 나가서 ‘여러분! 악마군단이 넘어오면 다 끝장입니다. 힘을 키워야 합니다! 모두 S급은 돼야 해볼 만 하다고요!’라고 떠들 순 없잖아.”
아니 떠들 순 있어도 곧이곧대로 들어줄 이는 한 명도 없었다.
“다현아. 부탁할게.”
“쳇. 알았다고. 대신 이거 끝나면 술이나 한잔해.”
하여간 술은 엄청 좋아한다.
다현이 투덜거리며 알았다고 대답하자 경호는 곧장 품에 안겨 있는 울피에게도 부탁했다.
“울피도 좀 도와줘. 수호신이 등장해야 하는 부분이 있거든.”
-저도요? 뭔데요?
***
그렇게 모든 준비를 마친 경호는 출발 직전 흰둥이를 찾았다.
“흰둥아. 너 오늘 나랑 예술 작품 하나 만들어 보지 않을래?”
제법 커다란 삼족우 다리뼈를 물고 씨름하던 흰둥이가 고개를 삐딱하게 들어 경호를 쳐다봤다.
‘아니, 개는 난데 경호 님, 도대체 무슨 개소리를 하시는 겁니까?’라고 하는 듯한 눈빛이었다. 아니 분명 그랬다.
-작품이요?
“어. 세상에 길이 남을 작품이지.”
경호가 불쑥 캠코더를 꺼내 흰둥이에게 건넸다.
“자아. 이거 사용할 줄 알지?”
-이거 영상 찍는 기계잖아요?
“정확히는 캠코더라고 하지. 거기 있는 그 버튼 누르면 찍히는 거야. 그 옆에 화면으로 보면 되고. 한번 해봐.”
흰둥이가 앞발로 캠코더를 잡고 이리저리 돌려보는 모습은 정말 엄청나게 귀여웠다.
아마 누군가 봤으면 기절할 수준의 비현실적 귀여움이었다.
경호마저 멍하게 지켜볼 정도.
캠코더를 들고 이리저리 돌려보던 흰둥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경호 님. 근데 뭘 찍으시려고요? 그냥 직접 찍으시면 되잖아요?
직접 찍으면 좋겠지만 가서 돌아가는 상황을 지켜보며 연출을 해야 하기에 그럴 수가 없었다.
괜히 연출 감독과 촬영 감독이 따로 있는 게 아니었다.
“아니 그게 나도 상황을 봐야 하고 아무도 모르게 몰래 찍어야 하는 거라서….”
툭.
경호의 말에 놀란 흰둥이가 앞발로 쥐고 있던 캠코더를 바닥에 툭하고 떨어뜨렸다.
“으악! 야! 고장 나면 어쩌려고!”
다행히 살짝 흠집은 생겼지만 작동엔 문제가 없었다.
경호가 다시 캠코더를 주워 건네려는데 흰둥이의 표정이 영 이상했다.
“그 이상한 표정은 뭐냐?”
-경호 님. 실망입니다. 지금 몰카를 찍….
퍼억!
-으아악!
경호의 주먹이 흰둥이의 뒤통수에 제대로 꽂혔다.
“야. 내가 암만 그래도 수호신을 시켜서 몰카를 찍겠냐? 그걸 말이라고!”
-그러니까 저도 놀랐죠. 아! 경호 님에게 이런 변태 기질이 있으셨구나 하고요.
경호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다.
“오크와 헌터 싸우는 거 보고 흥분하는 변태는 아니니까 걱정하지 말고. 하여간 잘 찍어!”
그 뒤로 찍어야 할 상황을 설명하고 흰둥이는 출발 전부터 상황이 끝나기까지 몰래 숨어 모든 것을 캠코더로 찍었다.
***
그렇게 모든 것이 끝나고 성원은 길드 사무실에 돌아와 한숨을 푹 쉬었다.
하아.
“어쩌지?”
팔이 잘린 지훈이야 보상금을 줘서 처리하면 될 일이었다.
각성자 간 대련으로 부상이 생기면 형사처벌을 면하는 특별법이 존재하기에 은가누에 관해서도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성원이 한숨을 쉬는 이유는 그것 때문이 아니었다.
“시간이 없어. 정말 이대로 지구가 악마군단에 멸망하는 건가.”
남은 아홉의 팀장과 팀원들, 더 크게 생각하면 전 세계 모든 헌터들이 모두 문제였다.
지금 당장 죽을 각오로 수련해도 침략을 막을까 말까 했다.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모두 은가누에게 당한 서지훈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특권 의식과 돈, 권력에 취해 흥청망청하며 사는 이들.
이것이 딱 상급 헌터의 모습이었다.
“형님이라면 답을 알고 있을까?”
마지막에 입봉작 어쩌고 했던 게 떠올랐다.
그때 사무실 문이 열렸다.
“혀, 형님!”
하여간 양반은 아닌 모양이었다.
성원이 이산가족 상봉하듯 경호를 반겼다.
“뭐야? 뭔데 평소보다 반응이 격한 건데?”
평소보다 더 격하게 반기는 성원의 모습에 경호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아니 오늘 그곳에서 본 장면이 계속 가슴에 남아서요.”
“뭐? 그 팀장들? 어차피 모르던 바도 아니잖아.”
“알고는 있었지만 막상 이렇게 보고 나니 계속 찝찝하네요. 기운도 확 빠지고. 그리고 가장 큰 문제는 이걸 제대로 해결할 방법이 없다는 거잖아요. 헌터들에게 악마군단이 넘어오니 조심해야 한다고 말해 봐야 소용도 없을 테고요.”
경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이 애써 연출을 했던 이유가 바로 저것 때문이었으니까.
“너 혹시 그 팀장 관련한 자료 가지고 있는 거 있어? 원래 그런 거 길드에서 관리한다고 하던데.”
“서지훈 헌터 말하는 거죠?”
상급 헌터의 대다수가 성격은 개차반에 도박, 여자, 폭행은 기본 옵션이 놈들이었다.
그러다 보니 당연히 사고가 끊이질 않았고 그에 따른 여러 복잡한 문제가 뒤따랐다.
법의 처벌을 피하기 위한 사고 수습이 필요했기에 상급 헌터들은 대형 길드에 몸을 맡겼다.
“한 대여섯 건 있습니다. 특수폭행에 성추행, 마약 같은 거요. 증거도 있고요.”
혹시나 해서 물어본 거였는데 대여섯 건이나 있단다.
“그놈 길드 가입한 지 몇 달 안 됐잖아?”
“첫날부터 사고 친 놈인데요. 뭐. 형님. 그런데 저런 놈들은 이걸로 협박해 봐야 크게 흔들린 놈이 아닙니다. 어차피 다른 길드로 넘어가면 거기서 또 막아 주거든요. 몇 억은 돈도 아닌 놈들이고 사실 상급 헌터는 그 이상의 값어치를 하니까요. 저 같은 경우도 데리고 있으면서 인간 만들어 보겠다고 들인 거니까요. 능력은 정말 좋은 녀석들이니까요.”
“능력은 개뿔. 그래 봐야 어차피 안 될 놈이야. 자아. 이거 봐 봐.”
탁.
경호가 테이블에 무언가를 내려놨다.
“이거 메모리카드잖아요?”
뜬금없는 메모리카드에 성원이 그것을 들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안 그래도 궁금했던 성원은 바로 폰으로 연결해서 담겨 있는 영상을 재생했다.
“엇! 이거….”
팀장들에게 계약서를 쓰게 하는 장면이 아주 생생하게 찍혀 있었다.
‘뭐지? 이걸 언제 어디서 찍은 거야?’
마치 드라마를 보는 듯한 구도였기에, 성원이 놀라 경호를 쳐다봤다.
“요즘 캠코더는 땡기는 것도 좋고 화질도 끝내주더라. 그리고 생각보다 흰둥이가 촬영에 소질이 있더라고.”
엥? 누가 무슨 소질이 있다고요?
“수호신님이 이걸 찍었어요? 캠코더를 들고? 크읍!”
은신을 한 채 뒷다리로 꼿꼿이 서서 앞발로 캠코더를 들고 있었을 흰둥이를 생각하니 저도 모르게 웃음이 튀어나왔다.
“어. 맞아. 엄청 귀엽게 들고서 찍는데…. 완전 전설의 짤로 길이 남을 장면인데 차마 찍을 수가 없어서 아쉽더라고.”
“형님. 저도 못 본 게 아쉽네요. 그런데 어떻게 이걸 찍을 생각을 하신 거예요?”
은가누와 서지훈의 일방적 싸움과 수호신인 척 일장 연설을 하는 울피의 모습까지 아주 생생하게 찍혀 있었다.
“처음부터 생각했었지.”
“형님. 그럼. 여기 울피 님과 다현 누님도 다 알고 있었던 거예요? 그때는 몰랐는데 이렇게 영상으로 보니 누님의 동작이 좀 어색한 거 같기도 한데…. 맞죠?”
경호도 영상을 받아 보고는 다현의 연기가 좀 어색하다는 느낌이었는데 성원도 그걸 느낀 모양이었다.
경호가 고개를 끄덕이자 성원이 입을 삐죽거리며 말했다.
“형님. 치사하게 저한테만 말 안 하신 거예요?”
“다른 이들이야 팀장들이랑 만나질 않으니까. 그런데 괜히 너 나한테 이야기 들었다가 긴장할까 봐 그랬지.”
“저도 이제 거의 배우급인데. 형님. 이거 배신입니다. 배신.”
“미안. 미안. 하여간 네가 작업 좀 해 줘야겠다. 아까 그 자료랑 이거 엮어서. 무슨 말인지 알겠지?”
“그러니까 서지훈 관련 자료랑 이거 내용 섞어서 만들라는 거잖아요.”
“너 할 줄 알지? 괜히 다른 사람 시키지 말고. 잘못하면 짜고 쳤다고 의심 살 수도 있으니까.”
반쯤 짜고 친 건 맞지만 의심을 받으면 안 되는 일이기에 은밀하게 진행해야 했다.
“형님. 걱정 마세요. 그 정도 센스는 있으니까요. 어차피 영상, 자료 다 있으니 금방 해요. 어차피 무슨 영화 편집 같은 게 아니니까요.”
“그래? 그럼. 기다릴게. 이제 정말 시간이 없으니까.”
“무슨 시간이요?”
열흘.
은가누가 이야기한 다음 오크 웨이브 날짜였다.
“열흘 뒤에 저번처럼. 아니 저번보다 훨씬 많은 수의 오크가 넘어올 거야. 이번엔 악마도 같이 넘어오는 거라서 저번처럼 마법진만 사용해서 투항시키긴 어려워.”
꿀꺽.
‘악마도 같이 넘어온다.’라는 말에 성원이 긴장했다.
악마의 강함을 직접 봤기에 그 무서움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너무 긴장하진 마. 나도 최대한 도울 거니까.”
성원이 경호의 말에 씨익 웃었다.
긴장한 얼굴이었지만 그렇다고 억지로 웃는 얼굴도 아니었다.
“뭐냐? 그 웃음은?”
“사실 겁도 나지만 기대도 되거든요. 신화길드에 오늘 본 그런 막장인 녀석들도 있지만 대부분 죽을 각오로 열심히 했으니까요. 다현 누님의 도움도 컸고 저와 정수, 호돈이 형도 정말 열심히 했어요.”
“그래. 그래도 악마를 처음 상대하는 자리니까 네가 봤을 때 간당간당해 보이는 인원은 빼고. 알았지? 분명히 강해졌다고 까부는 인원이 나올 거니까.”
경험도 좋지만, 쓸데없이 희생당할 필요는 없었다.
“알았어요. 그럼. 제가 인원 추려 보고 은가누 족장에게도 연락해 볼게요.”
“알았어. 어서 영상이나 마무리해 줘.”
성원이 다시 영상 편집에 집중하자 경호가 비스트에게 전화를 걸었다.
“용호 씨. 혹시 통화 괜찮으세요?”
-네. 경호 씨. 무슨 일이세요?
“부탁 하나만 하려고요.
-부탁이요?
“네. 혹시 ‘디스팩트’라고 아세요?”
-너튜브 시사 고발 채널이지 않습니까? 알고 있습니다.
“그곳에 영상을 제보하려는데 아무도 모르게 슬쩍 가져다주셨으면 해서요.”
-급한 겁니까?
“네. 세상을 구하는 일입니다.”
-허어. 정말 엄청난 일이네요. 당장 가겠습니다.
***
디스팩트.
대격변 이후 설립되어 각성자의 사건, 사고를 주로 다루는 탐사보도 전문 시사 고발 너튜브 방송 채널이었다.
“응?”
디스팩트에서 가장 고참인 이영수 기자가 피곤에 찌든 표정으로 책상 위에 놓여 있는 조그만 핑크색 상자를 쳐다봤다.
분명 화장실 갔다 오기 전에는 없던 물건이었다.
“뭐지? 어이! 최 기자! 여기 택배 왔었어?”
“네? 뭐라고요?”
“아니. 여기 누가 뭐 갖다 놓고 갔냐고?”
“아뇨. 그런 거 없었는데요?”
뭐지? 내가 착각했나? 아니 분명 없었는데.
혹시 와이프가 서프라이즈 선물을 두고 간 건가? 여기 사람들에게 비밀로 해 달라고 하고.
그럴 리가. 저녁밥도 겨우 얻어먹는 처지였다.
한참 고민하던 그가 궁금함을 이기지 못하고 핑크색 상자를 열어 봤다.
툭.
곱게 접힌 메모지가 상자에서 빠져나와 책상 위에 떨어졌다.
“응? 메모리카드잖아?”
상자 안에는 메모리카드가 덜렁 들어 있었다.
“뭐야?”
이영수 기자는 책상 위로 떨어진 곱게 접힌 메모지를 펼쳐 봤다.
“이것은 수호신이 직접 발설한 지구의 멸망 영상입ㄴ…. 뭐? 뭐라고?”